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생태주의
<카본 다이어리 2015>와 <코랄> '배후'에서 본문
[이건 Cli-Fi 소설이 아닙니다. 하지만 Cli-Fi 소설보다 산호초 게임은 Cli-Fi 소설에 가까워질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자연과 문명이 다르다고 구분합니다. 자연에서 인류는 비롯했고, 인류는 문명을 건설했고, 그래서 자연 속에서 문명은 나타납니다. 자연에서 인류가 비롯했기 때문에, 여전히 자연 속에서 인류는 먹고 삽니다. 자연 없이, 인류는 살지 못합니다. 자연 속에서 인류가 먹고 살고, 인류가 문명을 건설했기 때문에, 자연 없이, 문명은 나타나지 못합니다. 자연과 문명은 다르지 않습니다. 오직 자연 속에서만 문명이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자연과 문명은 단순한 이분법입니다. 하지만 공통점처럼, 차이는 중요합니다. 꿀벌들은 태블릿 PC를 만들지 않고 인터넷을 개설하지 않습니다.
꿀벌들은 첨단 잠수정을 건조하지 않고 무인 드론을 설계하지 않습니다. 분명히 꿀벌과 인간에게는 유사성이 있으나, 동시에 꿀벌과 인간은 크게 다릅니다. 아무리 우리가 동물 권리를 존중한다고 해도, 우리는 이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만약 우리가 자연과 문명을 잘못 해석한다면, 만약 우리가 야생 동물과 인간이 완전히 똑같다고 간주한다면, 우리는 온갖 착취들을 태생적인 것,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착각할 겁니다. 찰스 다윈을 보세요. 찰스 다윈은 착각했고 야생 동물들을 인류 사회에 대입했습니다. 찰스 다윈은 무한 경쟁 시장이 자연스럽다고 착각했고 수많은 약자들을 차별했습니다.
찰스 다윈이 착각한 것처럼, 만약 우리가 동물과 인간을 구분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인류 사회에 태생적인 것을 들이대고 온갖 차별들을 정당화할 겁니다. 꿀벌 무리와 인류 사회는 다릅니다. 분명히 인간은 동물이고, 우리가 인류 사회를 파악할 때, 이건 중요한 요소이나, 한편으로 우리는 '자연'을 인간에게 함부로 대입해서는 안 됩니다. 야생 동물들의 성별 노동들과 인류 사회의 노동들은 똑같지 않습니다. 동물과 인간이 다르기 때문에, 자연과 문명은 다릅니다. 동물은 자연에 속하고, 인간은 문명에 속합니다. 그래서 동물은 자연을 상징합니다. 동물 게임 역시 자연을 상징할 수 있습니다.
비디오 게임 문화에서 동물 조종 게임은 유구한 역사를 자랑합니다. 1986년 <오델 호수>부터 2021년 발매 예정 <쉘터 3>까지, 동물 조종 게임들은 꾸준한 명맥을 유지했습니다. 여러 동물 조종 게임들은 생태계 시뮬레이션에 속합니다. 동물 조종 게임들이 야생 동물 생태와 먹이 그물망을 구현하기 때문입니다. 이건 모든 동물 조종 게임이 생태계 시뮬레이션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에코 더 돌핀>은 돌고래를 조종하고 환상적인 해양 환경을 묘사하나, 이 게임은 야생 동물 생태, 해양 먹이 그물망, 에너지 순환을 구현하지 않습니다. 이 게임은 일반적인 아케이드 액션 게임에 훨씬 가깝습니다.
