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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 생태주의

<상흔>과 아방, 거대 생체 동력원 본문

감상, 분류, 규정/괴수들과 개조 생명체들

<상흔>과 아방, 거대 생체 동력원

OneTiger 2019. 10. 20. 21:08

[인류는 대왕 오징어를 만들지 않았습니다. 인류보다 대왕 오징어 같은 생물 다양성은 원초적입니다.]



소설 <상흔>에서 주된 배경 무대는 아르마다입니다. 아르마다는 선단 도시입니다. 다양하고 수많은 배들은 서로 뒤섞고 도시를 구성합니다. 작은 범선, 거대한 증기선, 구식 잠수함 같은 다양한 배들은 도시가 됩니다. 갑판은 정원이 되고, 선실은 아파트가 되고, 비행선은 망루가 되고, 지하 창고는 주점이 됩니다. 아르마다는 도시이나, 아르마다는 일반적인 도시가 아닙니다. 아르마다에는 건물들이 없습니다. 다양한 배들은 건물들을 대신합니다. 게다가 아르마다가 선단 도시이기 때문에, 아르마다는 움직일 수 있습니다. 견인선들은 아르마다를 이끌고, 아르마다는 여러 바다들을 향해 움직입니다.


하지만 너비 2km짜리 선단 도시는 절대 빠르게 움직이지 못합니다. 아르마다는 느릿느릿 움직여야 합니다. 그래서 아르마다 지도층은 아방 소환을 계획합니다. 아방은 거대 바다 괴수입니다. 만약 아르마다가 거대 바다 괴수 아방을 길들인다면, 아방은 엄청난 생체 동력원이 될 겁니다. 아방은 아르마다를 이끌고 온갖 바다들을 향해 빠르게 가로지를 겁니다. 물론 오직 빠른 속도만을 위해 아르마다 지도층은 아방을 소환하지 않습니다. 아르마다 지도층에게는 다른 목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많은 시민들은 아방이 아르마다를 이끌고 드넓은 바다를 누빌 거라고 믿습니다. 이건 번영으로 이어질 겁니다.



소설 <상흔>에서 아방 소환은 가장 중요한 사건들 중에서 하나입니다. 아르마다 지도부는 두 단계 사건을 계획하고, 첫째 단계는 아방 소환입니다. 아방 소환이 필수적이기 때문에, 첫째 단계 없이, 둘째 단계는 없습니다. 소설 중후반부까지, 아르마다 사람들은 아방 소환에 매달립니다. 아방을 길들이기 위해 아르마다는 시추선을 훔치고 상당한 심해 자원들을 채굴합니다. 특히, 아방 조종을 위해 락밀크 같은 고유한 자원은 필수적입니다. 아르마다 사람들은 온갖 어려움들을 거치고, 마침내 그들은 성공적으로 아방을 소환하고 길들입니다. 아방은 아르마다를 이끌고 바다를 빠르게 가로지릅니다. 아르마다 사람들은 환호합니다.


이제 시대는 바뀌었습니다. 아르마다는 온갖 바다들을 누비고 번영할 겁니다. 만약 아르마다가 거대한 선박이라면, 아방은 선박 동력원일 겁니다. 범선이 여러 돛들을 조종하고 바람을 받는 것처럼, 증기선이 석탄들을 태우고 두 외륜을 돌리는 것처럼, 아르마다는 아방을 이용해 항해합니다. 하지만 범선 및 증기선과 달리, 아르마다 동력원은 생체 동력원입니다. 아방은 거대 바다 괴수입니다. 다른 배들과 달리, 거대 바다 괴수는 아르마다를 이끕니다. 현실 속에는 여러 선박들이 있으나, 현실 속의 선박들은 '생체 동력원'을 이용하지 않습니다. 여러 사이언스 픽션들과 판타지들 속의 선박들 역시 '생체 동력원'을 이용하지 않습니다.



사이언스 픽션들과 판타지들에서 생체 우주선, 생체 잠수정은 드문 소재가 아닙니다. 소설 <레비아탄> 3부작이 보여주는 것처럼, 사이언스 픽션은 생체 비행선을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소설 <레비아탄>에서 진화 생물학자들은 거대 부유 고래를 키웁니다. 공군은 거대 부유 고래에게 선체를 장착하고 생체 비행선을 만듭니다. 아방이 아르마다를 이끄는 것처럼, 거대 부유 고래는 생체 비행선이 됩니다. 소설 <레비아탄> 3부작이 보여주는 것처럼, 사이언스 픽션들과 판타지들에서 생체 탈것, 생체 동력원은 드문 소재가 아닙니다. 하지만 생체 탈것들보다 기계 탈것들은 훨씬 많습니다. 상대적으로 훨씬 많은 탈것들은 생체 동력원을 이용하지 않습니다.


