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생태주의
<침묵의 봄>과 환경 아포칼립스 본문
[사이언스 픽션은 미래적인 일상을 묘사할 수 있습니다. 딱딱한 수치 계산에는 이런 미덕이 없어요.]
레이첼 카슨이 쓴 <침묵의 봄>이 나왔을 때, 어떤 사람들은 호평했고 어떤 사람들은 비난했습니다. <침묵의 봄>은 살충제가 자연 생태계를 오염시키고 이런 오염이 다시 인간 신체를 오염시킨다고 주장합니다. 당연히 살충제 회사들은 <침묵의 봄>을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화학 세계 뉴스 Chemical World News>는 <침묵의 봄>이 사이언스 픽션이고 TV 드라마 <환상특급>과 비슷하다고 반응했습니다. 이건 <침묵의 봄>이 자연 과학 서적보다 그저 공상에 불과하다는 조롱입니다. 하지만 <화학 세계 뉴스>의 의도와 달리, <침묵의 봄>에는 정말 '긍정적으로' SF 소설과 비슷한 측면이 있습니다.
<침묵의 봄>은 환경 오염들이 자연 생태계를 파괴하고 포스트 아포칼립스를 연출할 거라고 주장합니다. 1958년 올가 허킨스라는 원예가는 살충제 때문에 정원에서 새들이 죽었다고 편지를 썼습니다. 올가는 하늘에서 새들이 떨어졌고 새들의 자세가 기괴하다고 묘사했습니다. 이런 내용은 정말 돌연변이 괴물들이 나타나는 환경 아포칼립스 같습니다. 레이첼 카슨은 이런 편지를 받았고 어떤 영감을 느꼈습니다. 이런 영감은 <침묵의 봄>으로 이어졌습니다. 레이첼 카슨은 합성 살충제를 '죽음의 묘약'이라고 불렀고 결국 '죽음의 묘약'이 사람들을 해칠 거라고 예상했습니다.
<침묵의 봄>에서 레이첼 카슨은 생명이 없는 미래 세상을 묘사합니다. <침묵의 봄>은 존 키츠가 쓴 <잔인한 미녀>를 인용하고 "호숫가에서 풀들도 시들고 이제 새들도 노래하지 않는다."라고 말합니다. 사실 <침묵의 봄> 이전에도 레이첼 카슨은 '문학적인' 자연 과학 서적들을 썼습니다. 레이첼 카슨은 자연이 장대하고 살아있는 상호 작용이라고 생각했고 상호 작용이 자신을 신비하게 둘러쌌다고 느꼈습니다. 레이첼 카슨은 이런 자연 생태계 속에서 인간이 수많은 연결 고리들 중에서 하나라고 말합니다. <침묵의 봄> 역시 연결 고리를 강조합니다.
'죽음의 묘약'이 새들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면, '죽음의 묘약'은 연결 고리 속으로 들어올 테고 다른 고리들로 퍼질 겁니다. 결국 미래 세상에서 생명은 사라질 겁니다. 어떤 사람들은 레이첼 카슨이 <침묵의 봄>에 너무 문학적인 감성을 불어넣었다고 비판할 겁니다. 자연 과학 서적은 문학보다 과학을 말해야 합니다. "새들이 더 이상 노래하지 않는" 침묵의 봄은 너무 감상적인 측면으로 빠질지 모릅니다. 재미있게도 어떤 유명한 포스트 아포칼립스 소설 역시 "새들이 노래하지 않는" 세상을 묘사합니다. 케이트 윌헬름은 <노래하던 새들도 지금은 사라지고>를 썼습니다. 새들이 더 이상 노래하지 않는다면, 봄은 침묵을 지킬 겁니다. <노래하던 새들도 지금은 사라지고>는 정말 세상이 멸망했다고 이야기합니다.
<침묵의 봄>과 <노래하던 새들도 지금은 사라지고>는 문학적으로 비슷한 느낌을 풍깁니다. 양쪽 모두 환경 오염들을 걱정하고, 포스트 아포칼립스를 그리고, 새들이 침묵한다고 제목을 달았습니다. <침묵의 봄>은 1970년대 녹색 정치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고, <노래하던 새들도 지금은 사라지고>는 녹색 정치에게서 영향을 받았을 겁니다. 이건 <침묵의 봄>과 <노래하던 새들도> 사이에 직접적인 관계가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비록 두 책이 비슷한 분위기를 풍긴다고 해도, 비록 두 제목이 비슷한 느낌을 풍긴다고 해도, 이건 그저 우연에 불과합니다. (사실 '노래하는 새들도 지금은 사라지고'라는 제목은 윌리엄 셰익스피어 소네트 73번에서 비롯했습니다.)