<Catlateral Damage>는 고양이를 조종하나, 이건 생태계 시뮬레이션이 아닙니다. 이 게임은 웅장한 자연 환경, 생태계 순환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습니다. 고양이는 그저 집안을 엉만진창으로 어지를 뿐입니다. <에코 더 돌핀>과 <Catlateral Damage>가 보여주는 것처럼, 모든 동물 조종 게임은 생태계 시뮬레이션에 속하지 않습니다. 특히, <에코 더 돌핀>과 달리, <Catlateral Damage>는 야생 동물보다 가축(고양이)을 조종합니다. 비록 고양이가 완전한 가축이 아니라고 해도, 돌고래보다 고양이는 가축에 가깝습니다. <Catlateral Damage>는 자연을 상징하지 못합니다. 이 게임은 자연을 묘사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오델 호수>와 <쉘터 3>처럼, 여러 동물 조종 게임들은 생태계 시뮬레이션에 속하고, 이런 비디오 게임들은 자연을 상징할 수 있습니다. 만약 동물 조종 게임들이 생태계 시뮬레이션이고, 이런 게임들이 자연을 상징한다면, 비디오 게임 <코랄 Koral>은 어떤가요? <코랄>에서 게임 플레이어는 빛나는 에너지를 조종하고 산호를 비롯해 해양 생명체들에게 에너지를 퍼뜨립니다. <코랄>이 <오델 호수>와 <쉘터 3>와 비슷한가요? <코랄>이 자연을 상징할 수 있나요? <코랄>이 생태계 게임에 속하나요? 어떤 게임 플레이어들은 긍정할 테고, 어떤 게임 플레이어들은 부정할 겁니다. 여기에는 정답이 없습니다.
하지만 분명히 <코랄>은 해양 생물 다양성을 세심하게 묘사합니다. 어떤 관점에서 <코랄>은 움직이는 해양 풍경화입니다. 그래서 <코랄>은 생태계 시뮬레이션과 비슷합니다. 게다가 <코랄>은 환경 오염들을 비판합니다. 게임 초반부터 <코랄>은 싹쓸이 어업이 산호초에 대대적으로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고 설명합니다. <코랄>이 환경 오염들을 설명하기 때문에, 생태계 게임들과 <코랄>은 훨씬 가까워질 수 있습니다. <코랄>이 생태계 시뮬레이션에 속하든, 속하지 않든, <코랄>이 자연을 상징하든, 상징하지 않든, 게임 플레이어가 <코랄>을 플레이하는 동안, 게임 플레이어는 환경 오염들을 마주칩니다.
그래서 <코랄>은 일반적인 아케이드 게임보다 생태계 시뮬레이션에 가까워질 수 있습니다. 그리고 환경 오염들은 단순한 재난이 아닙니다. 생물 다양성 감소는 단순한 탐욕이 아니고 우연이 아닙니다. 오히려 생물 다양성 감소는 환경 오염 범죄에 가깝습니다. 만약 생물 다양성 감소가 환경 오염 범죄라면, 누가 범죄자인가요? 대답은 자본주의 시장 경제입니다. 자본주의에게 유일무이한 목표는 이윤 창출입니다. 이윤을 창출하기 위해 자본주의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습니다. 하지만 자본주의는 이윤을 스스로 창출하지 못합니다. 시장 경제가 포화 상태에 이르기 때문입니다. 자본주의는 뭔가에 기생해야 합니다.
시장 경제가 포화 상태에 이르기 때문에, 자본주의는 이윤을 스스로 창출하지 못하고, 그래서 자본주의는 뭔가에 기생해야 합니다. 자본주의는 자연 환경을 시장 경제에 집어넣고 수탈합니다. 이제 자연은 상품이 되고, 자연은 오직 이윤을 창출하기 위한 도구가 됩니다. 그래서 환경 오염들은 심각해집니다. 기후 변화 역시 다르지 않습니다. 아무리 자본주의가 온실 가스 배출을 줄이기 원한다고 해도, 자본주의는 가스 배출을 스스로 줄이지 못합니다. 자본주의에게 유일한 목표가 이윤 창출이기 때문에, 만약 기후 참사가 이윤을 창출한다면, 자본주의는 온실 가스들을 뿜고 지구 생물권을 죽일 겁니다.
