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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 생태주의

<솔라리스>와 여자 방문자, 연인 모스라 본문

감상, 분류, 규정/괴수들과 개조 생명체들

<솔라리스>와 여자 방문자, 연인 모스라

OneTiger 2019. 12. 3. 20:24

※ 이 게시글에는 영화 <고지라: 괴수왕>의 치명적인 결말 누설이 있습니다. (…라고 저는 말하고 싶으나, 이미 영화 예고편이 볼장을 다 봤기 때문에….)



[이런 예쁘고 사랑스러운 그림을 덕질하기는 정말 즐겁습니다. 하지만 여기에 편견이 있지 않나요?]



중세 유럽 판타지보다 사이언스 픽션은 전복적이고 혁명적입니다. 이유가 무엇인가요? 사이언스 픽션이 시대 격차를 말하기 때문입니다. 중세 유럽 판타지는 시대가 고정적이라고 간주합니다. 중세 사람들은 시대가 고정적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신이 존재하기 때문에, 신이 세상을 만들었기 때문에, 세상은 바뀌지 않습니다. 성서는 신이 무엇을 했는지 기록했고, 이런 성스러운 기록에서 세상은 벗어나지 않을 겁니다. 반면, 사이언스 픽션은 세상이 바뀔 거라고 말합니다. 근대 과학은 수많은 것들을 바꾸었습니다. 근대 지질학, 대륙 이동 이론은 인간 사고 방식을 엄청나게 바꾸었습니다.


대륙 이동 이론은 아득한 시각을 엽니다. 아득한 시각 속에서 우리는 어디에 인류가 존재하는지 고찰할 수 있습니다. 이런 사고 방식은 파격적입니다. 중세 유럽 판타지에는 이런 파격적인 사고 방식이 없습니다. 중세 판타지보다 사이언스 픽션은 전복적이고 혁명적입니다. 많은 문화 예술들은 전복, 파격, 혁명이라는 단어들을 좋아합니다. 이런 단어들은 기존 질서를 거부한다고 선언합니다. 그래서 문화 예술들이 뭔가를 자랑하고 내세우기 원할 때, 전복, 파격, 혁명은 아주 좋은 수식어들이 됩니다. 만약 어떤 문화 예술이 파격을 말한다면, 사람들은 그게 대단하다고 느낄지 모릅니다.



하지만 정말 사이언스 픽션이 파격적인가요? 분명히 사이언스 픽션은 드넓은 우주와 인류 위상을 고민합니다. 이런 아득한 시각은 파격적입니다. 하지만 이게 파격의 전부인가요? 인류 문명은 가부장적이고, 가부장 폭력은 수많은 여자들을 억압합니다. 남편은 아내를 구타하고, 남자 친구는 여자 친구를 성 폭행하고, 직장 상사는 비정규직 노동자를 더듬고, 미혼모는 손가락질을 받습니다. 만약 젊은 여자들이 짧은 치마를 입는다면, 많은 사람들은 짧은 치마가 문제를 일으킨다고 주절거릴 겁니다. 사람들은 가부장적인 편견과 차별보다 짧은 치마가 문제를 일으킬 거라고 주절거립니다.


사람들은 가부장적인 폭력을 용서하고 짧은 치마에게 죄를 뒤집어씌웁니다. 짧은 치마에게 아무 잘못이 없음에도, 진짜 문제가 가부장 편견임에도, 오히려 사람들은 짧은 치마, 여자에게 죄를 뒤집어씌웁니다. 여자가 짧은 치마를 입고 성 폭행을 당한다고 해도, 잘못은 성 폭행보다 여자와 짧은 치마입니다. 피해자는 죄인이 됩니다. 근대 인류 문명은 웃기는 꼴불견입니다. 웃기는 꼴불견으로서 근대 인류 문명은 피해자가 죄인이라고 말합니다. 사이언스 픽션은 이런 웃기는 꼴불견을 거부해야 할 겁니다. 웃기는 꼴불견은 기존 질서입니다. 사이언스 픽션은 기존 질서를 거부해야 합니다.



