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생태주의
'치즈 김밥'과 '티라노사우루스'에서 형식과 내용 본문
제목처럼 김성희가 쓴 <사랑예방백신백신>은 풍자 소설입니다. 소설 속에서 사랑은 전염병입니다. 게다가 사랑은 아주 원시적인 전염병입니다. 유럽 백인 시민들이 아프리카 흑인 원주민들을 열등하다고 무시하는 것처럼, <사랑예방백신백신>에서 사랑이라는 감정은 열등합니다. 누군가가 사랑에 빠진다면, 다른 사람들은 그 사람이 전염병에 빠졌다고 생각할 겁니다. 당연히 사랑을 예방하기 위해 사람들은 백신을 원합니다. 사랑 예방 백신이 있기 때문에, 사람들은 열등하고 원시적인 감성에 빠지지 않을 수 있죠.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지적하는 것처럼, 사랑을 통제하기는 힘듭니다. 누군가를 사랑할 때, 인간은 엄청난 족쇄를 끊고 돌진할 수 있습니다.
소설 주인공은 우연히 사랑에 빠지고, 사랑을 차별하는 사회와 맞서기 위해 소설 주인공은 반기를 듭니다. 이건 단순한 일탈이 아니라 반체제 혁명으로 이어지죠. 어떤 독자들은 이게 우스꽝스러운 디스토피아가 아니라 21세기 사회를 꼬집었다고 말할 겁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사랑은 힘을 잃습니다. 사랑보다 돈이 우선이기 때문에. 시장 경제가 모든 것을 상품화하기 때문에. 누군가를 사랑할 때 인간에게 타인이 필요함에도, 시장 경제가 타인을 배척하고 모두를 동일하게 만들기 때문에. 모노 컬처가 자본주의를 대표하는 것처럼, 자본주의의 속성은 획일적이고 전체주의적입니다.
동시에 풍자 소설로서 <사랑예방백신백신>은 존댓말을 사용합니다. 일반적인 성인 소설들은 반말을 사용하나, <사랑예방백신백신>에서 서술 문장들은 존댓말을 사용합니다. 그래서 이 소설은 동화 분위기를 풍기고, 독자를 존중하는 느낌을 풍기고, 가끔 살짝 오글거립니다. 만약 <사랑예방백신백신>이 만화나 영화나 게임이었다면, <사랑예방백신백신>은 이런 분위기들을 풍기지 못했을 겁니다. 만화나 영화나 게임에는 '서술 문장들'이 없습니다. 만화나 영화나 게임에 서술 문장들이 있다고 해도, 그것들은 부차적입니다. 오직 소설만 근본적으로 서술 문장들을 동원합니다.
"이웃 마을에서 영희는 철수를 만났고 사랑에 빠졌어요." 만약 처음부터 끝까지, 소설이 이런 문장들을 동원한다면, 소설은 색다른 분위기를 풍길 수 있겠죠. 하지만 <사랑예방백신백신>이 우스꽝스러운 풍자 소설이 아니었다면, <사랑예방백신백신>은 존댓말 서술 문장들을 동원하지 못했을 겁니다. 만약 무겁고 잔인한 하드 보일드 소설이 존댓말 문장들을 동원한다면, 그건 너무 어울리지 않을 겁니다. "어두운 뒷골목에서 암살자는 얼른거리는 사시미로 누군가의 배를 사정없이 찔렀고, 옆구리를 찢었고, 내장을 꺼냈답니다." 아무리 작가가 존댓말들을 열심히 동원한다고 해도, 이런 내용은 발랄해지지 않습니다. 하드 보일드 탐정 소설에서 대실 해밋이 존댓말 서술 문장들을 쓴다면, 그게 어울릴까요?
<사랑예방백신백신>은 발랄한 연애 이야기이고, 그래서 존댓말 서술 문장들과 이 소설은 잘 어울립니다. 누군가가 사랑에 빠지고, 귀엽고 예쁘게 연애하고, 사랑 예방 백신을 막기 위한 백신을 개발한다면, 이런 내용은 동화 같은 분위기를 풍길 수 있을 겁니다. 동화 같은 분위기는 "~했어요." 같은 문장들과 잘 어울립니다. 형식과 내용은 서로 잘 어울립니다. 이렇게 소설에서 형식과 내용은 서로 영향을 미칩니다. 형식은 내용에게서 독립적이지 않고, 내용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사랑예방백신백신>은 소설 모음집 <당신이 죽어야 하는 일곱 가지 이유>에 속했습니다.
이 소설 모음집에는 신스틱이 쓴 <미래의 이브>가 있고, <미래의 이브> 역시 연애 소설입니다. <미래의 이브>에는 두근거리고 설레는 연애들이 많습니다. 그렇다고 해도 이 소설은 동화 같은 분위기를 풍기거나 존댓말 문장 서술들을 동원하지 못할 겁니다. 발랄한 연애들과 달리, 배경 설정이 암울하기 때문입니다. 겉모습과 달리, <미래의 이브>는 암울한 소설입니다. 만약 신스틱이 존댓말들을 동원했다면, 동화 같은 형식과 암울한 내용은 서로 부딪혔을 겁니다. 형식은 내용을 해치고, 형식과 내용은 서로 어울리지 않을 겁니다. 소설을 쓸 때, 작가는 비단 내용만 아니라 형식을 고민해야 합니다.