아무리 지구 생물권이 망가진다고 해도, 이윤을 창출하기 위해 자본주의는 상관하지 않습니다. 기후 변화, 행성급 환경 오염, 지질학적인 충격, 지구 생물권 멸종은 단순한 환경 재난이 아닙니다. 이건 범죄이고, 범죄자는 자본주의입니다. 자본주의가 환경 오염 범죄자이기 때문에, 게임 플레이어는 <코랄>을 플레이하고 자본주의를 고민할 수 있습니다. 기후 변화는 백화 현상으로 이어지고, 백화 현상은 산호초들을 죽입니다. 자본주의가 기후 변화 범죄자이기 때문에, 산호초들은 죽습니다. <코랄>은 환경 오염들을 설명하고, 이것들은 자본주의 환경 범죄입니다. 게임 플레이어는 이것을 인식할 수 있습니다.
비록 <코랄>이 자본주의 시장 경제를 직접 지적하지 않는다고 해도, 현실에서 기후 변화 원인은 산업 자본주의입니다. 환경 전문가들이 산업 혁명을 운운하는 것처럼, 19세기 서구 산업 자본주의는 기후 변화 시발점입니다. 20세기 동안, 이윤을 축적하기 위해 자본주의는 자연 환경을 계속 수탈했고, 환경 전문가들은 100년 동안 지구 온도가 올라갔다고 설명합니다. 서구 자본주의가 자연 환경을 수탈하는 동안, 서구 자본주의는 제국주의로 확장했고 식민지들을 억압했습니다. 에코 페미니즘은 서구 자본가 계급이 이득을 얻는 동안 식민지 민중들(특히, 여자들)이 억압을 당했다고 설명합니다. 하지만 자본주의 사회는 이것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심지어 학교 교과서들조차 식민지 수탈과 성 차별을 간과하고 인류 전체가 자연 환경을 오염시켰다고 거짓말합니다. 기후 변화는 지질학적인 충격입니다. 이건 다소 냉정한 표현이나, 기후 변화 앞에서 대숙청과 킬링 필드는 그저 사소한 사건에 불과합니다. 소비에트 연방부터 크메르 루즈까지, 아무리 현실 사회주의들이 난리법석을 떨었다고 해도, 이것들은 지질학적인 충격이 되지 못합니다. 심지어 수구 꼴통 할배들조차 대숙청이 새로운 시대(世, cene)로 진입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반면, 기후 변화는 지질학적인 충격입니다. 자본주의는 지질학적인 환경 오염 범죄자입니다. 하지만 자본주의는 환경 오염 책임을 회피하고 인류 전체를 매도합니다.
[이 게임은 생태계 시뮬레이션이 아닙니다. 하지만 <코랄>은 자연 생태계와 환경 오염을 고민합니다.]
자본주의는 기후 변화 시발점입니다. 하지만 자본주의가 인류 전체를 매도하기 때문에, 자본주의는 지질학적인 세뇌입니다. 자유주의가 자본주의 시장 경제를 뒷받침하기 때문에, 자유 민주주의는 악랄하고 끔찍하고 지질학적인 독재입니다. 인류 문명에서 자유 민주주의는 유례를 찾아보기가 어려운 지질학적인 독재입니다. 현실에서 악랄하고 끔찍한 독재 자유 민주주의가 환경 오염들을 저지르기 때문에, 산호초들은 멸종 위기에 처하고, <코랄>은 산호초 멸종을 이야기합니다. 비록 <코랄>이 자유 민주주의를 직접 비판하지 않는다고 해도, 게임 플레이어는 현실을 참고하고 환경 오염을 고민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산호초 게임 <코랄>은 이른바 Cli-Fi, 기후 소설들(Climate Fictions)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이름이 가리키는 것처럼, 기후 소설들은 기후 변화를 묘사합니다. 과학 기술이 생태계 변화와 기후 변화를 분석하기 때문에, 기후 소설들은 과학 기술들에 기반합니다. 그래서 일반적인 기후 소설들은 SF 장르에 속합니다. 만약 중세 유럽 판타지 소설에서 사악한 마법사가 주문을 외우고 기후를 바꾼다면, 이 소설은 기후 소설이 될지 모르나, 이건 SF 장르에 속하지 않을 겁니다. 게다가 중세 판타지 소설은 일반적인 Cli-Fi 소설이 되지 않을 겁니다. 일반적인 Cli-Fi 소설들은 마법과 주문보다 자연 과학에 기반합니다.