하지만 정말 사이언스 픽션이 기존 질서를 거부하나요? 파격적인 사이언스 픽션께서 기존 질서를 거부하나요? 많은 SF 독자들은 소설 <솔라리스>가 대단하다고 말합니다. 어떤 독자들에게 <솔라리스>는 최고의 사이언스 픽션입니다. 그래서 최고의 사이언스 픽션 <솔라리스>가 기존 질서를 거부하나요? <솔라리스>가 가부장적인 억압을 비판하나요? 놀랍게도 최고의 사이언스 픽션 <솔라리스>에서 주연 등장인물들은 남자들입니다. 소설 속에는 여자 등장인물(들)이 있으나, 여자 등장인물(들)은 주체가 되지 못합니다. 남자들은 적극적으로 토론하고 행동하나, 여자는 적극적이지 않습니다.


여자는 그저 방문자에 불과합니다. 주체는 남자이고, 여자는 대상입니다. 남자가 바라보기 때문에, 여자는 존재합니다. 이웃집 영희는 <솔라리스>를 읽고 '가부장적인 시선'이 문제라고 비판합니다. 많은 상업 광고들은 여자를 훑어봅니다. 상업 광고 시점은 가부장적인 시선이 되고, 이런 시선은 여자를 훑어봅니다. 여자는 대상이 됩니다. 여자는 가부장적인 시선을 위한 대상이 됩니다. 그 자체로서 여자는 주체가 되지 못합니다. 가부장적인 시선이 훑어봐야 하기 때문에, 여자는 존재합니다. 이런 상업 광고들 속에서 여자는 대상이 됩니다. 그래서 성 해방 운동가들은 상업 광고들을 비판합니다.



가부장적인 편견은 남자가 주된 존재이고 여자가 보조적이라고 주장합니다. 여자가 아기를 낳고 먹이기 때문에, 여자와 육아가 쉽게 이어지(는 것 같)기 때문에, 돌봄 노동을 착취하고 잉여 생산물들을 차지하기 위해 가부장 문화는 여자를 개무시합니다. 여자는 주체가 되지 말아야 합니다. 만약 여자가 주체가 된다면, 여자와 남자는 동등해질 테고, 가부장 문화는 여자를 착취하지 못할 겁니다. 육체로서 여자가 아기를 먹이기 때문에, 가부장 문화는 여자와 육아를 '억지로' 연결하고 여자를 착취하기 원합니다. 그래서 남자가 바라볼 때, 여자는 존재해야 합니다. 여자는 스스로 존재하지 말아야 합니다.


남자 때문에, 여자는 존재합니다. 남자 없이, 여자는 존재하지 못합니다. 소설 <허랜드>는 남자 없는 여자들만의 공동체를 묘사하나, 가부장 문화는 남자 없이, 여자가 존재하지 못한다고 주장합니다. 가부장 문화는 이것을 훨씬 밀어붙일지 모릅니다. 심지어 남자를 위해 여자는 존재해야 합니다. 남자의 쾌락을 위해 여자의 육체는 존재해야 합니다. 여자의 육체는 부드럽고 나긋나긋하고 풍만합니다. 이유가 무엇인가요? 이유는 남자의 쾌락입니다. 부드럽고 나긋나긋하고 풍만한 여자는 남자를 안고 남자를 받아들여야 합니다. 남자를 위해 여자가 존재하기 때문에, 남자는 여자를 소유해야 합니다.



남자 때문에, 여자는 존재합니다. 심지어 남자를 위해 여자는 존재합니다. 그래서 남자는 여자를 소유해야 합니다. 에밀이 소피아를 소유하고, 에밀이 소피아의 주인이 되는 것처럼, 일본 문화에서 남편이 아내의 주인이 되는 것처럼, 영어 문화에서 아내가 남편 이름을 따르는 것처럼, 기독교 <성경>에서 아담에게서 이브가 비롯하는 것처럼, 남자 때문에, 남자를 위해 여자는 존재합니다. 상업 광고들은 이것을 노골적으로 보여줍니다. 상업 광고 시점은 예쁜 여자를 훑어보고, 이런 가부장적인 시선을 위해 예쁜 여자 모델은 존재합니다. 가부장적인 시선이 바라보기 때문에, 예쁜 여자 모델은 존재합니다.


