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생태주의
<태양이 없는 땅>의 남자 창조자들 본문
소설 <태양이 없는 땅>은 기후 변화가 인류 문명을 무너뜨렸다고 이야기합니다. 소설 속에서 여러 대륙들은 물에 잠겼고, 당연히 대도시들 역시 바다에 잠겼습니다. 몇몇 폐허만 수면 위에 고개를 내밀었을 뿐이고, 사람들은 폐허 속을 돌아다닙니다. 소설 주인공 소녀는 과거 문명이 남긴 지식에 관심이 많고, 그래서 폐허가 된 도서관을 들락거립니다. 도서관에서 소녀는 여러 위인들을 만나요. 갈릴레오, 뉴튼, 아인슈타인, 플레밍, 버질, 플라톤, 셰익스피어, 밀튼, 단테, 바이런, 번스, 톨스토이, 루소, 막스.
도서관은 이 사람들이 창조자라고 말하고, 소녀는 고개를 갸웃거립니다. 위대한 창조차가 모두 남자이기 때문입니다. 갈릴레오는 남자이고, 아이슈타인은 남자이고, 루소는 남자입니다. 소녀는 위인 초상화들을 둘러보나, 여자를 찾지 못합니다. 만약 현대 문명이 정말 무너지고, 미래 사람들은 폐허를 헤맨다면, 그들 역시 남자 위인들을 많이 만날지 모릅니다. 현대 문명은 여자 지식인들을 별로 인정하지 않죠. 과거에 비해 여자 지식인들은 많이 늘어났으나, 여전히 지식과 학문은 남성적인 영역입니다. 다들 남자 철학자와 남자 과학자와 남자 탐험가를 이야기해요.
철학 역사 사전이나 과학 역사 사전은 남자 지식인들을 이야기합니다. 여자 철학자, 여자 과학자, 여자 탐험가는 거의 없습니다. 아무리 좌파적인 지식인이라고 해도, 결국 그 사람은 남자입니다. 소설 주인공 소녀가 본 지식인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바이런이나 톨스토이, 루소는 꽤나 급진적인 지식인들입니다. 소녀가 본 막스가 누구인지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막스 베버일지 모르고, 칼 맑스일지 모르죠. 하지만 위인 초상화들이 (이름이 아니라) 성씨들을 열거했기 때문에 저는 그 사람이 (막스 베버가 아니라) 칼 맑스라고 생각합니다.
칼 맑스와 프리드리히 엥겔스는 급진적인 철학자들이고, 여자를 착취하는 자본주의를 비판했습니다. 하지만 맑스와 엥겔스 역시 남자죠. 사람들은 근대 유럽이 문명 사회였다고 칭송하나, 근대 유럽은 여자들을 평등하게 대접하지 않았습니다. 21세기 초기 지금까지 이런 성 차별들은 아직 사라지지 않았고, (인류가 미래까지 생존한다면) 미래 사람들은 21세기 사람들이 성 차별적이라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우리가 사회 구조를 당장 바꾸지 않는다면, 미래 사람들은 21세기를 후진적인 성 차별 시대라고 여기겠죠.
여자들이 정말 멍청했을까요. 여자들이 멍청하기 때문에, 남자들이 훨씬 똑똑하기 때문에, 대부분 철학자들과 과학자들과 탐험가들이 남자일까요. 그건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다. 여자 철학자나 탐험가가 없는 이유는 사회 구조가 가부장적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사회 구조가 남자들을 우대하기 때문에 여자들은 기회를 얻지 못했어요. 대규모 노동, 공장 생산, 군대 훈련은 강한 근력을 요구하고, 그래서 사회 구조는 남자들을 우대했죠. 이런 사회 구조는 남자가 여자보다 뛰어나다는 관념을 형성했고, 다들 그런 관념을 따랐습니다.
하지만 남자가 여자보다 근력이 뛰어나다고 해도, 남자가 좀 더 농사를 잘 짓거나 사냥을 잘 하거나 사람을 잘 죽인다고 해도, 그게 남자가 여자보다 뛰어나다는 뜻은 아닙니다. 육체적인 활동은 인간을 판별하는 기준이 되지 못합니다. 하지만 봉건 체계와 자본주의 체계는 육체적인 활동으로 인간을 판별했고, 그런 구조는 남자가 여자보다 뛰어나다는 관념을 형성했어요. 그런 구조가 지배 계급에게 유리했기 때문이죠. 남자가 더 힘들게 일하고 더 많은 사람들을 죽일수록 지배 계급은 더 많은 권력을 쌓을 수 있었습니다.
봉건 체계와 자본주의 체계 모두 근본적으로 착취적이고 불평등한 체계입니다. 당연히 이런 사회 구조 속에서 사람들은 평등을 꿈꾸지 못해요. 이런 사회 구조는 누군가를 억누르고, 여자들은 철학자가 되고 과학자가 되는 기회를 얻지 못하죠. 무엇보다 가장 큰 문제는 국가일 겁니다. 국가는 군대를 원하고, 군대는 남자 병사들을 원합니다. 그래서 국가 이데올로기는 남자(병사)를 명예롭게 포장하죠. 하지만 군대와 전쟁에는 명예 따위가 없습니다.
몇몇 예외적인 사례 이외에 군대는 그저 지배 계급에게 복종하는 폭력적인 집단에 불과하죠. 일반적으로 군대는 지배 계급에게 충성하고 약자들을 학살하죠. 그래서 국가라는 억압적인 구조가 깨지지 않는다면, 적어도 국가가 아주 획기적으로 바뀌지 않는다면, 성 차별은 사라지지 않을 겁니다. 국가가 없어지지 않는다면, 가부장적인 광신은 사라지지 않을 테고, 여자들은 계속 고통을 겪고 뒤로 밀려나야 할 겁니다. 그래서 세상을 창조하는 위대한 지식인들은 남자들일 겁니다. 저는 <태양이 없는 땅>에서 이 부분이 마음에 들더군요. 누군가는 왜 위인들이 남자인지 물어봐야 하겠죠.
※ 소녀가 도서관에서 본 위인들은 서구 문명 사람들이로군요. 위인들이 남자라는 사실만 아니라 위인들이 서구 문명 사람들이라는 사실 역시 문제인 것 같습니다. 유럽(백인) 중심주의 역시 엄청난 편견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