하지만 아무리 기후 소설들이 자연 과학에 기반한다고 해도, 모든 기후 소설은 똑같지 않습니다. 기후 소설에서 생태계 변화 원인들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제임스 발라드는 <물에 잠긴 세계>를 썼습니다. 기후가 바뀌기 때문에, 해수면은 상승하고, 런던은 수몰된 도시가 됩니다. 수몰된 도시에서 열대 밀림은 도시를 뒤덮고, 해양 파충류들은 헤엄칩니다. 새시 로이드는 <카본 다이어리 2015>를 썼습니다. <물에 잠긴 세계>는 수몰된 도시를 묘사하나, <카본 다이어리 2015>는 해수면 상승을 묘사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 소설은 홍수가 몰아친다고 이야기하고, 마을 사람들은 엄청난 물난리를 겪습니다.
<카본 다이어리 2015>에서 해수면 상승은 이유가 아니나, <물에 잠긴 세계>처럼, <카본 다이어리 2015>에서 등장인물들은 엄청난 물난리를 겪습니다. 두 소설은 비슷합니다. 두 소설은 똑같이 수몰된 도시를 이야기하고, 두 소설은 똑같은 Cli-Fi, 기후 소설에 속합니다. 하지만 두 소설에서 기후 변화 원인은 다릅니다. <물에 잠긴 세계>는 왜 기후가 바뀌고 바다가 도시를 덮치는지 설명하지 않습니다. 어떤 등장인물은 기후 변화 원인을 설명하나, 이 설명은 다소 황당하고, 소설 시점은 이것을 중시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기후 변화 원인이 아닙니다. 소설 주인공은 기후 변화를 과학적으로 분석하지 않습니다.
<물에 잠긴 세계>는 울창한 열대 밀림들과 이질적인 해양 파충류들과 야릇한 분위기에 치중합니다. 심지어 이 소설은 해양 파충류들과 공룡 시대를 동일시합니다. 열대 밀림들이 울창하고 해양 파충류들이 헤엄치기 때문에, <물에 잠긴 세계>는 중생대 공룡 시대를 추억합니다. <카본 다이어리 2015>는 정반대입니다. 제목이 가리키는 것처럼, 이 소설에서 기후 변화 원인은 온실 가스입니다. 온실 가스 배출은 기후를 바꾸고, 이상 기후는 홍수를 부르고, 마을은 물에 잠깁니다. 온실 가스 배출을 줄이기 위해 국가 정부는 시민 사회를 압박하나, 이건 숱한 불만들로 이어집니다. 시민들은 불만들을 터뜨리고, 일상은 힘겨워집니다.
<물에 잠긴 세계>는 환경 오염에 상관하지 않으나, <카본 다이어리 2015>에서 기후 변화는 명백한 환경 오염입니다. 환경 오염은 암울합니다. 암울한 환경 오염은 여러 사회 문제들을 부각합니다. 실업, 성 차별, 소수자 탄압. 나중에 속편 <식수 전쟁 2017>에서 암울한 환경 오염은 난민과 폭동과 무장 봉기와 전세계적인 문제로 확장합니다. 자본주의가 화석 연료에 너무 의지하기 때문에, 자본주의 그 자체가 화석 연료 산업이기 때문에, 독자는 <카본 다이어리 2015>와 <식수 전쟁 2017>을 읽고 자본주의를 고민할 수 있습니다. 만약 독자가 자본주의를 좀 더 고민한다면, 독자는 자본주의가 엄청난 성 차별이라고 깨달을 수 있습니다.