현실 속에서 인류 문명은 생체 동력원을 이용해 거대 선박을 움직인 적이 없습니다. 만약 선박에서 사람들이 노들을 젓는다면, 이건 생체 동력원이 될지 모르나, 이런 생체 동력원은 거대 부유 고래나 거대 바다 괴수 같은 생체 동력원과 다릅니다. 인류 문명은 거대한 동물을 이용해 거대한 선박을 움직인 적이 없습니다. 육상에서 소는 쟁기를 끌고, 말은 마차를 이끌고, 코끼리는 통나무를 옮기나, 바다에는 이런 동물들이 없습니다. 바다에는 혹등고래 같은 거대 동물이 있으나, 아무리 혹등고래가 선박을 이끌 수 있다고 해도, 어떻게 사람들이 혹등고래를 길들일 수 있나요? 어쩌면 미래 유전 공학은 가능할지 모르나, 현실 속에서 아직 이건 불가능합니다.



현실 속에서 거대 바다 야수가 거대 선박을 이끈 적이 없기 때문에, 사이언스 픽션들과 판타지들 역시 생체 동력원에 상대적으로 커다란 관심을 기울이지 않습니다. 사이언스 픽션들과 판타지들이 거대 선박, 거대 우주선을 묘사한다고 해도, 이것들은 생체 선박, 생체 우주선이 아닙니다. 이것들은 생체 동력원을 이용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아르마다는 일반적인 선단 도시가 아닙니다. 아르마다에는 아주 독특하고 기발한 동력원, 생체 동력원, 거대 바다 괴수 아방이 있습니다. 아르마다에 아방이 없다고 해도, 그 자체로서 선단 도시 아르마다는 독특한 설정입니다. 하지만 아방 덕분에, 아르마다는 훨씬 독특한 설정이 됩니다.


생체 비행선과 일반적인 체펠린 비행선은 다릅니다. 스팀펑크 게임 <사이스>처럼, 사이언스 픽션이 공중 선박을 묘사한다고 해도, 증기 기관 공중 선박과 생체 비행선은 다릅니다. 증기 공중 선박과 생체 비행선이 똑같이 비일상적인 상상력을 이용해 하늘을 날아다닌다고 해도, 생체 비행선에게는 고유한 매력이 있을 겁니다. 만약 생체 비행선에게 고유한 매력이 있다면, 이게 무엇인가요? 생체 동력원에게 무슨 고유한 매력이 있나요? 어쩌면 대답은 '원초적인 영성'인지 모릅니다. 만약 인간이 거대 야수를 거대 선박에게 연결하고 조종한다면, 인간은 원초적인 영성을 통제할지 모릅니다. 기계 선박에게는 이게 없습니다.



생체 잠수정과 기계 잠수정은 다릅니다. 우리는 기계를 만듭니다. 인류는 기계를 만듭니다. 인류가 나타나기 전에, 기계는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기계는 인류의 도구입니다. 그래서 인간이 기계를 조종한다고 해도, 이건 당연한 현상입니다. 반면, 우리는 생명체를 만들지 않았습니다. 인류는 생명체를 만들지 않았습니다. 인류가 나타나기 전에, 이미 생물 다양성은 엄청나게 번성했습니다. 이런 생물 다양성 덕분에, 인류 역시 진화하고 나타날 수 있었습니다. 인류보다 생물 다양성은 훨씬 원초적입니다. 심지어 21세기 초반 진화 생물학조차 어떻게 생명체들이 나타났는지 구체적으로 확신하지 못합니다.


우리보다 생명 현상이 원초적이기 때문에, 자연은 웅장하고 신비롭습니다. 생물 다양성 안에서 우리는 영성을 느끼고 신을 만납니다. 하지만 만약 우리가 웅장하고 신비로운 자연, 생명 현상을 조종할 수 있다면? 우리가 기계를 조종하는 것처럼, 만약 우리가 생물 다양성을 조종할 수 있다면? 우리는 영성을 통제하고 움켜쥘 수 있습니다. 우리는 신에게 가까이 다가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SF 소설들에서 과학자들이 생명 현상을 통제할 때, 과학자들은 "나는 신이 되었다."고 운운합니다. 기계는 웅장하지 않고 신비롭지 않습니다. 기계가 웅장하고 신비롭다고 해도, 기계에는 원초적인 영성, 신이 없습니다.