하지만 독자가 <침묵의 봄>과 <노래하던 새들도>를 연이어 읽는다면, <노래하던 새들도>에서 독자는 레이첼 카슨이 걱정하는 미래를 만날 수 있을 겁니다. 독자는 문학적인 자연 과학이 SF 소설로 이어질 수 있다고 느낄 겁니다. 어쩌면 레이첼 카슨은 이런 효과를 원했을지 모릅니다. 레이첼 카슨은 자연 과학이 그저 딱딱하고 냉철한 수치 계산에 불과하지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레이첼 카슨은 비단 환경 오염을 경고하기만 하지 않고 포스트 아포칼립스 같은 분위기를 연출하기 원했습니다. 이런 사고 방식은 자연 과학자보다 SF 소설 작가에 가깝습니다. 영리 기업들은 이런 사고 방식을 비난했습니다. 영리 기업들은 레이첼 카슨이 여자라고 강조했고 여자가 감상적인 측면에 빠진다고 주장했습니다.
사실 이런 주장은 여전히 지배적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자연 과학이 딱딱하고 냉철한 계산이라고 생각합니다. 영리 기업들이 레이첼 카슨이 여자라고 비난한 것처럼, 과학은 남성적이고 문학은 여성적입니다. 가부장적인 사회에서 여성적인 것보다 남성적인 것은 우월하고, 따라서 문학보다 과학은 우월합니다. 하지만 왜 자연 과학이 문학적인 감성을 포함해서는 안 되나요? 과학 덕분에 우리는 세상이 아주 원대하다고 깨달을 수 있습니다. 과학 덕분에 우리는 심해 생태계를 바라볼 수 있습니다. 거대한 향유 고래가 짙고 짙은 해저로 잠수할 때, 우리는 경외감에 젖을 수 있습니다. 자연 과학은 자연 생태계가 정말 웅장하고 번성하는 생명력이 아주 강하고 끈질기다고 가르칩니다.
이런 자연 생태계 앞에서 우리는 머리를 숙이고 모자를 벗고 경의를 표할 수 있습니다. 게다가 문학적인 측면은 다른 관점을 이용해 자연 생태계를 바라볼 수 있습니다. "나는 사람들에게 내가 다른 행성에서 왔다고 이야기한다. 내가 도착한 행성이 21세기 행성과 꽤나 달랐기 때문이다. 거기에는 플라스틱이 없었다. 이산화탄소 역시 훨씬 적었다. 바다에는 물고기들이 많았다. 나는 플라스틱세 이전 시대(pre-Plasticozoic era)에서 왔다." 이건 SF 소설에 있는 문구가 아닙니다. 이건 <내셔널 지오그래픽> 전속 탐험가 실비아 얼의 문구입니다. 하지만 이런 표현은 자연 과학보다 SF 소설에 가깝습니다. 사람들은 이런 표현을 이용해 얼마나 환경 오염이 심각한지 새삼 깨달을 수 있습니다.
나오미 오레스케스와 에릭 콘웨이는 <다가올 역사, 서양 문명의 몰락>을 썼습니다. 이 책은 미래 2393년을 묘사합니다. 미래 세상에서 기후 변화는 세상을 엄청나게 바꿨고, 서구 문명은 몰락했습니다. 동아시아(중국)는 세계 패권을 다시 거머쥐었습니다. 서구 자본주의는 종말을 고했습니다. 어떤 과학자는 개조 생명체들을 퍼뜨리고 자연 생태계를 복원합니다. 이런 줄거리는 SF 소설 같습니다. 하지만 <다가올 역사, 서양 문명의 몰락>은 SF 소설이 아닙니다. 나오미 오레스케스와 에릭 콘웨이는 SF 작가보다 과학 저술가에 가깝습니다. 하지만 두 사람은 문학적인 측면이 환경 오염을 훨씬 강하게 경고할 수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래서 두 사람은 Cli-Fi 소설처럼 <다가올 역사, 서양 문명의 몰락>을 썼습니다.
