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생태주의
파격적인 <뮨베이스>와 수용 미학 본문
[이런 장면은 진부한 스페이스 오페라이나, 누군가는 지구 자연 환경을 새롭게 바라볼지 모릅니다.]
"다음으로 넘어가기 위해 마우스 좌클릭하세요." 비디오 게임에서 이런 문구들을 찾기는 어렵지 않습니다. 만약 어떤 비디오 게임이 기초적인 게임 규칙들을 설명한다면, 게임 플레이어가 마우스 좌클릭할 때까지, 규칙 설명은 사라지지 않을 겁니다. 게임 플레이어가 규칙 설명을 이해하고 마우스 좌클릭할 때, 마침내 규칙 설명은 다음으로 넘어갈 겁니다. "다음으로 넘어가기 위해 스페이스 바를 누르세요."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많은 게임 로딩 화면들은 이런 문구를 제시합니다. 게임 플레이어가 스페이스 바를 누르기 전까지, 게임 로딩 화면은 게임 플레이 화면으로 넘어가지 않습니다.
"조의를 표시하기 위해 X를 누르세요." 같은 문구들은 게임 플레이어가 게임 사건에 개입해야 한다고 명시합니다. 만약 게임 플레이어가 X를 누르지 않는다면, 장례식에서 등장인물들은 뻘쭘하게 계속 쳐다볼 겁니다. 게임 플레이어가 X를 누를 때, 마침내 등장인물들은 조의를 표시할 겁니다. 종종 액션 장면들에서 설명 없이, 비디오 게임은 개입을 요구합니다. 트리세라톱스가 돌진할 때, 만약 게임 화면에서 X 표시가 뜬다면, 게임 플레이어는 X를 눌러야 합니다. 고생물학자는 트리세라톱스를 간신히 피할 겁니다. 이런 사례들은 비디오 게임과 게임 플레이어가 상호 작용한다고 말합니다.
비디오 게임과 달리, 소설에는 이런 요구들이 없습니다. 소설은 독자가 무엇을 해야 한다고 명시하지 않습니다. 독자는 소설책을 들고, 글자들을 읽고, 한 장씩 넘기고, 모두 읽은 이후, 소설책을 내려놓습니다. 소설은 독자가 이런 과정을 거쳐야 한다고 명시하지 않으나, 수많은 독자들은 이런 과정을 거칩니다. 독자는 이런 과정을 스스로 거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비디오 게임 및 게임 플레이어와 달리, 소설과 독자는 상호 작용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비디오 게임과 게임 플레이어가 상호 작용하는 것처럼, 소설과 독자 역시 상호 작용합니다. 독자는 소설을 읽고 해석하고 연결합니다.
이런 해석, 연결은 가시적이지 않습니다. 독자가 소설을 해석하는 동안, 독자의 머릿속에서 해석이 나타나기 때문에, 해석이 사고 방식이기 때문에, 해석은 가시적이지 않습니다. 만약 비디오 게임 <뮨베이스>에서 비디오 게임과 게임 플레이어가 상호 작용한다면, 이 결과는 우주 기지 건설이 될 겁니다. 게임 플레이어로서 아랫집 수진은 우주 기지를 짓고, 생체 발전소들을 짓고, 생체 연료들을 공급하기 위해 구근 농장들을 짓고, 농장에 물을 공급하기 위해 파란 버섯들을 키웁니다. <뮨베이스>에서 이런 과정, 결과, 우주 기지와 생체 발전소들과 구근 농장들과 파란 버섯들은 가시적입니다.
비디오 게임에서 상호 작용은 가시적입니다. 그래서 아랫집 수진은 비디오 게임과 게임 플레이어가 상호 작용한다고 인식할 수 있습니다. 반면, 독자 해석은 비가시적입니다. 아무리 독자가 기발하고 독창적으로 해석한다고 해도, 이런 사고 방식은 비가시적, 추상적입니다. 그래서 독자는 소설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많은 평론가들은 독자 역할보다 작가 역할, 소설 역할에 주목합니다. 하지만 소설은 혼자 존재하지 못합니다. 물리적인 실체로서 소설은 혼자 존재하나, 독자를 위해 작가는 소설을 씁니다. 작가가 쓰고, 독자가 읽을 때, 소설은 존재합니다.
