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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 생태주의

사이버펑크 소설과 연애 소설의 신분 격차 본문

SF & 판타지/디스토피아, 아포칼립스

사이버펑크 소설과 연애 소설의 신분 격차

OneTiger 2018. 3. 12. 20:09

여기에 전형적인 연애 소설이 있습니다. 이 연애 소설에서 어떤 대기업 회장의 아들과 가난한 아가씨는 서로 사랑하는 사이입니다. 하지만 회장 일가는 결혼에 반대하겠죠. 회장 부부는 가난한 아가씨와 그 가족을 무시합니다. 회장 부부는 가난한 가족에게 온갖 비난들과 폭언들을 퍼붓고, 심지어 실력 행사에 나섭니다. 재벌에게 가난한 일가족을 압박하기는 어렵지 않겠죠. 독자들은 그 광경을 보고 다들 화를 내거나 혀를 찰 겁니다. 가난한 아가씨는 숱한 굴욕들을 견뎌야 했으나, 사랑하는 사람을 믿고 포기하지 않습니다.


결국 사람들은 아가씨가 드러내는 진심을 인정하고, 심지어 회장 부부조차 가난한 아가씨를 인정합니다. 아가씨는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하고, 행복하게 잘 삽니다. 저는 연애 소설을 많이 읽지 않았습니다. 사실 거의 읽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이런 줄거리는 별로 특별하지 않을 겁니다. 수많은 연애 소설들은 대기업들과 재벌들과 회장들과 본부장들과 가난한 사람들과 신분 격차와 그런 것들을 이야기하겠죠. 그런 연애 소설들 속에서 대기업, 취직 문제, 돈벌이, 높은 신분은 여러 문제들을 일으키겠죠. 숱한 TV 드라마들 역시 그렇고요.



여기에 사이버펑크 소설이 하나 있습니다. <쿼런틴>이나 <얼터드 카본>이나 <리포맨>은 같은 소설은 적당한 사례가 되겠군요. 사이버펑크 소설은 전형적이고 암울한 미래 사회를 묘사합니다. 대기업들은 모든 것을 장악했고, 엄청난 부를 차지했습니다. 대도시를 장식하는 어마어마한 마천루와 화려한 간판들과 첨단 공장들은 대기업들이 얼마나 대단한지 증명합니다. 재벌들은 절대 권력을 움켜쥐었고, 정치인들은 재벌들과 긴밀하게 붙어먹습니다. 재벌들이 막대한 부를 얻는 만큼, 다른 한쪽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굶주립니다. 먹고 살기 위해 사람들은 대기업들에게 매달리거나 비인간적이고 위험한 일거리에 매달려야 합니다.


덕분에 각종 살인과 범죄는 더 이상 엽기적이지 않습니다. 이런 미래 도시에서 소설 주인공은 (전직 형사인) 탐정이고, 어떤 살인 사건을 수사합니다. 어떤 환경 보호 단체의 회원이 죽었기 때문입니다. 사건을 수사하는 동안 탐정은 이게 악덕 대기업과 이어졌다는 사실을 깨닫고, 전전긍긍합니다. 탐정이 사건을 계속 수사한다면, 대기업은 쥐도 새도 모르게 탐정을 없애버릴 수 있어요. 이런 줄거리는 특별하지 않습니다. <얼터드 카본>이나 <리포맨> 같은 소설을 읽어본다면, 이런 줄거리를 쉽게 연상할 수 있을 겁니다.



첫째 문단에서 언급한 연애 소설과 둘째 문단에서 언급한 사이버펑크 소설은 서로 비슷합니다. 핵심적인 갈등이 대기업에게서 비롯했기 때문입니다. 연애 소설에서 재벌 회장 부부는 가난한 아가씨를 모욕하고 압박합니다. 만약 주인공이 재벌 아들을 사랑하지 않았다면, 핵심적인 갈등은 터지지 않았을 겁니다. 연애 소설에서 주인공이 신분 장벽을 깨고 사랑을 얻는 과정은 주된 부분을 차지할 겁니다. 이런 이야기는 언제나 흥미롭고, 그래서 독자들은 대기업과 재벌 회장과 본부장과 가난한 아가씨가 나오는 연애 소설에 열광하겠죠.


사이버펑크 소설 역시 대기업을 핵심적인 갈등에 집어넣습니다. 사이버펑크 소설에서 대기업은 환경 보호론자가 죽은 사건과 이어졌고, (전직 형사인) 탐정을 압박합니다. 돈벌이를 위해 대기업은 사람을 죽였을지 모르나, 탐정은 함부로 대기업의 비밀을 캐지 못합니다. 대기업은 살인 청부업자를 고용할 테고, 언제 사이버웨어를 장착한 살인 청부업자가 탐정을 해칠지 모릅니다. 이는 너무 뻔한 줄거리일지 모릅니다. 하지만 인기가 많죠. SF 출판 시장에서 이런 소설들은 여전히 높은 인기를 자랑할 겁니다. SF 게임들 역시 마찬가지고요.



왜 연애 소설과 사이버펑크 소설은 대기업을 내세웠을까요. 당연히 자본주의 체계가 현대 문명을 떠받치기 때문입니다. 자본주의 체계에서 자본이 가장 많은 대기업은 가장 강력한 존재입니다. 그런 존재를 이야기할 때, 연애 소설과 사이버펑크는 심각한 갈등을 전개할 수 있겠죠. 여기에서 저는 한 가지 묻고 싶습니다. 연애 소설에 비해 사이버펑크 소설은 뭔가 더 거대하고 심각하게 보입니다. 일상적인 사랑을 이야기하는 연애 소설보다 첨단 미래 도시와 거대한 마천루와 사이버웨어와 인공 지능을 이야기할 수 있는 사이버펑크가 더 대단해 보이겠죠.


사실 그렇게 자부심을 느끼는 SF 독자들이 없지 않아요. 어떤 독자들은 거대하고 미래적인 SF 소설이 시시껄렁한 연애 소설보다 훨씬 우월하다고 느낄지 모르죠. 고장원 평론가가 지적한 것처럼 그건 드문 사례가 아닙니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요. 정말 연애 소설에 비해 사이버펑크 소설이 대단할까요. 겉보기는 그렇습니다. 하지만 알맹이는? 이 자랑스럽고 거대하고 웅장한 사이버펑크 소설은 자본주의 체계를 제대로 분석할까요. 아니면 그저 볼거리로서 이용할까요. 안타깝게도 숱한 사이버펑크 소설들은 자본주의 시장 경제를 분석하지 않습니다.



만약 제가 사이버펑크 소설들이 연애 소설과 똑같다고 말한다면, 여러 SF 독자들은 분노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저는 연애 소설과 사이버펑크 소설이 똑같다고 생각해요. 양쪽 모두 자본주의 시장 경제에 무심하죠. 아무리 첨단 미래 도시와 거대한 마천루와 사이버웨어와 인공 지능을 늘어놓는다고 해도, 그게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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