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생태주의
<테라 닐>과 어머니 자연이라는 연결 본문
제목이 가리키는 것처럼, 비디오 게임 <테라 닐>에서 주된 소재는 생태계 테라포밍입니다. 게임 플레이어는 오염된 황무지 행성을 정화하고, 지형을 바꾸거나 수로를 늘리고, 기초 생태계를 조성하고, 여러 생물 군계들을 퍼뜨리고, 생명의 요람을 키웁니다. 게임 초반, 배경 무대는 칙칙한 갈색이나, 나중에 싱그러운 녹색들과 시원한 파란색들은 칙칙한 갈색을 채웁니다. 하늘에서 새들은 날아다니고, 강에서 물고기들은 헤엄치고, 숲 속에서 사슴들과 곰은 돌아다닙니다. 오염된 황무지는 울창하고 싱그러운 자연으로 바뀝니다. 삭막하고 오염된 죽은 행성은 살아있고 숨쉬는 행성이 됩니다.
<테라 닐>은 죽은 행성을 살아있는 행성으로 바꾸고 생명 현상이 경이롭다고 연출합니다. 생명 현상이 경이롭기 때문에, 생태계 테라포밍 설정은 매력적입니다. 이건 오직 생태계 테라포밍 설정만 경이로운 생명 현상을 연출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사이언스 픽션 없이, 우리는 생명 현상이 경이롭다고 감탄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생태계 테라포밍 설정이 죽은 것과 살아있는 것을 대조하고, 죽은 것이 보색 효과를 일으키기 때문에, 생태계 테라포밍은 살아있는 것을 훨씬 강조할 수 있습니다. 게다가 국지적인 규모보다 행성 규모에서 생태계 테라포밍은 생명 현상이 숨쉰다고 연출합니다.
생태계 테라포밍이 죽은 것과 살아있는 것을 대조하고, 행성 규모에서 이 대조가 나타나기 때문에, 생태계 테라포밍은 생명 현상을 훨씬 강조할 수 있습니다. 만약 어떤 작가가 소설을 쓰고 생명 현상을 강조하기 원한다면, 생태계 테라포밍은 유용한 소재일 겁니다. 생명체는 먹고 삽니다. 인간 역시 생명체입니다. 인간은 먹고 삽니다. 먹고 살기 위해 인간에게는 먹거리가 필요합니다. 먹거리를 얻기 위해 인간은 자연 환경에게 의지합니다. 자연 속에서 인간은 먹거리를 얻습니다. 자연 없이, 인간은 먹거리를 얻지 못합니다. 생태계 테라포밍 없이, 주류 문학은 이것을 보여줄 수 있습니다.
주류 문학은 먹거리를 얻기 위해 인간에게 자연이 필요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만약 자연이 건강하지 않다면, 만약 심각한 가뭄이 나타난다면, 인간은 농사를 짓지 못할 테고 먹거리를 얻지 못할 겁니다. 하지만 심각한 가뭄과 죽은 행성은 다릅니다. 심각한 가뭄보다 죽은 행성은 훨씬 압도적인 규모를 자랑합니다. 심각한 가뭄은 국지적이고 단기적인 현상일 수 있으나, 죽은 행성은 우주적인 현상입니다. 죽은 행성이 우주적인 현상이기 때문에, 죽은 행성이 살아있는 행성으로 바뀔 때, 이건 훨씬 감동적일 겁니다. 그래서 주류 문학보다 사이언스 픽션은 경이로운 생명 현상을 강조합니다.
생명체가 먹고 살고, 인간이 생명체이고, 인간이 먹고 살기 때문에, 만약 우주 개척 시대가 열린다면, 생태계 테라포밍은 필수적일 겁니다. 만약 생태계 테라포밍이 너무 어렵다면, 바이오 돔은 필수적일 겁니다. 우주 개척자들이 생태계 테라포밍을 시도하든, 바이오 돔을 시도하든, 외계 행성에서 개척자들이 자급자족할 때, 우주 개척은 성공할 겁니다. 만약 우주 개척자들이 지구 생물권에게 너무 의지한다면, 우주 개척은 태양계를 쉽게 넘어가지 못할 테고, 우주 개척은 제한적일 겁니다. 식량 생산이 우주 개척에게 영향을 미치는 것처럼, 사이언스 픽션은 인간이 먹고 산다고 강조합니다.