[인류는 기계를 만듭니다. 기계는 원초적이지 않습니다. 기계 공중 함선은 인류 역사적인 산물입니다.]



우리가 기계를 만들었음에도, 어떻게 우리보다 기계가 원초적일 수 있나요? 어쩌면 인류 문명은 기술적 특이점을 지나고, 기계 지성은 인간 지성을 초월할지 모릅니다. 정말 기계는 인간을 정복하고, 인간은 기계화할지 모릅니다. 로봇들은 인간 신체(생체)가 나약하다고 비웃을지 모릅니다. 그렇다고 해도 인간은 기계를 만들었습니다. 인간이 기계를 만들었기 때문에, 기계는 존재합니다. 만약 인간이 기계를 만들지 않았다면, 기계는 존재하지 못했을 겁니다. 아무리 기술적 특이점이 다가오고, 기계 지성이 인간 지성을 초월하고, 로봇들이 인간 신체를 비웃는다고 해도, 생산 조건은 바뀌지 않습니다.


아무리 기계들이 인간들을 비웃는다고 해도, 인간들은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기계를 만들었어! 만약 우리가 만들지 않았다면, 기계는 나타나지 않았을 거야!" 그래서 기계에게는 영성이 없습니다. 우리는 기계가 놀랍다고 감탄할 수 있으나, 이런 감탄에는 영성이 없습니다. 우리는 슈퍼 컴퓨터가 굉장하다고 감탄합니다. 하지만 아무리 슈퍼 컴퓨터가 굉장하다고 해도, 슈퍼 컴퓨터는 작은 갯가재에게 미치지 못할지 모릅니다. 갯가재에게 원초적인 영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문명: 비욘드 어스>에서 첨단 인공 지능 거대 로봇보다 떡대 갯가재 괴수는 훨씬 로망스러운 궁극 기술이 됩니다.



생체 잠수정은 떡대 갯가재 괴수와 비슷합니다. 생체 잠수정은 문자 그대로 생명 현상입니다. 만약 과학 기술이 생체 잠수정을 건조한다면, 과학 기술은 생명 현상, 생물 다양성을 통제해야 합니다. 과학 기술은 원초적인 영성을 통제해야 합니다. 빅토르 프랑켄슈타인이 근대 프로메테우스가 되는 것처럼, 과학 기술은 신에게 한층 가까이 다가갑니다. 과학 기술은 원초적인 영성을 길들이고 정복해야 합니다. 만약 인류 문명이 생체 잠수정을 건조한다면, 사람들은 정복 욕구를 느낄지 모릅니다. "생물 다양성은 원초적이야. 하지만 우리는 원초적인 것을 통제하고 길들일 수 있어." 생체 잠수정에는 이런 감성이 있습니다.


비단 생체 잠수정만 아니라 바이오스피어 우주선 역시 마찬가지인지 모릅니다. 생체 잠수정과 바이오스피어 우주선은 다릅니다. 하지만 생체 잠수정처럼, 바이오스피어 우주선에서 승무원들은 생물 다양성을 통제하고, 관리하고, 길들여야 합니다. 만약 생태 구역들에서 특정한 생물종들이 너무 우세해지거나 감소한다면, 생태 구역들은 망할 테고, 더 이상 바이오스피어 우주선은 항해하지 못할 겁니다. 바이오스피어 우주선은 항로를 돌려야 할 겁니다. 우주선 승무원들은 생태 구역들을 통제해야 합니다. "자연 생태계는 원초적이야. 하지만 우리는 원초적인 것을 통제하고 길들일 수 있어." 바이오스피어 우주선에는 이런 감성이 있습니다.