하지만 광고 시점은 그저 연출에 불과합니다. <솔라리스>는 이것을 SF 설정으로 전환합니다. 사이언스 픽션은 비유, 과장, 연출을 설정으로 전환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러시아를 불곰 국가라고 부르나, <적색 경보 3>에서 소비에트 연방은 정말 전투곰들을 키웁니다. <적색 경보 3>의 전투곰들처럼, 사이언스 픽션은 비유를 설정으로 전환할 수 있습니다. <솔라리스>에서 남자 승무원이 존재하기 때문에, 여자 방문자는 나타납니다. 여자 방문자는 주체가 아닙니다. 여자 방문자는 남자 승무원에게 종속됩니다. 남자 승무원 없이, 여자 방문자는 존재하지 못합니다. '문자 그대로' 여자는 남자에게 매달려야 합니다.



소설 <솔라리스>에서 정말 여자는 남자에게 죽기 살기로 매달립니다. 아담에게서 이브가 비롯하는 것처럼, 남자 승무원에게서 여자 방문자가 비롯하기 때문입니다. <솔라리스>는 남자 때문에 여자가 존재한다고 노골적으로 설정합니다. 남자는 주체이나, 여자는 대상입니다. 이건 너무 놀라운 설정입니다. 최고의 사이언스 픽션 <솔라리스>는 가부장적인 편견을 SF 설정화합니다. 소설 <허랜드>가 여자들만의 공동체를 사변하는 것처럼, <솔라리스>는 가부장적인 시선을 사변합니다. 많은 SF 독자들은 <솔라리스>가 대단하다고 추켜세우나, 이런 가부장적인 사변이 정말 대단한가요? 이게 최고인가요?


아하, <솔라리스>가 가부장적인 시선을 SF 설정화하기 때문에, <솔라리스>가 최고의 SF 소설이 되나요? 상업 광고들이 가부장적인 시선을 드러내는 것처럼, 이웃집 영희는 <솔라리스>가 가부장적인 시선을 드러낸다고 느낍니다. 아무리 <솔라리스>가 플라즈마 바다와 온갖 학파들과 미모이드 덩어리와 외계 지성을 주절거린다고 해도, 이웃집 영희는 <솔라리스>가 불쾌하다고 느낍니다. 비단 <솔라리스>만 아니라 여러 SF 소설들에는 이런 가부장적인 설정이 있습니다. <노변의 피크닉>과 <세상이 끝날 때까지 아직 10억 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이웃집 영희는 이런 소설들이 불쾌하다고 느낍니다.



하지만 이런 느낌이 타당한가요? 많은 SF 독자들은 이웃집 영희를 비판할 겁니다. <솔라리스>에서 여자 방문자는 그저 설정에 불과합니다. 우주 정거장에 오직 남자 승무원들만 있다고 해도, 이건 그저 우연에 불과합니다. 우연히 남자 승무원들은 그저 우주 정거장을 찾았을 뿐입니다. <솔라리스>는 여자가 아기를 먹이기 때문에 가부장 문화가 여자를 착취해야 한다고 직접 주장하지 않습니다. <솔라리스>가 성 착취를 직접 주장하지 않기 때문에, <솔라리스>는 가부장적이지 않습니다. 이웃집 영희가 소설을 불쾌하게 느낀다고 해도, 이건 그저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감성에 불과합니다. 이건 타당하지 않습니다.


<노변의 피크닉>과 <세상이 끝날 때까지 아직 10억 년> 역시 비슷합니다. 두 소설은 가부장 문화가 여자를 착취해야 한다고 직접 주장하지 않습니다. 이웃집 영희가 불쾌하게 느낀다고 해도, 이런 느낌은 타당하지 않습니다. 다른 많은 상업 광고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상업 광고들은 그저 여자를 훑어볼 뿐입니다. 이건 그저 광고 연출에 불과합니다. 이웃집 영희는 광고 연출이 가부장적이라고 비판하지 못합니다. 이웃집 영희는 창작과 표현의 자유를 존중해야 합니다. <솔라리스>가 1인칭 주인공 시점이기 때문에, 소설 주인공이 남자이기 때문에, '나'는 여자 방문자를 바라보나, 이웃집 영희는 문학 형식을 존중해야 합니다.



