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생태주의
<우주 전쟁>과 <세상 숲>, 거대 괴수 소설 본문
[이런 그림은 1961년 원작과 너무 다릅니다. 하지만 이미 전형은 존재하고, 이건 전형에 속합니다.]
옆동네 철수는 SF 소설을 씁니다. SF 소설은 외계인 침략을 이야기합니다. 외계인들은 첨단 우주 함대를 이끌고 지구를 침략합니다. 지구인들은 기를 쓰고 반격하나, 지구 과학 기술들은 첨단 침략 외계인을 능가하지 못합니다. 특히, 지구 대기권 밖에서 우주 함선들이 지구를 포격하기 때문에, 지구인들은 제대로 반격하지 못합니다. 아아, 이건 말세입니다. 이건 심판의 날입니다. 못된 외계인들은 지구를 정복할 테고 인류를 지배할 겁니다. 인류는 외계인 노예가 될 겁니다. 하지만 그때, 남아메리카 아마존 열대 밀림에서 누군가는 분연히 떨치고 일어납니다. 그건 거대 나방 괴수입니다.
거대 나방 괴수는 열대 밀림과 인디언의 수호자입니다. 외계인들이 지구를 침략한다고 해도, 거대 나방 괴수는 상관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외계 우주 함선들이 서구 문명을 쑥대밭으로 만드는 동안, 거대 나방 괴수는 관망합니다. 이제까지 서구 자본주의는 열대 밀림을 파괴했고, 인디언들을 학살했고, 환경 오염들을 저질렀습니다. 이런 파괴, 학살, 오염 때문에, 서구 자본주의는 부유합니다. 하지만 서구 자본주의는 파괴, 학살, 오염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서구 자본주의는 자신이 가장 문명적이라고 자랑하고 계속 파괴하고 오염시킵니다. 거대 나방 괴수는 자본주의를 증오합니다.
그래서 외계 우주 함선들이 서구 자본주의를 쑥대밭으로 만든다고 해도, 거대 나방 괴수는 더듬이 털가닥 하나 까닥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만약 외계 우주 함선들이 지구를 정복한다면, 아마존 열대 밀림과 인디언들 역시 안전하지 않을 겁니다. 어떤 두 인디언 소녀는 거대 나방 괴수에게 부탁합니다. 두 인디언 소녀는 거대 나방 괴수가 침략 외계인을 몰아내기 원합니다. 거대 나방 괴수는 우아하고 신비롭고 장대한 네 날개들을 펼치고 하늘을 향해 솟구칩니다. 거대 나방 괴수는 창공을 빠르게 누비고 외계 우주 함선들과 전투기들을 격추시킵니다. 외계 함선들은 미사일들을 날리고 빔들을 쏩니다.
거대 나방 괴수는 날개 비늘들을 뿌리고 방어막을 형성합니다. 빔들은 방어막에 부딪히고 사방을 향해 분산합니다. 일부는 외계 함선들과 외계 전투기들을 때립니다. 날개 비늘들이 전파들을 교란하기 때문에, 외계 함선 레이더는 거대 나방 괴수를 제대로 포착하지 못합니다. 게다가 거대 나방 괴수는 아주 화려한 날개 무늬들을 번쩍입니다. 날개 무늬들이 번쩍이기 때문에, 외계인들은 최면에 걸립니다. 여러 스페이스 오페라들처럼, 외계인들과 인간들은 별로 다르지 않습니다. 인간들과 외계인들에게는 비슷한 시각 구조, 사고 구조가 있습니다. 외계인들은 몽롱한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외계인들이 쩔쩔매는 동안, 거대 나방 괴수는 함선들과 전투기들을 격추시킵니다. 종종 일부 로켓들은 거대 나방 괴수를 직격하나, 거대 나방 괴수는 다치지 않습니다. 거대 나방 괴수는 끈질긴 생명력으로 빠르게 자체 회복하고 계속 우주 함선들을 떨어뜨립니다. 결국 대부분 함선들은 추락합니다. 이제 지구인들은 스스로 우주 함선들과 싸울 수 있습니다. 거대 나방 괴수는 상황을 어느 정도 정리하고 지구 대기권 밖으로 날아갑니다. 우주에서 날아다니기는 많이 어려우나, 거대 나방 괴수는 우주 함선들을 계속 공격합니다. 지구 대기권 밖에서도 침략 외계인들은 거대 나방 괴수를 막지 못합니다.