심지어 작은 어항에서조차 우리는 이런 감성을 느낄지 모릅니다. 우리는 어항 속에서 꼬물거리는 꼬마 거북을 통제하고 지배합니다. 어항 속의 꼬마 거북에게 우리는 주인입니다. 비록 우리가 마음대로 거북을 조종하지 못한다고 해도, 우리는 거북과 어항 내부 환경을 직접 조성하고 배치합니다. 만약 어항 속에 살아있는 거북보다 물고기 로봇이 있다면, 감성은 크게 달라질 겁니다. 특히, 어항 속의 거북이 야생 동물이기 때문에, 우리는 정복 욕구를 훨씬 느낄지 모릅니다. 식물보다 동물이 훨씬 적극적으로 움직이기 때문에, 가축보다 야생 동물이 문명에서 훨씬 떨어졌기 때문에, 우리가 야생 동물을 길들일 때, '길들이는 쾌감'은 커질 겁니다. 우리가 야생 식물을 키울 때, 여기에는 길들이는 쾌감이 있을 겁니다.


우리가 거친 말에 올라탈 때, 여기에도 길들이는 쾌감이 있을 겁니다. 하지만 우리가 야생 식물과 거친 말보다 야생 동물을 길들일 때, 쾌감은 훨씬 커질지 모릅니다. 게다가 만약 야생 동물이 아주 커다랗다면, 소설 <듄>에서 폴 무앗딥이 아주 거대한 모래벌레를 조종하고 쾌감을 느낀 것처럼, '길들이는 쾌감' 역시 비례적으로 커질지 모릅니다. 만약 SF 소설 속에서 잠수정 승무원들이 거대 바다 야수를 잠수정에 연결하고 조종한다면, 잠수정 승무원들은 아주 커다란 쾌감을 느낄지 모릅니다. 우리 마음대로 거대한 생명 현상이 움직이거나 거대한 생명 현상을 통제할 때, 분명히 여기에는 짜릿한 흥분이 있을 겁니다. 이건 우리가 마음대로 거대한 생명 현상을 지배한다는 흥분입니다. 이건 정복 욕구와 비슷합니다.



만약 잠수정 승무원들이 이런 감성에 너무 익숙해진다면, 쾌감, 흥분, 정복 욕구는 시들해질 겁니다. 그렇다고 해도 만약 SF 작가가 잠수정을 이끄는 거대 야수를 서술한다면, SF 작가는 이런 감성을 외면하지 못할 겁니다. 바이오스피어 우주선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자연 생태계에서 인류는 비롯했습니다. 자연 생태계 없이, 인류는 나타나지 못했을 겁니다. 하지만 바이오스피어 우주선에서 승무원들은 자연 생태계를 직접 조성하고, 배치하고, 통제하고, 관리합니다. 자연 생태계는 원초적이나, 바이오스피어 우주선에서 승무원들은 원초적인 것을 통제할 수 있습니다. 게다가 바이오스피어 우주선은 웅장합니다. 바이오스피어 우주선은 일종의 세계입니다.


바이오스피어 우주선에게 거대한 규모가 있기 때문에, 우주선 승무원들은 '거대하고 원초적인 것'을 통제합니다. 일반적인 우주선에는 이런 감성이 없습니다. 일반적인 우주선에서 승무원들이 첨단 기계 장치들을 바라본다고 해도, 승무원들은 영성을 느끼지 않을 겁니다. 승무원들이 놀라운 감성을 느낀다고 해도, 인공 생태계에서 비롯하는 영성과 첨단 기계 장치에서 비롯하는 경이는 다를 겁니다. 어쩌면 포르노 소설들 역시 이런 감성을 이용하는지 모릅니다. 어머니에게서 아이는 비롯했습니다. 영화 <터미네이터>에서 존 코너를 막기 위해 T-800이 사라 코너를 없애기 원하는 것처럼, 어머니 없이, 아이는 나타나지 못합니다. 아이보다 어머니는 원초적입니다.



만약 아들이 자라고 어머니와 섹스한다면, 다른 섹스들보다 이건 훨씬 독특할 겁니다. 섹스는 임신과 출산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만약 어머니와 아들이 섹스한다면, 원초적인 존재(어머니)는 자신이 만든 후천적인 존재(아들)를 이용해 또 다른 존재를 잉태할 수 있습니다. 딸과 아버지가 섹스한다고 해도, 딸과 아버지 사이에는 이런 원초적인 감성이 없습니다. 아버지가 딸을 '직접' 낳지 않기 때문입니다. 포르노 소설에서 어머니가 아들과 섹스하는 동안, 어머니는 "여기는 네가 나온 구멍이야. 어때, 다시 들어가보고 싶지 않니?"라고 운운할 수 있습니다. 포르노 소설에서 아버지는 비슷한 대사를 운운하지 못합니다.