나오미 오레스케스와 에릭 콘웨이는 킴 스탠리 로빈슨을 언급하고 두 사람이 SF 소설들에게 영향을 받았다고 말합니다. 물론 <다가올 역사>는 일반적인 소설과 많이 다릅니다. <다가올 역사>는 등장인물들이나 사소한 순간들보다 거시적인 서사에 초점을 맞춥니다. 하지만 신화가 문학이 되는 것처럼, 거시적인 서사 전개 역시 문학이 될 수 있습니다. 이런 문학으로서 <다가올 역사>는 자연 과학과 기후 변화를 이야기합니다. 자연 과학은 그저 자연 과학에 불과하지 않습니다. 언젠가 기후 변화가 정말 심각해진다면, 기후 변화는 정치, 경제, 문화, 종교, 여러 일상들에 아주 커다란 영향을 미칠 겁니다. 민중들은 자연 과학을 이용해 기후 변화를 판단해야 합니다. 하지만 자연 과학은 기후 변화의 전부가 아닙니다. 기후 변화를 바라보기 위해 민중들에게는 자연 과학 이외에 여러 가지가 필요합니다.
<다가올 역사, 서양 문명의 몰락>은 기후 변화와 대재난을 이야기합니다. 이 책은 기후 변화가 서구 문명을 쓰러뜨릴 거라고 진단해요. 기후 변화를 논의하는 책들은 많습니다. 기후 변화 서적들이 너무 많기 때문에 이건 정말 홍수 같아요. 여러 기후 변화 서적들은 인류 문명이 무슨 문제에 직면했는지 다룹니다. 여러 기후 변화 서적들은 21세기 문제를 다룹니다. 하지만 이런 기후 변화 서적들과 달리, <다가올 역사>는 2393년이라는 미래를 이용해 21세기를 바라봅니다. 그래서 <다가올 역사>는 SF 소설 같습니다. 심지어 이 책은 개조 생명체들을 이용해 자연 생태계가 바뀐다고 묘사합니다. 이건 정말 생태학 사이언스 픽션입니다. SF 소설은 미래적인 관점을 이용해 현대 문명을 비판할 수 있고, 그래서 두 저자는 SF 소설을 모방했을 겁니다.
<다가올 역사, 서양 문명의 몰락>처럼, 자연 과학이 문학으로 흘러갈 때, 자연 과학은 상상력을 발휘하고 일상을 끌어들일 수 있습니다. 문학적인 측면 없이, 자연 과학은 이런 상상력을 발휘하지 못합니다. 한국어 판본 <다가올 역사>는 <프레시안>의 강양구 기자가 쓴 해제를 달았습니다. 해제에서 강양구 기자는 에드워드 벨라미가 쓴 <뒤 돌아보며>와 윌리엄 모리스가 쓴 <에코토피아 뉴스>를 언급해요. <다가올 역사>는 포스트 아포칼립스처럼 보이나, <뒤 돌아보며>와 <에코토피아 뉴스>는 유토피아 소설입니다. 포스트 아포칼립스와 유토피아는 서로 완전히 다른 장르입니다. 하나는 세계가 종말에 빠졌다고 이야기하고, 다른 하나는 세계가 행복하게 살아간다고 이야기해요.
하지만 두 장르 모두 미래적인 관점을 이용해 인류 문명을 비판합니다. 이런 특성 때문에 포스트 아포칼립스와 유토피아는 서로 비슷할 겁니다. 그리고 이런 특성 때문에 나오미 오레스케스와 윌리엄 모리스는 서로 비슷할지 모릅니다. 나오미 오레스케스는 포스트 아포칼립스를 썼고, 포스트 아포칼립스는 21세기 (자본주의) 문명을 비판하기 위한 방법입니다. 윌리엄 모리스는 유토피아 소설을 썼으나, 이것 역시 19세기 (자본주의) 문명을 비판하기 위한 방법입니다. 나오미 오레스케스와 윌리엄 모리스는 서로 다른 세계(멸망한 세계와 행복한 이상 사회)를 그렸으나, 목적은 서로 비슷합니다.
나오미 오레스케스는 과학 저술가이고, 윌리엄 모리스는 생태 사회주의를 알리기 원했으나, 양쪽은 똑같이 미래를 묘사하는 문학을 이용합니다. 이렇게 과학 저술과 문학은 만날 수 있습니다. 과학 저술과 문학은 얼마든지 공통점을 찾을 수 있어요. 자연 과학이 문학적인 측면을 포함한다면, 사람들은 자연 과학과 함께 훨씬 폭넓은 것들을 바라볼 수 있을 겁니다. 문학은 다양한 현실들을 모방하고 배치하고 반영합니다. 사람들은 문학을 이용해 현실의 다양한 요소들을 고민할 수 있습니다. 기후 변화가 세상에 영향을 미칠 때, 우리는 오직 자연 과학만을 이용해 세상을 파악하지 못합니다. 자연 과학은 일상을 파악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일상을 살아가야 합니다.