마침내 외계 지도부는 후퇴를 결정합니다. 거대 나방 괴수 때문에, 외계 우주 함대는 인류 문명을 지배하지 못합니다. 외계 우주 함대는 상투적인 대사 "다음 번에 두고 보자!"를 외치고 태양계 밖으로 물러납니다. 거대 나방 괴수는 아마존 열대 밀림으로 다시 돌아옵니다. 아아, 하지만 우주 전투는 너무 힘겨웠습니다. 거대 나방 괴수는 만신창이가 되었습니다. 두 인디언 소녀는 눈물들을 흘리고 거대 괴수가 살아나기 기도하나, 거대 나방 괴수는 정신을 차리지 못합니다. 이렇게 거대 나방 괴수는 세상을 떠납니다. 하지만 거대 나방 괴수가 열대 밀림을 떠나기 전에, 이미 나방 괴수는 알을 낳았습니다.
나중에 거대 나방 애벌레 괴수는 부활할 테고, 애벌레는 엄마 벌레가 될 테고, 엄마 나방 괴수는 열대 밀림을 다시 지킬 겁니다. 만약 외계 우주 함대가 다시 침략한다고 해도, 엄마 나방 괴수는 다시 외계 우주 함대를 몰아낼 겁니다. 서구 문명 역시 이것을 인정하고 열대 밀림 파괴, 인디언 학살, 식민지 수탈을 사과하고 보상합니다. 거대 나방 괴수가 서구 문명을 구원했다고 해도, 솔직히 서구 자본가 계급은 이것을 인정하기 원하지 않습니다. 소비에트 연방 인민들이 죽도록 고생했고 파쇼주의 나치를 몰아냈음에도, 서구 자본주의가 소비에트 연방에게 고마워하지 않은 것처럼, 엄마 괴수가 뒈지든 말든, 서구 자본가 계급은 엄마 괴수에게 별로 고마워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우주 함대가 서구 문명을 쑥대밭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더 이상 자본주의는 불가능합니다. 더 이상 자본주의가 불가능하기 때문에, 서구 자본가 계급은 식민지 수탈을 (억지로) 인정합니다. 더 이상 서구 문명이 깡패 짓거리하지 못하기 때문에, 남아메리카 좌파 정부들은 공유 사회를 실험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옆동네 철수는 소설을 끝마치고 이것을 이웃집 영희와 뒷동네 말자 할머니와 아랫집 수진에게 보여줍니다. 이웃집 영희와 뒷동네 말자 할머니와 아랫집 수진은 말합니다. "이건 모스라 이야기구나." 이웃집 영희와 말자 할머니와 아랫집 수진은 옆동네 철수가 모스라 팬 소설을 썼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옆동네 철수는 이게 팬 소설이 아니라고 반박합니다.
옆동네 철수는 자신이 소설 <우주 전쟁>과 소설 <페르디도 거리의 기차역>과 소설 <세상을 가리키는 말은 숲>과 비디오 게임 <문명: 비욘드 어스>를 오마쥬한다고 주장합니다. 소설 <우주 전쟁>은 침략 외계인들을 이야기합니다. 많은 SF 평론가들은 소설 <우주 전쟁>이 서구 제국주의, 식민지 수탈을 비유한다고 평가합니다. 비디오 게임 <문명: 비욘드 어스>는 환경 아포칼립스, 생태 유토피아입니다. <문명: 비욘드 어스>에서 거대 떡대 괴수는 자연 생태계를 보호하고 공중 구축함을 몰아냅니다. 그래서 옆동네 철수는 두 가지를 합치고 "만약 자연 친화적인 거대 괴수가 공중 구축함을 물리친다면…?"이라고 생각합니다.
옆동네 철수는 이게 재미있는 소재라고 생각합니다. 한편으로 옆동네 철수는 자신이 소설 <페르디도 거리의 기차역>의 주제와 소재를 독특하게 해석하기 원했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엄마 나방 괴수는 자연 환경을 보호하고 외계인들을 물리칩니다. 여러 평론가들이 <페르디도 기차역>을 칭찬했기 때문에, 옆동네 철수는 자신이 <페르디도 기차역>을 거대 괴수 소설에 덧붙이기 원했다고 설명합니다. 이 소설은 근대적인 환경 오염을 비판합니다. 이 소설은 나방 악마를 이야기하고, 최면을 걸기 위해 나방 악마는 날개 무늬들을 이용합니다. 옆동네 철수는 자신이 나방 악마를 엄마 나방 괴수로 독특하게 해석하기 원했다고 주장합니다.
