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생태주의
<노든홀트의 100만>과 대대적인 전염병 사태 본문
※ 이 게시글은 알프레드 월터 스튜어트(J.J.커닝턴)가 쓴 <노든홀트의 100만> 결말 누설을 포함합니다.
[이 게임은 자본주의를 직접 비판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평론가는 <우주 상인>을 적용할 수 있습니다.]
인간은 사회적인 존재입니다. 사회는 그저 단순한 집단에 불과하지 않습니다. 사회는 실체이고, 사회 구조는 인간에게 아주 막대한 영향을 미칩니다. 사회 구조에서 지배 계급은 지배적인 관념을 퍼뜨리고, 사람들은 지배적인 관념을 떠받듭니다. 문학 역시 지배 관념을 반영합니다. 자유 민주주의 사회에서 많은 사람들은 문학이 개인의 자유와 인간의 본질을 이야기해야 한다고 믿습니다. 자유 민주주의가 개인의 자유를 중시하기 때문입니다. 자유주의에서 자유는 개인적으로 소유하기 위한 자유를 가리킵니다. 자본주의는 사유화를 선호하고, 자유주의는 자본주의를 뒷받침합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본가 계급이 지배 계급이기 때문에, 자본가 지배 계급은 자유주의를 선호합니다. 자유주의는 지배 계급 관념이고, 사람들은 지배 계급 관념을 떠받듭니다. 인간의 본질 역시 지배적인 관념입니다. 자본가 계급은 계급 투쟁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자본가 계급이 계급 투쟁을 인정하는 순간, 그들은 피지배 계급 착취를 인정해야 합니다. 자본가 계급은 계급 투쟁을 은폐하기 원합니다. 그래서 자본가 계급은 계급보다 본질을 떠듭니다. 모든 인간이 똑같기 때문에, 계급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문학이 개인의 자유와 인간의 본질을 이야기한다고 믿습니다.
그 자체로서 개인의 자유와 인간의 본질이 중요하기 때문에, 문학은 두 가지를 중시하지 않습니다. 지배 관념이 개인의 자유와 인간의 본질을 선호하기 때문에, 문학은 두 가지를 중시합니다. 그래서 문학 외부에서 평론가는 사회 구조를 문학에 적용할 수 있습니다. 만약 문학 내부에서 평론가가 문학을 분석한다면, 평론가는 사회 구조를 적용하지 못할 겁니다. 이미 문학이 지배 관념을 인정하기 때문에, 문학 내부에서 평론가는 지배 관념을 인정해야 합니다. 이것을 막기 위해 평론가는 문학 외부로 빠져나와야 합니다. 문학 외부에서 평론가는 어떻게 사회 구조가 영향을 미치는지 분석할 수 있습니다.
가끔 문학은 지배 관념을 반영하기보다 저항합니다. 자유 민주주의 사회에서 문학은 인간의 본질을 떠들기보다 계급 투쟁에 주목할지 모릅니다. 이 상황에서 문학에 사회 구조를 적용하기는 훨씬 쉽습니다. 이미 문학이 사회 구조를 의식하기 때문에, 이 상황에서 문학과 사회 구조를 연결하기는 훨씬 쉽습니다. 그렇다고 해도 평론가는 어떻게 작가, 문학 시점, 등장인물이 사회 구조를 의식하는지 분석할 수 있습니다. 게다가 자유 민주주의 사회에서 자본가 계급이 지배 계급이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많은 문학들은 지배 관념을 반영할 테고, 그래서 평론가의 위치는 문학 내부보다 문학 외부가 되어야 합니다.
기독교 <성경>에서 이브보다 아담은 중요합니다. 아담은 동물들에게 이름들을 붙였습니다. 여기에는 상당히 커다란 의미가 있습니다. 중세 유럽 판타지에서 진명(true name)이 마법 주문이 되는 것처럼, 아담은 동물들에게 이름들을 붙였고, 이건 중요한 의식입니다. 아담(의 갈비뼈)에게서 이브는 비롯했고, 이브는 아담에게 종속됩니다. 기독교 신도는 이것이 신의 뜻이라고 해석합니다. 하지만 기독교 <성경> 외부에서 평론가는 사회 구조를 적용할 수 있습니다. 고대 사회가 가부장 제도였기 때문에, 가부장 제도는 종교에게 영향을 미쳤고, 종교 문학으로서 기독교 <성경>은 지배 관념을 반영했을 겁니다.
