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생태주의
치즈 케이크와 근본적인 SF 정수 본문
만약 탕수육에게 정수, 본질이 있고, 미식가가 이 정수, 본질을 평가하기 원한다면, 미식가는 탕수육을 먹어야 합니다. 미식가가 탕수육을 먹은 이후, 미식가는 탕수육 본질을 평가할 수 있습니다. 탕수육은 음식이나, 만약 미식가가 탕수육을 먹지 않는다면, 미식가가 탕수육 맛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미식가는 탕수육 본질을 평가하지 못할 겁니다. 적어도 미식가는 음식으로서 탕수육 본질을 평가하지 못합니다. 게다가 탕수육 본질을 평가하기 위해 미식가는 다른 음식을 먹지 못합니다. 만약 미식가가 치즈 케이크를 먹고 탕수육 본질을 평가하기 원한다면, 이건 엉뚱한 바람일 겁니다.
음식으로서 탕수육을 평가하기 위해 미식가는 치즈 케이크보다 탕수육을 먹어야 합니다. "음, 탕수육 양념은 파인애플을 포함해야 해." 만약 미식가가 치즈 케이크를 먹고 이 문구를 중얼거린다면, 다른 사람들은 미식가를 비웃을 겁니다. 어떻게 치즈 케이크에서 탕수육 본질이 우러나올 수 있나요? 이건 황당무계한 사고 방식입니다. 치즈 케이크와 탕수육이 너무 다르기 때문에, 탕수육 본질을 평가하기 위해 미식가는 치즈 케이크보다 탕수육을 먹어야 합니다. 미식가는 양념을 튀긴 고기에 붓거나 튀긴 고기를 양념에 찍을 수 있으나, 어쨌든 미식가는 케이크보다 탕수육을 먹어야 합니다.
미식가가 부먹을 하든, 찍먹을 하든, 미식가가 치즈 케이크보다 탕수육을 먹은 이후, 미식가는 탕수육 본질을 평가할 수 있습니다. 비록 탕수육에게 정수, 본질이 없다고 해도, 만약 미식가가 탕수육을 근본적으로 평가하기 원한다면, 미식가는 치즈 케이크보다 탕수육을 먹어야 합니다. "나는 탕수육을 근본적으로 평가할 거야. 그래서 나는 진한 치즈 케이크를 먹어야 해." 이 주장은 황당무계합니다. 다른 사람들은 이 주장이 황당무계하다고 지적할 겁니다. 이 사례는 우리가 뭔가를 근본적으로 평가하기 전에 우리가 그것을 제대로 규정해야 한다고 보여줍니다. 평가보다 규정은 우선합니다.
미식가가 탕수육 본질을 평가하기 전에, 미식가는 탕수육을 규정해야 합니다. 만약 미식가가 탕수육을 규정하지 않는다면, 미식가는 치즈 케이크를 먹고 탕수육 본질을 평가할지 모릅니다. 이 엉뚱한 상황을 막기 위해 미식가는 무엇이 탕수육인지 파악해야 합니다. 비록 탕수육에게 정수와 본질이 없다고 해도, 만약 미식가가 탕수육을 근본적으로 평가하기 원한다면, 미식가는 치즈 케이크와 탕수육을 구분해야 합니다. 만약 미식가가 치즈 케이크와 탕수육을 구분하지 못한다면, 미식가는 치즈 케이크를 먹고 탕수육을 근본적으로 평가할지 모릅니다. 사람들은 이 엉터리 평가를 비웃을 겁니다.
미식가가 부먹을 하든, 찍먹을 하든, 치즈 케이크보다 부먹 탕수육과 찍먹 탕수육은 진짜 탕수육입니다. 치즈 케이크보다 부먹 탕수육과 찍먹 탕수육에서 탕수육 본질이 비롯하거나 근본적인 탕수육 평가가 비롯하는 것처럼, 평가보다 규정은 우선합니다. 만약 규정보다 평가가 우선한다면, 미식가가 치즈 케이크를 먹고 탕수육 양념과 파인애플을 운운하는 것처럼, 이건 엉터리 평가가 될지 모릅니다. 다른 평가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스페이스 오페라 역시 다르지 않습니다. 평가보다 규정이 우선하기 때문에, 평론가가 스페이스 오페라를 평가하기 전에, 평론가는 이 장르를 규정해야 합니다.