마지막으로 옆동네 철수는 자신이 소설 <우주 전쟁>과 소설 <세상을 가리키는 말은 숲>을 연결하기 원했다고 설명합니다. 그래서 거대 괴수 소설 속에는 침략 외계인들이 있고, 열대 밀림이 있고, 참혹한 식민지 수탈이 있습니다. 소설 <세상을 가리키는 말은 숲>이 그러는 것처럼, 옆동네 철수는 자신이 베트남 침략을 비롯해 여러 서구 제국주의 침략들을 비판하기 원했다고 설명합니다. 이렇게 옆동네 철수는 자신이 무엇들을 참고했는지 밝힙니다. 여기에는 모스라가 없습니다. 옆동네 철수는 자신이 모스라를 오마쥬하지 않는다고 반박합니다. 어쩌면 옆동네 철수는 거짓말하는지 모릅니다.
어쩌면 거대 괴수 소설을 쓰기 위해 옆동네 철수는 모스라를 참고했는지 모릅니다. 아니면 옆동네 철수는 모스라를 참고하지 않았는지 모릅니다. 정말 옆동네 철수는 그저 <페르디도 거리의 기차역>을 독특하게 해석했을 뿐인지 모릅니다. 정말 옆동네 철수는 <우주 전쟁>과 <세상을 가리키는 말은 숲>을 연결하고, <문명: 비욘드 어스>를 덧붙이고, 거대 괴수 소설을 완성했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아무리 옆동네 철수가 반박한다고 해도, 이웃집 영희와 말자 할머니와 아랫집 수진은 거대 괴수 소설이 모스라를 오마쥬한다고 느낍니다. 이유가 무엇인가요? 이미 영화 <모스라>가 전형을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1961년 영화 <모스라>부터 2004년 영화 <고지라: 파이널 워즈>까지, 이미 모스라는 전형, 장르가 되었습니다. 비단 영화 시리즈만 아니라 온갖 만화들 역시 전형, 장르를 만들었습니다. 비단 온갖 만화들만 아니라 거대 괴수 팬들은 온갖 설정 놀음들을 제시했습니다. 1961년 영화 <모스라>부터 온갖 사소한 설정 놀음들까지, 이런 것들은 전형을 만듭니다. 이미 전형은 존재합니다. 아무리 옆동네 철수가 모스라를 오마쥬하지 않는다고 해도, 이미 아주 커다란 전형이 존재하기 때문에, 이웃집 영희와 뒷동네 말자 할머니와 아랫집 수진은 거대 괴수 소설이 이런 전형에 속한다고 느낍니다.
만약 21세기 초반 SF 작가가 인조인간 소설을 쓴다면, 여러 문학 평론가들은 인조인간 소설과 <프랑켄슈타인>을 비교할지 모릅니다. SF 작가가 메리 셸리를 참고하지 않았다고 해도, 문학 평론가들은 21세기 초반 인조인간 소설과 <프랑켄슈타인>을 비교할 겁니다. <프랑켄슈타인>은 19세기 고딕 호러입니다. 왜 평론가들이 19세기 고딕 호러 소설과 21세기 초반 인조인간 소설을 비교하나요? 이미 <프랑켄슈타인>이 전형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SF 작가가 <프랑켄슈타인>을 의도하지 않았다고 해도, 이미 <프랑켄슈타인>이 창조자 인간-피조물 인조인간 전형을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이웃집 영희와 뒷동네 말자 할머니와 아랫집 수진은 거대 괴수 소설을 개별적으로 평가할 수 있습니다. 이웃집 영희와 말자 할머니와 아랫집 수진은 오직 거대 괴수 소설 그 자체만 평가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세 사람들은 오직 거대 괴수 소설 그 자체만 평가하지 않습니다. 이미 모스라가 전형을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세 사람들은 거대 괴수 소설을 개별적으로 평가하지 못합니다. 옆동네 철수가 반박한다고 해도, 이웃집 영희와 뒷동네 말자 할머니와 아랫집 수진이 거대 괴수 소설을 평가하는 동안, 문학 평론가들이 <프랑켄슈타인>을 참고하는 것처럼, 세 사람들은 모스라를 참고해야 합니다.
비단 거대 괴수 소설과 모스라만 아니라 다른 사변 장르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뭔가를 해석할 때, 우리는 그것을 개별적으로 해석해서는 안 될 겁니다. 우리는 오직 그것 그 자체만 개별적으로 해석해서는 안 될 겁니다. 문학 평론가들이 <프랑켄슈타인>을 참고하는 것처럼, 이웃집 영희와 뒷동네 말자 할머니와 아랫집 수진이 모스라를 참고하는 것처럼, 우리는 개별적인 해석보다 총체적인 흐름을 추구해야 할 겁니다. 우리는 어떤 현상, 어떤 상황을 뚝 떼어놓고 해석해서는 안 될 겁니다. 만약 우리가 어떤 현상, 어떤 상황을 뚝 떼어놓고 해석한다면, 우리 시야는 너무 좁아질지 모릅니다.
