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생태주의
<파리 대왕>과 <빼앗긴 자들>, 야만과 문명을 함께 읽기 본문
소설 <파리 대왕>은 지옥을 보여줍니다. 무인도에서 여러 소년들은 나름대로 문명을 이룩하려고 애쓰나, 그런 시도는 실패로 돌아가고 야만을 부릅니다. 문명은 야만이 되고, 소년들은 잔인하게 무인도를 정복합니다. <파리 대왕>은 문명을 비관적으로 바라봅니다. 소년들은 문명에 속했으나, 무인도는 문명을 해체했고 소년들은 야만이 되었습니다. 결국 문명과 야만 사이는 별로 멀지 않습니다. 무인도처럼 뭔가가 표피를 살짝 긁는다면, 야만은 문명을 뚫고 모습을 드러낼 겁니다.
비록 무인도에서 소년들은 먹고 사느라 바빴으나, 건실한 도시 시민들 역시 무인도 소년들과 별로 다르지 않을지 모릅니다. 도시 시민들은 자신들이 문명이라고 자랑스럽게 말합니다. 하지만 몇몇 재난이 도시를 건드린다면, 재난은 표피를 벗길 테고, 야만은 모습을 드러낼 겁니다. <파리 대왕>을 읽는 동안, 독자들은 소년들을 현대 도시 시민들에게 투영할 수 있을 겁니다. 소년들이 야만이 되는 것처럼, 현대 도시 시민들 역시 야만이 될 수 있겠죠. 현대 도시 시민들이 얇은 포장지를 벗길 수 있다면, 그들은 야만을 마주볼 수 있을 겁니다. 만약 독자들이 이런 시각을 훨씬 비관적으로 밀어붙인다면, 독자들은 비단 문명만 아니라 인간의 본질이 야만이라고 단정할지 모릅니다.
인간이 본질적으로 야만이기 때문에 무인도 소년들은 지옥을 연출했습니다. 결국 지옥은 정해진 운명입니다. 인간이 본질적으로 야만이라면, 지옥은 무인도 소년들이 피하지 못하는 운명입니다. 결국 무인도 소년들은 지옥을 연출해야 합니다. 그건 그들의 사명입니다. 본질이 야만인 상황에서 어떻게 무인도 소년들이 본질을 회피할 수 있겠습니까. 독자들은 이런 해석을 현대 도시 시민들에게 적용할 수 있습니다. 현대 도시 시민들은 찬란하고 세련된 도시 문명으로 야만을 감추나, 자연 재해나 전쟁은 그런 포장지를 당장 찢어버릴 수 있습니다. 자연 재해나 전쟁이 포장지를 찢는다면, 야만은 당장 모습을 드러낼 겁니다. 야만이 인간의 본질이기 때문에, 도시 시민들 역시 야만을 피하지 못하겠죠.
결국 모든 것은 야만이 될 겁니다. 아무리 20세기 현대 사회가 세련되게 보인다고 해도, 그건 그저 포장지에 불과하고, 언젠가 모든 것은 야만이 될 겁니다. <파리 대왕>은 이런 비관적인 정서를 풍길 수 있습니다. 만약 이런 비관적인 정서가 늘어난다면, 그건 회의가 될지 모릅니다. 독자들은 아예 비관을 넘어 회의에 다다를지 모릅니다. <파리 대왕>은 희망을 약속하지 않습니다. 여기에는 오직 본질적인 야만이 있을 뿐이죠. 물론 윌리엄 골딩은 인간이 본질적으로 야만이고 인간이 모두 사라져야 한다고 말하기 원하지 않을 겁니다.
윌리엄 골딩은 언제든 야만이 모습을 드러낼 거라고 경고하기 원했겠죠. <파리 대왕>은 1954년 소설입니다. 1954년은 2차 세계 대전에서 별로 멀지 않은 연도입니다. 영화 <고지라> 역시 1954년 영화죠. 1954년에 아직 사람들은 2차 세계 대전이라는 참상을 제대로 지우지 못했을 겁니다. 2차 세계 대전이 엄청난 비극이기 때문에 <파리 대왕>은 문명보다 야만을 강조했을 겁니다. 적어도 1950년대와 1960년대 독자들은 <파리 대왕>과 야만과 2차 세계 대전을 쉽게 연결할 수 있겠죠. 그렇다고 해도 <파리 대왕>에게는 단점이 아예 없지 않을 겁니다. <파리 대왕>이 주연 등장인물들을 너무 편리하게 설정했기 때문이죠.
