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생태주의
<피에 담긴 것>과 디스토피아 소설의 미덕 본문
웹 소설 <피에 담긴 것>은 비디오 게임 <스타크래프트 2>에서 비롯한 2차 공식 창작물입니다. 소설 주인공은 불량배들과 거래하는 어떤 기술자이고, 살벌하고 절망적인 우주 항구에서 살아갑니다. 우주 항구에서 수많은 불량배들, 빈민들, 용병들은 서로 죽이고, 싸우고, 갈취하고, 배신합니다. 어디에도 인간적인 따스함은 없고, 오직 생존하기 위해 다들 죽이고, 죽이고, 또 죽일 뿐입니다. 그들은 잠시 정을 맺을 수 있으나, 그건 별로 오래 가지 않습니다. 우주 항구에서 동정이나 연민은 사치에 불과하고, 누군가가 그런 사치를 부린다면 목숨을 지불해야 할 겁니다.
불량배들이나 용병들은 쉽게 목숨을 가져가지 않습니다. 희생양이 죽을 때까지 그들은 고통스럽게 괴롭히죠. 이런 상황 속에서 소설 주인공은 살아가는 이유나 희망을 잃습니다. 일상은 변하지 않고, 소설 주인공은 계속 잔인한 용병들과 비열한 불량배들과 밑바닥 사람들을 봐야 합니다. 하지만 어느 날, 주인공은 살아있는 저그 애벌레들을 만나고, 일상이 잠시 비틀린다고 느낍니다. 저그 애벌레가 주인공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을까요. 주인공이 저그 애벌레들을 이용할 수 있을까요.
<피에 담긴 것>은 기발하거나 깊이가 있는 소설이 아닙니다. 이건 비디오 게임에서 파생한 소설이고, 비디오 게임을 위해 존재하는 소설입니다. 종종 그런 2차 창작물이 특별한 결과로 이어질 수 있으나, <피에 담긴 것>은 그런 사례가 아니에요. 하지만 저는 이 웹 소설이 나름대로 재미있다고 생각합니다. 다소 진부한 구석으로 흘러가곤 하나, <피에 담긴 것>은 나름대로 미래 디스토피아의 일면을 그리려고 애씁니다. 이 소설에서 우주 전쟁이나 저그 군단은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스타크래프트>는 테란과 저그와 프로토스가 싸우는 군사적인 스페이스 오페라입니다.
하지만 <피에 담긴 것>은 스페이스 오페라와 거리가 멀어요. 소설 주인공은 불량배들과 거래하는 기술자이고, 강화복 보병이나 우주 함선 장교가 아닙니다. <피에 담긴 것>은 그저 <스타크래프트>를 빙자한 디스토피아 소설입니다. 이 소설에서 저그를 지운다고 해도 문제가 없을 겁니다. 저그 애벌레가 환경 오염에 찌든 돌연변이 생명체라고 설정해도, 소설 분위기는 변하지 않을 겁니다. 어쩌면 <스타크래프트>와 관계가 없기 때문에 이 소설이 나름대로 재미있는지 모르죠.
<피에 담긴 것>에서 정말 중요한 것은 저그 애벌레가 아니라 자본주의 시장 경제입니다. 이 소설이 묘사하는 절망적인 우주 항구는 자본주의가 만든 빈민가를 뻥튀기한 결과입니다. <피에 담긴 것>은 사이버펑크 작가들이 우울하게 상상한 자본주의 비극을 그대로 따라갑니다. 이 소설은 우주 전쟁보다 근미래 디스토피아가 되고 싶어합니다. 하지만 작가는 그저 비극적인 상황을 연이어 강조할 뿐이고, 대안을 제시하거나 상황을 분석하지 않아요. 현실은 그저 현실일 뿐이고, 소설 주인공은 그저 발버둥칠 뿐입니다. 저는 이런 점이 아쉽습니다.
작가가 급진적인 대안을 제시하거나 상황을 자세히 분석했다면, <피에 담긴 것>은 훨씬 깊이가 있거나 파격적인 소설이 되었을지 모릅니다. 비단 <피에 담긴 것>만 아니라 수많은 디스토피아 소설들은 현실이 그저 현실이라고 말합니다. 그런 소설들은 현실을 분석하거나 대안을 제시하지 않아요. 디스토피아 작가에게 현실을 자세히 분석해야 할 의무가 있을까요. 작가에게 급진적인 대안을 내놓아야 할 의무가 있을까요.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SF 소설이 자본주의 비극을 뻥튀기한다고 해도, 디스토피아 작가에게 자본주의를 분석할 의무는 없을 겁니다.
문학이 얼마나 자세하게 현실을 반영해야 할까요. 문학이 무조건 현실에 참여해야 할까요. 문학이 현실에 참여해야 한다면, 얼마나 깊이 참여해야 할까요. 아마 각자 의견이 다를 겁니다. 저는 문학이 반드시 현실에 참여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해요. 설사 SF 작가가 마르크스주의자라고 해도, 소설에 무조건 마르크스주의를 집어넣을 의무는 없을 겁니다. 그렇다고 해도 저는 SF 작가들이 현대 문명을 좀 더 깊게 분석하고 대안을 제시하기 바랍니다. SF 소설은 미래 사회를 이야기합니다. <피에 담긴 것> 역시 미래 사회를 묘사하죠.
아무리 SF 소설 속의 미래가 비유나 뻥튀기라고 해도, 미래를 이야기하는 작가는 먼저 현대 문명을 분석할 수 있어야 할 겁니다. 현대 문명을 파악하지 못하는 작가가 어떻게 미래 사회를 그릴 수 있겠어요. 게다가 현실을 제대로 분석하지 않는다면, 디스토피아 작가는 삼천포로 빠지고 헛소리를 떠들 수 있어요. 짧고 작은 이야기를 전개하기 때문에 다행히 <피에 담긴 것>은 그런 삼천포에 빠지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분량이 길고 규모가 큰 디스토피아는 삼천포로 쉽게 빠질 수 있어요. 저는 그런 디스토피아들을 많이 봤습니다. (<세계 대전 Z> 같은 소설은 좀비 아포칼립스를 이용해 열심히 헛소리를 떠들죠.)
그리고 SF 작가들이 현대 문명을 좀 더 깊게 분석한다면, 현대 문명을 반영하는 진부한 공식 역시 피할 수 있을 겁니다. 아무리 작가가 뛰어난 필력을 선보이거나 복선들을 멋지게 활용해도, 진부한 공식을 따라가는 소설은 진부한 소설이 되겠죠. <피에 담긴 것>을 근미래 디스토피아라고 간주한다고 해도, 이 소설은 진부한 디스토피아 공식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장르 작가들은 장르적인 공식을 발전시켜야 할 미덕이 있어요. <피에 담긴 것>은 뻔한 디스토피아입니다. 작가가 급진적인 대안을 제시했다면, <피에 담긴 것>은 훨씬 파격적인 소설이 될 수 있었겠죠.
※ <커맨드 앤 컨쿼>나 <KKND>, <스타크래프트> 같은 게임들은 실시간 전략 게임이라고 불립니다. 하지만 저는 이런 게임들이 전략 게임이 아니라 전술 게임이라고 생각합니다. 진짜 전략 게임은 <마스터 오브 오리온>이나 <엔들리스 스페이스> 같은 종류가 아닐까요. 훨씬 깊고 풍부하기 때문이죠. 어쩌면 실시간이라는 장르 자체가 전략과 어울리지 않는지 모르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