<솔라리스>에서 '나'가 바라보기 때문에, 여자는 주체보다 대상에 훨씬 가까워집니다. 소설 시점은 남자 승무원과 여자 방문자를 객관적으로 주시하지 않습니다. 소설 시점 '나'는 여자를 바라봅니다. 소설 주인공, 1인칭 시점으로서 주체 '나'는 남자이고, '나'는 대상 여자를 바라봅니다. 이건 성 차별인지 모르나, 동시에 이건 창작과 표현의 자유입니다. 이웃집 영희는 1인칭 주인공 '남자' 시점이 여자 방문자를 대상화한다고 비판하지 못합니다. <솔라리스>에서 플라즈마 바다가 인간 기억과 심리를 파헤치기 때문에, 불가해한 외계 지성을 강조하기 위해 <솔라리스>는 그저 1인칭 주인공 시점을 이용할 뿐입니다. 이건 SF 설정과 문학 형식의 만남입니다.


이웃집 영희는 SF 설정과 문학 형식의 만남을 비판하지 못합니다. 오히려 SF 독자로서 이웃집 영희는 이런 창작과 표현을 존중하고 스타니스와프 렘을 칭찬해야 할지 모릅니다. 아무리 상업 광고 시점들이 여자 모델들을 훑어본다고 해도, 이웃집 영희는 상업 광고 연출들을 존중해야 할지 모릅니다. 속담 "자라를 보고 놀란 마음은 솥뚜껑을 보고 놀란다."는 유사성의 함정을 지적합니다. 가부장적인 시선과 <솔라리스> 사이에는 아주 뚜렷한 유사성이 있으나, 만약 이웃집 영희가 이것을 지적한다면, 이건 유사성의 함정인지 모릅니다. 그렇다고 해도 이웃집 영희는 소설 <솔라리스>가 불쾌하다고 느낍니다. 뒷동네 말자 할머니는 이웃집 영희를 이해합니다.



왜 뒷동네 말자 할머니가 이웃집 영희를 이해하나요? 속담 "자라를 보고 놀란 마음은 솥뚜껑을 보고 놀란다."가 유사성의 함정을 지적함에도, 왜 말자 할머니가 이웃집 영희를 이해하나요? 만약 이웃집 영희가 가부장적인 시선과 <솔라리스> 사이에 유사성이 있다고 비판한다면, 이게 유사성의 함정이 아닌가요? 자라는 생체 솥뚜껑이 아닙니다. 자라와 솥뚜껑이 다른 것처럼, <솔라리스>와 가부장적인 시선은 다릅니다. 문제는 가부장적인 시선이 일반적인 솥뚜껑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가부장적인 시선, 가부장 문화는 엄청난 억압, 폭력입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수많은 여자들은 끔찍한 공포들에 시달립니다.


가부장 문화는 너무 억압적이고 지배적인 폭력입니다. 자본주의 시장 경제는 가부장적입니다. 자본주의 지역은 1차 세계 대전, 2차 세계 대전을 연이어 일으켰습니다. 가부장적인 자본주의는 전쟁 범죄자입니다. 가부장 문화가 세계 전쟁 범죄자임에도, 어떻게 이웃집 영희가 가부장 문화를 쉽게 간과할 수 있나요? 노예 제도 사회에서 흑인 여자가 불안과 공포에 떨어야 하는 것처럼, 가부장 문화에서 사회적인 약자로서 이웃집 영희는 불안과 공포에 떱니다. 노예 제도 사회에서 백인 남자가 흑인 여자에게 친절하게 대한다고 해도, 흑인 여자는 백인 남자를 의심해야 합니다. 백인 남자는 노예 납치꾼인지 모릅니다.