고대 사회가 가부장 제도인 것처럼, 21세기 초반 자본주의 사회는 가부장 제도입니다. 자본주의 시장 경제가 여자 무급 노동에 기생하기 때문에, 자본주의가 여자들을 착취하기 때문에, 자본주의는 가부장 제도입니다. 종종 문학은 사회 구조를 의식합니다. 단편 소설 <음복>은 가부장 제도를 의식합니다. 하지만 <음복>은 가부장 제도가 무엇인지 설명하지 않습니다. <음복>은 어떻게 가부장 제도가 나타났고 어떻게 이것이 소설에게 영향을 미쳤는지 설명하지 않습니다. 강화길은 페미니즘 사회학자보다 페미니즘 '소설 작가'입니다. 소설은 사회학 논문이 아닙니다. 작가와 달리, 평론가는 설명할 수 있습니다.
문학이 지배 관념을 반영하거나 인식할 때, 문학 외부에서 평론가는 이것을 분석할 수 있습니다. 소설 <노든홀트의 100만 Nordenholt's Million>은 전염병 아포칼립스입니다. 탈질소화 세균들이 대대적으로 퍼지기 때문에, 농업은 파탄에 이릅니다. 많은 포스트 아포칼립스들이 대피소들을 묘사하는 것처럼, <노든홀트의 100만>은 대피소로서 생존 식민지를 묘사합니다. 하지만 탐욕스러운 사업가 스탠리 노든홀트는 생존 식민지를 자신의 요새로 전환합니다. 생존 식민지에서 스탠리 노든홀트는 정치인들을 협박하고, 독재를 강화하고, 권력을 확장합니다. 식민지 노동자들은 농노와 다르지 않습니다.
결국 나중에 탈질소화 전염병은 사라지고, 파탄에서 농업은 벗어납니다. 하지만 식민지 노동자들은 분노를 참지 못합니다. 스탠리 노든홀트가 너무 심각하게 착취했기 때문에, 식민지 노동자들은 봉기합니다. 노동자들은 작업을 거부하고, 공장들을 파괴하고, 기괴한 공동체를 이룩합니다. 지배 계급이 착취를 너무 강화할 때, 피지배 계급은 버티지 못하고, 이건 대대적인 전복으로 이어집니다. 전염병 아포칼립스로서 <노든홀트의 100만>은 산업 자본가들에게 우호적이지 않습니다. 이 소설에서 스탠리 노든홀트는 식민지 독재자이고, 노동자들은 극심한 착취에 시달립니다. 대대적인 전염병 사태에서 지배 계급은 권력을 강화합니다.
지배 계급에게 전염병 사태는 좋은 빌미가 되고, 극심한 착취에서 피지배 노동자 계급은 벗어나지 못합니다. <노든홀트의 100만>은 탈질소화 전염병을 묘사하나, 현실에서 전염병 사태 역시 다르지 않습니다. 코로나 19 사태를 보세요. 소설에서 식민지 노동자들이 봉기하는 것처럼, 미국에서 민중들은 먹고 사는 문제를 외칩니다. 코로나 19 사태는 어떻게 자본가들이 권력을 휘두르는지 드러냅니다. 이른바 '코로나 위기 극복을 위한 노사정 대표자 회의'에서 국가 정부는 취약 계층을 외면하고, 자본가 계급은 낮은 임금을 요구합니다. 자본가 계급은 전염병 사태를 내세우고 노동자 계급이 양보해야 한다고 압박합니다.
이건 회의보다 그저 압박에 불과합니다. 국가 정부는 고용 보호를 외치나, 국가 정부는 파업 노동자들을 외면합니다. 국가 정부는 기업 지원에 비용을 투자하나, 노동자 고용과 생계는 뒷전입니다. 하청 노동자 해고는 심각한 수준이나, 국가 정부는 이것을 외면합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국가 정부는 지배 계급, 자본가 계급을 편듭니다. 국가 정부는 자본주의 관리자이고, 자본가-국가-노동자는 평등한 관계를 절대 유지하지 못합니다. 이미 자본가 계급이 강자이기 때문에, 국가는 강자를 편들고, 자본주의 관리자로서 국가 정부는 노동자 계급을 압박합니다. 국가 정부에게도 코로나 19 사태, 대대적인 전염병은 좋은 빌미가 됩니다.
