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생태주의
<수경 재배 실험실>과 영성으로서 생명 현상 본문
위 그림은 수경 재배 실험실을 보여줍니다. 하지만 일반적인 수경 재배 실험실과 달리, 여기는 울창한 숲 속 같습니다. 식물들이 재배 구역들을 벗어났고 사방으로 퍼졌기 때문입니다. 그림 속에는 실험실 연구원들이 없습니다. 그림 속에서 인간들은 보이지 않습니다. 그림 속에는 오직 식물들과 버섯들만 있습니다. 어쩌면 수경 재배 실험실은 어떤 사고에 부딪혔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실험실 연구원들은 사라졌고, 아무도 실험실을 관리하지 않았고, 식물들과 버섯들은 재배 구역들을 벗어났는지 모릅니다. 식물들은 사방으로 번성했고 실험실을 녹색 기운으로 가득 채웠습니다.
이런 장면은 왜 생명 현상이 신비하고 장엄하고 아름다운지 보여줍니다. 생명 현상은 '번성'입니다. 아무도 통제하지 않았기 때문에, 식물들은 사방으로 번성하기 시작했고 실험실을 녹색 기운으로 물들일 수 있었습니다. 누군가가 지시하거나 명령하지 않는다고 해도, 생명 현상은 스스로 번성합니다. 사실 생명 현상에게 번성은 지상 과제입니다. 아주 작은 미생물부터 거대한 향유 고래와 세콰이어까지, 생명 현상은 번성하기 원합니다. 수경 재배 실험실이 울창한 삼림이 되는 것처럼, 몇 억 년 전부터 생명 현상은 지구를 채우기 시작했고 살아있는 상호 작용을 조성했습니다.
기계는 생명 현상과 다릅니다. 기계는 스스로 번성하지 않습니다. 만약 인간이 직접 명령하지 않고 프로그램을 짜지 않는다면, 기계는 스스로 번성하지 않을 겁니다. 어쩌면 나중에 상급 인공 지능은 자신이 생명체와 비슷하다고 주장할지 모릅니다. 미래 상급 인공 지능은 스스로 번성하기 원할지 모릅니다. 그렇다고 해도 만약 기계가 생명 현상을 모방하지 않는다면, 기계는 스스로 번성하지 못할지 모릅니다. 비록 기계가 스스로 번성한다고 해도, 분명히 기계보다 생명체는 선천적입니다. 인간은 기계를 만들었습니다. 기계에게는 용도가 있으나, 생명체에게는 용도가 없습니다.
생물학자들은 어떻게 생명 현상이 나타났는지 확실히 알지 못합니다. 생물학자들이 원시적인 인공 생명체를 합성하고 유기물 찌개를 조합한다고 해도, 생물학자들은 생명 현상 기원을 알지 못합니다. 어쩌면 소설 <라마와의 랑데부>에서 라마 바다가 생명체들을 낳는 것처럼, 원시적인 생명체들은 나타났는지 모릅니다. 비디오 게임 <문명: 비욘드 어스>에서 유기물 찌개 제노매스가 떡대 괴수 병기 제노 타이탄을 진화시키는 것처럼, 유기물 찌개에서 생명 현상은 진화했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여기에는 확실한 근거가 없고, 생물학자들은 생명 현상 기원을 밝히기 원합합니다.
어쩌면 지구 생명 현상은 스스로 발생하지 않았는지 모릅니다. 지구에서 외계인들은 생명 현상을 퍼뜨렸는지 모릅니다. 아니면 다른 행성에서 지구를 향해 (외계) 생명체들은 날아왔는지 모릅니다. 외계에서 지구 생명체들은 비롯했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정말 외계에서 지구 생명체들이 비롯했다고 해도, 근본적인 문제는 사라지지 않습니다. 어디에서 외계 생명체들이 비롯했나요? 어떻게 최초의 외계 생명체가 나타날 수 있었나요? 생물학자들은 알지 못합니다. 다른 학문 분야들처럼, 생물학자들은 기원을 찾고 계보를 그리기 원합니다. 모든 학문 분야에서 계보는 가장 근본적인 연구 주제일 겁니다.
