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생태주의
<테라포밍 마스>, 허구로서 외계 행성 개척 본문
셜록 홈즈가 실존 인물인가요? 셜록 홈즈 덕후들, 셜로키언들에게 셜록 홈즈는 실존 인물일 겁니다. 하지만 모든 셜로키언에게 셜록 홈즈가 실존 인물인가요? 어떤 셜로키언들에게 셜록 홈즈는 소설 등장인물인지 모릅니다. 일반적인 탐정 소설 독자들에게 셜록 홈즈는 소설 등장인물에 훨씬 가까울 겁니다. 아무리 셜로키언들이 셜록 홈즈를 실존 인물이라고 상정한다고 해도, 현실 속에서 셜로키언들은 셜록 홈즈를 직접 만나지 못합니다. 현실 속에는 존 왓슨 박사, 허드슨 부인, 레스트레이드 경감, 아이린 애들러, 제임스 모리아티 교수가 없습니다. 모두 소설 등장인물입니다.
하지만 허드슨 부인이 소설 등장인물이라고 해도, 이건 허드슨 부인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만약 허드슨 부인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소설 독자는 허드슨 부인을 인식하지 못할 겁니다. 분명히 허드슨 부인은 존재하고, 베이커 거리 221B 하숙집 역시 존재합니다. 베이커 221B 하숙집은 잉글랜드 런던에 속하고, (허드슨 부인이 살아가는) 잉글랜드 런던 역시 존재합니다. 잉글랜드 런던은 유럽 대륙에 속하고, 유럽 대륙 역시 존재합니다. 유럽 대륙은 지구에 속하고, 지구 역시 존재합니다. 지구는 태양계에 속하고, 태양계 역시 존재합니다. 태양계 외곽에는 명왕성이 있습니다.
문제는 허드슨 부인이 명왕성을 알지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셜록 홈즈를 비롯해 존 왓슨 박사, 허드슨 부인, 레스트레이드 경감, 아이린 애들러, 제임스 모리아티 교수는 명왕성을 알지 못합니다. 아무리 제임스 모리아티 교수가 똑똑하다고 해도, 아무리 아이린 애들러에게 뛰어난 재치가 있다고 해도, 모리아티 교수와 아이린 애들러는 명왕성을 알지 못합니다. 아무리 셜록 홈즈가 유럽 최고의 자문 탐정이라고 해도, 셜록 홈즈는 명왕성을 알지 못합니다. 셜록 홈즈는 19세기 후반~20세기 초반에 속합니다. 셜록 홈즈가 살아가는 동안, 아직 천문학은 명왕성을 찾지 못했고, 셜록 홈즈는 명왕성을 알지 못합니다.
만약 셜록 홈즈를 비롯해 소설 등장인물들이 명왕성을 알지 못한다면, 셜록 홈즈가 살아가는 우주에서 명왕성이 존재하나요, 아니면 존재하지 않나요? 탐정 소설 독자들은 허드슨 부인이 명왕성을 알지 못한다고 인식하고, 동시에 탐정 소설 독자들은 허드슨 부인과 명왕성이 함께 존재한다고 인식할 수 있습니다. 허드슨 부인이 명왕성을 들어본 적이 없다고 해도, (셜록 홈즈가 살아가는 우주에서) 명왕성은 존재할 겁니다. 명왕성을 알지 못하는 허드슨 부인이 명왕성과 함께 존재하는 것처럼, 허구에는 모순이 있습니다. 독자가 소설을 읽는 동안, 모순적인 경계선에서 독자는 허구와 현실을 함께 인식합니다.
이런 모순적인 경계선은 비단 명왕성만 아니라 다른 것들을 물을 수 있습니다. 셜록 홈즈는 19세기 후반 유럽에 속하고, 19세기 후반 유럽에는 <자본론>이 있습니다. 셜록 홈즈가 <자본론>을 읽었거나 들어봤을까요? 비록 셜록 홈즈가 <자본론>을 읽은 적이 없거나 알지 못한다고 해도, 소설 속에서 셜록 홈즈와 <자본론>이 함께 존재할 수 있을까요? 만약 허드슨 부인과 명왕성이 함께 존재한다(고 소설 독자들이 인식한다)면, 19세기 후반 유럽에서 셜록 홈즈와 <자본론>은 함께 존재할 겁니다. 비록 셜록 홈즈가 비정규직 여자 노동자들에게 상관하지 않는다고 해도, 셜록 홈즈와 <자본론>은 함께 존재할 겁니다.