사이언스 픽션 없이, 우리는 인간이 먹고 산다고 인식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얼마든지 인식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사이언스 픽션에서 식량 생산은 죽은 행성, 우주 개척, 항성계와 이어집니다. 압도적인 규모에서 생태계 테라포밍은 사람들이 먹고 산다고 이야기합니다. 죽은 행성이 살아있는 행성으로 바뀌고, 풍요로운 자연 속에서 개척자들이 농사를 짓고 수확할 때, 이 장면은 인간이 먹고 산다고 강조합니다. 그래서 주류 문학보다 사이언스 픽션은 인간이 먹고 산다고 부각할 수 있습니다. 적어도 주류 문학보다 사이언스 픽션은 먹고 살기를 압도적인 규모, 우주적인 현상과 연결합니다.
만약 거시적인 규모에서 소설 작가가 먹고 살기를 연출하기 원한다면, 주류 문학보다 사이언스 픽션은 낫습니다. 비단 생태계 테라포밍만 아니라 다른 SF 생태학 설정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만약 환경 오염이 너무 심각하고, 지구 생물권 그 자체가 건강하지 않다면, 식량 생산 비율은 추락할 겁니다. 식량 생산이 바닥을 치기 때문에, 엄청난 인구는 굶주릴 겁니다. 많고 많은 사람들이 굶주리기 때문에, 인류 문명은 무너질지 모릅니다. 인류 문명이 무너지기 때문에, 환경 아포칼립스는 얼마나 자연 환경이 중요한지 보여줍니다. 주류 문학은 인류 문명이 무너진다고 연출하지 않습니다.
환경 아포칼립스가 먹고 살기와 인류 문명을 연결하고, 생태계 테라포밍이 먹고 살기와 행성 규모를 연결하는 것처럼, 주류 문학보다 사이언스 픽션은 거시적입니다. 사이언스 픽션이 거시적이기 때문에, 사이언스 픽션은 넓은 시야를 자랑하고 주제를 부각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사이언스 픽션이 미래를 예언하지 못한다고 지적합니다. 사이언스 픽션이 미래를 예언하지 못하기 때문에, 우주 개척은 그저 황당무계한 망상에 불과한지 모릅니다. 사이언스 픽션과 달리, 여러 과학자들은 생태계 테라포밍이 절대 쉽지 않다고 설명합니다. 심지어 바이오 돔조차 너무 어려운 과업일지 모릅니다.
심지어 바이오 돔조차 너무 어려운 과업이기 때문에, 우주 개척은 너무 제한적일지 모릅니다. 아무리 미래 인류 문명이 우주 개척 시대를 연다고 해도, 사이언스 픽션 속의 우주 개척과 미래 우주 개척은 다를지 모릅니다. 누가 아나요? 어쩌면 2531년 미래 인류는 21세기 초반 SF 소설들이 너무 순진했다고 비웃을지 모릅니다. 어쩌면 2531년 미래 인류는 <테라 닐>이 우주 개척을 너무 순진하게 묘사했다고 비웃을지 모릅니다. <테라 닐>은 미래를 예언하지 않습니다. <테라 닐>은 미래 개척자들이 외계 행성을 필연적으로 테라포밍한다고 예언하지 않습니다. 예언은 SF 미덕이 아닙니다.
SF 미덕은 예언보다 '강조'입니다. 사이언스 픽션이 행성 규모를 제시하기 때문에, 주류 문학보다 사이언스 픽션은 주제를 '부각'합니다. 주류 문학보다 생태계 테라포밍은 먹고 살기를 부각합니다. 우주 개척자들이 행성 그 자체를 바꾸기 때문에, 살아있는 행성에서 사람들은 농사를 짓습니다. 만약 행성 그 자체가 바뀌지 않는다면, 황무지 행성에서 사람들은 먹고 살지 못합니다. 비록 2531년 미래 인류가 우주 개척 시대를 열지 못한다고 해도, 비록 2531년 미래 인류가 <테라 닐>을 비웃는다고 해도, 사이언스 픽션이 주제와 거시적인 규모를 연결하기 때문에, 이 연결에는 가치가 있습니다.
