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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라이>가 운반하는 지식 권력 본문

SF & 판타지/디스토피아, 아포칼립스

<일라이>가 운반하는 지식 권력

OneTiger 2018. 10. 2. 18:51

영화 <일라이>는 포스트 아포칼립스입니다. 이 영화는 익숙한 포스트 아포칼립스 공식들을 반복합니다. 인류 문명은 망했고, 세상은 화폐해지고, 사람들은 서로 도살하고, 어디에도 희망은 없고, 독재자는 사람들 위에 군림하고 싶어하고, 기타 등등. 포스트 아포칼립스를 잘 아는 사람들은 <일라이>가 꽤나 진부하고 전형적이라고 평가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일라이>에는 독특한 특징이 하나 있습니다. 이 영화의 영문 제목은 <일라이의 서적>입니다. 영화 주인공 일라이는 어떤 서적을 운반하는 중이고, 악당 지도자는 그걸 뺏고 싶어합니다.


당연히 이런 상황에서 관객들은 묻겠죠. 왜 일라이가 서적을 소중하게 운반하고, 악당 지도자가 그걸 뺏고 싶어하는가? 서적이 무엇을 의미하고 무엇을 비유할 수 있는가? 이 세상에는 수많은 책들이 있습니다. 야한 포르노 만화부터 묵직하고 두꺼운 철학 서적이나 과학 서적까지, 이 세상에는 수많은 책들이 있습니다. 흔히 사람들은 독서가 마음의 양식이 된다고 말하나, 대부분 사람들은 야한 만화가 마음의 양식이 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겠죠. 뭐, 하지만 두 연인이 그저 끈적하게 빨고 핥고 부비고 먹고 쑤실 뿐이라면, 그건 마음의 양식이 될지 모르죠. 서적은 마음의 양식이고, 책은 지식을 상징할 수 있습니다.



책은 지식이고, 책은 지식인을 대표합니다. 책은 철학자들, 예술가들, 비평가들, 기타 지식인들을 대표할 수 있습니다. 종종 장르 설정 역시 이런 측면을 반영합니다. 롤플레잉 게임 <던전스 앤 드래곤스>에서 마법사를 대표하는 그림은 책입니다. 마법사는 지식(인텔리전트) 수치를 가장 높게 올려야 하고, 수많은 책들을 읽어야 합니다. 마법사는 지식인이고, 사실 <반지 전쟁> 같은 대작 소설부터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 같은 비디오 게임까지, 여러 중세 판타지들은 마법사가 지식인이라고 주장합니다. 고대 서적들을 뒤적이는 간달프 그레이나 책들이 수두룩한 마법 연구실은 그런 반증이겠죠. 따라서 <일라이>에서 영화 주인공 일라이는 지식을 운반하는 중입니다.


문제는 지식이 권력이 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예전부터 지식인들은 권력을 차지할 수 있었습니다. 지식은 권력의 상층부로 올라가는 방법들 중 하나입니다. 선거(election)는 엘리트(elite)에서 비롯했죠. 구태여 이런 어원을 따지지 않는다고 해도, 우리는 권력자가 지식인이라고 생각합니다. 만약 전문적인 지식이 없는 사람이 국회의원이 된다고 할 때, 사람들은 그게 부당하다고 판단할 겁니다. 국회의원은 나랏일을 맡아야 하고, 따라서 국회의원은 지식인이 되어야 합니다. 꽃집 아가씨나 식당 아줌마나 시골 할머니는 국회의원이 되지 못합니다. 왜? 그들이 지식인이 아니기 때문에.



그래서 자발적인 민중 활동은 꽤나 어려운 과제입니다. 사람들은 지식인들을 숭배하고, 지식인들이 자신들을 이끌기 바랍니다. 하지만 지식인들은 권력에 붙을지 모릅니다. 지식인들은 어려운 지식으로 민중들을 호도하고, 지배 계급을 변호할지 모릅니다. 지배 계급을 변호하기 위해 지식인들은 온갖 명분들을 만듭니다. 민중들은 그게 잘못이라고 깨닫지 못합니다. 명분들, 사상들, 철학들이 너무 어렵기 때문에 민중들은 그게 잘못이라고 생각하지 못해요. 게다가 지식인들은 지식 체계를 만들고, 어렸을 때부터 민중들은 그걸 받아들입니다. 중세 시대에 지식인들은 성직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교회 권력을 변호했고,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과학을 탄압했죠.