만약 수구 꼴통 아재 아서 코난 도일이 <자본론>을 읽은 적이 없다고 해도, 허드슨 부인과 명왕성처럼, 소설 독자들은 셜록 홈즈와 <자본론>이 함께 존재한다고 인식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작가 의도는 <자본론>을 밀어내지 못합니다. 독자가 소설을 해석하는 동안, 독자는 작가 의도를 중시해야 하나, 작가보다 현실은 훨씬 거대합니다. 작가보다 현실이 훨씬 거대하기 때문에, 비록 독자가 작가 의도를 중시한다고 해도, 독자는 훨씬 거대한 현실을 고려해야 합니다. 셜록 홈즈 이야기는 명왕성과 <자본론>이 없는 또 다른 세계가 아닐 겁니다. 그래서 낸시 스프링어는 에놀라 홈즈가 <자본론>을 읽는다고 설정했습니다.
그 자체로서 셜록 홈즈가 존재한다고 해도, 여기에는 또 다른 모순이 있습니다. 소설 독자가 소설 형식을 인식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셜록 홈즈는 꺽다리입니다. 체격은 마른 편이고, 머리는 큽니다. 하지만 이런 표현은 셜록 홈즈를 구체적으로 묘사하지 못합니다. 시각적인 측면에서 소설 독자들은 셜록 홈즈 외모에 만장일치로 동의하지 못합니다. 시드니 파젯은 유명한 셜록 홈즈 삽화를 그렸고, 그래서 시각적인 측면에서 소설 독자들은 셜록 홈즈 외모를 인식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허드슨 부인은? 셜록 홈즈와 허드슨 부인이 함께 존재함에도, 시각적인 측면에서 소설 독자들은 오직 셜록 홈즈만 인식합니다.
시드니 파젯이 허드슨 부인을 그리지 않았기 때문에, 시각적인 측면에서 소설 독자들은 셜록 홈즈와 허드슨 부인을 똑같이 인식하지 못합니다. 셜록 홈즈와 허드슨 부인은 함께 존재하나, 소설 독자들은 셜록 홈즈와 허드슨 부인을 다르게 인식합니다. 다행히 시각적인 측면에서 소설 독자들이 허드슨 부인을 구체적으로 인식하지 못한다고 해도, 이건 별로 문제가 되지 않을 겁니다. 허드슨 부인은 전형적인 백인 중년 여자인지 모릅니다. 현실 속에서 전형적인 백인 중년 여자를 인식하기는 어렵지 않습니다. 19세기 일상적인 측면에서 셜록 홈즈 이야기는 벗어나지 않습니다. 소설 독자는 현실을 참고할 수 있습니다.
소설 독자가 탐정 소설을 읽는 동안, 소설 독자는 허드슨 부인과 가상의 사회 관계를 맺을 수 있습니다. 이건 어렵지 않습니다. 시각적인 측면에서 탐정 소설이 허드슨 부인을 구체적으로 묘사하지 않는다고 해도, 소설 독자는 현실을 참고할 수 있습니다. 그 자체로서 허구가 존재함에도, 소설 독자는 현실을 참고해야 하고, 허구에는 이런 치명적인 모순이 있으나, 탐정 소설 독자는 치명적인 모순을 쉽게 넘어갈 수 있습니다. 하지만 SF 소설에서 이건 문제가 됩니다. 허드슨 부인과 달리, 일상적인 측면에서 SF 소설이 벗어나기 때문입니다. 바이오스피어 우주선은 비일상적인 상상력입니다.
현실 속에는 바이오스피어 우주선, 생체선(生體船)이 없습니다. 만약 시각적인 측면에서 하드 SF 소설이 생체 우주선을 구체적으로 묘사하지 않는다면, 소설 독자는 생체 우주선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할지 모릅니다. 글자는 기호입니다. 글자는 뭔가를 직접 가리키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저 기호로서 특정한 글자를 특정한 대상에 연결할 뿐입니다. 단어 장수 거북은 동물 장수 거북을 반드시 가리키지 않습니다. 이건 그저 임시적인 연결에 불과하고, 임시적인 연결은 쉽게 끊어집니다. 남한 사람에게 동물 장수 거북은 단어 장수 거북이나, 일본 사람에게 이 장엄한 해양 동물은 オサガメ입니다.