작가가 중요한 것처럼, 소설에게 독자는 중요합니다. 만약 작가-소설-독자 관계가 성립하지 않는다면, 소설은 존재하지 못할 겁니다. 이건 독자 역할이 작가 역할, 소설 역할을 뛰어넘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어떤 평론가들은 독자가 텍스트를 무한하게 해석한다고 주장하나, 이건 과잉 해석으로 이어질 겁니다. 독자는 소설을 무한하게 해석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작가 역할과 소설 역할처럼, 독자 역할은 중요합니다. 많은 문학 비평 이론들 중에서 수용 미학은 가장 대표적입니다. 수용 미학은 독자 역할을 중시합니다. 독자가 소설을 읽는 동안, 독자는 어떤 의미를 구현하고, 독서는 성취가 됩니다.
독자가 소설을 읽는 동안, 소설을 이해하기 위해 형식과 내용 측면에서 독자는 전형, 공식을 파악해야 합니다. 소설 <미친 아담>은 허구입니다. 소설 시점은 주연 등장인물 토비를 들여다보고, 액자 구성은 또 다른 주연 등장인물 젭을 이야기하고, 시간 배경으로서 과거와 현재는 계속 겹칩니다. 등장인물들은 윤리적인 갈등들에 부딪히고, 우연히 정의와 불의는 엇갈립니다. 이건 전형, 공식이고, 독자는 이것을 이해해야 합니다. 소설 처음부터 끝까지, 독자는 <미친 아담>을 순차적으로 읽어야 합니다. <공룡 박물관의 공포> 같은 게임북은 순차적이지 않으나, <미친 아담>은 순차적입니다.
만약 독자가 소설 중간부터 읽는다면, 이건 작가 마가렛 앳우드 의도를 위반할 겁니다. 독자는 어떻게 처벌과 재교육 논쟁이 갈등하고 어떻게 연애가 애무와 섹스로 이어지는지 이해해야 합니다. 공동체 규범이 범죄를 처벌해야 하나요? 재교육이 필요하지 않은가요? 소설이 어떤 범죄를 묘사할 때, 독자는 처벌과 재교육 논쟁이 나타날 거라고 기대할 수 있습니다. 여러 문학들에서 이게 공식이기 때문입니다. 독자는 공식을 알아야 합니다. 하지만 이것들은 전형적인 공식입니다. 이건 보편적이거나 지배적인 공식입니다. 하지만 소설에는 오직 전형적이거나 보편적이거나 지배적인 공식만 있지 않습니다.
어떤 소설에는 아주 기발하거나 독창적이거나 전복적이거나 파격적인 공식이 있습니다. <미친 아담>에서 인류 문명은 멸망하고, 사방에서 개조 동물들은 득실거리고, 식물들은 문명을 뒤덮기 시작합니다. 생태주의 종교 집단과 생물학자들은 작은 공동체를 구성하고 생존을 도모합니다. 이건 전형적인 공식이 아닙니다. 적어도 주류 문학에서 이건 전형적이지 않습니다. 현실 속에서 개조 야생 동물들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현실 속에서 인류 문명은 무너지지 않았습니다. 개조 동물 돼지구리는 비일상적입니다. 개조 동물이 비일상적이기 때문에, 이건 전복적입니다. 이건 전복적인 공식입니다.