포르노 소설에서 어머니가 아들과 섹스하는 동안, 어머니는 "너는 내 몸을 먹고 자랐어. 어때, 다시 먹어보고 싶지 않니?"라고 운운할 수 있습니다. 아버지는 비슷한 대사를 절대 운운하지 못합니다. 아무리 아버지가 딸을 낳기 위한 정자를 제공한다고 해도, 아버지는 딸을 직접 낳지 못하고 직접 먹이지 못합니다. 그래서 아버지는 밋밋하고 시시하고 평면적입니다. 그래서 자연은 어머니가 될 겁니다. 그래서 생명의 요람, 골디락스 행성은 어머니 행성이 될 겁니다. 자연과 어머니는 원초적입니다. 포르노 소설에서 어머니와 아들이 섹스하는 동안, 아들은 자신이 원초적인 존재로 돌아간다고 느낄지 모릅니다.



[종종 생태계 게임들은 게임 플레이어가 작은 신이라고 묘사합니다. 자연 생태계가 원초적이기 때문에.]



SF 소설에서 우주선 승무원들이 생태 구역들을 관리하는 동안, 우주선 승무원들은 그들이 원초적인 것을 관리한다고 느낄지 모릅니다. 이건 정복 욕구인지 모릅니다. 사람들이 원초적인 것을 통제하고 지배할 때, 이건 정복이 됩니다. 사람들이 후천적인 것을 정복할 수 있다고 해도, 원초적인 것을 통제하는 행위와 후천적인 것을 통제하는 행위는 다릅니다. 두 행위는 다른 감성을 연출합니다. 그래서 바이오스피어 우주선과 일반적인 장거리 우주선은 다르고, 생체 잠수정과 기계 잠수정은 다릅니다. 그래서 (바이오스피어 우주선을 비롯해) 전반적으로 생태학 덕질은 정복 욕구를 경계해야 할 겁니다.


생태학 덕질은 정복 욕구, 원초적인 것을 통제하고 지배하기 위한 욕구를 경계해야 할 겁니다. 우리는 원초적인 것, 영성을 존중해야 합니다. 하지만 아무리 사람들이 영성을 개인적으로 존중한다고 해도, 여기에는 한계가 있을 겁니다. 개인보다 사회가 훨씬 압도적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사회 구조가 지배적인 관념을 형성하고, 지배적인 관념이 정복 욕구를 옹호한다면, 개인이 이런 편견에서 쉽게 벗어날 수 있나요? 이건 너무 어려울 겁니다. 세계화 자본주의 속에서 우리는 살아갑니다. 세계화 자본주의는 정복, 침략, 학살, 수탈, 오염을 미화합니다. 자본주의 시장 경제는 돌봄 노동을 착취합니다.



돌봄 노동은 원초적입니다. 만약 사람들이 아이들을 낳지 않고, 먹이지 않고, 키우지 않는다면, 200년 이내에 인류는 멸종할 겁니다. 단편 소설 <일곱 번째 남편>처럼, 여러 포스트 아포칼립스들에서 임신, 출산, 수유, 육아는 인류 문명 유지와 다이뤡~트하게 이어집니다. 돌봄 노동이 원초적이기 때문에, 인류 사회는 사회적인 재화들을 돌봄 노동들에 투입해야 합니다. 만약 사회 재화들이 돌봄 노동들에 흘러간다면, 자본가 계급은 이윤을 극대화하지 못할 겁니다. 자본가 계급은 사회 재화들을 최대한 차지하고 이윤을 극대화해야 합니다. 그래서 돌봄 노동들은 사회 재화들을 충분히 받지 못합니다. 자본주의는 돌봄 노동들을 착취해야 합니다.