사상과 현상은 끊임없이 바뀝니다. 사상과 현상은 고정적이지 않습니다. 불과 150년 동안, 마르크스주의는 엄청나게 확장했고 갈라졌습니다. 그래서 만약 철학자들이 마르크스주의를 제대로 연구하기 원한다면, 철학자들은 복잡한 마르크스주의 계보를 그려야 할 겁니다. 인류 문명 역시 끊임없이 바뀌었습니다. 만약 역사학자들이 인류 사회를 연구하기 원한다면, 역사학자들은 어떻게 인류 사회가 바뀌었는지 복잡한 계보를 그려야 할 겁니다. 마르크스주의처럼, 불과 150년 동안 SF 장르 역시 끊임없이 확장했고 갈라졌습니다. 만약 SF 평론가가 복잡한 장르 계보를 만들지 않는다면, 평론가는 SF 소설들을 제대로 비평하지 못할 겁니다.
생물학자들 역시 생명 진화 계보를 그려야 합니다. 사실 생물학자들은 생명의 나무를 그리고 계보를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기원입니다. 디거스, 마르크스주의, 생태 사회주의를 보세요. 21세기 초반 오늘날, 생태 사회주의는 생산 수단 공유와 드넓은 야생 보호 구역을 주장합니다. 하지만 생태 사회주의가 본격적으로 나타나기 전에, 이미 17세기 디거스는 "인간들은 짐승들과 새들과 물고기들과 함께 토지를 공유해야 한다."라고 주장했습니다. 17세기 디거스, 21세기 초반 생태 사회주의는 모두 사회주의 계열에 속합니다. 마르크스주의는 가장 거대한 사회주의 계열입니다. 그래서 마르크스주의 계보가 17세기 디거스와 21세기 초반 생태 사회주의를 연결할 수 있나요?
21세기 초반 생태 사회주의와 17세기 디거스 사이에서 계보가 존재하나요? 17세기 디거스가 선구적이거나 원형적인 생태 사회주의자들인가요? 21세기 초반 생태 사회주의에게 17세기 디거스가 '기원'이나 '원류'가 될 수 있나요? (이 블로그는 어떤가요? 생태학 SF 블로그가 디거스를 정신적으로 계승할 수 있나요?) SF 장르 역시 비슷합니다. SF 평론가들은 메리 셸리가 본격적인 SF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메리 셸리 이전에 SF 소설들이 없었나요? 이른바 원형적인 SF 소설들은? 마가렛 캐번디시가 <불타는 세계>를 썼기 때문에, 마가렛 캐번디시가 원형적인 SF 작가인가요? SF 평론가가 원형적인 SF 소설을 이야기할 때, SF 평론가가 마가렛 캐번디시를 파악해야 하나요?
생명 현상 기원은 훨씬 어려운 문제입니다. 적어도 인류 문화에서 생태 사회주의와 사이언스 픽션은 비롯했습니다. 하지만 인류 문명은 생명 현상을 만들지 않았습니다. 생물학자들은 생명의 나무를 그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생물학자들은 어디에서 생명의 나무가 비롯했는지 알지 못합니다. 우리는 생명 현상 기원을 알지 못합니다. 나중에 유인 우주선이 외계 행성을 탐사한다고 해도, 우주선 승무원들은 외계 생명체를 파악하지 못할지 모릅니다. 외계 행성에 생명체들이 있다고 해도, 우주선 승무원들은 외계 생명체들을 파악하지 못할지 모릅니다. 그래서 생물학자들은 기원을 찾고 무엇이 생명 현상을 낳았는지 알기 원합니다. 생물학자들은 생명 생산 조건을 알기 원합니다. 근본적인 학문은 이런 것일 겁니다.