개조 야생 동물은 SF 공식입니다. 비단 <미친 아담>만 아니라 수많은 사이언스 픽션들에게 전복, 파격, 변화는 핵심입니다. 독자는 SF 소설을 읽고, 현실을 꿰뚫어보고, 거창한 우주 속의 인류 위상을 고민하고, 인식의 지평선을 넓힙니다. 비단 <미친 아담> 같은 SF 소설만 아니라 SF 만화, SF 영화, SF 게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사이언스 픽션들은 우주 속의 인류 위상을 고민합니다. 사이언스 픽션들은 고정 관념을 깨뜨리고 인식을 뒤집을 수 있습니다. 사이언스 픽션에서 상식은 상식이 아니고, 비유는 비유가 아닙니다. 존 발리가 쓴 <역행하는 여름>처럼, 성별 역할은 고정적이지 않을지 모릅니다.
인류 문화에서 성별 역할은 온갖 차별들과 억압들로 이어지나, <역행하는 여름>에서 생체 개조 기술은 성별 역할을 완전히 뒤집습니다. 사이언스 픽션에서 인간은 살아있는 켄트로사우루스를 만날 수 있습니다. 사이언스 픽션에서 인류는 바이오스피어 우주선을 건조하고, 우주에서 인간은 살아갈 수 있습니다. 사이언스 픽션에서 지구는 유일한 생명의 요람이 아닙니다. 인류는 외계 행성을 개척하고, 불모지 외계 행성은 또 다른 생명의 요람이 됩니다. 사이언스 픽션에서 인간은 유일한 지적 존재가 아닙니다. 아주 완벽하고 도덕적인 인공 지능은 인류 문명을 평화롭게 다스릴지 모릅니다.
오랜 옛날부터 많은 철학자들, 이론가들, 예술가들은 지구가 하나의 생명체, 동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사이언스 픽션에서 가이아 행성에게는 지성이 있을지 모릅니다. 행성 지성은 자신의 아이들, 피조물들, 생명체들과 정신적으로 소통할지 모릅니다. SF 소설은 전복, 파격을 제시하고, 독자는 고정 관념을 깨뜨리고, 인식의 지평선을 넓히고, 세상을 새롭게 바라볼 수 있습니다. 사이언스 픽션은 비일상적이고, SF 팬은 일상을 다르게 바라봅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대표적인 수용 미학으로서 볼프강 이저가 쓴 <독서 행위>는 텍스트가 파격적인 전형, 전복적인 공식을 제시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소설이 파격과 전복을 제시할 때, 독자는 충격을 받고 세상을 다시 바라볼 겁니다. 수용 미학은 이게 좋은 독서, 좋은 해석이라고 주장합니다. 사이언스 픽션들에게 파격과 전복이 핵심이기 때문에, 수용 미학에게 사이언스 픽션들은 좋은 텍스트가 될지 모릅니다. 19세기 서구 근대화가 수많은 것들을 바꿨기 때문에, 19세기 서구 작가들은 충격을 겪었습니다. 21세기 초반 우리에게 전기 불빛은 진부하나, 19세기 서구에서 가스 램프가 전기 불빛으로 바뀌었을 때, 수많은 서구 사람들은 이게 충격적이라고 느꼈을 겁니다. 어떤 문학들은 이것을 반영했습니다. 이런 문학 사조는 사이언티픽 로망스입니다.
사이언티픽 로망스는 사이언스 픽션으로 발전합니다. 그래서 사이언스 픽션에게 전복, 변화, 파격은 핵심 사항입니다. 사이언스 픽션에게는 '간극'이 있습니다. 독자는 SF 소설을 읽고 고정 관념을 허물 수 있습니다. 이건 수용 미학이 사이언스 픽션으로 반드시 이어진다는 뜻이 아닙니다. 어떤 평론가들과 독자들이 수용 미학에 공감한다고 해도, 그들은 사이언스 픽션이 황당무계하다고 느낄지 모릅니다. 개조 돼지구리? 새로운 인류 크레이커? 실험실 배양 닭고기? 인류 문명 멸망? 이게 무슨 황당무계한 헛소리들인가요? 인류 문명이 바이오스피어 우주선을 띄울 수 있나요? 상급 인공 지능이 가능한가요?
