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생태주의
특정한 상황 속의 지배적인 관념과 해석 본문
※ 이 게시글에는 정원 작가가 그린 만화 <올해의 미숙>, 낸시 스프링어가 쓴 소설 <왼손잡이 숙녀>, 영화 <고지라: 괴수왕>의 치명적인 내용 누설, 결말 누설이 있습니다.
[초월적인 상황 속에서 캡틴 마블 해석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특정한 상황 속에서 해석은 존재합니다.]
흔히 사람들은 그 자체로서 창작물이 존재한다고 생각합니다. 소설, 만화, 영화, 게임에는 물리적인 측면이 있고, 물리적인 측면 때문에, 분명히 그 자체로서 소설, 만화, 영화, 게임은 존재합니다. 하지만 물리적인 실체를 구현하기 위해 작가는 소설을 쓰지 않습니다. 작가가 소설을 쓰는 동안, 작가는 독자가 소설을 읽을 거라고 상정합니다. 어쩌면 아무도 소설을 읽지 않을지 모르고, 작가는 유일한 독자가 될지 모르나, 그렇다고 해도 작가는 독자가 읽을 거라고 상정하고 소설을 씁니다. 아무리 소설에게 물리적인 측면이 있다고 해도, 만약 독자가 읽지 않는다면, 소설은 존재하지 않을 겁니다.
독자가 소설을 읽기 때문에, 소설은 존재합니다. 작가가 쓰고 독자가 읽기 때문에, 이런 변증법적인 관계 속에서 소설은 존재합니다. 문제는 독자가 소설을 단순하게 읽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독자는 소설을 '해석'합니다. 독서는 해석입니다. 작가가 뭔가를 의도했다고 해도, 작가 의도에서 독자는 벗어날지 모릅니다. 작가가 뭔가를 주장하기 원한다고 해도, 독자는 그것에 반박할지 모릅니다. 작가에게 아무 의도가 없다고 해도, 독자는 소설이 뭔가를 의도한다고 해석할지 모릅니다. 작가와 독자가 다르고, 작가와 독자에게 다른 경험이 있기 때문에, 독자는 작가 의도를 100% 따라가지 않습니다.
이렇게 작가와 독자 속에서 소설은 존재합니다. 그래서 평론가가 소설을 이야기할 때, 평론가는 작가와 소설과 독자 관계를 모두 고려해야 합니다. 해석으로서 소설은 존재합니다. 물리적인 측면 그 자체로서 소설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만약 소설에게 오직 물리적인 측면만 있다면, 아무도 소설을 평가하지 못할 겁니다. 해석으로서 소설이 존재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소설을 평가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작가와 독자 관계는 중요합니다. 하지만 여기에서 오직 작가와 독자 관계만 중요한가요? 이런 시각은 너무 형이상학입니다. 초월적인 시간과 공간 속에서 작가와 소설과 독자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자본주의 시장 경제에서 종종 농민들은 멀쩡한 야채들을 버립니다. 왜 농민들이 멀쩡한 야채들을 버리나요? 자본주의 사회에서 야채가 먹거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자본주의 시장 경제에서 먹거리로서 야채는 존재하지 못합니다. 자본주의 시장 경제에서 야채는 상품이 되어야 합니다. 상품으로서 가치가 떨어지기 때문에, 먹거리로서 야채에게 가치가 있음에도, 농민들은 야채들을 버려야 합니다. 자본주의 시장 경제, 특정한 상황 때문에, 야채는 먹거리가 되지 못합니다. 해석 역시 비슷합니다. 독자가 소설을 읽는 동안, 독자는 소설을 해석합니다. 소설을 해석하기 위해 독자가 무엇을 고려해야 하나요?
초월적인 시간과 공간 속에서 독자는 소설을 읽지 않고 해석하지 않습니다. 문학이 비유이기 때문에, 문학에는 보편성이 있고, 특정한 시간과 공간에서 문학은 벗어날 수 있습니다. 그래서 21세기 초반 남한 독자는 조선 시대 문학을 읽고 고개를 끄덕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문학에게 보편성이 있다고 해도, 특정한 시간과 공간에서 문학이 벗어난다고 해도, 초월적인 시간과 공간 속에서 독자는 소설을 읽지 않고 해석하지 않습니다. 특정한 시간과 공간 속에서 독자는 소설을 해석합니다. 독자는 어떤 특정한 상황 속에서 자신이 소설을 읽고 해석해야 한다고 의식해야 합니다. 독자는 상황을 고려해야 합니다.