흑인 여자가 백인 남자를 의심하는 것처럼, 가부장 문화에서 사회적인 약자는 편견을 의심해야 합니다. 아무리 <솔라리스>에서 SF 설정과 문학 형식이 그저 만날 뿐이라고 해도, SF 독자보다 사회적인 약자로서 이웃집 영희는 <솔라리스>를 의심해야 합니다. 가부장 폭력에서 이웃집 영희는 벗어나지 못합니다. 이웃집 영희는 SF 독자를 포기할 수 있고, SF 독자가 되지 않을 수 있으나, 이웃집 영희는 사회적인 약자를 포기하지 못합니다. 이웃집 영희는 자신이 사회적인 약자가 아니라고 결정하지 못합니다. 영희에게는 결정하기 위한 권리가 없습니다. 이건 계급 문제입니다. 계급 착취는 '현실 문제'입니다. 아무리 이웃집 영희가 발버둥친다고 해도, 이런 '현실 문제'에서 이웃집 영희는 벗어나지 못합니다.


필립 딕의 유명한 문구 "Reality is that which, when you stop believing in it, doesn't go away. (당신이 믿지 않는다고 해도, 현실, 그것은 사라지지 않는다.)"가 지적한 것처럼, 아무리 인간이 현실을 싫어한다고 해도, 현실에서 인간은 벗어나지 못합니다. 이웃집 영희가 무엇을 느끼든, '현실 문제'는 존재합니다. 어쩌면 나중에 이웃집 영희는 소설 <솔라리스>가 가부장적이지 않다고 느낄지 모릅니다. 은어와 도루묵 이야기처럼, 만약 해석이 주관적이라면, 해석은 얼마든지 바뀔 수 있을 겁니다. 최고의 SF 소설 목록들이 <솔라리스>를 추켜세우는 것처럼, 나중에 이웃집 영희는 <솔라리스>를 아주 감동적으로 읽을지 모릅니다. 그렇다고 해도 계급 착취와 여자 차별은 바뀌지 않습니다. 문제는 현실입니다.



[연인으로서 예쁘고 귀엽고 사랑스러운 소녀는 강하고 억센 남자, 임금, 지배자를 품어줍니다.]



문제는 현실로서 가부장 문화입니다. 이렇게 저렇게 이웃집 영희는 <솔라리스>를 해석할 수 있으나, 뭐라고 이웃집 영희가 해석하든, 현실은 가부장 문화입니다. 아무리 SF 독자들이 <솔라리스>를 변호한다고 해도, 현실로서 가부장 문화가 문제이기 때문에, 사회적인 약자로서 이웃집 영희는 <솔라리스>가 불쾌하다고 느낍니다. 이웃집 영희는 비단 <솔라리스>만 아니라 몬스터버스 모스라 역시 불쾌하다고 느낍니다. 위 그림을 보세요. 위 그림은 이른바 모스라 의인화/모에화입니다. 모스라는 거대 나방 괴수이나, 위 그림은 모스라를 의인화합니다. 모스라는 사랑스러운 소녀가 됩니다.


"산들바람과 나뭇잎은 소근거립니다." 이런 표현처럼, 의인화는 아주 보편적인 비유입니다. 문학에서 의인화는 아주 보편적입니다. 위 그림에서 모스라가 사랑스러운 소녀라고 해도, 이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위 그림에서 모스라는 (의인화한) 고지라를 품어줍니다. 모스라는 고지라의 연인입니다. 비단 위 그림만 아니라 다른 많은 팬 아트들에서 모스라는 고지라의 연인입니다. 고지라의 연인으로서 모스라는 존재합니다. 모스라는 스스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고지라의 연인으로서 예쁜 모스라는 나타납니다. 모스라는 예쁘고 귀여운 여자이고, 고지라는 억세고 강한 남자입니다.



