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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 체계는 이미 안락한 멸망 본문

SF & 판타지/디스토피아, 아포칼립스

자본주의 체계는 이미 안락한 멸망

OneTiger 2018. 3. 29. 20:01

소설가 브라이언 올디스는 'cosy catastrophe'라는 용어를 만들었습니다. 저는 이걸 안락한 멸망이라고 부릅니다. 왜 안락할까요. 다른 사람들은 고통을 받으나, 소설 주인공은 그렇지 않고 다른 사람들보다 우위에 서기 때문입니다. 존 윈덤이 쓴 <트리피드의 날>에서 대부분 사람들은 장님이 됩니다. 앞을 볼 수 있는 사람은 극소수입니다. 소설 주인공은 무사히 앞을 볼 수 있어요. 그래서 소설 주인공은 초인이 됩니다. 장님들이 사는 나라에서 앞을 볼 수 있는 사람은 초인과 마찬가지입니다.


구원자처럼 주인공은 다른 사람들을 이끌고 보살피고 먹거리를 줍니다. 다른 사람들이 고통을 받고 지옥을 헤매더라도, 주인공은 고통을 피할 수 있고 지옥을 넘어갈 수 있습니다. 오히려 소설 주인공은 느긋하고 안전한 피난처를 찾고, 거기에서 잘 먹고 잘 쉽니다. 아리따운 아가씨와 함께. 아마 많은 독자들은 앞을 볼 수 없는 대부분 사람들보다 앞을 볼 수 있는 소설 주인공에게 감정을 이입할 겁니다. 독자는 고통을 받는 대부분 사람들보다 안락하게 쉬는 주인공에게 초점을 맞출 겁니다. 브라이언 올디스는 그걸 비판하기 원했고, 그래서 안락한 멸망이라는 용어를 만들었죠.



안락한 멸망은 꽤나 매력적인 장르입니다. <트리피드의 날>에서 앞을 볼 수 있는 주인공은 얼마든지 다른 사람들을 지배할 수 있습니다. 주인공이 마음을 먹었다면, 왕이 될 수 있었을 겁니다. 먹고 살기 위해 어떤 여자는 주인공에게 육체를 바치기 원했습니다. 게다가 앞을 볼 수 있는 일부 사람들은 앞을 볼 수 없는 사람들을 지배하기 원했어요. 안락한 멸망은 소설 주인공을 권위적인 자리로 밀어올릴 수 있고, 소설 주인공은 초인이나 구원자가 될 수 있죠. 소설 주인공을 돋보이게 꾸미고 싶은 작가는 안락한 멸망을 멋지게 써먹을 수 있을 겁니다. 직장 상사가 미운가요? 옆집 아저씨가 미운가요? 다른 사람들이 지옥인가요? 혼자 멋지게 살고 권위를 휘두르고 싶은가요?


여기에 안락한 멸망 장르가 있습니다. 안락한 멸망 소설 속에서 직장 상사가 고통을 받고, 옆집 아저씨가 지옥을 헤매고, 다른 사람들이 신음하는 동안, 주인공은 혼자 잘 먹고 잘 살 수 있습니다. 주인공은 다른 사람들을 짓밟거나, 짓밟지 않는다고 해도 얼마든지 우위에 설 수 있어요. 하지만 이런 소설은 다른 사람들의 불행을 이용해 주인공을 안락한 자리로 밀어올립니다. 다른 사람들의 고통 위에서 주인공은 안락해질 수 있죠.



<트리피드의 날>이 그렇게 못되먹은 소설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저는 <트리피드의 날>에 여러 문제점들이 있다고 생각하나, 오직 <트리피드의 날>만 걸고 넘어지고 싶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수많은 작가들이 어떻게 현대 자본주의 문명이 존재할 수 있는지 이야기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간단히 생각해볼 수 있어요. 어떻게 자본주의 체계가 존재할 수 있었을까요. 어떻게 서부 유럽이나 북아메리카는 자본주의 강대국이 될 수 있었을까요. 왜 일본이나 한국은 자본주의 강대국이 되었음에도 동남 아시아 국가들은 그렇지 못했을까요.


만약 유럽 침략자들이 아메리카나 아프리카 식민지를 수탈하지 않았다면, 유럽 국가들이 부를 축적할 수 있었을까요. 만약 유럽 침략자들이 부족민들을 학살하지 않았다면, 미국이나 캐나다가 등장할 수 있었을까요. 만약 영국이 인도의 산업 발전을 파괴하지 않았다면? 미국이 동남 아시아나 남아메리카 사회주의 세력들을 짓밟지 않았다면? 모든 사람이 자본주의 체계를 이룩하는 상황에 동의했다면? 소수 권력자들이 힘으로 토지를 빼앗지 않았다면? 우리는 이런 것들을 물어봐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살아가는 자본주의 체계는 그런 학살과 수탈 위에 서있기 때문입니다.



자본주의 국가에서 중산층들이 잘 먹고 잘 사는 이유에는 뒷배경이 있습니다. 숱하게 죽어간 부족민들, 여자들, 흑인들, 노예들, 농민들, 약소국 공산당들, 야생 동식물들이 있습니다. 그들의 피무덤 위에 자본주의 체계는 서있습니다. 안락한 멸망이 비단 <트리피드의 날>을 가리킬까요. 그렇지 않아요. 이미 현실은 안락한 멸망입니다. 평등한 공동체들이 멸망했기 때문에, 평등한 부족민들이나 마을 운동들이나 공산당들이 멸망했기 때문에, 자본주의 체계는 안락하게 살 수 있습니다. 자본주의 체계가 움켜쥔 부는 하늘에서 뚝 떨어지거나 땅에서 불쑥 솟지 않았습니다. 그건 누군가의 피이고, 누군가의 땀이고, 누군가의 살입니다.


이미 현실 자체가 포스트 아포칼립스입니다. 하지만 억압적인 구조를 유지하고 현실을 왜곡하기 위해 자본주의 체계는 계속 예쁘고 멋진 장면들만 강조합니다. 수많은 사람들은 그런 장면들만 쳐다보고, 자본주의를 숭배합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누구를 수탈했고 오염시켰는지 주목하지 않아요. 광신도처럼 그들은 그저 자본주의가 개인의 자유를 보장한다고 떠벌일 뿐이죠. 안락한 멸망 소설들을 비판하고 싶다면, 우리는 먼저 현실을 들여다봐야 할 겁니다. 정말 세상을 뒤집고 인류를 비판하고 싶다면, 그 전에 우리는 자본주의 체계가 안락한 멸망이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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