인간은 사회적인 존재입니다. 사회 구조 속에서 인간은 살아갑니다. 인간보다 사회 구조는 훨씬 거대합니다. 사회 구조는 인간에게 아주 커다란 영향을 미칩니다. 만약 사회 구조에서 어떤 관념이 지배적이라면, 지배적인 관념은 인간 사고 방식에 아주 커다란 영향을 미칠 겁니다. 사회 구조, 지배적인 관념에서 인간 사고 방식이 상대적으로 자유롭다고 해도, 많은 사람들은 지배적인 관념을 따라갈 겁니다. 이건 해석에 영향을 미칠지 모릅니다. 지배적인 관념은 소설 해석에 영향을 미칠지 모릅니다. 그래서 독자는 어떤 특정한 상황, 지배적인 관념 속에서 자신이 소설을 해석하는지 고려해야 할 겁니다.
정원이 그린 만화 <올해의 미숙>에서 만화 주인공에게는 불우한 가정 환경이 있습니다. 가난하고 폭력적이고 억압적인 가정 환경에서 만화 주인공은 벗어나기 원합니다. 그러는 동안, 만화 주인공은 어떤 친구를 만납니다. 친구는 일탈을 꿈꾸고, 만화 주인공은 친구와 함께 일탈, 즐거움, 자유를 느낍니다. 만화 주인공과 친구는 여행을 떠나고, 여행지에서 잠시 동안 만화 주인공과 친구는 야릇한 분위기를 연출합니다. 잠자리에서 친구는 만화 주인공 얼굴을 어루만지고, 이런 장면은 레즈비언 분위기를 풍기는 것 같습니다. 아니면 이건 그저 소녀들의 평범하고 일상적인 행동인지 모릅니다.
아무 사심 없이, 여자는 다른 여자를 더듬을지 모릅니다. 여자들에게는 이런 행동이 있습니다. 만화 속의 장면은 일상적인 여자 행동을 가리키는지 모릅니다. 아니면 만화 속의 장면은 레즈비언 분위기를 가리키는지 모릅니다. 어떤 독자들은 아무 사심 없이 친구가 만화 주인공을 더듬는다고 해석할지 모릅니다. 어떤 독자들은 친구와 만화 주인공이 레즈비언 분위기를 풍긴다고 해석할지 모릅니다. 문제는 나중에 친구가 만화 주인공을 너무 크게 배신한다는 사실입니다. 친구는 만화 주인공에게서 우정을 느끼지 않습니다. 어떤 목적을 위해 친구는 그저 도구로서 만화 주인공을 이용했을 뿐입니다.
친구가 너무 크게 배신하기 때문에, 독자들은 뒷통수가 얼얼하다고 느낄지 모릅니다. 만약 독자들이 친구가 나쁘다고 해석한다면, 독자들은 친구의 행동 역시 수상하고 나쁘다고 해석할지 모릅니다. 친구는 만화 주인공을 더듬었고, 이건 레즈비언 분위기를 풍깁니다. 그래서 독자들은 레즈비언이 부정적이라고 해석할지 모릅니다. 여기에서 독자는 작가 의도를 고려할 수 있습니다. 정원 작가가 레즈비언을 비난하기 원했나요? 레즈비언을 비난하기 위해 정원 작가가 친구가 만화 주인공 얼굴을 만진다고 그렸나요? 이건 확실하지 않습니다. 만화 <올해의 미숙>은 레즈비언이 나쁘다고 직접 말하지 않습니다.
<올해의 미숙>이 레즈비언을 직접 말하지 않기 때문에, 해석들은 다양해질지 모릅니다. 어떤 독자는 친구가 부정적인 레즈비언이라고 해석할지 모릅니다. 어떤 독자는 친구 행동과 레즈비언 사이에 아무 관계가 없다고 해석할지 모릅니다. 친구는 그저 만화 주인공 얼굴을 더듬었을 뿐이고, 이런 장면은 오직 하나만입니다. 만약 정원 작가가 레즈비언을 정말 비난하기 원했다면, <올해의 미숙>은 이런 장면들, 레즈비언 분위기를 훨씬 강조했을 겁니다. 만화 <올해의 미숙>에는 레즈비언을 비난하기 위한 단서들이 부족합니다. 그래서 독자들은 <올해의 미숙>이 레즈비언을 비난한다고 해석하지 못합니다.