어쩌면 정말 옆동네 철수는 모스라를 오마쥬하지 않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이미 모스라는 전형이 되었습니다. 이미 많은 SF 팬들은 모스라를 압니다.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거대 괴수 소설과 모스라가 떨어질 수 있나요? 아무리 작가가 의도하지 않았다고 해도, 이미 전형이 존재하기 때문에, 독자는 소설이 전형에 속한다고 느낄 수 있습니다. 독자가 소설을 해석할 때, 작가 의도는 중요합니다. 작가 의도는 아주 중요한 해석 기준입니다. 하지만 작가 의도처럼, 전형 역시 중요한 기준이 됩니다. 이미 모스라가 전형이기 때문에, 옆동네 철수 의도와 달리, 아랫집 수진은 거대 괴수 소설과 모스라를 연결할 수 있습니다.
솔직히 모스라 그 자체에도 여러 유형들이 있습니다. 1961년 원작 모스라와 2019년 몬스터버스 모스라는 다릅니다. 2004년 <고지라: 파이널 워즈> 모스라와 이른바 헤이세이 모스라는 다릅니다. 어떤 관객들은 헤이세이 모스라가 너무 마법사 같다고 투덜거립니다. 아무리 모스라가 사이언스 판타지라고 해도, 헤이세이 모스라는 너무 판타지 영역에 깊이 들어갑니다. 하지만 이 모든 모스라는 '모스라라는 전형'에 똑같이 속합니다. 아무리 1961년 원작 모스라와 헤이세이 모스라와 2004년 모스라와 몬스터버스 모스라가 다르다고 해도, 거대 괴수 팬들은 이런 모스라들이 똑같은 울타리에 들어간다고 해석합니다.
[전형이 존재하기 때문에, 구닥다리 고딕 호러 분위기와 음울한 사이버펑크는 똑같은 범주에 들어갑니다.]
중세 유럽 판타지들에서 레인저에게는 여러 유형들이 있습니다. 도적처럼, 어떤 레인저는 쌍검을 휘두릅니다. 로빈 후드처럼, 어떤 레인저는 명사수입니다. 드루이드처럼, 어떤 레인저는 자연의 여신을 숭배하고 야생 동물들을 소환합니다. 세 레인저 유형들은 다르나, 사람들은 세 유형들이 레인저라는 울타리에 똑같이 들어간다고 해석합니다. 이게 너무 이상하지 않나요? 소설 <반지 전쟁>에서 이실리엔 레인저들은 자연 동료 소환 주문을 외우지 않고 커다란 상어를 소환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던전스 앤 드래곤스>에서 레인저들은 자연 동료 소환 주문을 외우고 커다란 상어를 소환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두 유형을 모두 레인저라고 부릅니다. 이건 말이 안 됩니다. 어떻게 두 레인저가 똑같은 울타리에 들어갈 수 있나요? 이실리엔 레인저가 커다란 상어를 소환하지 못함에도, 어떻게 <반지 전쟁> 레인저와 <디앤디> 레인저가 똑같은 울타리에 들어가나요? 하지만 이미 레인저는 전형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반지 전쟁> 레인저와 <디앤디> 레인저는 똑같은 울타리에 들어갑니다. 비록 어떤 중세 판타지 팬은 <반지 전쟁> 레인저를 싫어하고 <디앤디> 레인저를 훨씬 좋아할지 모르나, 그렇다고 해도 중세 판타지 팬은 이미 전형으로서, 폭넓은 범주로서 레인저가 존재한다고 인정해야 할 겁니다.
모스라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모스라'는 고정적인 실체가 아닙니다. 이미 폭넓은 범주로서 모스라 전형은 존재합니다. 그래서 작가로서 옆동네 철수가 의도하지 않았다고 해도, 독자로서 아랫집 수진은 거대 괴수 소설이 모스라 전형에 속한다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이런 해석은 오류가 아닐 겁니다. 만약 옆동네 철수가 이런 해석을 거부한다면, 오히려 옆동네 철수는 오류에 빠질지 모릅니다. 옆동네 철수는 폭넓은 범주로서 모스라 전형을 인정해야 합니다. 만약 모든 것이 개별적이라면, SF 평론가는 장르를 만들지 말아야 할 겁니다. 모든 것이 개별적임에도, 왜 SF 평론가가 장르를 만들어야 하나요?