자본주의 시장 경제가 돌봄 노동을 착취하기 때문에, 자본주의는 필연적으로 가부장 문화입니다. 자본주의가 가부장 문화이기 때문에, 자본주의 속에서 여자는 보조적인 인간이 됩니다. 상대적으로 많은 여자들이 돌봄 노동들을 맡기 때문에, 자본주의가 돌봄 노동들을 착취하기 때문에, 여자들은 착취를 당합니다. 어떻게 착취를 당하는 인간이 주된 인간이 될 수 있나요? 여자는 보조적인 인간이고, 남자는 주된 인간입니다. 그래서 주된 인간(남자)은 보조적인 인간(여자)을 정복할 수 있습니다. 가부장적인 자본주의에서 남자는 여자를 정복합니다. 가부장적인 자본주의는 정복을 옹호합니다. 자본주의에서 가부장적인 편견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어쩌면 이 게시글에도 가부장적인 편견이 있는지 모릅니다. 아니, 분명히 이 게시글에도 가부장적인 편견이 있을 겁니다. 자본주의 체계 속에서 제가 이 게시글을 씀에도, 어떻게 제가 가부장적인 편견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있나요? 그래서 생체 잠수정과 포르노 소설 사이에 아무 관계가 없음에도, 저는 어머니와 아들의 섹스를 운운하는지 모릅니다. 이 게시글에서 가장 위험한 것은 소설 <상흔> 내용 누설보다 가부장적인 편견일 겁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런 주장이 너무 황당무계하다고 비판할지 모릅니다. "아니, 어떻게 생체 잠수정과 바이오스피어 우주선에서 돌봄 노동 착취와 가부장적인 편견이 튀어나올 수 있지? 전날 밤 술자리에서 시뻘건 파우스트를 너무 많이 처마셨나? 이건 엉터리 헛소리야!"


흐음, 생체 잠수정과 가부장적인 편견이 정말 황당무계한 헛소리인가요? 만약 바이오스피어 우주선과 가부장적인 편견이 엉터리라고 해도, 이런 해석이 전날 밤 술자리에서 시뻘건 파우스트를 너무 처마신 헛소리라고 해도, 분명히 가부장적인 자본주의는 돌봄 노동들을 착취합니다. 바이오스피어 우주선과 가부장적인 편견 사이에는 다른 해석들이 존재할 수 있으나, 그렇다고 해도 가부장적인 자본주의는 착취 경제입니다. 여기에는 다른 해석들이 없습니다. 그래서 착취를 막기 위해 인류 사회는 돌봄 노동들을 사회화해야 합니다. 마리아 미스는 인류 사회가 돌봄 노동 사회화를 넘고 '돌봄 노동 의무화'로 가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심지어 인류 사회는 성 해방 운동을 대대적으로 지원해야 할지 모릅니다.



언젠가 인류 사회는 오직 간단한 돌봄 노동 사회화만으로 가부장적인 편견을 몰아낼지 모릅니다. 하지만 고대부터 오늘날까지, 거대 문명들은 가부장 문화였습니다. 가부장 문화는 너무 유구한(?) 역사를 자랑합니다. 그래서 가부장 편견을 몰아내고 착취를 막기 위해 인류 사회는 성 해방 운동을 대대적으로 지원해야 할 겁니다. 바이오스피어 우주선에 가부장적인 편견이 없다고 해도, 인류 사회는 반드시 자본주의를 없애고 돌봄 노동을 사회화해야 합니다. 만약 자본주의 시장 경제가 사라지지 않는다면, 아무리 생태학 SF 덕후들이 생체 잠수정과 바이오스피어 우주선을 열심히 떠든다고 해도, 여기에는 성 착취가 있을지 모릅니다.


생명 현상은 원초적입니다. 생명 현상에서, 특히, 고등 생명 현상에서 섹스는 빠지지 못합니다. 섹스, 임신, 출산, 수유, 육아, 재생산은 빠지지 못합니다. 이것들은 (고등) 생명 현상을 뒷받침합니다. 지배적인 관념은 섹스, 임신, 출산, 수유, 육아, 재생산을 왜곡하고 착취합니다. 그래서 진화 생물학은 엉터리 사회 생물학, 우생학으로 쉽게 빠집니다. 생태학 SF 덕질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바이오스피어 우주선과 성 착취 사이에는 아무 관계가 없는 것 같으나, 생명 현상과 생명 과학이 바이오스피어 우주선을 뒷받침하기 때문에, 생태학 SF 덕질은 편견을 경계해야 합니다. 생태학 SF 덕질은 성 착취를 경계하고 영성을 존중해야 합니다.



생체 잠수정과 바이오스피어 우주선에는 영성이 있습니다. 만약 생체 잠수정이 침몰하고 바이오스피어 우주선이 표류한다면, 기계 잠수정이 침몰하고 일반적인 우주선이 표류할 때보다 이건 훨씬 높은 비극으로 승화할 겁니다. 문자 그대로 생체 잠수정이 병들고, 다치고, 피를 흘리고, 신음하고, 죽어가는 동안, 이건 훨씬 높은 차원의 비극이 됩니다. 기계 잠수정은 병들지 않습니다. 석유는 피가 아닙니다. 하지만 생체 잠수정은 병들고 피를 흘릴지 모릅니다. 소설 <상흔>에서 아방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은 선박을 만듭니다. 아무리 아르마다가 기발하고 독특한 선단 도시라고 해도, 아르마다에는 원초적인 영성이 없습니다.