만약 독자들이 정원 작가에게 직접 물어본다면, 독자들은 대답을 들을 수 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만약 작가가 대답을 회피한다면? 많은 작가들은 해석을 독자에게 넘깁니다. 많은 작가들은 작가가 이야기를 설명하기보다 독자가 이야기를 해석하기 원합니다. 만약 정원 작가가 대답한다고 해도, 정원 작가는 거짓말할지 모릅니다. 누가 아나요? 정원 작가는 레즈비언을 정말 비난하기 원했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정원 작가는 친구가 만화 주인공 얼굴을 만진다고 그렸는지 모릅니다. 비록 이런 장면이 오직 한 장면만이라고 해도, 정원 작가는 이 장면이 레즈비언에게 부정적인 인상을 씌울 거라고 간주했는지 모릅니다.
이렇게 독자가 작가에게 직접 물어본다고 해도, 해석들은 다양해질지 모릅니다. 독자가 작가를 완벽하게 파악하지 못하기 때문에, 해석은 정답이 되지 못합니다. 만약 독자가 작가를 완벽하게 파악하지 못한다면, 어떻게 독자가 <올해의 미숙>을 해석할 수 있나요? 여기에서 독자는 무슨 상황 속에서 <올해의 미숙>이 존재하는지 고려할 수 있습니다. 만화 속에서 배신자 친구가 만화 주인공 얼굴을 만진다고 해도, 왜 이게 문제가 되나요? 왜 부정적인 레즈비언 묘사가 문제가 되나요? 왜 비단 <올해의 미숙>만 아니라 많은 소설들, 만화들, 영화들, 게임들에서 레즈비언을 비롯해 성 소수자 문제가 논란이 되나요?
이유는 간단합니다. 현실 속에서 지배적인 관념이 성 소수자를 차별하기 때문입니다. 현실 속에서 지배적인 관념은 자본주의 체계입니다. 남한 사회가 자본주의 사회이기 때문입니다. 자본주의 시장 경제에서 가족은 가장 기본적인 경제 단위입니다. 하지만 동성애가 자유분방해진다면, 전통적인 가족 개념은 흔들릴지 모릅니다. 만약 비단 동성애만 아니라 연애와 섹스가 전반적으로 자유분방해진다면, 전통적인 가족 개념은 흔들릴지 모릅니다. 그래서 수구 꼴통 매체들은 동성애가 가족을 무너뜨리고, 사회를 무너뜨리고, 국가를 무너뜨린다고 지랄지랄합니다. 지배적인 관념은 레즈비언을 차별합니다.
지배적인 관념이 자유분방한 연애와 섹스를 차별하기 때문에, 부정적인 레즈비언 묘사는 문제가 됩니다. 만화 속에서 레즈비언 등장인물이 악역이라고 해도, 그 자체로서 이건 문제가 아닐 겁니다. 레즈비언 역시 인간입니다. 인간으로서 레즈비언은 악당이 될지 모릅니다. 만화는 레즈비언이 악당이라고 얼마든지 묘사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어떤 독자들은 만화 묘사가 마음에 걸린다고 느낄지 모릅니다. 여기에서 근본적인 문제는 만화 속의 못된 등장인물보다 현실 속의 성 소수자 차별입니다. 만약 독자들이 만화 묘사가 문제라고 생각한다면, 독자들은 만화 묘사보다 현실 속의 차별을 비판해야 합니다.
낸시 스프링어가 쓴 <왼손잡이 숙녀>는 탐정 소설입니다. <왼손잡이 숙녀>에서 소설 주인공은 19세기 런던 탐정 에놀라 홈즈입니다. 에놀라 '홈즈'가 가리키는 것처럼, 에놀라는 셜록 홈즈 동생입니다. 홈즈 가문으로서 에놀라 홈즈는 뛰어난 추리를 선보입니다. 에놀라 홈즈는 사라진 숙녀를 찾고 범인을 밝힙니다. 하지만, 세상에! 범인은 노동 운동 지도자입니다. 평소에 노동 운동 지도자는 마르크스주의와 계급 투쟁을 구구절절 떠들었습니다. 평소에 노동 운동 지도자가 계급 투쟁을 격렬하게 떠들었음에도, 노동 운동 지도자는 숙녀를 납치했습니다. 노동 운동 지도자는 잔인한 범죄자입니다.