소설 속에서 주연 등장인물들은 소년들입니다. 그들은 어른들이 아닙니다. 그들은 아직 세상을 제대로 모르고 인간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모릅니다. 그들은 한창 문명을 배우는 중이었고 문명이 무엇인지 깊이 파악하지 못했죠. 소년들은 사회화가 제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소년들이 무인도를 마주친다면, 소년들이 문명을 이룩하기 원한다고 해도, 그건 야만이 될지 모릅니다. 인간들이 얼마든지 평화로운 문명을 이룩할 수 있음에도, 그걸 감추기 위해 <파리 대왕>은 일부러 소년들을 늘어놓았는지 모릅니다. 설사 윌리엄 골딩에게 그런 의도가 없다고 해도, <파리 대왕>은 너무 쉬운 상황을 설정했죠.
그 자체로서 호모 사피엔스는 인간이 아닙니다. 사회 구조에 따라 호모 사피엔스들은 수많은 관념들을 내놓을 수 있습니다. 3세기 유럽 사람과 21세기 유럽 사람이 똑같을까요? 그건 절대 아니겠죠. 심지어 17세기에서 19세기로 넘어오는 동안, 유럽 사람들은 사고 방식들을 엄청나게 바꿨습니다. 17세기와 19세기가 고작 200년 차이임에도, 17세기 유럽 사람과 19세기 유럽 사람은 엄청나게 다릅니다. 19세기 유럽 여자는 자신이 누구인지 인식했고, 여자가 당당하게 사회 활동에 참가하고, 자유롭게 연애하고, 가부장 문화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주장할 수 있었습니다. 그 자체로서 호모 사피엔스는 인간이 아닙니다. 인간의 고정적인 본질 따위는 없어요. 사회 구조에 따라 인간들은 수많은 본질들을 보여줍니다.
하지만 <파리 대왕>은 그걸 간과합니다. 이 소설은 어리숙한 소년들이 주연 등장인물들이라고 설정했습니다. 이건 너무 쉬운 설정입니다. 야만 상태를 연출하기 위해 <파리 대왕>은 의도적으로 소년들을 배치했는지 모릅니다. 이건 <파리 대왕>이 해탈한 부처들을 주연 등장인물들이라고 설정해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지만 적어도 <파리 대왕>은 무엇이 문명인지 제대로 보여줬어야 했습니다. <파리 대왕>은 문명을 보여주지 않았어요. 이 소설은 문명을 대충 넘어가고 무조건 야만을 향해 신나게 달렸죠. 문명을 제대로 보여주지 않았음에도, <파리 대왕>은 문명이 그저 표피에 불과하다고 이야기했습니다. 이건 공평하지 않습니다. <파리 대왕>은 일방적으로 야만을 강조했고 일방적으로 문명을 감췄습니다.
하지만 윌리엄 골딩이 일부러 문명을 감추기 원했을까요? 그건 아닐 겁니다. 문제는 윌리엄 골딩이 무엇이 문명인지 알지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윌리엄 골딩이 머릿속에 떠올릴 수 있는 문명 사회는 그저 20세기 서구 자본주의 사회에 불과할 겁니다. 이게 문명이라고 단정한다면, 윌리엄 골딩은 거기에서 야만을 볼 겁니다. 20세기 서구 자본주의 사회가 문명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식민지 수탈 때문에 20세기 서구 자본주의 사회는 존재할 수 있었습니다. 당연히 그 자체로서 20세기 서구 자본주의 사회는 문명이 아닙니다. 이건 야만에 훨씬 가깝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은 평등한 문명을 외쳤으나, 그때마다 자본주의는 그런 외침들을 무참하게 짓밟았습니다. 결국 평등을 외치는 목소리들은 타락하거나 절망하거나 무너졌습니다. 평등을 짓밟는 자본주의가 문명이 될 수 있겠습니까? 당연히 윌리엄 골딩은 이런 야만에서 야만을 봤을 겁니다. 당연히 야만은 야만을 부를 겁니다. 야만은 문명을 부르지 못하겠죠. 그래서 윌리엄 골딩은 <파리 대왕>으로 야만을 이야기했을 겁니다. 비단 <파리 대왕>만이 아닙니다. 숱한 포스트 아포칼립스 소설들은 비슷하게 지옥을 연출하고 야만을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야만이 혼자 존재할 수 있나요? 그건 어불성설이죠.