종종 신문 기자들은 환경 운동가나 생태학 전문가처럼 SF 소설가를 묘사합니다. 여러 지식인들은 파올로 바치갈루피 같은 Cli-Fi 작가가 환경 운동가이고 생태학 전문가라고 말합니다. 사실 파올로 바치갈루피는 양쪽 모두 아닙니다. 파올로 바치갈루피는 그저 생태학 SF 소설들을 꾸준히 썼을 뿐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문학적인 측면을 이용해 생태학에 접근할 수 있습니다. 민중들이 정말 기후 변화를 막아야 한다면, 생태학과 환경 사회학은 더 이상 딱딱한 학술 분야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민중들은 생태학과 환경 사회학에 친근하게 다가가고, 지식을 쌓고, 이걸 인류 사회에 적용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생태학과 환경 사회학을 비롯해 여러 과학들이 그저 학술적인 전문 분야라고 간주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연 과학에 쉽게 다가가지 못하고, 지식을 쌓지 못하고, 기후 변화를 방치합니다. 무엇보다 생태학과 환경 사회학이 우리 일상에 커다란 영향을 미침에도, 자연 과학은 이런 영향을 묘사하지 못합니다. 기후 변화가 일상을 파괴하고 사람들이 좌절한다고 해도, 자연 과학자들이 서러운 좌절들을 묘사할 수 있을까요? 딱딱하고 냉철한 수치 계산이 서러운 좌절들을 묘사할 수 있을까요? 반면, 파올로 바치갈루피 같은 Cli-Fi 작가는 생태학과 환경 사회학과 미래의 일상을 뒤섞습니다.
Cli-Fi 소설은 미래적인 일상을 묘사하고, 독자들은 일상에 훨씬 친숙하게 다가갈 수 있습니다. 일상 속에서 사람들은 사랑하고 이야기하고 울고 웃고 화를 냅니다. 독자는 이런 일상을 흥미롭게 읽을 수 있습니다. 독자가 일상을 읽는 동안, 독자는 생태학과 환경 사회학을 받아들일 수 있고 어떻게 자연 과학이 삶에 영향을 미치는지 알 수 있습니다.
일상 속에서 우리는 사랑하고 분노하고 좌절하고 희망을 품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다른 사람들이 일상을 살아가는지 알기 원합니다. 우리는 사회적인 존재이고, 사회적인 존재로서 우리는 다른 사회적인 관계들을 파악하기 원합니다. 우리가 사회적인 관계들을 파악하기 원할 때, 우리가 어떻게 다른 사람들이 일상을 살아가는지 알기 원할 때, 문학은 아주 유용한 도구가 됩니다. 독자는 문학을 이용해 다른 사람들의 삶들을 들여다볼 수 있습니다. 모태 솔로(?) 독자는 기욤 뮈소가 쓴 <종이 여자>를 읽고 연애와 사랑과 실연과 상처가 무엇인지 고민할 수 있습니다.
모태 솔로 독자가 직접 연애하지 못한다고 해도, 모태 솔로 독자는 문학을 이용해 간접적으로 연인을 그릴 수 있습니다. 모태 솔로 독자는 얼마나 연애가 두근거리는지 얼마나 실연이 고통스러운지 상상할 수 있습니다. 실연이 두려운가요? 실연을 당했을 때, 사람이 폐인이 되어야 하나요? 이게 정상인가요? 모든 사람이 실연과 상처를 이기고 아무렇지 않게 살아갈 수 있나요? 사람이 실연을 겪는다면, 사람은 또 다른 사랑을 시작하지 못할 겁니다. 하지만 누군가는 오직 사랑만이 실연의 상처를 덮고 치유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이게 정말 옳은가요? 연인이 없기 때문에, 모태 솔로 독자는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모태 솔로 독자가 <종이 여자>를 읽는다면, 독자는 이런 물음들을 고민할 수 있을 겁니다.
사이언스 픽션 역시 이런 역할을 맡을 수 있습니다. 기후 변화가 인류 문명과 자연 생태계에 영향을 미칠 때, 우리가 오직 자연 과학만으로 이런 상황을 파악해야 하나요? 기후 변화는 수많은 사람들의 일상들을 파괴할 겁니다. 파괴적이고 폭력적인 일상 속에서 수많은 사람들은 고통스러워하고 절망할 겁니다. 그렇다고 해도 사람들은 계속 일상을 살아가야 합니다. 일상이 고통이고 좌절이라고 해도, 사람들은 살아가야 합니다. 이렇게 일상이 이어지는 동안, 어떤 사람들은 사랑을 찾고 사랑으로 미래를 바라볼지 모릅니다. <와인드업 걸> 같은 SF 소설은 이런 감성들을 담을 수 있습니다.