그래서 <왼손잡이 숙녀>는 노동 운동, 계급 투쟁, 마르크스주의가 부정적이라고 묘사하는 것 같습니다. 노동 운동 지도자가 잔인한 범죄자이고, 평소에 노동 운동 지도자가 마르크스주의를 구구절절 떠들었기 때문에, 마르크스주의 역시 부정적입니다. 독자들은 계급 투쟁이 부정적이라고 해석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정말 소설 속에서 계급 투쟁이 부정적인가요? 소설 <왼손잡이 숙녀>가 마르크스주의가 부정적이라고 비난하나요? 그건 아닙니다. <왼손잡이 숙녀>는 마르크스주의가 부정적이라고 직접 말하지 않습니다. 에놀라 홈즈는 <자본론>이 너무 어렵다고 투덜대나, 이건 비난이 아닙니다.
솔직히 <자본론>은 어렵습니다. 비단 에놀라 홈즈만 아니라 좌파 경제학자들 역시 <자본론>이 어렵다고 말합니다. <자본론>이 어렵기 때문에, 임승수 작가는 '심지어 원숭이조차 이해할 수 있는' <자본론> 해설을 쓰기 원했을 겁니다. 허버트 웰즈 역시 <자본론>을 이해하지 못했고, 선구적인 생태 사회주의자 윌리엄 모리스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에놀라 홈즈가 투덜거린다고 해도, 이건 마르크스주의가 부정적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아무리 노동 운동 지도자가 잔인한 범죄자라고 해도, 소설 <왼손잡이 숙녀>는 마르크스주의가 나쁘다고 직접 말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많은 독자들은 마르크스주의가 악랄하다고 해석할지 모릅니다.
소설이 마르크스주의를 직접 비난하지 않음에도, 왜 많은 독자들이 마르크스주의가 악랄하다고 해석하나요? 이유는 간단합니다. 현실 속에서 자본주의 체계가 마르크스주의를 왜곡하고 탄압하기 때문입니다. 자본주의 체계는 서구 제국주의에 들러붙습니다. 마르크스주의와 서구 제국주의는 적대적입니다. 애니메이션 <고지라: 괴수 행성> 3부작에서 모스라(마이나/미아나)와 기도라가 적대적인 것처럼, 마르크스주의와 서구 제국주의는 적대적입니다. 심지어 서구 제국주의 전쟁에서 소비에트 연방조차 자유롭지 못했습니다. 서구 제국주의, 자본주의 체계는 마르크스주의를 왜곡하고 탄압합니다. 이건 탐정 소설 해석에 영향을 미칩니다.
자본주의 사회 속에서 남한 독자들은 <왼손잡이 숙녀>를 읽습니다. 남한 사회는 자본주의 사회이고, 남한 사회는 마르크스주의를 탄압합니다. 유시민 같은 제국주의 앞잡이는 사회주의 혁명을 왜곡하고 거짓말들을 늘어놓습니다. 남한 사람들은 유시민 같은 제국주의 앞잡이가 좋다고 떠받듭니다. 이런 상황에서 독자들이 <왼손잡이 숙녀>를 읽기 때문에, 어떤 독자들은 <왼손잡이 숙녀>가 마르크스주의를 부정적으로 묘사한다고 느낄지 모릅니다. 여기에서 문제는 <왼손잡이 숙녀>가 아닙니다. <왼손잡이 숙녀>는 마르크스주의가 나쁘다고 강조하지 않습니다. 문제는 서구 제국주의입니다.
만화 <올해의 미숙>보다 현실 속의 성 차별이 문제인 것처럼, 소설 <왼손잡이 숙녀>보다 현실 속의 서구 제국주의는 문제입니다. 만약 서구 제국주의가 사라진다면, 독자들은 계급 투쟁과 잔인한 범죄자가 별개라고 해석할 수 있을 겁니다. (서구 제국주의가 지배적이기 때문에, 어쩌면 낸시 스프링어 역시 계급 투쟁이 악랄한 짓거리라고 느낄지 모릅니다.) 이렇게 독자들은 소설 <왼손잡이 숙녀> 그 자체보다 어떤 특정한 상황 속에서 독자가 탐정 소설을 해석하는지 파악할 수 있습니다. 탐정 소설 독자들은 서구 제국주의와 <왼손잡이 숙녀>를 함께 고려할 수 있습니다. 이건 훨씬 폭넓은 시각입니다.
[지배적인 관념 속에서 사람들은 사랑스러운 여자 거대 괴수를 바라봅니다. 문제는 가부장 문화입니다.]