인간이 켄트로사우루스와 만날 수 있나요? 21세기 지구에서 켄트로사우루스가 돌아다닐 수 있나요? 이것들은 너무 황당무계한 헛소리들입니다. 어떤 독자들이 수용 미학을 받아들인다고 해도, 그들은 사이언스 픽션을 거부할지 모릅니다. 그렇다고 해도 분명히 수용 미학과 사이언스 픽션은 잘 어울립니다. 수용 미학은 소설 속에 전복적인 형식, 내용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사이언스 픽션은 전복적인 형식, 내용을 제시할 수 있습니다. 사이언스 픽션은 (돼지구리 같은) 신조어들을 제시하거나, 글씨체들을 뒤섞거나, 문단 구성을 흐트러뜨립니다. 독자는 SF 소설을 읽고 문단-사고 방식 사이의 '간극'을 겪을 수 있습니다.
사이언스 픽션에게는 전복적인 잠재력이 있고, 수용 미학과 사이언스 픽션은 잘 어울립니다. SF 독자는 고정 관념을 깨뜨리고, 신념을 바꾸고, 인식의 지평선을 넓힙니다. 하지만 수용 미학과 SF 독서에는 커다란 문제가 있습니다. 무엇이 무엇을 향해 파격적인가요? 수용 미학은 문학 평론에서 전형과 비(非)전형, 주류와 비주류가 나뉜다고 상정합니다. 왜 전형, 이른바 익숙한 문학 코드들이 나타납니까? 누가 전형과 비전형을 구분하나요? 왜 어떤 문학 평론이 주류가 되고, 왜 어떤 문학 평론이 비주류가 되나요? 많은 사람들은 문학 평론이 인간의 본질, 개인의 자유를 말해야 한다고 믿습니다. 왜 이런 전형이 나타납니까?
이웃집 영희는 자본주의 시장 경제를 비판합니다. 이웃집 영희는 임금 노동 제도를 너무 너무 너무 너무 싫어합니다. 아무리 이웃집 영희가 파격적인 형식, 전복적인 내용을 읽는다고 해도, 이웃집 영희는 자본주의를 비판합니다. 독자 신념은 바뀌지 않습니다. 많은 평론가들, 독자들과 달리, 이웃집 영희는 <우리들>과 <노변의 피크닉>을 읽고 자본주의 시장 경제를 비판합니다. 이웃집 영희에게 소설 <우리들>에서 단일 제국은 자본주의 획일화입니다. 자본주의 농업은 모노 컬처를 강요하고, 자본주의는 획일적이고 전체주의적입니다. <노변의 피크닉>에서 스토커들은 비정규직 노동자들 같습니다.
자본주의 시장 경제에서 비정규직 여자 노동자들은 온갖 고초들을 겪습니다. 비정규직과 여자로서 그들은 이중적으로 사회적인 약자입니다. 낮은 임금과 성 폭력은 계급 차별과 성 차별에 모두 속합니다. <노변의 피크닉>에서 돈을 벌기 위해 스토커들은 목숨들을 걸어야 합니다. 이웃집 영희는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약자들이 목숨들을 건다고 해석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소비에트 연방이 억압적이라고 오해하나, 소비에트 연방보다 서구 제국주의는 훨씬 악랄합니다. 그래서 이웃집 영희는 <노변의 피크닉>을 읽고 서구 제국주의가 너무 악랄하다고 해석합니다. 국내에서 영희 해석은 비주류입니다.