SF 평론가는 <프랑켄슈타인>과 <모로 박사의 섬>과 <시리우스>와 <로섬의 만능 로봇>을 오직 개별적으로만 평가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많은 SF 평론가들은 <프랑켄슈타인>과 <모로 박사의 섬>과 <시리우스>와 <로섬의 만능 로봇>을 총체적으로 파악하기 원합니다. 만약 문학 평론가가 네 사변 문학들을 오직 개별적으로만 파악한다면, 이런 해석은 비판을 피하지 못할 겁니다. '인간 창조주-피조물'이 폭넓은 범주이기 때문입니다. 이미 '인간 창조주-피조물'이 폭넓은 전형이 되었기 때문에, SF 평론가는 <프랑켄슈타인>과 <모로 박사의 섬>과 <시리우스>와 <로섬의 만능 로봇>을 함께 묶습니다.
하지만 어떻게 전형이 나타납니까? 이미 전형이 존재한다고 해도, 하늘에서 전형은 뚝 떨어지지 않았을 겁니다. 만약 하늘에서 전형이 뚝 떨어지지 않았다면, 어떻게 전형이 나타납니까? 사람들은 기원을 찾고, 흐름을 파악하고, 유사성들을 연결합니다. 1961년 모스라는 기원이 됩니다. 1961년 모스라 이후, 모스라는 여러 흐름들을 거쳤습니다. 여러 흐름들 속에는 거대 나방, 여러 초능력들, 모성적인 성향, 엄마 벌레와 애벌레와 변태 과정, 자연 친화, 비서구 문화 같은 유사성들이 있습니다. 이런 기원, 흐름, 유사성은 폭넓은 전형 모스라를 만듭니다. 이런 전형 속에서 헤이세이 모스라와 몬스터버스 모스라는 존재합니다.
헤이세이 모스라와 몬스터버스 모스라가 너무 다르다고 해도, 이런 전형 속에서 두 유형이 존재하기 때문에, 두 유형은 똑같은 모스라(범주)가 됩니다. 그래서 뭐라고 작가로서 옆동네 철수가 의도했든, 독자로서 아랫집 수진은 거대 괴수 소설이 전형에 속한다고 해석합니다. 만약 사람들이 기원, 흐름, 유사성을 찾는다면, 사람들은 범주를 형성하고 여러 유형들을 함께 묶고 분류할 수 있을 겁니다. 생태학 SF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만약 사람들이 기원, 흐름, 유사성을 찾는다면, 사람들은 생태학 SF 전형을 형성할 수 있을 겁니다. 어떤 두 가지가 너무 다르다고 해도, 두 가지는 똑같이 생태학 SF 전형에 들어갈 겁니다.
외계 행성 테라포밍 소설과 생태계 시뮬레이션 게임이 너무 다르다고 해도, 두 가지는 똑같은 범주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테라포밍 소설 작가가 의도하지 않았다고 해도, 사람들은 두 가지가 똑같은 범주에 들어간다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물론 전형은 고정적이지 않습니다. 전형은 얼마든지 바뀔 수 있습니다. 전형이 바뀔 때, 전형 속의 유형들은 뛰쳐나오거나 사라지거나 다른 곳으로 이주하거나 훨씬 깊이 들어갈 겁니다. 그래서 전형은 고정적인 실체보다 유동적인 변화입니다. 전형이 유동적인 변화이기 때문에, 전형은 많은 논란들을 부릅니다. 어쩌면 정말 거대 괴수 소설은 <우주 전쟁>에 가까운지 모릅니다.
옆동네 철수가 주장하는 것처럼, 거대 괴수 소설은 <모스라>보다 <우주 전쟁>과 <세상 숲>과 <문명: 비욘드 어스>에 훨씬 가까운지 모릅니다. 그래서 옆동네 철수와 아랫집 수진은 계속 논란을 벌입니다. 이런 논란은 쉽게 끝나지 않을 겁니다. 어떤 중세 판타지 팬들은 <반지 전쟁> 레인저보다 <디앤디> 레인저와 <히마매 4> 드루이드가 비슷하다고 해석할지 모릅니다. 어떤 SF 독자는 <로섬의 만능 로봇>보다 <모로 박사의 섬>과 <오릭스와 크레이크 (인간 종말 리포트)>가 비슷하다고 해석할지 모릅니다. 어떤 SF 팬은 어떻게 외계 행성 테라포밍 소설과 생태계 시뮬레이션 게임이 비슷한지 따질 겁니다.
이런 논란이 쉽게 끝나지 않기 때문에, 이웃집 영희는 골치가 아프다고 느낍니다. 옆동네 철수와 아랫집 수진은 논란을 멈추지 않습니다. 두 사람이 합의점을 찾을 수 있나요? 그건 아닐 겁니다. 하지만 뒷동네 말자 할머니는 한 가지를 제안합니다. <우주 전쟁>, <세상을 가리키는 말은 숲>, <모스라>, <페르디도 거리의 기차역>, <문명: 비욘드 어스>에는 어떤 근본적인 유사성이 있는지 모릅니다. 옆동네 철수와 아랫집 수진은 어디에서 근본적인 유사성이 비롯했는지 파악할 수 있습니다. 거대 괴수 소설이 <우주 전쟁>에 가깝든, <세상 숲>에 가깝든, <모스라>에 가깝든, 이건 주관적인 해석 차이입니다.