만약 스페이스 오페라를 평가하기 위해 평론가가 치즈 케이크를 먹는다면, 이건 황당무계할 겁니다. "나는 스페이스 오페라 본질을 찾기 원해. 그래서 나는 진한 치즈 케이크를 먹을 거야." 하지만 치즈 케이크에서 스페이스 오페라 본질이 우러나올 수 있나요? 비록 스페이스 오페라에게 정수와 본질이 없다고 해도, 만약 평론가가 스페이스 오페라를 근본적으로 평가하기 원한다면, 평론가는 치즈 케이크를 먹기보다 스페이스 오페라를 분석해야 합니다. 만약 평론가가 치즈 케이크를 먹고 스페이스 오페라를 운운한다면, 다른 사람들은 고개들을 갸웃거릴 겁니다. 이건 코미디와 다르지 않습니다.
만약 미식가가 탕수육을 평가하기 원한다면, 미식가가 찍먹을 하든, 부먹을 하든, 미식가는 치즈 케이크보다 탕수육을 먹어야 합니다. 만약 평론가가 스페이스 오페라를 평가하기 원한다면, 평론가가 소설을 읽든, 비디오 게임을 플레이하든, 평론가는 치즈 케이크를 먹기보다 스페이스 오페라를 분석해야 합니다. 이건 타당한 논리입니다. 아무도 이 논리가 틀리다고 부정하지 못합니다. 어쩌면 참여 문학 관점에서 평론가는 SF 소설을 평가하거나 아니면 순수 문학 관점에서 평론가는 SF 소설을 평가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참여 문학이든, 순수 문학이든, 평론가는 치즈 케이크를 먹어서는 안 됩니다.
미식가가 찍먹을 하든, 부먹을 하든, 미식가가 치즈 케이크보다 탕수육을 먹어야 하는 것처럼, 참여 문학이든, 순수 문학이든, 평론가는 진한 치즈 케이크를 먹기보다 SF 소설을 읽어야 합니다. 이건 타당한 논리입니다. 이 타당한 논리는 비단 치즈 케이크만 아니라 다른 것들을 적용할 수 있습니다. 요한 볼프강 폰 괴테는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썼습니다. 만약 평론가가 이 소설을 읽고 스페이스 오페라를 평가한다면, 이게 타당한 평가일 수 있나요? 스페이스 오페라를 평가하기 위해 평론가가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읽어야 하나요? 그건 아닙니다. 이 소설과 치즈 케이크는 다르지 않습니다.
평론가가 치즈 케이크를 먹기보다 SF 소설을 읽어야 하는 것처럼, 평론가는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보다 SF 소설을 읽어야 합니다. 평론가가 SF 소설을 읽거나 SF 게임을 플레이한 이후, 평론가는 스페이스 오페라를 운운할 수 있습니다. "나는 훌쩍 떠나온 것이 얼마나 기쁜지 모른다! 인간의 마음이란 대체 어떤 것일까! 하지만 가련한 레오노레는 정말 안됐어! 내가 그녀의 여동생이 지닌 독특한 매력에 이끌려 흐뭇해하고 즐거워하는 사이에 딱하게도 레오노레의 마음 속에 나를 향한 사랑이 불타오르는 것을 난들 어찌할 수 있었겠나?" 이 문장들이 스페이스 오페라인가요? 그건 아닙니다.
이 문장들은 스페이스 오페라가 아닙니다. 아무리 평론가가 이 문장들을 열심히 읽는다고 해도, 평론가는 스페이스 오페라 본질을 찾지 못합니다. 비록 스페이스 오페라에게 본질이 없다고 해도, 평론가는 이 문장들을 읽고 스페이스 오페라를 근본적으로 평가하지 못합니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과 달리, 만약 평론가가 SF 소설을 읽거나 SF 게임을 플레이한다면, 평론가는 스페이스 오페라를 근본적으로 평가할지 모릅니다. 평론가가 참여 문학 관점을 적용하든, 순수 문학 관점을 적용하든, 평론가가 SF 소설을 읽은 이후, 마침내 평론가는 스페이스 오페라를 근본적으로 평가할 수 있습니다.