문명을 인식하기 전까지, 사람들은 야만을 알지 못했습니다. 야만은 혼자 존재하지 못합니다. 사람들이 문명을 인식할 때, 마침내 야만은 나타날 수 있죠. 문제는 사람들이 무엇이 문명인지 제대로 고민하지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사람들은 관념적으로 문명을 인식하나, 왜 문명과 야만이 다른지 근본적으로 인식하지 못합니다. 사람들은 야만과 문명을 제대로 구분하지 않죠. 윌리엄 골딩 역시 마찬가지일 겁니다. 수많은 포스트 아포칼립스들(과 포스트 아포칼립스가 되는 거대 괴수 이야기들) 역시 마찬가지일 겁니다.
윌리엄 골딩은 20세기 서구 자본주의 사회에 속했습니다. 수많은 포스트 아포칼립스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설사 포스트 아포칼립스 작가가 비(非)서구 사회에 속하거나 비(非)자본주의 사회에 속했다고 해도, 포스트 아포칼립스라는 장르는 서구 자본주의 사회에서 비롯했습니다. 아니, 그 자체로서 SF 장르는 서구 자본주의 사회에서 출발했습니다. 따라서 문명과 야만을 제대로 구분하고 싶다면, 윌리엄 골딩과 포스트 아포칼립스 작가들은 자본주의를 고민해야 합니다. 하지만 정말 윌리엄 골딩과 포스트 아포칼립스 작가들이 근본적으로 자본주의를 고민했을까요? 글쎄요, 그건 상당히 회의적입니다. 근본적인 고민 없이, 어떻게 윌리엄 골딩과 포스트 아포칼립스 작가들이 야만을 이야기할 수 있죠? 어쩌면 <파리 대왕>은 관념적인 말장난에 불과한지 모릅니다.
문명 없이 야만은 존재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파리 대왕>은 문명을 언급하지 않죠. <파리 대왕>이 문명을 언급한다고 해도, 그건 20세기 서구 자본주의 사회이고, 이건 문명이 아니라 야만에 훨씬 가깝죠. 따라서 독자들이 <파리 대왕>을 평가하고 싶다면, 독자들은 문명을 이야기하는 소설을 읽어야 할 겁니다. 그런 소설들이 있을까요? 다행히 그런 소설들은 있습니다. 어슐라 르 귄이 쓴 <빼앗긴 자들>은 대표적인 사례겠죠. <빼앗긴 자들>은 문명이 무엇이고 어떻게 사람들이 문명화되는지 보여줍니다. 이 소설은 몇몇 중요한 특징을 두리뭉실 넘어가나, 그렇다고 해도 이 소설은 문명이 무엇인지 보여줄 수 있어요.
<파리 대왕>을 제대로 평가하고 싶다면, 독자들은 <빼앗긴 자들>을 함께 읽어야 할 겁니다. 문명 없이 야만이 존재하지 못하는 것처럼, <빼앗긴 자들> 없이 독자들이 <파리 대왕>을 이야기한다면, 그건 관념적인 말장난으로 흐를지 모릅니다. 오직 20세기 서구 자본주의 사회가 문명이라고 상정한다면, 독자들은 야만이 문명이라고 오해할 겁니다. 당연히 그런 오해는 관념적인 말장난으로 흐르겠죠. 우리는 어디에 우리가 있고 우리가 무슨 상황에 처했는지 인식할 수 있어야 할 겁니다. 그런 인식 없이 우리는 밑도 끝도 없이 야만을 들이대지 못할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