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생태주의
<페르디도 기차역>과 탐정 주인공 본문
추악하고 부패한 대도시와 형사는 잘 어울리는 한쌍입니다. 형사가 아니라 탐정을 집어넣어도 나쁘지 않을 겁니다. 형사처럼 탐정은 범죄를 수사할 수 있고, 수많은 탐정들은 형사들과 어울리거나 전직 형사 출신입니다. 그래서 19세기의 대도시 런던은 셜록 홈즈를 낳았고, 20세기의 어두운 미국 뒷골목은 필립 말로나 샘 스페이드를 낳았을 겁니다. 이런 탐정 소설들은 여전히 높은 인기를 끌어요. SF 소설들 역시 이런 형식을 빌립니다. <쿼런틴>이나 <얼터드 카본>은 어떻게 SF 소설이 디스토피아 대도시와 탐정을 연결할 수 있는지 보여주죠. 어쩌면 <블레이드 러너> 역시 이런 형식에 속할지 모르겠군요.
저는 만약 소설 <페르디도 거리의 기차역>이 탐정을 내세웠다면, 어땠을지 생각하곤 합니다. <페르디도 기차역>은 스팀펑크 디스토피아입니다. 차이나 미에빌은 추악하고 부패한 도시 뉴크로부존을 전면에 내세우고, 독자를 뉴크로부존의 곳곳으로 끌고 다닙니다. 차이나 미에빌은 도시 관광 안내자가 되고, 독자를 온갖 장소들로 안내합니다. 미에빌은 거대한 시청 건물과 썩은 강물, 핏빛 도살장, 복잡한 번화가, 지저분한 하수구, 유사 인간들의 슬럼을 가리지 않습니다.
당연히 뉴크로부존에서 흉악 범죄는 드문 현상이 아닙니다. 시장은 조직 범죄자들과 손을 잡았고, 그들의 뒤를 봐줍니다. 생체 개조부터 마약 유통까지, 조직 범죄자들은 별별 범죄들을 망라합니다. 거대한 조직들 아래에서 각종 끄나풀들은 잡다한 살인이나 도박이나 도적질을 멈추지 않습니다. 연쇄 살인마들 역시 빠지지 않습니다. 도시의 하수구부터 높다란 시청 건물까지, 음침한 뒷골목부터 화려한 번화가들까지, 뉴크로부존은 범죄들이 들끓는 온상입니다. 게다가 이 도시에는 오직 인간들만 살지 않습니다. 인간 이외에 다양한 비인간 종족들과 자동 인형들과 외계 생명체들과 기괴한 악마들은 도시를 들락거리거나 아예 도시에 상주합니다.
차이나 미에빌은 도시의 다양한 면모들을 구역질이 나도록 자세히 묘사합니다. 아마 <페르디도 기차역>을 읽는 가장 큰 재미는 이런 것일 겁니다. 스팀펑크 대도시의 지저분하고 어둡고 썩은 장소들. 수많은 비인간 종족들과 기계들과 외계 생명체들. 각종 비리들과 범죄들. 형사나 탐정이 활약하기에 정말 이상적인 장소가 아닌가요. 19세기의 런던이나 20세기의 미국 뒷골목이나 미래의 사이버펑크 도시가 탐정을 위한 무대가 될 수 있다면, <페르디도 기차역> 역시 그럴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소설 주인공은 형사나 탐정이 아닙니다. 어느 흑인 물리학자입니다. 게다가 몸집이 꽤나 뚱뚱한 것 같습니다. 이 흑인 뚱보 물리학자는 범죄 수사와 아무 연관이 없어요. 실험 재료를 구하기 위해 범죄자들을 마다하지 않으나, 물리학자는 직접 범죄를 수사하지 않아요. 물리학자는 발명가이고, 다양한 발명품들을 이용해 생계를 유지합니다. 흑인 물리학자 이외에 다른 주연 인물들 역시 형사나 탐정과 별로 연관이 없어요.
물리학자와 사귀는 벌레 종족은 예술가입니다. 조각을 만들죠. 또 다른 주연 인물은 지하 언론 기자입니다. 이 기자는 군사 정부에 적대적이고, 노동 운동을 열렬히 지지합니다. 물리학자는 기자와 절친한 사이이고, 물리학자 역시 노동 운동을 지지하는 편이고요. 조각 예술가와 지하 언론 기자는 형사나 탐정과 거리가 멀어요. 물리학자와 조각 예술가와 부패한 대도시…. 글쎄요, 별로 어울리는 조합이 아닌 것 같습니다. 지하 언론 기자는 부패한 대도시와 어울릴지 모르나, 기자가 취재하는 장면은 별로 많이 나오지 않습니다. 저는 만약 차이나 미에빌이 형사나 탐정을 이용했다면, <페르디도 기차역>이 훨씬 흥미진진해졌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미에빌이 탐정을 내세웠다면, <페르디도 기차역>은 어느 정도 진부함을 감수해야 했을 겁니다. 부패한 대도시와 탐정은 너무 진부한 공식이고, 독자들이 <페르디도 기차역>을 또 하나의 그저 그런 SF 탐정 소설이나 아류작으로 인식했을지 모르죠. 소설 주인공이 물리학자였기 때문에 소설에서 위기 이론이나 인공 지능이 더욱 두드러질 수 있었고요. 만약 소설 주인공이 탐정이었다면, 물리학자처럼 절지류 괴물들을 처치하지 못했겠죠. 게다가 전반적인 이야기에서 탐정이 별로 쓸모가 없었을 겁니다. 탐정의 시각에서 사건을 추적한다고 해도, 탐정이 절지류 괴물들에게 맞서기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었겠어요.
그렇다고 해도 저는 여전히 탐정이라는 인물 설정이 아쉽습니다. 차이나 미에빌은 뉴크로부존을 정말 자세하고 생생하게 묘사했어요. 여기에서 탐정이나 형사가 활약했다면, 도시의 범죄자들에게 맞서 흥미진진한 모험을 펼칠 수 있었을 겁니다. 아마 <이중 도시>보다 훨씬 매력적인 탐정 소설이 되었을지 모릅니다. 뭐, <이중 도시>는 많은 찬사들을 받은 작품입니다. 하지만 이 소설에는 기괴한 생체 실험이나 첨단 기계들이 나오지 않죠. 저는 그런 점이 꽤나 아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