루이즈 아베마(Louise Abbéma)는 <티 타임 Tea Time>을 그렸습니다. <티 타임>은 고풍스러운 19세기 서구 백인 여자가 찻잔을 들고 개를 내려다본다고 묘사합니다. 평론가가 이 그림을 보고 스페이스 오페라 본질을 찾을 수 있나요? 스페이스 오페라 본질을 파악하기 위해 평론가가 이 그림을 분석해야 하나요? 만약 평론가가 <티 타임>을 열심히 분석하고 루이즈 아베마 의도를 열심히 파악한다면, 평론가가 스페이스 오페라 본질을 깨달을까요? 아니, 루이즈 아베마는 치즈 케이크와 다르지 않습니다. 치즈 케이크에서 SF 본질이 비롯하지 않는 것처럼, 루이즈 아베마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비록 스페이스 오페라에게 본질이 없다고 해도, 스페이스 오페라를 근본적으로 분석하기 위해 평론가는 루이즈 아베마와 <티 타임>을 연구하기보다 SF 소설을 읽거나 SF 게임을 플레이해야 합니다. 만약 평론가가 이안 뱅크스 소설을 읽거나 엘리자베스 베어 소설을 읽는다면, 평론가는 스페이스 오페라를 근본적으로 평가할지 모릅니다. 평론가가 스페이스 오페라를 근본적으로 평가하기 전에, 평론가는 이안 뱅크스나 엘리자베스 베어나 다른 SF 작가들의 소설들을 읽어야 합니다. 아니면 평론가는 <네메시스>나 <가이아 프로젝트>나 <에버스페이스>나 다른 SF 게임들을 플레이해야 합니다.
이 사례가 보여주는 것처럼, 규정보다 평가는 우선하지 않습니다. 만약 규정보다 평가가 우선한다면, 스페이스 오페라를 분석하기 위해 평론가는 치즈 케이크를 먹거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읽거나, 루이즈 아베마를 연구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아무리 평론가가 <티 타임>을 열심히 연구하고 미학 논문을 제출한다고 해도, SF 팬들은 <티 타임> 미학 논문이 SF 평론이라고 간주하지 않을 겁니다. 평론가는 <티 타임>을 연구하기보다 이안 뱅크스 소설을 읽어야 합니다. 평론가가 이안 뱅크스 소설에게 참여 문학 관점을 적용하든, 순수 문학 관점을 적용하든, 평론가는 SF 소설을 읽어야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영화 <승리호>가 국내 스페이스 오페라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고 호평합니다. 이유가 무엇인가요? <승리호>가 뛰어난 시각 효과를 자랑하기 때문입니다. 이건 다소 이상한 호평입니다. 스페이스 오페라에게 시각 효과가 전부인가요? 만약 스페이스 오페라에게 시각 효과가 전부라면, 엘리자베스 베어 소설은 스페이스 오페라가 아닐 겁니다. 소설은 글자 매체입니다. 소설은 시각 효과를 사용하지 않습니다. 소설 <타이거! 타이거!>가 현란한 타이포그래피를 자랑하는 것처럼, 아무리 소설이 시각 효과를 동원한다고 해도, 적어도 소설 시각 효과와 블록버스터 영화 시각 효과는 다릅니다.
소설이 시각 효과를 동원하지 않거나, 소설 시각 효과와 블록버스터 영화 시각 효과가 아주 다르기 때문에, 엘리자베스 베어 소설이 스페이스 오페라가 아닌가요? 만약 시각 효과가 기준이라면, 영화 <타이타닉>은 어떤가요? 엘리자베스 베어 소설과 달리, <타이타닉>은 엄청난 시각 효과를 보여줍니다. 그래서 이 영화가 스페이스 오페라인가요? 영화 관객들이 <승리호>를 칭찬할 때, 그들은 시각 효과를 중시합니다. 시각 효과 관점에서 이안 뱅크스 소설과 엘리자베스 베어 소설보다 <승리호>는 <타이타닉>에 가깝습니다. <승리호>가 <타이타닉>에 가깝기 때문에, <타이타닉>이 SF 영화인가요?