[지구 방역 마스크 그림은 귀엽습니다. 하지만 자본주의 환경 오염과 노동자 착취는 귀엽지 않습니다.]
자본주의 시장 경제에서 자본가 계급은 임금 노동자 계급을 착취합니다. 잉여 노동 시간을 이윤으로 전환하기 위해 자본가는 노동자를 착취합니다. 아무리 개인적인 자본가들이 선량하다고 해도, 사회 구조 때문에, 자본가 의도와 상관없이, 자본가와 임금 노동자는 적대적입니다. 아무리 자본가가 선량하다고 해도, 자본가는 노동자를 착취하고, 자본가는 계급 투쟁을 시작합니다. 그 자체로서 자본주의가 착취 경제이기 때문에, 언제나 자본가 계급은 임금 노동자 계급을 압박합니다. 코로나 19 사태가 경제 위기를 일으키기 때문에, 자본가 계급은 빌미로서 전염병 사태를 들이밀고 노동자 계급을 훨씬 압박합니다. 전염병 사태에서 무급 노동자들, 파업 노동자들은 훨씬 고통스러워합니다.
자본주의 전염병 사태에서 오직 임금 노동자들만 고통스러워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할머니가 어린 손녀를 힘들게 돌본다고 해도, 할머니는 노동자가 되지 못합니다. 자본주의가 여자 무급 노동에 기생하기 때문에, 자본가 계급과 여자들 역시 적대적입니다. 여자들이 착취 대상이기 때문에, 여자들은 피지배 계급이 됩니다. 대대적인 전염병 사태 속에서 여자들이 육아, 가사, 교육 문제들을 토로하는 것처럼, 피지배 계급으로서 여자들 역시 심각한 고통에 부딪힙니다. 국가 정부는 이것을 해결하지 않습니다. 자본주의 관리자로서 국가 정부는 자본주의 시장 경제를 유지해야 합니다. 이것을 위해 국가 정부는 피지배 계급(임금 노동자들, 여자 무급 노동자들)보다 자본가 지배 계급을 지원합니다.
존 크리스토퍼는 <풀의 죽음>을 썼습니다. <노든홀트의 100만>처럼, <풀의 죽음> 역시 대대적인 전염병이 작물들을 죽인다고 설정합니다. 농업이 파탄에 빠지기 때문에, 유럽(을 비롯해 세계 곳곳)은 아수라장이 됩니다. 하지만 왜 국가 정부가 아수라장을 막지 못했나요? 이미 여러 농민들은 대대적인 전염병 사태를 예상했고 포스트 아포칼립스에 대비했습니다. 만약 유럽 국가 정부들이 이런 지혜로운 농민들을 연구했고 연구 결과를 공표했다면, 인류 문명은 풀의 죽음 사태에 대처했을 테고, 유럽은 아수라장이 되지 않았을 겁니다. 하지만 국가 정부들은 이런 지혜로운 농민들을 연구하지 않았습니다.
<풀의 죽음>은 왜 국가 정부들이 전염병 사태를 방치했는지 설명하지 않습니다. 이 소설은 아수라장 유럽 상황에 초점을 맞춥니다. 하지만 평론가는 코로나 19 사태를 <풀의 죽음>에 적용할 수 있습니다. 코로나 19 사태가 자본주의 환경 오염이기 때문입니다. 자본주의에게는 필연적인 속성이 있습니다. 이건 확장, 정복입니다. 자본주의는 비(非)자본주의 영역을 지속적으로 정복하고 확장합니다. 이건 우연보다 필연입니다. 자본가 계급이 임금 노동자들, 여자 무급 노동자들을 착취하기 때문에, 자본주의 사회에서 전반적인 소비 능력은 낮아집니다. 하지만 이윤을 높이기 위해 자본가 계급은 많은 상품들을 쏟아냅니다.
상품들은 많아지나, 소비 능력은 많은 상품들을 따라가지 못합니다. 결국 자본주의는 과잉 생산 경제입니다. 과잉 생산은 잉여 자본이 되고, 잉여 자본은 거품을 쌓습니다. 거품을 해소하기 위해 자본가 계급은 잉여 자본을 투자해야 합니다. 자본주의 내부에서 자본가 계급은 잉여 자본을 투자하지 못합니다. 이미 시장 경제가 (상대적인) 포화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잉여 자본은 시장 경제 외부로 나가야 합니다. 잉여 자본이 시장 경제 외부로 나가야 하기 때문에, 자본주의는 지속적으로 정복하고 확장합니다. 자연 환경은 가장 일반적이고 가장 거대한 비(非)자본주의 영역입니다. 자본주의는 자연 환경을 지속적으로 정복하고 확장해야 합니다.