<와인드업 걸> 같은 환경 아포칼립스는 미래 일상을 그리고 독자들을 미래 일상 속으로 집어넣을 수 있습니다. 독자들은 미래 일상을 현실에 반영하고 현실을 다시 돌아볼 수 있어요. 환경 아포칼립스 소설에서 독자는 또 다른 사회적인 관계를 찾을 수 있습니다. 독자는 미래 사람들과 사회적인 관계들을 맺고, 그들과 함께 환경 오염들이 만연한 세상을 살아가고, 그들과 함께 슬퍼하거나 분노하거나 사랑할 수 있습니다. 자연 과학은 이걸 시도하지 못합니다. 자연 과학에게는 이런 미덕이 없습니다. 자연 과학이 문학과 만날 때, 이런 조합은 미래의 일상을 끌어들일 수 있습니다.
비단 성인 소설만 아니라 가족 애니메이션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애니메이션 <월-E>에는 환경 오염들이 일으키는 좌절이나 고통이나 분노가 없습니다. 하지만 <월-E>는 쓰레기 마천루들과 외롭게 살아가는 청소 로봇을 보여줍니다. 청소 로봇이 혼자 어마어마한 쓰레기 마천루들을 지나갈 때, 관객들은 청소 로봇과 함께 황량하고 암울한 미래 일상으로 떠날 수 있습니다. 황량하고 삭막한 지구에는 정말 노래하는 새들이 없습니다. 환경 아포칼립스로서 <월-E>는 '침묵'을 보여줍니다. 이건 그저 비유에 불과하지 않습니다. 초반부 동안 환경 아포칼립스로서 <월-E>는 정말 '침묵'을 지킵니다.
이런 '침묵' 때문에, 압도적인 침묵 속에서 마침내 월-E가 녹색 새싹을 건질 때, 이런 장면은 훨씬 빛을 발할 수 있습니다. 아이들은 노래하는 새들이 사라지는 침묵의 봄이 무엇인지 쉽게 이해하지 못할 겁니다. 하지만 <월-E>를 보는 동안 아이 관객들은 어떻게 환경 아포칼립스가 '침묵'을 지키는지 느낄 수 있습니다. 아이 관객들이 청소 로봇의 일상을 따라가기 때문입니다. 관객들은 월-E와 공감하고, 월-E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월-E가 됩니다. 문학은 일상과 사회적인 관계들을 제시하고, 사람들은 그걸 현실로 끌어들일 수 있습니다. 자연 과학에는 이런 미덕이 없습니다. 특히, 딱딱하고 냉철한 수치 계산에는 이게 없습니다.
문학은 현실을 바라볼 수 있는 유용한 도구이고 창문입니다. 레이첼 카슨이 '문학적으로' 생태학을 이야기할 때, 레이첼 카슨의 생태학은 비단 자연 과학만 아니라 현실의 다양한 측면들을 담습니다. 어떤 과학자들은 문학보다 과학이 훨씬 우수하고 실용적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레이첼 카슨과 파올로 바치갈루피와 나오미 오레스케스는 이런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 같습니다. 흔히 사람들은 과학이 무엇이든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과학은 실용적입니다. 문학 같은 것은 그저 쓸데없는 취미에 불과합니다. 실용적인 과학 앞에서 소설책은 그저 불쏘시개에 불과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실용적인 것을 중시하고, 그래서 그들은 문학을 무시합니다. 하지만 정말 문학보다 과학이 무조건 우월한가요? 기후 변화가 일상을 파괴하고 사람들이 절망할 때, 과학자가 이런 절망을 처절하게 그릴 수 있나요? <월-E>가 황량하고 압도적인 침묵을 보여주는 것처럼, 딱딱한 수치 계산이 침묵을 아이들에게 전달할 수 있나요? 자연 과학이 우리 일상을 전부 표현할 수 있나요? 자연 과학이 사람들이 느끼는 감성들과 일상적인 행위들을 섬세하게 표현할 수 있나요? 그건 불가능합니다. 그건 자연 과학자들의 역할이 아닙니다. 그건 SF 작가들의 역할입니다.
왜 레이첼 카슨이 <센스 오브 원더> 같은 책을 썼나요? 도서관 사서들이 <센스 오브 원더>를 자연 과학 서적으로 분류한다고 해도, <센스 오브 원더>에는 문학적인 향취가 가득합니다. 자연 과학은 문학을 포함하거나 문학적이거나 문학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파올로 바치갈루피가 보여주는 것처럼, <월-E>가 보여주는 것처럼, 자연 과학과 문학 사이에서 생태학 사이언스 픽션들은 좋은 징검다리가 될 수 있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