<승리호>가 <타이타닉>에 가깝기 때문에, <타이타닉>이 스페이스 오페라인가요? 그건 아닙니다. 영화 관객들이 오직 시각 효과만 중시하고 <승리호>를 칭찬할 때, 그들은 스페이스 오페라로서 <승리호>를 칭찬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시각 효과 영화로서 <승리호>를 칭찬합니다. 비록 <승리호>가 스페이스 오페라보다 중세 판타지나 무협이었다고 해도, 만약 <승리호>가 뛰어난 시각 효과를 자랑했다면, 영화 관객들은 <승리호>를 칭찬했을 겁니다. 이 관점에서 시각 효과는 치즈 케이크와 다르지 않습니다. 스페이스 오페라를 근본적으로 분석하기 위해 평론가는 치즈 케이크를 먹어서는 안 됩니다.
스페이스 오페라를 근본적으로 분석하기 위해 평론가는 오직 시각 효과에만 매달려서는 안 됩니다. 블록버스터 시각 효과와 치즈 케이크가 다르지 않은 것처럼, 평가보다 규정은 우선합니다. 만약 규정보다 평가가 우선한다면, 평론가는 헬름 협곡 공성전을 보고 스페이스 오페라를 분석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헬름 협곡 공성전에서 스페이스 오페라 본질이 우러나오거나 근본적인 SF 평론이 비롯할 수 있나요? 어떤 SF/판타지 팬들은 엘리자베스 베어 소설과 헬름 협곡 공성전이 별로 다르지 않다고 분류할지 모릅니다. 이 분류는 틀리지 않습니다. 사이언스 픽션과 판타지는 친숙한 짝궁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사이언스 픽션과 판타지가 친숙한 짝궁이라고 해도, 두 장르에게는 결정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만약 평론가가 이 차이를 인식하지 못한다면, 평론가는 스페이스 오페라 본질을 찾지 못할 겁니다. 비록 스페이스 오페라에게 본질, 정수가 없다고 해도, 스페이스 오페라를 근본적으로 분석하기 위해 평론가는 엘리자베스 베어 소설과 헬름 협곡 공성전을 구분해야 합니다. 아무리 을씨년스러운 흡혈귀 성채에서 드루이드와 검치 호랑이 동료가 구울들을 물리친다고 해도, 이건 스페이스 오페라가 아닙니다. 아무리 치즈 케이크보다 던전 탐험 드루이드가 훨씬 낫다고 해도, 이건 SF가 아닙니다.
"비평과 비판은 동의어가 아니다. 작품을 보고 단점을 찾아내 지적하는 것보다 미덕을 찾아내는 일이 더 어렵고 가치 있는 일이며 그런 관점에서 글을 쓴다." 신형철 평론가가 <몰락의 에티카>를 출판했을 때, 이렇게 신형철 평론가는 주장했습니다. 만약 이 주장에서 작품이 스페이스 오페라가 된다면, 장르 평론은 다음과 같습니다. "평론(비평)과 비판은 동의어가 아니다. 스페이스 오페라에서 단점을 찾아내고 지적하기보다 미덕을 찾아내기는 훨씬 어렵다. 이 작업에는 훨씬 가치가 있다." 네, 맞습니다. 평론가는 스페이스 오페라를 열심히 까대기보다 스페이스 오페라 미덕을 찾아야 합니다.