진화 생물학자 롭 월리스는 <거대 농장은 거대 독감을 만든다 Big Farms Make Big Flu>를 썼습니다. 롭 월리스는 코로나 19 같은 전염병들이 개별적인 문제가 아니라고 주장합니다. 다국적 식량 기업들이 무분별한 이윤을 추구하기 때문에, 산업화 농업은 전염병 사태를 일으킵니다. 마지막 원시 삼림과 소규모 농장이 사라질 때까지, 자본주의는 지속적으로 정복하고 확장해야 합니다. 이 과정에서 자연 환경이 상품화하기 때문에, 더 이상 자연은 자연이 아닙니다. 자연이 그저 상품에 불과하기 때문에, 생물 다양성과 지속 가능성은 사라지고, 이 상황은 전염병 사태를 일으킵니다. 자연 환경의 다양성, 복잡함은 사라지고, 전염병 사태에게 이건 아주 유리합니다.
유기물 총량과 토지 사용 측면에서 21세기 초반 지구 생물권은 거대한 산업화 농장입니다. 대형 야생 동물들보다 대형 가축들은 훨씬 커다란 비중을 차지합니다. 대형 목장들, 축산업들은 대형 야생 동물들을 몰아냅니다. 호랑이 같은 알파 프레데터, 최고 포식자는 얼마나 지역 생태계가 건강한지 증명합니다. 하지만 호랑이는 희귀 야생 동물입니다. 최고 포식자는 희귀 야생 동물입니다. 이건 지역 생태계가 건강하지 않다는 뜻입니다. 산업화 농장은 지역 생태계들을 짓밟습니다. 롭 월리스는 인류 문명에서 자본주의 이외에 치명적인 전염병을 이렇게 퍼뜨리는 사회 구조가 없을 거라고 주장합니다.
<거대 농장은 거대 독감을 만든다>는 2016년 서적입니다. 2016년 서적으로서 <거대 농장은 거대 독감을 만든다>는 코로나 19 사태를 설명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근본적인 원인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중요한 것은 생물 다양성과 지속 가능성보다 이윤 창출입니다. 소설 <풀의 죽음>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풀의 죽음>에서 유럽 국가들은 자본주의 국가들입니다. 자본주의 국가에서 자본가 계급은 생물 다양성과 지속 가능성보다 이윤 창출을 선호하고, 국가 정부는 자본가 계급을 편듭니다. 국가 정부는 산업화 농업을 편듭니다. 하지만 지혜로운 농민들은 다국적 식량 기업 간부들이 아닙니다.
소설 속에서 지혜로운 농민들은 다국적 식량 기업 간부들보다 지역 토착 농민들에 가깝습니다. 그래서 국가 정부는 지혜로운 농민들을 연구하지 않습니다. 만약 국가 정부가 그들을 연구한다면, 그들은 이윤 창출을 방해할지 모릅니다. 자본주의 농업이 지속 가능한 농업을 파괴하고 획일화 농장, 공장 농업을 강요하는 것처럼, 자본주의 농업과 지속 가능한 농업은 대립합니다. 그래서 국가 정부들은 지혜로운 농민들을 연구하지 않았고 전염병 사태에 대처하지 못했을 겁니다. 이렇게 평론가는 사회 구조를 <풀의 죽음>에 적용할 수 있습니다. 어떤 SF 독자들은 이 해석이 틀리다고 반박할지 모릅니다.
<풀의 죽음>은 왜 국가 정부들이 전염병 사태에 대처하지 못했는지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SF 독자들은 평론가에게 반박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미 현실에서 자본주의는 여러 전염병 사태들을 일으켰고, 소설 속에서도 국가 정부는 자본주의 정부입니다. 가부장 제도가 기독교 문학에게 영향을 미치는 것처럼, 자본주의 농업은 전염병 아포칼립스 문학에 영향을 미쳤을지 모릅니다. 이 관점에서 2014년 영화 <고지라> 역시 <풀의 죽음>과 비슷합니다. 핵 발전소는 위험합니다. 많은 환경 운동가들은 핵 발전소에 반대합니다. 하지만 자본가 계급을 편들기 위해 국가 정부는 위험한 핵 발전소를 용인합니다.