하지만 옆동네 철수와 아랫집 수진은 거대 괴수 소설이 무슨 조건들에서 비롯했는지 파악할 수 있습니다. 이건 그저 주관적인 해석에 불과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웃집 영희와 옆동네 철수와 뒷동네 말자 할머니와 아랫집 수진은 <우주 전쟁>, <세상을 가리키는 말은 숲>, <모스라>, <페르디도 거리의 기차역>, <문명: 비욘드 어스>에 어떤 근본적인 유사성들이 있는지 파악합니다. 아하, 네 사람들은 정말 근본적인 유사성들을 찾을 수 있습니다. 이것들이 무엇인가요? 이것들은 서구 근대화, 식민지 수탈, 근대적인 환경 오염입니다. <우주 전쟁>부터 <문명: 비욘드 어스>까지, 여기에는 유사성들이 있습니다.
<우주 전쟁>, <세상을 가리키는 말은 숲>, <모스라>, <페르디도 기차역>, <문명: 비욘드 어스>는 모두 서구 근대화, 식민지 수탈, 근대적인 환경 오염을 공통적으로 이야기합니다. 여전히 옆동네 철수와 아랫집 수진은 옥신각신 논란을 벌이나, 그렇다고 해도 말자 할머니는 두 사람이 서구 근대화, 식민지 수탈, 근대적인 환경 오염을 인정해야 한다고 제안합니다. 두 사람은 동의합니다. 거대 괴수 소설에도 세 조건들이 있습니다. 현실 속에 서구 근대화, 식민지 수탈, 근대적인 환경 오염이 있기 때문에, <우주 전쟁>, <세상 숲>, <모스라>, <페르디도 기차역>, <문명: 비욘드 어스>는 나타납니다. <우주 전쟁>에서 붉은 식물들이 지구 환경을 바꾸는 것처럼, <세상 숲>, <모스라>, <문명: 비욘드 어스>는 근대적인 환경 변화를 이야기합니다.
현실 속에 서구 근대화, 식민지 수탈, 근대적인 환경 오염이 있기 때문에, 옆동네 철수는 거대 괴수 소설을 쓸 수 있습니다. 플랜테이션 농업이 아메리카 밀림을 파괴했기 때문에, 옆동네 철수는 거대 엄마 괴수가 남아메리카 열대 밀림을 보호한다고 쓸 수 있었습니다. 이건 그저 주관적인 해석에 불과하지 않습니다. 이건 현실입니다. 비록 옆동네 철수와 아랫집 수진이 합의하지 못한다고 해도, 두 사람은 현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리고 수많은 SF 평론가들 역시 '현실을 인정'해야 할 겁니다. 하지만 정말 SF 평론가들이 현실을 인정하나요? 글쎄요, 그건 아닌 것 같습니다. 오히려 여러 SF 평론가들은 현실을 열심히 외면하는 것 같습니다. 그들은 하늘에서 SF 장르가 뚝 떨어졌다고 열정적으로 믿는 것 같습니다. 왜 이런 현상이 나타납니까?
<우주 전쟁>, <세상 숲>, <모스라>, <페르디도 기차역>, <문명: 비욘드 어스>에는 서구 근대화, 식민지 수탈, 근대적인 환경 오염이 있습니다. 거대 괴수 소설에도 세 가지 조건들이 있습니다. 세 가지 조건들 때문에, <우주 전쟁>, <세상 숲>, <모스라>, <페르디도 기차역>, <문명: 비욘드 어스>, 거대 괴수 소설은 나타납니다. 만약 서구 근대화가 행성급 환경 오염을 일으키지 않았다면, <문명: 비욘드 어스>는 행성 생태계를 보호하기 위한 떡대 절지류 괴수를 이야기하지 않았을 겁니다. 14세기 유럽에는 행성급 환경 오염이 없었고, 그래서 14세기 유럽 문학은 떡대 절지류 괴수를 이야기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서구 근대화가 행성급 환경 오염을 일으킨다고 믿지 않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행성급 환경 오염이 그저 개인적인 문제, 개별적인 문제에 불과하다고 믿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서구 근대화와 근대적인 환경 오염을 연결하지 못합니다. SF 평론가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서구 근대화는 자신의 잘못을 감추기 원합니다. 서구 근대화는 지배적인 관념을 퍼뜨립니다. 지배적인 관념은 자본주의 시장 경제가 반드시, 절대적으로, 언제나, 아무 이유 없이 옳다고 거짓말합니다. 지배적인 관념 속에서 사람들은 거짓말을 믿습니다. 지배적인 관념 속에서 여러 SF 평론가들 역시 거짓말을 믿습니다.