만약 일본 사람이 한국어, 한글을 알지 못한다면, 일본 사람이 단어 장수 거북을 읽는다고 해도, 일본 사람은 동물 장수 거북을 머릿속에 떠올리지 못할 겁니다. 아니, 아무리 일본 사람이 한국어를 능숙하게 이해하고 한글을 능숙하게 읽는다고 해도, 일본 사람은 장수 거북이 무엇인지 알지 못할지 모릅니다. 남한 사람 역시 단어 장수 거북이 무엇을 가리키는지 알지 못할지 모릅니다. 장수 거북은 일상적인 야생 동물이 아닙니다. 장수 거북은 길냥이가 아닙니다. 길냥이는 일상적입니다. 거리에서 남한 시민들은 길냥이와 쉽게 마주칠 수 있습니다. 반면, 장수 거북은 망망대해에 속합니다.
장수 거북이 망망대해에 속하기 때문에, 남한 시민들에게 장수 거북은 친숙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남한 시민들이 장수 거북을 읽을 수 있다고 해도, 남한 시민들은 장수 거북이 무엇인지 인식하지 못할지 모릅니다. 일본 사람이 한국어를 능숙하게 구사한다고 해도, 상황은 바뀌지 않습니다. 아무리 트와이스 사나가 한국어를 능숙하게 구사한다고 해도, 만약 미나토자키 사나가 해양 동물 장수 거북을 알지 못한다면, 미나토자키 사나는 그저 장수 거북을 읽을 뿐인지 모릅니다. 미나토자키 사나에게 단어 장수 거북과 단어 オサガメ는 모두 해양 동물 장수 거북으로 이어지지 않을지 모릅니다.
이렇게 글자가 뭔가를 직접 가리키지 않기 때문에, 만약 SF 소설이 생체 우주선을 묘사한다면, 소설 독자는 생체 우주선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할지 모릅니다. SF 소설 독자가 현실을 참고하기 원한다고 해도, 현실 속에는 생체 우주선이 없습니다. SF 독자는 우주 사업 상상도들을 참고할 수 있으나, SF 소설 속의 생체 우주선과 우주 사업 상상도 속의 생체 우주선은 다를지 모릅니다. 아직 인류 문명은 바이오스피어 우주선을 띄운 적이 없습니다. 아무도 어떻게 바이오스피어 우주선이 항해할 수 있는지 알지 못합니다. 바이오스피어 우주선에서 오직 바이오 돔만 '바이오'인가요? 다른 부분들이 '바이오'가 아닌가요?
만약 우주선 벽면이 균사체 구조를 포함한다면? 우주 항해 동안, 우주선 승무원들은 배설물들을 만들 겁니다. 만약 우주선 벽면 속의 균사체가 배설물과 (물과) 열을 활용한다면, 균사체 포자들은 활발하게 움직일 테고, 균사체 포자들은 훌륭한 방화벽, 훌륭한 우주 방사선 차단제가 될지 모릅니다. 만약 바이오 돔에서 생물 다양성이 부족해진다면, 우주선 생태학자들은 우주선 벽면을 뜯고, 균사체 포자들을 바이오 돔에 집어넣고, 생물 다양성을 채울지 모릅니다. 만약 이런 생체 벽면들이 훨씬 강화하거나 향상된다면, 아무리 장거리 우주선이 망가진다고 해도, 생체 벽면들은 스스로 복구, 치유, 번성할지 모릅니다.
SF 소설은 생체 우주선이 스스로 치유한다고 서술할 수 있습니다. 그 자체로서 허구가 존재하기 때문에, 그 자체로서 생체 우주선은 존재할 겁니다. 하지만 소설 독자는 생체 우주선 묘사, 설정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할지 모릅니다. 소설 독자가 현실을 참고하기 원한다고 해도, 인류 문명이 생체 우주선을 건조한 적이 없기 때문에, 소설 독자는 현실을 완벽하게 참고하지 못합니다. 베이커 거리 221B 하숙집과 바이오스피어 우주선은 다릅니다. 양쪽은 똑같은 허구이나, 베이커 거리 221B 하숙집보다 바이오스피어 우주선은 훨씬 비일상적입니다. 바이오스피어 우주선을 인식하기는 훨씬 어렵습니다.
"허드슨 부인과 베이커 거리 221B 하숙집이 정말 존재하는가?" 이 물음은 여러 논란들을 일으키고, 탐정 소설 독자들은 만장일치로 합의하지 못할 겁니다. 하지만 베이커 거리 221B 하숙집을 인식하기는 상대적으로 쉽습니다. 반면, 바이오스피어 우주선은 쉽지 않습니다. 만약 하드 SF 소설이 바이오스피어 우주선 설계 구조를 너무 복잡하고 어렵게 묘사한다면, 소설 독자는 하드 SF 소설을 덮을지 모릅니다. 초보 SF 독자에게 이건 너무 높은 진입 장벽입니다. 하지만 만약 하드 SF 만화가 그림으로서 생체 우주선을 묘사한다면, 이것을 이해하기는 상대적으로 쉬울 겁니다. 글자보다 그림은 시각적입니다.