근대 시대 이후에는 성직자들이 사라졌으나, 부르주아 지식인들이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부르주아 경제학자들은 가장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그들은 인간이 탐욕스럽고 이기적인 개인이라고 주장하죠. 커다란 사회 속에서 우리가 사회적으로 살아감에도, 부르주아 지식인들은 이런 사실을 인정하지 않고 오직 개인만을 강조하죠. 아예 신자유주의는 사회 그 자체를 부정해요. 물론 대기업들이 흔들릴 때, 권력자들은 사회 경제를 살려야 한다고 부르짖고 공적 자금들을 쏟아붓습니다. 하하, 그런 공적 자금들이 어디에서 나왔나요? 왜 사회를 부정하는 국가 정부가 개인들의 세금을 함부로 대기업들에게 쏟아붓죠?



설사 부르주아 경제학자들이 옳다고 해도, 왜 오직 소수 사람들이 지식을 독점해야 하나요? 왜 누군가는 이른바 허드렛일에 매달리고, 왜 누군가는 번듯한 지식인이 되어야 하나요? 민중들은 지식인들이 될 수 있습니다. 민중들은 지식인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때 소수 독재는 사라지고, 다수는 평등하게 사회를 유지할 수 있겠죠. 지식들을 쌓고 싶다면, 민중들은 공부해야 합니다. 하지만 민중들이 쉽게 공부할 수 있나요? 시립 도서관에 좋은 책들이 쌓였다고 해도, 민중들이 책들을 쉽게 대출할 수 있다고 해도, 공부할 여유가 있을까요?


어떤 사람들은 공부를 좋아하고, 공부하기 위해 인생을 버릴지 모릅니다. 공부하기 위해 그런 사람들은 연애, 결혼, 명예, 가족, 좋은 옷, 멋진 자동차, 커다란 집을 포기할지 모릅니다. 그들은 쥐꼬리 같은 생활비로 먹고 살고, 도서관에서 공부하는지 모릅니다. 그들이 그걸 좋아하기 때문에. 어떤 사람들은 아예 (문자 그대로) 이성의 손 한 번 잡지 않습니다. 사랑과 섹스는 만고불변의 기쁨이요 쾌락이나, 이런 사람들은 그걸 포기합니다. 하지만 이런 사람들은 소수겠죠. 다른 많은 사람들이 그럴 수 있나요? 왜 공부하기 위해 그들이 연애, 결혼, 명예, 가족, 좋은 옷, 멋진 자동차, 커다란 집을 포기해야 하나요? 왜 공부하기 위해 그들이 섹스 같은 쾌락을 포기해야 하나요? 민중들은 공부할 여유를 찾아야 합니다. 그걸 위해 노동 시간은 줄어들고, 노동 고용은 늘어나고, 기본 소득처럼 안정적인 생계 정책은 필요하겠죠.



따라서 <일라이>에서 일라이는 권력을 운반하는 중입니다. 지식은 권력이 될 수 있어요. 일라이는 그런 권력을 안전하게 보관하기 원하고, 악당 지도자는 그걸 이용해 권력자가 되고 싶어합니다. 물론 여러 평론가들이나 관객들은 <일라이>가 지식보다 종교에 초점을 맞춘다고 평가합니다. 하지만 종교와 상관없이, 분명히 서적은 지식을 상징할 수 있고, 따라서 이런 해석(일라이는 지식을 운반한다)은 완전히 틀리지 않겠죠. 영화를 관람한 이후, 이렇게 관객들은 물어볼 수 있을 겁니다. 왜 오직 악당 지도자만 책을 읽어야 하는가? 왜 다른 사람들이 책을 읽지 못하는가? 정말 소수가 지식을 독점해야 하는가? 지식인들이 소수여야 하는가? 왜 농민들과 노동자들이 생활 지식인이 되지 못하는가? 우리가 정말 평등한 사회를 이룩하고 싶다면, 우리는 모두 지식인이 될 수 있어야 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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