영화 <캡틴 마블>과 영화 <고지라: 괴수왕>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관객들은 캡틴 마블을 비난하고 모스라를 옹호합니다. 이런 관객들은 캡틴 마블보다 모스라가 훨씬 나은 여자 등장인물이라고 말합니다. 이유가 무엇인가요? 여기에는 여러 이유들이 있을 겁니다. 하지만 <올해의 미숙>과 <왼손잡이 숙녀>에서 현실 속의 지배적인 관념이 문제가 되는 것처럼, <캡틴 마블>과 <고지라: 괴수왕>에서도 지배적인 관념은 문제가 될 겁니다. 영화 <고지라: 괴수왕>에서 모스라는 가부장적인 편견에 부합합니다. 영화 속에서 고지라가 크게 다쳤을 때, 모스라는 고지라를 감쌉니다. 다친 남자를 보호하기 위해 모스라는 자신을 희생합니다.
여자(모스라)가 희생하기 때문에, 남자(고지라)는 강해지고 악당(기도라)을 물리칩니다. 이건 전형적인 현모양처, 빅토리아 시대 성 차별입니다. 만약 19세기 런던 탐정 에놀라 홈즈가 이런 장면을 본다면, 에놀라 홈즈는 여전히 21세기 초반 인류 문화가 가부장적인 편견에 들러붙는다고 한숨을 쉴 겁니다. 이건 그 자체로서 <고지라: 괴수왕>이 문제라는 뜻이 아닙니다. 이건 그 자체로서 모스라 팬 아트들이 문제라는 뜻이 아닙니다. 영화 속에서 고지라를 위해 모스라가 희생한다고 해도, 이건 많은 해석들을 내놓을 수 있습니다. 팬 아트들에서 모스라가 사랑스러운 아가씨가 된다고 해도, 그 자체로서 사랑스러운 아가씨는 문제가 아닙니다.
하지만 현실, 지배적인 관념은 가부장 문화입니다. 가부장 문화는 끔찍한 성 차별을 저지릅니다. 가부장 문화는 여자가 보조적인 존재라고 치부합니다. 가부장 문화 속에서 남자를 위해 여자는 쾌락이 되거나, 안식처가 되거나, 씨받이가 되거나, 뭔가가 됩니다. 이런 지배적인 관념 속에서 관객들은 <캡틴 마블>과 <고지라: 괴수왕>을 바라봅니다. 이건 모든 관객이 <캡틴 마블>과 <고지라: 괴수왕>을 천편일률적으로 바라본다는 뜻이 아닙니다. 영화 속에서 아시아 여자 학자는 티타누스 모수라를 대변합니다. 어떤 관객들은 상투적인 백인 남자 전형에서 티타누스 모수라가 벗어난다고 좋아할지 모릅니다.
분명히 티타누스 모수라에게는 긍정적인 상징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서구 제국주의, 자본주의 시장 경제에서 지배적인 관념은 비롯합니다. 지배적인 관념에서 개인은 자유롭지 못합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관객이 티타누스 모수라를 바라볼 때, 여기에는 문제가 있을지 모릅니다. 이렇게 사람들이 뭔가를 해석할 때, 사람들은 '배후'에 초점을 맞출 수 있습니다. 최근에 2020년 골든 글로브 시상식은 논란이 됩니다. 감독 수상 후보에 여자 감독들이 없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여자 감독들이 좋은 영화들을 촬영하지 못했다고 골든 글로브를 변호합니다. 하지만 여기에서도 억압적인 사회는 문제입니다.
어제 12월 11일 게시글이 이야기한 것처럼, 가부장 사회는 여자 작가들을 짓누릅니다. 가부장 사회는 19세기 초반 메리 셸리, 20세기 초반 버지니아 울프, 21세기 초반 레베카 솔닛을 짓누릅니다. 가부장적인 억압 속에서 작가로서 여자는 쉽게 글을 쓰지 못합니다. 심지어 소설보다 영화는 훨씬 대규모 산업이고, 여자 작가보다 여자 감독은 훨씬 어렵습니다. 여자 감독은 여러 제작자들을 통솔해야 하고, 흥행 실적에 관심을 쏟아야 하고, 비싼 촬영 장비들을 다루어야 합니다. 하지만 가부장 사회 속에서 영화 산업은 가부장적으로 치우칩니다. 제작부터 주제까지, 억압적인 상황은 영화를 둘러쌉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여자 감독들이 좋은 영화를 만들 수 있나요? 이런 상황 속에서 여자 감독들이 좋은 평가를 받을 수 있나요? 많은 영화 관계자들, 관객들, 평론가들은 <기생충>과 <조커>가 훌륭하다고 평가합니다. 하지만 그 자체로서 <기생충>과 <조커>가 훌륭한가요? 훌륭한 영화를 구분하기 위한 절대적인 기준이 있나요? 어떻게 기준이 나타납니까? 누가 기준을 만드나요? 19세기 서구에서 계급 투쟁을 약화시키기 위해 보수 우파 지식인들은 이른바 정전(正傳) 문학 평론들을 지정했습니다. 우파들이 정전 평론들을 지정했음에도, 자칭 중립들은 정전들을 읽고 인간의 본질을 열심히 지껄입니다.