만약 기후 변화가 심각해지고 지구가 이른바 눈덩이가 된다면, 눈덩이 지구에서 농사를 짓기는 너무 어려울 겁니다. 어떤 사람들은 하얀 겨울 풍경이 아름답다고 예찬합니다. 분명히 겨울 풍경은 장대하고 신비롭습니다. 하얀 눈송이들은 이 세계를 다른 차원으로 바꿉니다. (겨울 풍경이 신비롭기 때문에, 개인적으로 저는 이런 스크린샷(링크)이나 이런 스크린샷(링크), 이런 스크린샷(링크)을 좋아합니다.) 하지만 만약 기후 변화가 심각해지고, 지구가 눈덩이가 되고, 사람들이 농사를 짓지 못한다면, 더 이상 겨울 풍경은 신비로운 그림이 아닐 겁니다. 환경 아포칼립스는 신비롭지 않습니다.
농사를 짓기가 어렵기 때문에, 식량 생산 비율은 크게 추락할 테고, 많고 많은 사람들은 굶주릴 겁니다. 많은 사람들이 굶주리기 때문에, 이건 다른 재앙들을 유발할 겁니다. <테라 닐>은 겨울 풍경을 묘사하지 않습니다. <테라 닐>은 싱그러운 녹색들을 보여줍니다. 비단 <테라 닐>만 아니라 다른 생태계 테라포밍들 역시 녹색들을 보여줍니다. 테라포밍은 하얀색보다 녹색입니다. 테라포밍은 겨울보다 봄이나 여름입니다. 봄과 여름에서 생명 현상이 활발하기 때문입니다. 우주 바이오 돔 그림들은 바이오 돔 내부가 겨울이라고 상상하지 않습니다. 겨울 풍경과 먹거리는 이어지지 않습니다.
환경 아포칼립스가 다른 재앙들을 유발하는 것처럼, 행성 생태계 테라포밍과 먹고 살기가 이어지는 것처럼, 인간에게 먹고 살기는 가장 근본적인 문제입니다. 성공적인 바이오 돔이 우주 개척을 뒷받침하는 것처럼, 인간에게 다른 무엇보다 먹고 살기는 근본적입니다. 자연 생태계가 먹이 그물망을 형성하고, 자연 생태계에서 인간이 벗어나지 못하는 것처럼, 자연 환경에서 먹거리는 비롯합니다. 생태계 테라포밍과 바이오 돔(을 비롯해 SF 설정들)은 자연 환경과 먹거리를 부각할 수 있습니다. 다른 무엇보다 먹거리가 근본적이기 때문에, 다른 무엇보다 풍요로운 자연은 근본적입니다.
<테라 닐>이 풍요로운 자연을 보여주기 때문에, 어머니 자연과 <테라 닐>은 잘 어울립니다. 게임 플레이어는 <테라 닐>을 보고 어머니 자연을 느낄 수 있습니다. 자연과 여자가 생명체(아기)를 낳고 먹이기 때문에, 자연과 여자는 비슷합니다. 생태계 테라포밍과 어머니 자연이 잘 어울리는 것처럼, SF 생태학에게 어머니 자연은 중요한 상징이 될 수 있습니다. 비록 어머니 자연이 SF 생태학보다 고대 신화라고 해도, <테라 닐>은 왜 자연이 아버지(남자)보다 어머니(여자)인지 감동적으로 연출합니다. 비록 이 게임이 신화를 말하지 않는다고 해도, 이 게임은 신화적인 경이를 선사합니다.