모든 사이언스 픽션은 똑같은 사이언스 픽션들이 아닙니다. SF '소설'과 SF '게임'은 다릅니다. 소설은 글자 매체이고, 글자는 사상, 심리, 이론을 다룰 수 있습니다. 게임에서 중요한 것은 규칙입니다. 그래서 어떤 문화 예술 평론가들에게 소설은 예술이 될 수 있으나, 게임은 예술이 되지 못합니다. 비록 게임이 예술이 되지 못한다고 해도, 소설이 사이언스 픽션을 이야기할 수 있는 것처럼, SF 설정은 게임이 될 수 있습니다. 매체가 다르기 때문에, SF '소설'과 SF '게임'은 똑같은 것을 다르게 이야기합니다. 만약 SF 소설과 SF 게임에게 비슷한 설정이 있다고 해도, 소설과 게임은 설정을 다르게 표현할 겁니다.
소설 <붉은 화성>은 화성 테라포밍을 묘사합니다. 화성 테라포밍이 옳은가요? 지구 인간들에게 화성을 바꾸기 위한 권리가 있나요? 개척 과학자들은 논쟁을 벌입니다. 소설 <붉은 화성>에게 이건 아주 중요한 화제입니다. 반면, 게임 <테라포밍 마스>는 논쟁을 묘사하지 않습니다. 소설 <붉은 화성>처럼, 게임 <테라포밍 마스>는 화성 테라포밍을 묘사하나, <테라포밍 마스>는 논쟁, 심리, 대화를 묘사하지 않습니다. 게임 플레이어에게 논쟁, 심리, 대화보다 규칙과 수치 계산은 훨씬 중요합니다. 게임 플레이어는 생태 공학 논쟁을 읽고 등장인물에게 공감하기보다 조류 규칙을 읽고 생태계 수치를 계산합니다.
[게임 플레이어에게 외계 행성을 개척하기 위한 논쟁보다 조류 규칙과 수치 계산은 훨씬 중요할 겁니다.]
<테라포밍 마스>에는 등장인물이 없습니다. 적어도 <테라포밍 마스>에서 등장인물 역할은 희미합니다. 독자는 소설 <붉은 화성>을 읽고 개척 생태학자 히로코 아이에게 공감할 수 있습니다. 히로코 아이가 아시아 여자이고, 화성 개척 과정에서 히로코 아이가 바이오 돔 팀장이기 때문에, 소설 독자에게 이건 특별한 의미가 될지 모릅니다. 전형적인 백인 남자 신화에서 히로코 아이는 벗어납니다. 반면, <테라포밍 마스>에서 게임 플레이어는 등장인물과 사회적인 관계를 깊게 맺지 않습니다. 아무리 게임 플레이어가 깊은 관계를 맺기 원한다고 해도, 보드 게임은 사회 관계를 위한 문학 장치들을 동원하지 않습니다.
소설 <붉은 화성>은 심리를 직접 묘사합니다. 소설 <붉은 화성>이 심리를 직접 묘사하지 않는다고 해도, 소설은 시점을 제시하고 등장인물을 관찰합니다. 게임 <테라포밍 마스>는 등장인물을 구체적으로 관찰하지 않습니다. 게임 플레이어는 눈 조류(Snow Algae) 카드를 발동하기 위해 해양 타일 몇 개가 필요한지 알기 원할 겁니다. 소설 <붉은 화성>과 게임 <테라포밍 마스>는 화성 개척 과정을 묘사하고, 그 자체로서 화성 개척 과정은 존재하나, 화성 개척 과정은 다르게 존재합니다. 소설 <붉은 화성>에서 사상으로서 테라포밍 과정은 존재하나, 게임 <테라포밍 마스>에서 규칙으로서 테라포밍 과정은 존재합니다.
이건 게임이 사상을 포함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게임에는 오직 규칙만 있지 않습니다. 게임은 사상을 포함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도 게임에서 사상보다 규칙이 훨씬 커다란 비중을 차지하는 것처럼, 허구로서 두 테라포밍 과정은 '다르게' 존재합니다. SF 장르는 그 자체로서 또 다른 세계를 표현할 수 있으나, SF 팬이 또 다른 세계를 받아들이는 동안, 경계선에서 SF 팬은 모순, 허구를 인식합니다. 그 자체로서 또 다른 세계가 존재한다고 해도, 여기에는 모순, 빈틈이 있습니다. 허드슨 부인과 명왕성과 <자본론>이 모순, 빈틈을 드러내는 것처럼, 외계 행성 테라포밍 역시 모순을 드러냅니다.