정전 문학 평론들처럼, 누군가가 좋은 영화 기준을 지정하기 때문에, <기생충>과 <조커>는 좋은 영화가 됩니다. 누가 기준을 지정하나요? 무슨 상황 속에서 기준이 나타납니까? 세계화 자본주의가 억압적인 가부장 문화임에도, 이런 기준에 아무 문제가 없나요? 사람들이 재생산 착취를 열심히 외면하고 인간의 본질을 열심히 지껄이는 상황에서 좋은 영화를 평가하기 위한 기준에 아무 문제가 없을 수 있나요? 정말 2019년에 여자 감독들이 좋은 영화들을 촬영하지 못했나요? 누가 그것을 지정하나요? 왜 영화 평론가가 존재하나요? 하늘에서 근면성실한 자본가들이 뚝 떨어지는 것처럼, 하늘에서 영화 평론가가 뚝 떨어지나요? 신이 영화 평론가에게 권위를 부여하나요?
많은 사람들은 하늘에서 자본가들이 뚝 떨어졌다고 믿습니다. 자본가 계급이 엄청난 토지를 소유함에도, 사람들은 어떻게 자본가 계급이 엄청난 토지를 소유하는지 묻지 않습니다. 그 자체로서 자본가 계급은 존재합니다. 그 자체로서 자본가 계급이 존재하는 것처럼, 사람들은 그 자체로서 영화 평론가가 존재한다고 믿습니다. 사람들은 어떻게 영화 평론가가 나타나는지 묻지 않습니다. 이건 왕권 신수설과 다르지 않습니다. 신은 영화 평론가에게 권위를 부여하고, 그래서 평론가는 평론가입니다. 어떤 신비한 권위가 영화 평론가를 지정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어떻게 영화 평론가가 나타나는지 묻지 않습니다. 아무리 사회가 기울어진 운동장이라고 해도, 사람들은 묻지 않습니다.
여자 감독들이 좋은 영화들을 만들든, 좋은 영화들을 만들지 못하든, 문제는 이런 현상 그 자체보다 가부장 문화입니다. 2020년 골든 글로브에서 여자 감독이 수상한다고 해도, 어떤 사람들은 이게 생색내기, 눈을 가리고 아옹이라고 비판할지 모릅니다. 이런 비판이 옳은가요, 틀린가요? 이런 비판이 옳든 틀리든, 이런 비판 '배후'에는 세계화 자본주의가 있습니다. 세계화 자본주의는 가부장적이고, 이건 바뀌지 않는 사실입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배후'를 파악하지 않습니다. 루리웹 같은 수구 꼴통 유저들은 끔찍하고 폭력적인 가부장 문화보다 여자들이 저능하다고 아가리들을 무식하게 지껄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수구 꼴통 루리웹 유저들이 아가리들을 무식하고 멍청하게 나불거린다고 해도, 그 자체로서 <고지라: 괴수왕>이 문제가 아닌 것처럼, 수구 꼴통 루리웹 유저들은 문제가 아닐 겁니다. 수구 꼴통 유저들 역시 민중입니다. 민중에게 무슨 잘못이 있나요? 수구 꼴통 민중 '배후'에는 억압적인 사회 구조가 있습니다. 근본적인 문제는 억압적인 사회 구조입니다. 사회 구조가 민중들을 세뇌하기 때문에, 민중들은 수구 꼴통이 됩니다. 천재적이신 보수 우파 지식인들께서는 절대 인정하지 않겠으나, 수구 꼴통 루리웹 유저들은 '자본주의 사회가 전체주의'라는 아주 확실한 증거입니다.
※ 그림 <she is beauty she is grace> 출처: Prinz Cake,
https://prinzcake.tumblr.com/post/185463614978/she-is-beauty-she-is-grac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