우리가 근대 사회를 바라볼 때, 우리는 서구 근대화가 문제라고 고려해야 합니다. 하지만 정말 우리가 이것을 고려하나요? 그건 아닌 것 같습니다. 베트남 침략을 보세요. 많은 사람들은 베트남 침략을 비판합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그저 전쟁 그 자체가 나쁘다고 말할 뿐입니다. 사람들은 서구 근대화가 문제라고 고려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그저 하늘에서 베트남 침략이 뚝 떨어졌을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초월적인 시간과 공간 속에서 베트남 침략은 혼자 존재하지 않습니다. <우주 전쟁>이 서구 제국주의를 비판하는 것처럼, 이미 20세기 이전에는 서구 제국주의가 있었습니다.
서구 제국주의는 근대 문명에 엄청난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래서 17~19세기 식민지 수탈에서 우리는 출발해야 합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17~19세기 서구 제국주의를 간과하고 오직 베트남 침략만 개별적으로 해석합니다. 이런 해석은 조건들을 파악하지 않습니다. 이런 해석은 오류입니다. 이웃집 영희와 뒷동네 말자 할머니와 아랫집 수진은 이런 해석이 오류라고 주장할 겁니다. 옆동네 철수는 변명을 늘어놓는지 모르나, 분명히 소설 <우주 전쟁>과 소설 <세상을 가리키는 말은 숲>은 이어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우주 전쟁>과 <세상을 가리키는 말은 숲>을 분리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17~19세기 식민지 수탈을 간과하거나 외면하거나 심지어 미화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근대 인류 문명에서 수많은 굵직한 사건들이 오직 개별적으로만 존재한다고 판단합니다. 하지만 수많은 굵직한 사건들은 개별적으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총체적인 흐름 속에서 굵직한 사건들은 이어집니다. 강물에 상류와 하류가 있는 것처럼, 굵직한 사건들은 이어집니다. 대항해 시대, 엔코미엔다, 플랜테이션 농장, 식민지 수탈, 인디언 학살, 마녀 사냥, 상업 자본주의, 흑인 노예 제도, 프랑스 혁명, 산업 자본주의, 1848년 혁명, 파리 코뮌, 1차 세계 대전은 이어집니다. 이것들은 개별적이지 않습니다.
이런 흐름은 러시아 소비에트, 간섭 전쟁, 1930년대 경제 공황, 파쇼주의 난동, 2차 세계 대전을 향해 다시 이어집니다. 이런 총체적인 흐름 속에서 베트남 침략은 존재합니다. 우리는 이런 흐름을 연결하고 총체적으로 해석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오직 개별적으로만 해석하기 원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하늘에서 현상, 사건이 뚝 떨어진다고 해석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거대 괴수 소설과 모스라가 별개라고 판단할 겁니다. 정말 거대 괴수 소설과 모스라가 별개인가요? 그건 아닐 겁니다. 근대 사회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총체적인 흐름 속에서 우리는 근대 사회를 해석해야 합니다.
[이런 장면은 개별적이지 않습니다. 서구 제국주의 때문에, 못된 외계 삼발이는 인간들을 포격합니다.]
하지만 서구 근대화는 자본주의 시장 경제가 반드시, 절대적으로, 언제나, 아무 이유 없이 옳다고 거짓말합니다. 이런 거짓말 속에서 사람들은 근대 사회를 바라봅니다. 식민지 근대화 이론과 민족 역사관을 보세요. 언뜻 두 가지는 대립하는 것 같습니다. 식민지 근대화 이론은 제국주의 침략이 근대화 기틀을 마련했다고 주장합니다. 민족 역사관은 피지배 민족이 스스로 근대화를 이룩할 수 있었다고 주장합니다. 두 가지 주장은 대립하고, 그래서 식민지 근대화 이론과 민족 역사관은 치열하게 싸웁니다. 문제는 두 가지 주장에 아주 근본적인 공통점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두 가지 주장은 서구 근대화가 옳다고 상정합니다.
식민지 근대화 이론은 "서구 근대화는 옳다. 제국주의 침략은 서구 근대화 기틀을 마련했다."고 주장합니다. 민족 역사관은 "서구 근대화는 옳다. 피지배 민족은 이것을 스스로 이룩할 수 있었다."고 주장합니다. 두 가지 결론은 다르나, 두 가지 결론은 모두 서구 근대화가 옳다고 상정합니다. 하지만 정말 서구 근대화가 옳은가요? 대항해 시대를 빙자하는 대학살 시대, 열대 밀림 파괴, 인디언 학살, 플랜테이션 농업, 엔코미엔다, 마녀 사냥, 식민지 분할, 노예 무역, 시커먼 대기 오염, 인클로저, 죽어나가는 아동 노동자들, 야생 동물 밀렵이 옳은가요? 아니, 이것들은 절대 옳지 않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이것들이 옳다고 믿습니다.