하지만 평론가가 스페이스 오페라 미덕을 찾기 전에, 평론가는 스페이스 오페라가 무엇인지 규정해야 합니다. 만약 규정보다 평가가 우선한다면, 평론가는 치즈 케이크를 먹고 스페이스 오페라 미덕을 찾을지 모릅니다. "우와, 이 치즈는 아주 진하고 풍부해! 스페이스 오페라는 진한 치즈 맛을 자랑해야 해!" 이게 SF 평론인가요? 그건 아닙니다. 평론가는 비단 치즈 케이크만 아니라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과 루이즈 아베마 그림과 블록버스터 시각 효과를 경계해야 합니다. 평론가가 치즈 케이크를 스페이스 오페라라고 착각하는 것처럼, 평론가는 <티 타임>을 SF 그림이라고 착각할지 모릅니다.
아무리 신형철 평론가가 골백번 옳다고 해도, 아무리 신형철 평론가가 절대적으로 옳다고 해도, 신형철 평론가는 치즈 케이크가 스페이스 오페라라고 우기지 못합니다. 신형철 평론가는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과 <티 타임>과 <타이타닉>이 스페이스 오페라라고 우기지 못합니다. <티 타임>은 스페이스 오페라가 되지 못하나, 엘리자베스 베어 소설은 스페이스 오페라입니다. 비평과 비판이 동의어가 되든, 되지 않든, 루이즈 아베마와 엘리자베스 베어는 아주 다릅니다. 뭐라고 신형철 평론가가 주장하든, 신형철 평론가는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과 <에버스페이스>가 다르다고 인정해야 합니다.
<에버스페이스>는 스페이스 오페라가 될 수 있으나, 비디오 게임 <소드 코스트 레전드>는 되지 못합니다. 이유가 무엇인가요? 대답들은 여러 가지입니다. 스페이스 오페라를 비롯해 사이언스 픽션은 고정적인 경계선이 아닙니다. 오히려 SF 장르는 유동적이고 거시적인 흐름입니다. 스페이스 오페라, 사이언스 픽션 장르가 유동적이고 거시적인 흐름이기 때문에, SF 팬들은 다양한 대답들을 내놓을 수 있습니다. 다양한 대답들은 '시대 격차'를 포함합니다. 아니, 다른 대답들보다 시대 격차는 훨씬 근본적인 대답인지 모릅니다. 어쩌면 시대 격차는 아주 근본적인 대답이나 가장 근본적인 대답인지 모릅니다.
많은 남한 사람들은 15세기 조선 황희 정승을 존경합니다. 많은 남한 사람들은 황희 정승이 훌륭하다고 존경합니다. 이 남한 사람들 중에는 여자들이 있습니다. 남한 사회에서 많은 여자들은 황희 정승이 훌륭하다고 존경합니다. 15세기 조선 사회에서 여자는 철학자가 되지 못했습니다. 15세기 조선 사회에서 여자 철학자는 일반적이지 않았습니다. 시몬 드 보부아르처럼, 근대 사회에서 여자는 철학자가 될 수 있으나, 조선 사회에서 이건 일반적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황희 정승이 조선 사회를 비판했나요? 아니, 비록 여자 철학자가 일반적이지 않다고 해도, 황희는 비판하지 않았습니다.
남한 사회에서 많은 여자들이 황희 정승을 존경하고, 황희 정승이 가부장 사회를 비판하지 않았기 때문에, 남한 여자들이 가부장 사회에 동의하나요? 아니, 만약 내일 당장 남한 정부가 여자 철학자를 금지한다면, 많은 남한 여자들은 반발할 겁니다. 아무리 그들이 황희를 존경한다고 해도, 그들은 여자 철학자를 옹호할 겁니다. 많은 남한 여자들이 여자 철학자를 옹호하기 때문에, 만약 황희 정승이 21세기 초반 남한 사회를 본다면, 아무리 남한 여자들이 황희를 존경한다고 해도, 황희는 기절초풍할지 모릅니다. "아니, 세상에! 어떻게 여자가 철학자가 될 수 있지? 21세기 초반 남한 사회는 말세야!"