이웃집 영희 해석과 전형은 어긋납니다. 영희 해석은 전형적이지 않습니다. 문제는 이겁니다. "왜 이것이 비전형, 비주류적인 해석이 되는가?" 수용 미학은 익숙한 것과 낯선 것을 상정하나, 하늘에서 익숙한 것과 낯선 것이 뚝 떨어지나요? 만약 독자들이 <노변의 피크닉>을 읽고 소비에트 연방을 비난한다면, 국내에서 이런 해석은 익숙한 것일 겁니다. 하지만 다른 독자들과 달리, 이웃집 영희가 <노변의 피크닉>을 읽는다고 해도, 이웃집 영희는 소비에트 연방을 비난하지 않습니다. 여전히 이웃집 영희는 서구 제국주의를 미워합니다. 이런 해석은 낯선 것입니다. 왜 이게 '낯선 것, 불편한 것'인가요? 수용 미학은 이것을 묻지 않습니다.
아니, 볼프강 이저가 이것을 묻는다고 해도, 여러 독자들이 수용 미학에 공감할 때, 독자들은 왜 어떤 해석이 낯선 것, 불편한 것이 되는지 묻지 않습니다. 문학 평론은 인간의 본질, 개인의 자유를 반드시 말해야 합니다. 왜? 이게 당연하기 때문입니다. 왜 이게 당연한가요? 이게 당연하기 때문입니다. 왜 이게 당연한가요? 이게 당연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독자들은 당연, 당연, 당연, 당연한 환원론으로 침체합니다. 이런 주장은 오직 자유주의 독자만 상정합니다. 이런 주장은 자유주의 범주 안에서 독자가 해석해야 한다고 상정합니다. 독자가 해석한다고 해도, 독자 해석이 중요하다고 해도, 자유주의 범주 안에서 독자는 해석해야 합니다.
수용 미학처럼, 사이언스 픽션에게도 커다란 문제가 있습니다. 사이언스 픽션은 전복, 변화, 파격을 제시합니다. 하지만 무엇이 전복인가요? 무엇이 변화, 파격인가요? 인류 문명이 무너지거나, 인간과 상급 인공 지능이 대화하거나, 거대 바다 괴수가 상륙하거나, 개척 과학자들이 바이오스피어 우주선을 건조한다고 해도, 이게 반드시 파격이 되나요? 오직 포장지만 파격이고, 알맹이가 고정 관념이 아닌가요? 수용 미학이 자유주의를 상정하는 것처럼, 자유주의는 지배적입니다. 악랄한 서구 제국주의 때문에, 자유주의는 지배적입니다. 그래서 사이언스 픽션들이 자유주의를 전복하나요? 그건 아닙니다. 많은 사이언스 픽션들은 자유주의를 떠받듭니다. SF 독자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SF 독자들은 파격과 전복을 떠드나, 자유주의 안에서 그들은 파격과 전복을 떠듭니다. 뭔가가 지배적인 관념을 뒤집기 원한다고 해도, SF 독자들은 이것을 외면합니다. 독자들은 오직 안전하고 안락한 전복만 원합니다. 만약 SF 평론이 자유주의에 도전한다면, SF 독자들은 이런 SF 평론이 빨갱이라고 손가락질할 겁니다. 많은 SF 독자들은 자유주의 좀비들입니다. 자유주의 범주 속에서 SF 독자들은 안전하고 안락하게 전복을 외칩니다. SF 독자들은 정말 파격적인 것, 정말 전복적인 것, 정말 혁명적인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초거대 우주 거주지가 대단하다고 해도, 이건 지배 계급을 위협하지 말아야 합니다. 지배적인 관념 속에서 초거대 우주 거주지는 파격적이어야 합니다.