하지만 생태계 테라포밍이 어머니 자연을 연출할 때, 게임 플레이어는 지배적인 관념을 주의해야 합니다. 자연과 여자가 비슷하기 때문에, 지배적인 관념이 이 관계를 왜곡할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자연이 생명체를 낳고 먹이는 것처럼, 여자가 아기를 낳고 먹이기 때문에, 자연과 여자는 비슷합니다. 자연과 여자가 비슷하기 때문에, 여자는 임신과 출산, 수유, 육아와 떨어지지 않습니다. 여자에게 임신과 출산, 수유, 육아는 '자연'입니다. 이것들은 '자연' 법칙입니다. 이것들이 자연 법칙이기 때문에, 여자와 이것들은 떨어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여자는 외부 노동보다 가정적인 것과 이어집니다.
사람들이 원시 사회를 상상할 때, 많은 사람들은 동굴에서 여자가 아기를 돌보고 야생에서 남자가 매머드를 사냥한다고 상상합니다. 여자와 달리, 남자는 외부로 나가고 식량을 얻습니다. 남자가 매머드를 사냥하고 식량을 얻기 때문에, 여자보다 남자는 중요하고, 남자는 권력자가 됩니다. 심지어 어떤 인류학자들은 남자를 위해 여자가 진화했다고 주장합니다. 여자는 스스로 진화하지 않았습니다. 중요한 남자를 위해 보조적인 여자는 진화했습니다. 하지만 페미니즘 학자들은 이게 그저 편협한 망상에 불과하다고 비판합니다. 남자를 권력자라고 정당화하기 위해 가부장 신화는 진화 이론을 왜곡합니다.
근대 사회에서도 가부장 신화는 노동 개념을 흐리고 여자가 보조적이라고 왜곡합니다. 남한은 근대 사회입니다. 남한 사회에서 여자를 비난하기 위한 가장 유명한 모욕이 무엇인가요? 대답은 육아입니다. "어이구, 이런, 젠장. 집구석에서 여자는 애를 봐야 해! 여자는 가정적이야!" 이건 여자를 비난하기 위한 가장 유명한 모욕입니다. 이 모욕은 여자와 육아를 강제로 연결합니다. 가부장 편견이 여자를 모욕할 때, 가부장 편견은 외부 노동을 연결하지 않습니다. 가부장 편견은 회사에서 여자가 일해야 한다고 주장하지 않습니다. 여자와 외부 노동이 이어지지 않기 때문에, 여자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여자가 외부 노동자가 아니기 때문에, 보조적인 여자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여자보다 남자는 중요합니다. 여자보다 남자가 중요하기 때문에, 이건 끔찍한 성 폭력들을 유발합니다. 한때 남한 사회에서 '야타족'은 커다란 유행(?)이었습니다. "야, 타~.", "오빠, 내가 타?" 이 대사에서 남자는 자동차를 몰고, 여자는 자신이 자동차에 탈 수 있는지 묻습니다. '야타족'은 남자가 자동차를 몰고 여자가 자동차를 몰지 않는다고 묘사합니다. 왜 남자가 자동차를 몰고, 여자가 자동차를 몰지 않나요? 여자와 외부 노동이 이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남자와 외부 노동이 이어지기 때문에, 여자보다 남자는 돈을 법니다.
남자가 돈을 벌기 때문에, 남자는 자동차를 몹니다. 여자가 외부 노동과 이어지지 않고, 여자가 돈을 벌지 않기 때문에, 여자는 자동차를 몰지 않습니다. 여자와 외부 노동이 이어지지 않기 때문에, 여자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여자가 돈을 벌지 않기 때문에, 여자는 남자에게 의지해야 합니다. 여자가 남자에게 의지하기 때문에, 남자 없이, 여자는 존재하지 못합니다. 소설 <시녀 이야기>에서 가부장 편견은 여자가 돈을 벌지 못한다고 나불거립니다. 여자보다 남자는 중요한 역할입니다. 여자보다 남자가 중요하기 때문에, 이건 성 차별에게 아주 커다란 영향을 미치고 끔찍한 성 폭력들을 유발합니다.