비단 훌륭하신 황희 정승님만 아니라 다른 조선 지식인들 역시 기절초풍할 겁니다. 만약 그들이 21세기 초반 남한 사회를 본다면, 훌륭하신 15세기 조선 지식인들께서는 기절초풍할 겁니다. 15세기 조선 사회에서 여자는 지식인이 되지 못했고, 민중들을 가르치지 못했고, 지배 계급에게 저항하지 못했으나, 시몬 드 보부아르가 가부장 편견을 비판했던 것처럼, 근대 사회에서 여자는 지식인이 되고, 민중들을 가르치고, 지배 계급에게 저항할 수 있습니다. 세종 대학교 사태가 보여주는 것처럼, 비록 가부장 제도는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고, 여전히 이건 지배적인 관념이나, 적어도 여자는 지식인입니다.
적어도 대학교에서 여자는 강의할 수 있습니다. 15세기 조선 사회에서 이건 불가능했으나, 21세기 초반 남한 사회에서 이건 가능합니다. 500년이라는 시대 격차에서 이 현상은 비롯했습니다. 500년이 흘렀기 때문에, 조선 사회와 남한 사회는 아주 다릅니다. 500년이 흘렀기 때문에, 불가능은 가능이 되었습니다. 500년 시대 격차 덕분에, 불가능이 가능이 되는 것처럼, 만약 또 다시 500년이 흐른다면, 또 다시 어떤 불가능은 가능이 될지 모릅니다. 500년 이후, 인류 사회는 아주 크게 바뀔 겁니다. 21세기 초반 남한 사람들은 어떤 것을 상식이라고 간주하나, 500년 이후, 상식은 망상이 될지 모릅니다.
500년 이후, 상식이 망상이 될지 모르고, 불가능이 가능할지 모르는 것처럼, 시대 격차는 아주 놀랍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현재가 고정적이라고 착각하나, 현재는 미래를 향해 끊임없이 흐르고, 미래는 아주 크게 바뀝니다. 조선 사회는 여자 대학 교수를 꿈꾸지 못했으나, 근대 사회는 꿈꿀 수 있습니다. 500년 시대 격차에서 여자 지식인이 비롯하는 것처럼, 시대 격차는 인류 사회를 크게 바꿉니다. 이게 아주 놀라운 변화이기 때문에, 사이언스 픽션은 이 놀라움을 강조하기 원합니다. 적어도 사이언스 픽션은 미래 사회를 묘사하고 변화를 보여줍니다. 이건 가장 중요한 SF 미덕일 겁니다.
이건 모든 사이언스 픽션에서 경이로운 시대 격차가 가장 중요한 미덕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스페이스 오페라를 보세요. 스페이스 오페라들이 시대 격차를 강조하나요? <에버스페이스> 같은 비디오 게임이 놀라운 사회 변화를 강조하나요? 그건 아닙니다. 스페이스 오페라는 시대 격차보다 화끈하고 거대한 전투를 강조합니다. 하지만 훌륭하신 황희 정승님께서는 궤도 정거장을 알지 못했습니다. 심지어 21세기 초반 어린 여자 아이들조차 궤도 정거장을 인식하나, 훌륭한 조선 재상 황희는 이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황희가 궤도 정거장을 알지 못했던 것처럼, 이건 시대 격차를 드러냅니다.
스페이스 오페라에서 궤도 정거장은 드문 설정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 장르에서 궤도 정거장은 흔한 설정입니다. 황희 정승이 궤도 정거장을 알지 못했으나, 심지어 21세기 초반 어린 여자 아이들조차 궤도 정거장을 인식하는 것처럼, 궤도 정거장이 시대 격차를 드러내고, 스페이스 오페라에서 궤도 정거장이 흔한 설정이기 때문에, 스페이스 오페라는 시대 격차에게 기반합니다. 하드 사이언스 픽션과 달리, 비록 스페이스 오페라가 황당무계하다고 해도, 스페이스 오페라는 시대 격차에게 기반합니다. 시대 격차는 아주(가장) 근본적인 SF 특성인지 모릅니다. SF 평론가는 이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만약 SF 평론가가 이것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SF 평론가는 이 장르를 근본적으로 분석하지 못할 겁니다. 시대 격차가 아주(가장) 근본적인 특성이기 때문에, 만약 평론가가 이 특성을 외면하고 간과한다면, 평론가는 이 장르를 분석하지 못할 겁니다. 스페이스 오페라를 분석하기 위해 평론가가 시대 격차를 외면하지 못하고 간과하지 못하는 것처럼, 시대 격차는 아주(가장) 근본적인 대답이 될 수 있습니다. 신형철 평론가 역시 이것을 부정하지 못합니다. <소드 코스트 레전드>에서 세하닌 문보우 성직자가 신성 주문을 외운다고 해도, 이건 시대 격차가 아닙니다. 종교와 마법은 시대 격차가 아닙니다.