서구 근대화는 옳습니다. 대항해 시대를 빙자하는 대학살 시대, 열대 밀림 파괴, 인디언 학살, 플랜테이션 농업, 엔코미엔다, 마녀 사냥, 식민지 분할, 노예 무역, 시커먼 대기 오염, 인클로저, 죽어나가는 아동 노동자들, 야생 동물 밀렵은 옳습니다. 이것들이 옳기 때문에, 서구 근대화가 다른 문제들을 일으킨다고 해도, 사람들은 그게 옳다고 해석하거나 그것을 제대로 해석하지 못합니다. 사람들은 서구 근대화와 다른 사건을 개별적으로 해석합니다. 사람들은 모든 사건이 개별적이라고 해석합니다. 베트남 침략은 개별적입니다. 하늘에서 베트남 침략은 뚝 떨어졌습니다.
다른 무엇도 베트남 침략에 영향을 미치지 않았습니다. 특히, 서구 근대화, 자본주의 시장 경제는 베트남 침략에 영향을 절대 미치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사람들은 믿습니다. 이 세상에는 오직 미국과 베트남만 있고, 오직 미국과 베트남만 갈등했습니다. 이건 베트남 침략의 전부입니다. 사람들은 파리 코뮌 학살과 혼란스러운 러시아 소비에트와 베트남 침략을 절대 연결하지 못합니다. <우주 전쟁>, <세상 숲>, <모스라>, <페르디도 기차역>, <문명: 비욘드 어스>, 옆동네 철수 소설이 모두 개별적인 것처럼, 베트남 침략은 개별적입니다. 서구 근대화가 절대적으로 옳기 때문에.
거대 괴수 소설에서 좌파 정부들은 공유 사회를 실험합니다. 많은 독자들은 이런 결말이 엉터리라고 힐난할 겁니다. 많은 독자들은 좌파 정부들이 독재 정부라고 힐난할 겁니다. 보수 우파 지식인들은 사회주의가 독재라고 꽥꽥거리고 씨불거립니다. 하지만 오히려 서구 제국주의는 사회주의 세력들을 학살했습니다. 19세기 파리 코뮌부터 오늘날 좌파 정부들까지, 사회주의 세력들은 서구 제국주의에서 한 번이라도, 단 한 번이라도, 정말 단 한 번이라도 자유롭게 벗어난 적이 없습니다. 언제나 사회주의 세력들은 상대적인 약자였고, 서구 제국주의는 상대적인 약자를 짓밟았습니다.
하지만 강자가 약자를 짓밟았다고 해도, 사람들은 상관하지 않습니다. 지배적인 관념이 서구 근대화가 옳다고 세뇌하기 때문입니다. SF 평론가들 역시 거대 괴수 소설이 엉터리 결론을 내린다고 힐난할 겁니다. 물론 다른 많은 사람들처럼, SF 평론가들은 피해자입니다. 지배적인 관념이 SF 평론가들을 세뇌하기 때문에, 그들은 피해자입니다. 하지만 SF 평론가들이 피해자라고 해도, 그들은 문화/인문/지식 분야에 속합니다. SF 평론가들은 많은 책들을 읽고, 철학 용어들을 읊조리고, 인문학 분위기를 풍깁니다. SF 평론가들이 문화/인문/지식 분야에 속함에도, 그들은 현실을 외면합니다.
사이언스 픽션에게 서구 근대화가 아주 중요함에도, 서구 근대화가 다른 사변 장르들과 사이언스 픽션을 결정적으로 구분함에도, 여러 SF 평론가느님들은 서구 근대화를 너무 열심히 외면합니다. 고작 이런 덕질 블로그 따위는 여러 SF 평론가느님들의 천재적인 해석을 감히 따라가지 못할 것 같습니다. 고작 이런 덕질 블로그 따위는 어떻게 19세기에 허버트 웰즈가 <우주 전쟁> 같은 소설을 쓸 수 있었는지 그저 감탄할 뿐입니다. 허버트 웰즈는 정말 희대의 천재였던 것 같습니다. 여러 SF 평론가느님들과 완전히 다른 의미에서.
※ 그림 <Mothra 2019 in the pyramid> 출처: MissSaber444,
https://www.deviantart.com/misssaber444/art/Mothra-2019-in-the-pyramid-8039739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