아르마다는 인류 역사적인 산물입니다. 반면, 아방에는 원초적인 영성이 있습니다. 아르마다 사람들은 아방을 직접 만들지 못합니다. 아방은 인류 역사적인 산물이 아닙니다. 기계 잠수함과 아방이 똑같이 어떤 의지로 움직인다고 해도, 아방에게 영성이 있기 때문에, 생체 동력원은 훨씬 기발하고 독특한 설정이 됩니다. 어떤 사람들은 비단 생명 현상만 아니라 다른 현상들 역시 원초적이고 초월적이라고 반박할지 모릅니다. 행성 공전은 원초적이고 초월적입니다. 인류 문명은 행성을 만들지 않았습니다. 만약 우리가 파우스트를 너무 거하게 마신다면, 우리는 머리가 어질어질 돈다고 느끼겠으나, 우리는 행성을 빙글빙글 돌리지 못합니다.



[거대 괴수는 원초적입니다. 만약 인류가 원초적인 것을 길들인다면, 이건 편견을 자극할지 모릅니다.]



인류가 나타나기 전에 이미 행성들은 빙글빙글 도는 중이었습니다. 심지어 서구 근대화 이전까지, 사람들은 행성이 공전한다고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인류보다 생물 다양성이 원초적인 것처럼, 인류보다 행성 공전 현상은 원초적입니다. 심지어 생물 다양성보다 행성 공전은 훨씬 거대합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생물 다양성보다 행성 공전에게 훨씬 신비로운 영성이 있다고 주장할지 모릅니다. 이런 논리는 틀리지 않으나, 행성 공전에게는 의지가 없습니다. 적어도 21세기 초반 과학 기술은 행성 공전에게 의지가 없다고 이야기합니다. 어느 날, 어떤 천문학적인 재난 때문에, 행성 공전이 멈춘다고 해도, 행성은 화내지 않을 겁니다.


반면, 생명 현상에는 의지가 있습니다. 아무리 새싹이 어리고 작고 가냘프다고 해도, 새싹은 특정한 의지를 드러냅니다. 언젠가 새싹은 나무가 되고 수명을 다하겠으나, 그렇다고 해도 새싹은 특정한 의지를 드러내고 양지를 향해 줄기를 뻗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작은 새싹이 살아있다고 감탄합니다. 아무리 행성 공전 현상이 거대하다고 해도, 행성 공전 현상에는 의지가 없습니다. 생명 현상에게 의지가 있기 때문에, 생명 현상이 독립적으로 움직이기 때문에, 인간이 생명 현상을 통제할 때, 이건 어떤 편견을 자극할지 모릅니다. 생명 현상에게 의지가 있기 때문에, 아방은 신비롭고, 생체 잠수정은 신비롭고, 바이오스피어 우주선은 신비롭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아르마다를 이끄는 아방, 생체 비행선, 바이오스피어 우주선은 비슷합니다. 거대 바다 괴수와 바이오스피어 우주선 사이에는 언뜻 아무 관계가 없는 것 같으나, 아르마다가 아방을 조종하기 때문에, 거대 바다 괴수와 바이오스피어 우주선은 이어질 수 있습니다. 만약 아르마다가 기계 엔진을 장착했다면, 기계 잠수함과 일반적인 우주선에 영성이 없는 것처럼, 아르마다 기계 엔진에는 영성이 없었을 겁니다. 만약 속도를 높이기 위해 아르마다가 기계 엔진을 장착하거나, 마법 주문을 외우거나, 해저 자원을 태운다면, 아무리 기계 엔진과 마법 주문과 해저 자원이 기발하다고 해도, 여기에는 원초적인 영성이 없을 겁니다.



※ 게임 <압주> 스크린샷 출처: Mindless Walkthroughs,

https://youtu.be/O69r1U3ObTs


※ 게임 <문명: 비욘드 어스> 스크린샷 출처: Maui_NL,

https://steamcommunity.com/sharedfiles/filedetails/?id=332271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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