근대 사회 이전에, 사람들은 종교와 마법을 인식했습니다. 세하닌 문보우 성직자가 신성 주문을 외우고 언데드를 물리치는 것처럼, <소드 코스트 레전드>에서 종교와 마법이 아주(가장) 커다란 비중을 차지하고, 종교와 마법이 근대 사회에 속하지 않기 때문에, <소드 코스트 레전드>는 시대 격차에게 기반하지 않습니다. 반면, 사이언스 픽션이 시대 격차에게 기반하기 때문에, 훌륭한 황희 정승이 21세기 초반 남한 사회를 보고 기절초풍하는 것처럼, 이건 SF 미덕입니다. 아무리 비평과 비판이 다르다고 해도, 평론가가 SF를 평가하기 전에, 평론가는 인류 사회가 바뀐다고 인정해야 합니다.
만약 중세 판타지가 스팀펑크를 도입한다면, 중세 판타지는 사이언스 판타지로 변신~하고 시대 격차를 강조할 수 있습니다. 이 관점에서 중세 판타지+스팀펑크와 스페이스 오페라는 비슷합니다. 스페이스 오페라가 시대 격차에게 기반하는 것처럼, 인류 사회는 계속 바뀔 겁니다. 이제까지 인류 사회들이 계속 바뀐 것처럼, 앞으로 인류 사회는 계속 바뀔 겁니다. 고정 관념은 깨질지 모르고, 지배적인 관념은 사라질지 모르고, 미친 헛소리는 상식이 될지 모릅니다. 많은 사람들은 현재가 고정적이라고 착각하나, 스페이스 오페라를 비롯해 사이언스 픽션은 현재가 고정적이지 않다고 강조합니다.
신형철 평론가가 단점을 지적하기보다 장점을 찾기 원하는 것처럼, SF 평론가는 스페이스 오페라를 까대기보다 스페이스 오페라를 칭찬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SF 평론가가 이 장르를 까대든, 칭찬하든, SF 평론가는 현재 사회와 미래 사회가 아주 다르다고 인정해야 합니다. 만약 현재 사회와 미래 사회가 다르지 않다면, 만약 미래 사회가 그저 현재 사회의 연장선에 불과하다면, 현재 사회에서 장거리 유인 우주선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미래 사회에서도 장거리 우주선은 존재하지 않을 겁니다. 장거리 우주선이 나타나지 않기 때문에, 스페이스 오페라 역시 나타나지 못합니다.
만약 현재 사회와 미래 사회가 다르지 않다면, 스페이스 오페라는 나타나지 못할 겁니다. 현재 사회와 미래 사회가 아주 다르기 때문에, 비록 현재 사회에서 장거리 유인 우주선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해도, 미래 사회는 장거리 우주선을 건조할 겁니다. 이렇게 시대 격차는 스페이스 오페라를 결정적으로 뒷받침합니다. 현재 사회와 미래 사회가 아주 다르기 때문에, 26세기 미래 사회에서 자유 민주주의 같은 21세기 초반 상식은 미친 헛소리일지 모릅니다. 만약 SF 평론가가 이것을 외면하고 간과한다면, SF 평론가는 치즈 케이크가 궤도 정거장이라고 오해할지 모릅니다.
※ 사진 <Cheesecake …> 스크린샷 출처: sharonang,
pixabay.com/photos/cheesecake-chocolate-sweet-yummy-608963/
※ 게임 <에버스페이스> 스크린샷 출처:
store.steampowered.com/app/396750/EVERSPACE/
※ 게임 <소드 코스트 레전드> 스크린샷 출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