비록 허드슨 부인이 명왕성을 알지 못하고, 프리드리히 엥겔스를 만난 적이 없고, <자본론>을 읽지 않는다고 해도, 셜록 홈즈 이야기 속에서 허드슨 부인과 명왕성과 <자본론>은 함께 존재할 수 있습니다. 허드슨 부인과 명왕성과 <자본론>처럼, 소설, 만화, 영화, 연극, 게임이 뭔가를 말하지 않는다고 해도, 뭔가는 존재할 수 있습니다. 게임 <테라포밍 마스>는 자본주의를 비판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탐정 소설 독자가 셜록 홈즈 이야기 속에 프리드리히 엥겔스를 집어넣는 것처럼, 게임 플레이어는 자본주의 비판을 집어넣을 수 있습니다. 자본주의 시장 경제가 외계 행성을 성공적으로 테라포밍할 수 있나요?
만약 이게 성공한다고 해도, 이게 정말 성공인가요? 이윤 극대화를 위해 자본주의는 자연 환경을 반드시 파괴해야 합니다. 본질적으로 자본주의와 환경 오염은 떨어지지 못합니다. 남한 시민들은 중국 대기 오염을 비난하나, 중국 대기 오염은 세계화 자본주의를 뒷받침합니다. 세계화 자본주의를 숭배하는 남한 정부는 중국 대기 오염에 큰절을 올려야 합니다. 그래서 녹색 자본주의는 근본부터 글러먹은 헛소리입니다. 최근에 신종 바이러스 때문에 전국은 들썩입니다. 언론 매체들은 신종 바이러스 사태를 아주 열심히 보도합니다. 다들 이것을 아주 열심히 떠듭니다. 하지만 오직 신종 바이러스 사태만 문제인가요?
메르스 사태가 지나간 것처럼, 신종 바이러스 사태 역시 지나갈지 모릅니다. 하지만 신종 바이러스 사태가 지나간다고 해도, 기후 변화는 사라지지 않습니다. 기후 변화는 행성급 환경 오염입니다. 아무리 기후 변화가 행성급 환경 오염이라고 해도, 언론 매체들은 기후 변화를 보도하지 않을 테고, 사람들은 기후 변화를 떠들지 않을 겁니다. 다들 기후 변화, 행성급 환경 오염을 열심히 외면할 겁니다. 신종 바이러스와 기후 변화 중에서 무엇이 훨씬 심각한 문제인가요? 대답은 기후 변화일 겁니다. 아무리 신종 바이러스가 긴박하다고 해도, 신종 바이러스보다 행성급 환경 오염으로서 기후 변화는 훨씬 심각합니다.
하지만 언론 매체들이 신종 바이러스 사태를 아주 열심히 떠든다고 해도, 언론 매체들은 기후 변화를 떠들지 않습니다. 언론 매체들은 기후 변화를 너무 피상적으로 다룹니다. 이유가 무엇인가요? 기후 변화 배후에 자본주의 시장 경제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윤 극대화를 위해 자본주의가 환경 운동을 억압하고, 가로막고, 왜곡하기 때문입니다. 오직 이윤만을 위해 자본주의는 자연 환경을 반드시 파괴해야 합니다. 그래서 녹색 자본주의는 글러먹은 헛소리입니다. 비록 자본주의 경제가 외계 행성을 테라포밍한다고 해도, 이건 성공이 아닐 겁니다. 오히려 이건 또 다른 식민지 수탈일 겁니다.
외계 행성 테라포밍은 또 다른 대기 오염, 또 다른 플라스틱 쓰레기 섬, 또 다른 기후 변화일 겁니다. 게임 <테라포밍 마스>는 이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테라포밍 마스>가 말하지 않는다고 해도, 게임 플레이어는 자본주의 비판을 게임 속에 집어넣을 수 있습니다. 물론 <자본론>과 외계 행성 테라포밍은 다릅니다. 마르크스/엥겔스는 <자본론>을 썼고, 이건 구체적인 사건입니다. 아직 인류 문명이 외계 행성을 테라포밍하지 않았기 때문에, <자본론>과 달리, 외계 행성 테라포밍은 구체적인 사건이 아닙니다. 그래서 셜록 홈즈 이야기보다 <테라포밍 마스>에는 훨씬 커다란 빈틈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