비디오 게임 <뮨베이스>에서 우주 고양이는 외계 행성 생존자가 됩니다. 외계 행성에서 우주 고양이는 우주 기지를 짓고, 열매들과 구근들을 모으고, 주변 환경을 탐사합니다. 만약 불시착 지점 주변에서 식생이 풍부하게 존재한다면, 우주 고양이는 식량과 생체 연료를 쉽게 얻을 겁니다. 아랫집 수진은 <뮨베이스>를 플레이하고 풍성한 식생, 풍성한 자연 환경이 중요하다고 깨닫습니다. 하지만 우주 고양이는 1인 생존자입니다. 아무리 우주 고양이가 식량과 생체 연료를 쉽게 얻는다고 해도, 우주 고양이는 사회적으로 재생산하지 못합니다. 우주 고양이는 필멸을 쓸쓸하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인류 사회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재생산 없이, 필멸에서 인류 사회는 벗어나지 못합니다. 아랫집 수진은 사회적인 재생산이 소중하다고 깨닫습니다. 문제는 자본주의입니다. 풍성한 식생이 중요하고, 재생산이 소중함에도, 자본주의 시장 경제는 자연 환경을 파괴하고 돌봄 노동을 착취합니다. 자본주의가 여자와 육아를 '억지로' 연결하기 때문에, 여자의 육체는 왜곡되고, 남자는 모성이 되지 못합니다. 남자는 모성이 아닙니다. 자본주의 속에서 남자는 품어주지 말아야 하고, 감싸주지 말아야 하고, 안아주지 말아야 합니다. 아랫집 수진은 <뮨베이스>를 플레이하고 자본주의가 문제라고 고민합니다.
[이런 장면은 돌봄 노동 사회화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SF 평론은 잠재력을 적극적으로 찾아야 합니다.]
이런 해석이 옳은가요? 평소에 아랫집 수진은 자본주의를 비판합니다. 아랫집 수진이 자본주의를 비판하기 때문에, 이웃집 영희가 그러는 것처럼, 아랫집 수진은 <뮨베이스>를 플레이하고 신념(자본주의는 나쁘다)을 대입합니다. 수용 미학은 이게 올바른 해석이 아니라고 비난할지 모릅니다. SF 독자들 역시 아랫집 수진이 너무 작위적으로 대입한다고 비난할지 모릅니다. <뮨베이스>와 돌봄 노동 사회화는 이어지지 말아야 합니다. 이건 작위적입니다. 이미 올바른 해석이 존재하기 때문에, 이건 작위적입니다. 올바른 해석 '배후'에도 '의도'가 있으나, 이건 중요하지 않습니다. 이미 올바른 해석은 존재합니다.
여기에서 올바른 해석은 자유주의 해석을 가리킵니다. 올바른 해석 '배후'에 자유주의라는 '의도'가 있음에도, 이건 중요하지 않습니다. 아무 이유 없이, 자유주의 해석은 옳습니다. 아무 이유 없이, 자유주의 해석은 반드시 옳아야 합니다. 그래서 SF 독자들은 인간의 본질을 열심히 외칩니다. 이게 자유주의 해석, 보수 우파 해석이고, 보수 우파가 지배적임에도, SF 독자들은 파격을 부르짖고 인간의 본질을 열심히 외칩니다. 아무리 하드 SF 소설이 어려운 상급 인공 지능을 보여준다고 해도, 만약 독자가 지배적인 관념에 굴복한다면, 이게 파격인가요? 오직 자연 과학, 과학 기술만 파격이 되어야 하나요?
심지어 스페이스 오페라 게임이 유사 공룡들을 보여준다고 해도, 어떤 게임 플레이어들에게 이건 파격, 전복, 변화, 비일상일지 모릅니다. 게임 플레이어들은 유사 공룡들을 바라보고 지구 자연 환경을 고민할지 모릅니다. 하드 SF 독자들은 스페이스 오페라 속의 유사 공룡들이 진부한 설정이라고 비판할 겁니다. 유사 공룡들에게 파격, 전복, 변화, 비일상 같은 단어들은 어울리지 않습니다. 하드 SF 소설이 어렵고 복잡한 기계 공학 용어들을 늘어놓고 상급 인공 지능을 이야기할 때, 이건 정말 파격, 전복, 변화, 비일상이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오직 하드 SF 소설들만 파격을 대표해야 하나요?