아무리 할머니가 어린 손녀를 힘들게 돌본다고 해도, 할머니는 육아 노동자가 되지 못합니다. 육아 노동자로서 할머니가 댓가를 받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육아 노동은 정당한 노동이 되지 못합니다. 원초적인 육아 노동은 인류 사회를 뒷받침하나, 자본주의는 육아 노동을 무시합니다. "집구석에서 여자는 아이를 봐라!" 이렇게 자본주의는 육아 노동을 무시합니다. 아무리 남자들이 육아 노동에 참가하기 원한다고 해도, 이건 불가능합니다. 남자들이 영리 기업 노동자가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자본주의는 성별 노동을 분리합니다. 자본주의는 여자가 육아를 맡아야 한다고 강요합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많은 육아 노동자들이 여자들이기 때문에, 자본주의는 여자 무급 노동에 기생합니다. 무급 노동자들이 자본주의를 뒷받침하기 때문에, 자본주의는 과잉 경제입니다. 오직 이윤만 창출하기 위해 자본주의는 엄청난 상품들을 쏟아내나, 압도적인 무급 노동자들이 자본주의를 뒷받침하기 때문에, 소비량은 생산량은 따라잡지 못합니다. 자본주의는 필연적인 과잉 생산 경제입니다. 과잉 생산은 포화 상태로 이어집니다. 포화된 시장 경제에서 자본주의는 이윤을 창출하지 못합니다. 자연 환경이 시장 경제 영역이 아니기 때문에, 잉여 자본을 투입하기 위해 자본주의는 자연을 시장 경제에 집어넣습니다.
자본주의가 비(非)시장 경제를 시장 경제에 집어넣기 때문에, 포화 상태에서 시장 경제는 벗어나고, 자본주의는 이윤을 창출합니다. 자연은 상품이 되고, 환경 오염들은 심각해집니다. 자본주의가 여자 무급 노동에 기생하기 때문에, 환경 오염들은 심각해집니다. 성 차별과 환경 오염은 개별적인 문제가 아닙니다. 성 차별은 환경 오염으로 이어집니다. <카본 다이어리 2015>는 이것을 직접 설명하지 않습니다. 이 소설은 그저 여자 권리와 기후 변화를 함께 보여줄 뿐입니다. 하지만 성 차별과 환경 오염이 개별적이지 않고, 성 차별이 환경 오염으로 이어지기 때문에, 독자는 양쪽을 함께 고민할 수 있습니다.
종종 문화적인 측면에서 에코 페미니스트들은 여자와 자연에 접근하고, 분명히 문화 분석은 중요하나, 어머니 자연은 오직 문화적인 개념만 아닙니다. 생태학/경제학에서 여자와 자연은 얽힙니다. 여자와 자연은 비단 문화적인 개념일 뿐만 아니라 생태학, 경제학 문제입니다. 독자는 여자 권리와 기후 변화를 읽고 생태학, 경제학 관점에서 기후 변화를 바라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카본 다이어리 2015>와 <코랄>은 비슷합니다. <카본 다이어리 2015>는 온실 가스 배출이 홍수로 이어진다고 이야기합니다. 자본주의가 환경 오염 범죄자이기 때문에, 홍수는 마을을 덮칩니다. <코랄>은 싹쓸이 어업이 산호초 생태계를 파괴한다고 설명합니다.
자본주의가 오직 이윤만 추구하기 때문에, 어류들은 해양 자원보다 상품이 됩니다. <카본 다이어리 2015>와 <코랄> '배후'에서 자본주의는 똑같은 환경 오염 범죄자입니다. 두 가지는 비슷한 생산 조건을 드러냅니다. 현실에서 자본주의가 환경 오염들을 저지르기 때문에, <카본 다이어리 2015>와 <코랄>은 나타납니다. 양쪽 '배후'에서 환경 오염 범죄자로서 자본주의는 생산 조건이 됩니다. 반면, <물에 잠긴 세계>는 환경 오염을 직접 설명하지 않습니다. 제목이 가리키는 것처럼, <카본 다이어리 2015>에서 소설 주인공 로라는 탄소 일기를 쓰나, <물에 잠긴 세계>에서 등장인물들은 환경 오염을 논의하지 않습니다.