만약 고지라의 연인으로서 모스라가 존재한다면, 이건 가부장 편견인지 모릅니다. 모스라가 여자이고 고지라가 남자이기 때문에, 남자 고지라 때문에, 남자 고지라를 위해 여자 모스라는 존재하는지 모릅니다. 수많은 팬 아트들에서 남자 고지라를 위해 고지라의 연인으로서 여자 모스라는 존재합니다. <솔라리스>에서 남자 승무원 때문에 여자 방문자가 존재하는 것처럼, <고지라: 괴수왕> 팬 아트들에서 남자 고지라를 위해 '예쁘고 귀엽고 사랑스러운 여자' 모스라는 존재합니다. 심지어 영화 <고지라: 괴수왕>에서 모스라는 다친 고지라를 감쌉니다. 고지라를 감싸기 위해 모스라는 장렬하게 산화하고 고지라를 강화시킵니다. 강화한 고지라를 위해 모스라는 희생합니다. 여자는 남자를 감싸고, 강한 남자를 위해 여자는 자신을 희생합니다.


이건 아주 전형적인 현모양처, 빅토리아 시대 성 차별입니다. 수많은 <고지라: 괴수왕> 팬 아트들은 연인으로서 모스라, 대상화 모스라, 현모양처 모스라를 보여줍니다. 많은 팬 아트들은 (고지라가 모스라를 소유하는 것처럼) 떡대 고지라가 날씬한 모스라를 안는다고 묘사합니다. 많은 팬 아트들에서 모스라는 고지라를 감싸고 품어줍니다. 그래서 이웃집 영희는 위 그림을 비롯해 수많은 <고지라: 괴수왕> 팬 아트들이 불쾌하다고 느낍니다. 하지만 이런 감성, 해석이 타당한가요? 정말 위 그림이 예쁘고 귀여운 소녀 모스라를 이용하고 가부장적인 편견을 드러내나요? 어쩌면 위 그림은 그저 <고지라: 괴수왕>에 순정 만화를 대입했을 뿐인지 모릅니다. 위 그림은 그저 단순한 의인화, 단순한 모에화, 단순한 패러디에 불과한지 모릅니다.



영화 <고지라: 괴수왕>에서 모스라가 다친 고지라를 감싸거나 강화한 고지라를 위해 모스라가 희생한다고 해도, <고지라: 괴수왕>은 현모양처를 직접 주장하지 않습니다. 이건 그저 영화 <GMK> 오마쥬에 불과합니다. 오히려 영화 속에는 적극적인 여자 지식인들, 여자 전투원들이 있습니다. 비록 엠마 러셀 박사가 악역이라고 해도, 엠마 러셀 박사는 사건을 가장 적극적으로 주도합니다. 영화 속에서 모스라는 서구보다 아시아 계열 괴수이고, 모스라는 서구 중심주의, 백인 우월주의에 도전합니다. 이렇게 영화 관객들은 <고지라: 괴수왕>을 긍정적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웃집 영희가 잘못 해석하나요?


하지만 아랫집 수진 역시 모스라 팬 아트들이 불쾌하다고 느낍니다. 아랫집 수진이 어렸을 때부터, 아랫집 수진은 토호 모스라에 친숙했습니다. 하지만 몬스터버스 모스라가 아주 우아하기 때문에, 최근에 아랫집 수진은 토호 모스라에 적응하지 못합니다. 아랫집 수진은 여러 몬스터버스 모스라 그림들을 덕질하고, 이런 덕질은 정말 즐겁습니다. 영화 <고지라: 괴수왕>이 썩토 폭망 지수를 찍었다고 해도, 모스라 디자인은 아주 근사합니다. 아랫집 수진은 여러 의인화/모에화 모스라들을 함께 좋아하나, 그렇다고 해도 아랫집 수진은 즐거움과 불쾌함을 함께 느낍니다. 이런 감성이 잘못인가요? 이게 타당하지 않나요?



위 그림에서 소녀 모스라는 고지라가 군주, 임금이라고 말합니다. 떡대 고지라는 그저 강하고 억센 남자에 불과하지 않습니다. 떡대 고지라는 그 이상입니다. 고지라는 군주, 임금, 왕입니다. 남자가 왕이기 때문에, 남자는 주된 존재에 훨씬 가깝습니다. 왕은 모든 것을 소유합니다. 왕은 여자를 얼마든지 소유합니다. 모스라가 고지라를 임금님이라고 부르기 때문에, 모스라는 고지라의 왕비나 궁녀 같습니다. 왕비가 왕에게 종속되는 것처럼, 아랫집 수진은 모스라가 고지라에게 속한다고 느낍니다. 동시에 아랫집 수진은 위 그림이 왕으로서, 주인으로서, 소유자로서 남자를 강조한다고 느낍니다.