[소설 외부와 영화 외부에서 평론가는 대대적인 작물 전염병과 거대 괴수 난동을 비교할 수 있습니다.]
핵 발전소는 거대 괴수 무토를 깨웁니다. 거대 괴수 무토는 도시를 쑥대밭으로 만듭니다. 만약 고지라가 무토를 처치하지 않았다면, 정말 인류 문명은 석기 시대로 돌아갔을지 모릅니다. 2014년 <고지라>는 전염병 아포칼립스가 아닙니다. 하지만 자본주의 사회가 오직 이윤 창출만 추구하고 자연 환경을 오염시키기 때문에, 거대 괴수 무토는 난동을 부립니다. 자본주의 환경 오염은 거대 괴수 난동으로 이어집니다. 이 관점에서 <풀의 죽음>과 <고지라>는 비슷합니다. 소설 외부, 영화 외부에서 평론가는 <풀의 죽음>과 <고지라>를 비교할 수 있습니다. 비디오 게임 <FAR: Lone Sails>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FAR: Lone Sails>는 포스트 아포칼립스입니다. 이 게임은 천연 자원(바다)이 거덜났다고 묘사합니다. 바다는 사막이 되었습니다. 왜 바다가 사막이 되었나요? 이 게임은 구체적인 설정을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FAR: Lone Sails>는 스팀펑크입니다. 일반적으로 스팀펑크는 산업 자본주의를 과장합니다. 소설 <페르디도 거리의 기차역>부터 비디오 게임 <오더 1886>까지, 많은 스팀펑크들이 증명하는 것처럼, 스팀펑크는 산업 자본주의를 과장합니다. <FAR: Lone Sails>가 스팀펑크이기 때문에, 산업 자본주의는 포스트 아포칼립스를 일으켰는지 모릅니다. 자본주의가 천연 자원들을 거덜내기 때문입니다.
소설 <우주 상인>을 비롯해 여러 환경 아포칼립스들은 탐욕스러운 자본주의가 오직 이윤 창출만 추구하고 천연 자원들을 거덜낸다고 이야기합니다. <FAR: Lone Sails>에서도 이윤 창출을 위해 산업 자본주의는 바다를 거덜냈는지 모릅니다. <FAR: Lone Sails>는 자본주의를 직접 언급하지 않으나, 비디오 게임 외부에서 평론가는 <우주 상인>과 <FAR: Lone Sails>를 비교하고 사회 구조를 적용할 수 있습니다. 어떤 게임 플레이어들은 반박할지 모릅니다. 그들은 이 게임이 산업 자본주의를 직접 비판하지 않는다고 반박할지 모릅니다. 이 반박은 타당합니다. 하지만 자본주의는 SF 장르에게 영향을 미칩니다.
하늘에서 SF 장르는 뚝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가부장 제도가 종교 문학에게 영향을 미치는 것처럼, 그래서 비단 예수만 아니라 붓다, 무함마드 같은 종교 성인들이 남자들인 것처럼, 사회 구조로서 자본주의 시장 경제는 사이언스 픽션에게 영향을 미칩니다. 아니, 만약 서구 근대화가 나타나지 않았고 자본주의가 나타나지 않았다면, SF 장르 역시 나타나지 않았을 겁니다. 가상의 전기 서적 <두 사람>에서 일로나 예르거는 진화 이론(찰스 다윈)과 공산주의 혁명(카를 마르크스)이 함께 나타났다고 말합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진화 이론과 공산주의 혁명은 나타났습니다. 사이언스 픽션(메리 셸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두 사람>에서 일로나 예르거는 진화 이론과 공산주의 혁명에 주목하고, 사이언스 픽션은 논의 대상이 아니나, 서구 근대화에서 진화 이론(찰스 다윈)과 공산주의 혁명(카를 마르크스)과 사이언스 픽션(메리 셸리)은 함께 나타났습니다. 서구 근대화와 SF 장르는 떨어지지 않습니다. SF 장르에게 서구 근대화는 생산 조건입니다.
※ 코로나 19 풍자 그림 출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