<물에 잠긴 세계>에서 환경 오염은 핵심 주제가 아닙니다. 그래서 <물에 잠긴 세계>보다 <카본 다이어리 2015>는 <코랄>에 가깝습니다. <물에 잠긴 세계>와 <카본 다이어리 2015>는 침수된 도시를 이야기합니다. 두 소설은 비슷합니다. 두 소설은 똑같이 수몰된 도시를 이야기하고, 두 소설은 똑같은 Cli-Fi 울타리에 속합니다. 하지만 두 소설에서 기후 변화 원인은 다릅니다. <물에 잠긴 세계>는 환경 오염에 주목하지 않으나, <카본 다이어리 2015>는 환경 오염에 주목합니다. 자본주의는 환경 오염 범죄자입니다. <코랄> 역시 환경 오염에 주목합니다. 비록 <코랄>이 기후 소설보다 해양 모험 게임에 가깝다고 해도, <물에 잠긴 세계>보다 <카본 다이어리 2015>는 <코랄>에 가깝습니다.
[월드 엔진은 쿵쿵따~를 날립니다. 만약 테라포밍이 기후 변화를 동반한다면, 이게 Cli-Fi 설정인가요?]
여기에서 Cli-Fi 장르, 기후 소설은 기준이 되지 못합니다. 아무리 어떤 소설이 기후 변화를 이야기한다고 해도, 기후 변화 원인은 환경 오염이 아닐지 모릅니다. 만약 자연적인 이유 때문에, 폭염과 가뭄과 홍수가 찾아온다면, 이 기후 소설과 <카본 다이어리 2015>는 다를 겁니다. Cli-Fi 울타리에서 여러 기후 소설들은 환경 오염을 비판하지 않습니다. 영화 <맨 오브 스틸>에서 크립톤 외계인들은 거대한 테라포밍 장비를 설치합니다. 크립톤 외계인들은 지구 환경을 바꾸기 원합니다. 만약 테라포밍 장비가 지구 환경을 바꾼다면, 기후 역시 바뀔 겁니다. 이건 기후 변화가 될 겁니다.
크립톤 외계인들은 대대적인 기후 변화를 저지릅니다. 하지만 <맨 오브 스틸>과 <카본 다이어리 2015>에서 기후 변화 원인은 다릅니다. <맨 오브 스틸>에서 기후 변화는 외계인 침략이나, <카본 다이어리 2015>에서 기후 변화는 사회 구조적인 문제입니다. <맨 오브 스틸>에서 슈퍼맨은 이것저것 열심히 때려부수나, <카본 다이어리 2015>에서 로라는 여자 권리를 고민합니다. 슈퍼맨이 이것저것 때려부수느라 바쁘기 때문에, 자유 민주주의 사회의 학교 교과서들처럼, 슈퍼맨은 여자 권리에게 눈꼽만큼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습니다. 비단 <맨 오브 스틸>만 아니라 다른 많은 사이언스 픽션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Cli-Fi 울타리에서 사이언스 픽션이 기후 변화를 이야기한다고 해도, <물에 잠긴 세계>와 <카본 다이어리 2015>가 다른 것처럼, 크립톤 외계인 조드 장군이 자본가 계급이 아닌 것처럼, 기후 변화 원인은 다를지 모릅니다. 아무리 크립톤 외계인 파오라가 테라포밍 장비를 설치하고 쿵쿵따~를 날린다고 해도, 파오라는 석유 재벌 기업 이사가 아닙니다. 그래서 '기후 소설' <카본 다이어리 2015>는 산호초 게임 <코랄>에 가깝습니다. 기후 소설보다 기후 소설은 산호초 게임에 가까울 수 있습니다.
※ 게임 <코랄> 스크린샷 출처: Shirrak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