이런 느낌은 타당하지 않은지 모릅니다. '괴수왕'은 그저 수사적인 표현에 불과합니다. 아랫집 수진은 수사적인 표현을 오해하지 말아야 합니다. 아랫집 수진이 위 그림에서 모스라가 궁녀라고 느낀다고 해도, 이건 그저 주관적인 해석에 불과합니다. 아랫집 수진은 주관적인 해석을 강요하지 못합니다. 만약 아랫집 수진이 주관적인 해석을 강요한다면, 이건 억지 연결이 될 겁니다. 회전 도로 표지판과 재활용 표시가 다른 것처럼, 아랫집 수진은 유사성의 함정에 빠지지 말아야 합니다. 그저께 12월 1일 게시글(링크)에서 어떤 게임 플레이어는 얼음 호수 속의 발록과 영구 동토층 메탄을 연결했습니다.



이게 논리적인 연결인가요? 얼음 호수 속의 뜨거운 발록과 영구 동토층의 뜨거운 메탄 효과가 타당한 연결인가요? 인생에 정답이 없기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에게는 수많은 주관적인 경험들과 인상들이 있습니다. 주관적인 인상 때문에, 인간은 어떤 특정한 유사성에 훨씬 높은 가치를 부여하고, 뭔가를 분류하고, 연결하고, 해석할지 모릅니다. 자라가 생체 솥뚜껑이 아님에도, 옆동네 철수는 시각적인 형태에 훨씬 높은 가치를 부여하고, 자라와 솥뚜껑을 분류하고, 연결하고, 해석할지 모릅니다. 얼음 호수 속의 뜨거운 발록과 영구 동토층의 뜨거운 메탄 효과는 생체 솥뚜껑 자라와 다르지 않은지 모릅니다.


문제는 영구 동토층 메탄이 단순한 유사성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기후 변화는 너무 너무 너무 너무 지배적이고 폭력적이고 억압적이고 지질학적인 재난입니다. 이런 지배적이고 폭력적이고 억압적이고 지질학적인 재난에서 게임 플레이어는 절대 벗어나지 못합니다. 아무리 1,000시간 동안 게임 플레이어가 <미들어스: 섀도우 오브 워>를 플레이한다고 해도, 게임 플레이어는 어머니 자연 카르난을 만나지 못합니다. 현실 속에서 게임 플레이어는 처절한 기후 난민이 될지 모릅니다. 기후 변화가 단순한 유사성이 아니기 때문에, 게임 플레이어는 영구 동토층 메탄에 아주 높은 가치를 부여할 수 있습니다.



[모스라는 고지라가 좋아죽습니다. 그 자체로서 이런 그림은 문제가 아닐 겁니다. 문제는 현실입니다.]



어쩌면 나중에 게임 플레이어는 얼음 호수 속의 발록과 영구 동토층 메탄을 연결하지 않을지 모릅니다. 나중에 게임 플레이어는 완전히 다르게 해석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뭐라고 게임 플레이어가 해석하든, 기후 변화는 현실 문제입니다. 해석은 바뀔지 모르나, 기후 변화는 현실 문제입니다. 게임 플레이어가 뜨거운 발록과 뜨거운 기후 변화를 연결하든 말든, 어머니 자연 카르난이 지구 자연 환경이 되든 말든, 기후 변화는 기후 난민들을 고통에 빠뜨립니다. 모스라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모스라가 예쁘고 귀여운 궁녀가 되든, 모스라가 자연의 여신이 되든, 예쁜 궁녀와 자연의 여신은 해석과 표현에 속합니다.