어떤 게임 플레이어들에게 기계 공학 용어들은 그저 과학 만능주의에 불과할지 모릅니다. 오히려 이런 게임 플레이어들은 유사 공룡들을 바라보고 지구 환경을 새롭게 깨달을지 모릅니다. 유사 공룡들 역시 비일상입니다. SF 울타리 안에서 스페이스 오페라 속의 유사 공룡들은 진부하나, 외계 행성의 유사 공룡들 역시 비일상입니다. 현실 속에서 우리는 살아있는 켄트로사우루스를 만나지 못합니다. 만약 스페이스 오페라 게임이 외계 유사 공룡들을 보여준다면, 어떤 게임 플레이어들은 이게 파격이라고 느낄지 모릅니다. 복잡한 상급 인공 지능과 진부한 유사 공룡은 똑같이 비일상입니다.
<뮨베이스>는 하드 SF 게임이 아닙니다. 오히려 <뮨베이스>는 아기자기합니다. 하드 SF 독자들은 <뮨베이스>가 파격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겁니다. 볼프강 이저가 요리 소설(진부하고 통속적인 소설)을 지적하는 것처럼, <뮨베이스>는 요리 SF 게임입니다. 이런 요리 SF 게임은 혁신적인 문학이 되지 못하고, 이건 정전이 되지 못할 겁니다. 하지만 아랫집 수진은 <뮨베이스>를 플레이하고 자본주의가 자연 환경을 파괴하고 돌봄 노동을 착취한다고 느낍니다. 이런 SF 해석이 파격적이지 않나요? 아무리 하드 SF 소설이 온갖 어려운 과학 용어들을 늘어놓는다고 해도, 하드 SF 작가는 자유주의, 지배적인 관념에 굴복할지 모릅니다.
하드 SF 독자들은 작가 의도를 충실하게 따라갈지 모릅니다. 이런 창작, 독서가 파격적인가요? 이런 상황에서 하드 SF 독서보다 <뮨베이스> 게임 플레이는 훨씬 파격적입니다. 사이언스 픽션은 비일상적인 것을 이야기하나, 이건 안전하고 얄팍하고 안락한 파격이 될지 모릅니다. 그 자체로서 사이언스 픽션 평론은 전복과 파격을 반드시 보장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SF 독자는 주류 문학 독자와 판타지 독자보다 자신이 훨씬 파격적이고 전복적이라고 착각할지 모릅니다. 사이언스 픽션에 온갖 비일상적인 것들이 있기 때문에, SF 독자는 자신이 전복적이라고 착각할지 모릅니다. 사실 이런 착각을 구경하기는 어렵지 않습니다.
애석하게도 국내 대표 SF 평론가가 소비에트 연방을 일방적으로 비난하고 서구 제국주의가 좋다고 나팔을 부는 상황을 구경하기는 어렵지 않습니다. 자본주의 사회가 독재 사회임에도, 만약 SF 평론가가 자본주의를 찬양하고 '독재 국가' 소비에트 연방을 비난한다면, 이게 파격적인 SF 평론인가요? 아니, SF 평론가는 지배 계급 앞잡이가 됩니다. SF 평론가가 의도하지 않았다고 해도, 애석하게도 SF 평론가는 지배 계급 앞잡이가 됩니다. 이건 파격적인 평론보다 좀비 평론, 노예 근성 평론입니다. 그 자체로서 SF 평론은 파격적이지 않습니다. SF 평론은 노예 근성으로 굴러떨어질지 모릅니다.
그래서 사이언스 픽션에게 잠재력이 있다고 해도, SF 평론은 잠재력을 적극적으로 찾아야 합니다. 만약 SF 평론이 잠재력을 적극적으로 찾기 원한다면, SF 평론은 하늘에서 사이언스 픽션이 뚝 떨어진다고 간주하지 말아야 할 겁니다. 이런 관념론 때문에, 수용 미학에 한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SF 평론은 어떻게 사이언스 픽션이 나타나고 왜 좋은 사이언스 픽션들과 비주류 사이언스 픽션들이 갈리는지 파악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