이건 오직 노동 문제만 성 차별에게 영향을 미친다는 뜻이 아닙니다. 노동 이외에 다른 요소들 역시 성 차별에게 영향을 미칩니다. 아무리 인류 사회가 노동 문제를 해결한다고 해도, 성 차별들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을지 모릅니다. (심지어 성 해방을 위해 모든 남자는 사라져야 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시녀 이야기>에서 가부장 편견이 여자가 돈을 벌지 못한다고 억압하는 것처럼, 노동 문제는 성 차별에게 근본적인 영향을 미칩니다. 적어도 이건 심각한 문제입니다. 만약 인류 사회가 노동 문제를 해결하지 않는다면, 성 차별들은 사라지지 않을 겁니다. 자본주의는 노동 문제를 해결하지 않습니다.
노동자는 댓가를 받습니다. 하지만 자본주의 사회에서 육아 노동자는 댓가를 받지 않습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사람들은 육아가 노동이라고 인식하지 않습니다. "집구석에서 여자는 애를 봐야 해!" 이 모욕처럼, 육아는 노동이 아닙니다. 만약 육아 노동자가 댓가를 받는다면, 가부장 편견은 집구석을 나불거리지 않을 겁니다. 왜 자본주의 사회에서 육아가 노동이 아닌가요? 대답은 잉여 가치입니다. 임금 노동자는 잉여 가치를 만듭니다. 자본가는 잉여 가치를 이윤으로 전환합니다. 잉여 가치 없이, 이윤은 나타나지 못합니다. 임금 노동과 달리, 육아 노동은 잉여 가치를 만들지 않습니다.
육아가 잉여 가치를 만들지 않기 때문에, 자본가는 이윤을 얻지 못합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본가가 권력자이고, 자본가가 이윤을 얻지 못하기 때문에, 자본주의 사회는 육아 노동을 무시합니다. 육아는 노동이 되지 못하고, 육아 노동자는 댓가를 받지 못합니다. 육아는 노동보다 자원 봉사가 되어야 합니다. 이것을 정당화하기 위해 지배적인 관념은 오직 임금 노동자만 노동자라고 묘사합니다. 만약 육아 노동이 댓가를 받는다면, 남자들 역시 육아 노동에 참가할지 모릅니다. 만약 남자들이 육아 노동에 참가한다면, 임금 노동자들은 줄어들지 모르고, 잉여 가치들은 줄어들지 모릅니다.
잉여 가치들이 줄어들기 때문에, 자본가들은 높은 이윤들을 얻지 못합니다. 만약 육아가 노동이 된다면, 자본가들에게 이건 너무 불리합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지배적인 관념은 육아가 노동이 아니라고 정당화합니다. 이것을 정당화하기 위해 지배적인 관념은 여자와 육아를 억지로 연결합니다. 여자가 아기를 낳고 먹이기 때문에, 여자는 육아를 맡아야 합니다. 이건 여자의 소명, 의무입니다. 이건 자연 법칙입니다. <테라 닐>처럼, SF 생태학에서 어머니 자연은 감동적이고 중요한 상징이 될 수 있으나, 심지어 어머니 자연이라는 단어조차 지배적인 가부장 편견을 떠받들지 모릅니다.
지배적인 관념은 어머니 자연을 왜곡하고 육아가 여자의 소명이라고 주장할지 모릅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지배적인 관념이 여자와 육아를 억지로 연결하기 때문에, 여자와 외부 노동은 이어지지 않습니다. 자본주의는 가부장 제도입니다. 자본주의와 성 평등은 공존하지 못합니다. 아무리 <테라 닐>과 어머니 자연이 감동적이라고 해도, 이 연결은 자본주의를 경계해야 합니다. 비단 <테라 닐>과 어머니 자연만 아니라 다른 성 차별 논의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성 해방 운동이 여자 인형을 어쩌구 떠든다고 해도, 자본주의 비판 없이, 근본적인 논의는 나타나지 못합니다.
※ 게임 <테라 닐> 스크린샷 출처: vfqd,
www.youtube.com/watch?v=Tusj004njB4
※ 게임 <임팩트 윈터> 스크린샷 출처: Generic Gaming,
www.youtube.com/watch?v=Un-LNA8vQx4
※ 사진 <Muesli Breakfast Fruits …> 출처: webandi,
pixabay.com/photos/muesli-breakfast-fruits-strawberry-525599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