하지만 현실 문제로서 가부장 문화는 해석과 표현이 아닙니다. 가부장 문화는 착취 경제입니다. 이건 현실입니다. 귀싸대기를 후려치는 얼얼한 아픔처럼, 가부장 문화는 현실입니다. 기후 변화처럼, 가부장 문화는 너무 너무 너무 너무 지배적이고 폭력적이고 억압적인 착취 경제입니다. 심지어 가부장 문화는 기후 변화를 초래합니다. 그래서 아랫집 수진이 가부장적인 시선을 느낀다고 해도, 이건 그저 단순한 유사성에 불과하지 않습니다. 초월적인 시간과 공간 속에서 인간은 해석하지 않습니다. 문학 평론가는 무슨 상황 속에서 인간이 해석하는지 고찰해야 합니다. 근본적인 문학 평론은 이런 고찰일 겁니다.



소설 <반지 원정대>에서 흑기사 나즈굴은 프로도와 샘과 피핀을 추격합니다. 프로도와 샘과 피핀은 흑기사를 간신히 회피합니다. 세 호빗들은 그들이 흑기사를 따돌렸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아뿔싸! 나중에 세 호빗들은 말발굽 소리를 다시 듣습니다. 프로도와 샘과 피핀은 흑기사가 다시 나타났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말발굽 소리는 흑기사 나즈굴이 아니라 메리입니다. 프로도와 샘과 피핀은 유사성의 함정에 빠졌습니다. 말발굽 소리가 유사했기 때문에, 프로도와 샘과 피핀은 메리가 흑기사 나즈굴이라고 착각했습니다. 문제는 나즈굴이 너무 심각한 위협이라는 사실입니다.


흑기사 나즈굴이 너무 위험했기 때문에, 상황이 너무 심각했기 때문에, 프로도와 샘과 피핀은 말발굽 소리를 잘못 해석했습니다. 세 호빗들처럼, 특정한 상황에서 인간은 특정한 유사성에 훨씬 높은 가치를 부여합니다. 모스라 팬 아트들에는 아무 문제가 없을지 모릅니다. 다른 많은 사람들은 모스라 모에화에 아무 문제가 없다고 느낄지 모릅니다. 아무리 모스라가 고지라를 향해 새빨간 하트들을 뿅뿅~ 날린다고 해도, 이건 소녀소녀스러운 순정 분위기에 가까울 겁니다. 하지만 아랫집 수진은 너무 지배적인 폭력, 가부장 문화를 인식합니다. 문제는 모에화보다 가부장 문화입니다.



아랫집 수진이 모스라 팬 아트들을 의심하기 때문에, 어떤 영화 관객들은 아랫집 수진이 꼴페미 씨발년이라고 손가락질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뒷동네 말자 할머니는 아랫집 수진을 이해합니다. 가부장 문화로서 현실이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아랫집 수진이 모에화 그림들을 덕질하든, 아랫집 수진이 토호 모스라에 적응하지 못하든, 이건 그저 주관적인 감성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아랫집 수진이 모에화 모스라 그림들에 완전히 빠진다고 해도, 현실 문제는 존재합니다. 필립 딕이 말하는 것처럼, 가부장 문화에서 사회적인 약자로서 아랫집 수진은 절대, 절대 벗어나지 못합니다.


심지어 아랫집 수진이 가부장 문화를 믿지 않는다고 해도, 가부장 문화는 절대 사라지지 않습니다. 가부장적인 현실 속에서 아랫집 수진은 예쁘고 귀엽고 사랑스러운 소녀 모스라를 덕질해야 합니다. 그래서 방법은 하나입니다. 현실에서 이웃집 영희와 뒷동네 말자 할머니와 아랫집 수진이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에, 영희와 말자 할머니와 수진은 현실을 바꿔야 합니다. 세 사람들은 현실을 반드시 바꿔야 합니다. 오직 이것만 유일한 대안입니다.



※ 그림 <Godzilla & Mothra> 출처: PP@mieaowu,

https://twitter.com/mieaowu/status/1135194715459076097


※ 그림 <おはよう王様> 출처: よさ@yosa_4343,

https://twitter.com/yosa_4343/status/1135075672345341952


※ 그림 <ゴジモス> 출처: 御手洗クーゲルシュライバーやすこ@akadama24,

https://twitter.com/akadama24/status/1137731930881814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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