근본적인 학문은 생산 조건을 파악해야 합니다. 근본적인 학문은 '생산 조건을 파악하기 위한 과정'일 겁니다. 하지만 마르크스주의 철학자들 및 SF 평론가들과 달리, 생물학자들은 생명 생산 조건을 심층적으로 파악하지 못합니다. 생명 현상이 선천적이기 때문에, 생명 현상이 원대하기 때문에, 생물학자들은 심층적으로 알지 못합니다. 생물학자들은 이게 섭섭하다고 느낄지 모르나, 오히려 이것 때문에, 생명 현상은 신비롭고 장엄하고 아름답습니다. 생명 현상은 선천적이고, 수경 재배 실험실 그림이 보여주는 것처럼, 선천적인 생명 현상은 스스로 번성합니다. 누가 지시하지 않는다고 해도, 생명 현상은 스스로 엔트로피를 (국지적으로) 늦추고, 번성하고, 진화합니다.
기계는 스스로 번성하지 않습니다. 생명 현상과 달리, 기계는 원대하지 않고 신비롭지 않습니다. 이건 기계 공학이 시시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만약 기계 공학이 시시하다면, 이렇게 인터넷 블로그에서 저는 게시글을 쓰지 못할 겁니다. 첨단 기계 공학 덕분에, 동영상 사이트에서 저는 수경 재배 실험실 동영상들을 구경할 수 있습니다. 기계 공학이 인터넷과 컴퓨터를 발명했기 때문에, 창작 그림 사이트에서 저는 수경 재배 실험실 그림들을 구경할 수 있습니다. 수경 재배 실험실은 우주선 내부 녹색 삼림 같습니다. 수경 재배 실험실 그림들은 (폐쇄) 인공 생태계 분위기를 강하게 풍깁니다.
수경 재배 실험실이 정말 인공 생태계가 아니라고 해도, 여기에는 유사성이 있습니다. 기계 공학 덕분에, 저는 이런 것들을 구경하고 감상할 수 있습니다. 기계 공학은 멋집니다. 그렇다고 해도 기계는 선천적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기계는 스스로 엔트로피를 늦추거나 스스로 번성하지 못합니다. 생명 현상에게 근대적인 진보가 어울리지 않는다고 해도, 오히려 생명 현상에게 근대적인 진보가 어울리지 않기 때문에, 생명 현상은 신비롭습니다. 분명히 여기에는 영성이 있습니다. 우리가 드루이드가 구태여 되지 않는다고 해도, 우리는 수경 재배 그림에서 신비로운 영성을 느낄 수 있습니다.
비단 수경 재배 실험실 그림만 아니라 포스트 아포칼립스들 역시 비슷한 장면들을 연출합니다. 리처드 제프리스가 쓴 소설 <애프터 런던>부터 윌 스미스가 주연한 영화 <애프터 어스>까지, 여러 포스트 아포칼립스들에서 생명 현상은 번성하고 인류 문명을 뒤덮습니다. 식물들이 건물들을 뒤덮을 때, 이런 장면은 포스트 아포칼립스를 대표할 수 있습니다. 생명 현상이 스스로 번성하기 때문에, 만약 인류 문명이 장대한 야생 보호 구역을 만든다면, 생물 다양성은 스스로 복원할 수 있을지 모릅니다. 그래서 드넓은 야생 보호 구역은 중요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은 다른 무엇보다 세계화 자본주의입니다. 자본주의는 야생 보호 구역을 절대 좋아하지 않습니다. 자본주의가 시장 경제를 끊임없이 확장하고 비자본 영역으로 과잉 생산 자본을 계속 밀어넣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생물 다양성 복원은 험난한 장애들을 거쳐야 합니다. 그래서 로자 룩셈부르크의 저 유명하고 유명한 물음 "사회주의냐, 야만이냐?"처럼, 우리는 선택해야 합니다. 야생 보호 구역인가, 아니면 자본주의인가. 대답은 확실합니다. 신비로운 번성을 위해 우리는 자본주의를 타파해야 할 겁니다.
※ 그림 <Hydroponics Lab> 출처: Alan O. Brie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