이렇게 형식과 내용이 긴밀한 관계를 맺었음에도, 어떤 독자들은 독립적인 형식이 존재한다고 생각할 겁니다. 이런 독자들은 문장들이 무슨 내용을 이야기하든 문장 형식들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중요한 것은 내용이 아니라 형식과 구조입니다. 내용은 그저 부차적인 것에 불과합니다. 이런 독자들은 내용보다 형식을 중시합니다. 적어도 이런 독자들은 형식이 내용을 압도하거나 그저 내용이 형식을 보조할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분명히 형식은 중요합니다. 작가가 문장을 구성하지 못한다면, 작가는 절대 소설을 쓰지 못할 겁니다. <사랑예방백신백신>과 <미래의 이브>는 그저 이야기에 불과하지 않습니다. 양쪽은 소설입니다. 소설 주인공이 사랑 예방 백신을 위한 백신을 만들든, 남자 인조인간으로서 소설 주인공이 인간 아가씨를 사랑하든, 이런 이야기들은 소설이라는 형식에 들어가야 합니다. 소설이라는 형식 없이, 이런 이야기들은 존재하지 못합니다.
우리가 이야기를 전달할 때, 우리는 문장이나 그림이나 영상이나 음악이나 다른 뭔가를 이용해 이야기를 표현해야 합니다. 소설 <미래의 이브>에서 봄의 여신 같은 화사한 아가씨를 묘사하기 위해 신스틱은 여러 미사여구들을 동원합니다. 만약 <미래의 이브>가 소설이 아니라 TV 드라마라면, 드라마 PD는 미사여구들보다 촬영 기법들을 동원할 겁니다. 잠자리에서 이모가 어린 조카에게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줄 때, 이모는 언어를 동원해야 합니다. 형식은 중요합니다. 하지만 오직 형식만이 중요할까요? 내용 없는 형식이 존재할 수 있을까요?
1) 치즈 김밥이 어디에 있나요?
2) 티라노사우루스가 어디에 있나요?
두 문장은 서로 똑같습니다. 두 문장의 구조는 별로 다르지 않습니다. 양쪽 모두 의문문이고, 물음표로 마무리했고, 핵심 단어 체언(치즈 김밥과 티라노사우루스)을 먼저 배치했습니다. 양쪽 모두 마침표를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양쪽 문장은 단순한 혼잣말이나 감탄사가 아닐 겁니다. 체언 치즈 김밥에는 '이'라는 조사가 붙고, 체언 티라노사우루스에게는 '가'라는 조사가 붙으나, 이건 특별히 중요한 차이가 아닐 겁니다. 양쪽 문장 모두 '~있습니까'보다 '~있나요'라고 물었습니다.
그래서 이런 문장은 딱딱한 느낌보다 부드러운 느낌을 풍깁니다. 'ㄴ'과 'ㅇ'이 연이어 나왔기 때문에, 독자가 '있나요'를 발음할 때, 김영랑이 쓴 시 <돌담에 속삭이는 햇발>처럼, 독자는 혀를 부드럽게 굴릴 겁니다. 쓸데없이 군기를 잡는 군발이들은 이런 발음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군대는 각을 중시하고, 그래서 군대 말투는 딱딱한 '있습니까'를 좋아할 겁니다. 군기를 잡는답시고 사람들을 패죽이는 군대와 달리, 소설 작가가 'ㄴ'과 'ㅇ'을 연이어 사용한다면, 작가는 부드럽고 포근한 느낌을 풍길 수 있을 겁니다.
어쩌면 소설 작가가 "치즈 김밥이 어디에 있나요?"라고 적었을 때, 작가는 '치즈'라는 늘어지는 발음과 '나요'라는 부드러운 발음을 비교하기 원했을지 모릅니다. '치즈'와 '나요'는 서로 잘 어울리는 발음일 겁니다. '티라노사우루스'라는 발음과 '나요'라는 발음이 서로 잘 어울릴까요? 단어 '티라노사우루스'에서 첫음절 '티'는 다소 딱딱하나, 연이어 이어지는 음절들 '라노사우루'는 'ㄴ'과 'ㄹ'과 'ㅇ'을 부드럽게 굴립니다. 음절들 '라노사우루'는 '나요'와 잘 어울릴지 모릅니다. 독자가 형식에 주목할 때, 독자는 이런 특성들을 지적할 수 있습니다. 이런 분석 역시 소설을 평가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게 전부일까요?
1번 문장과 2번 문장은 다릅니다. 인간의 구강 구조가 '치즈 김밥'과 '티라노사우루스'를 서로 다르게 발음하기 때문에? 그건 전부가 아닐 겁니다. 그것 역시 중요한 차이이나, 왜 우리가 어떤 것을 치즈 김밥이라고 부르고 어떤 것을 티라노사우루스라고 부르나요? 치즈 김밥과 티라노사우루스라는 기표(형식)에 아무 기의(내용)가 없을까요? 당연히 내용이 다르기 때문에 형식 역시 달라집니다. 김밥이 존재하기 때문에, 김밥 속에 치즈가 들었기 때문에, 우리는 그걸 '치즈 김밥'이라는 기표로 부릅니다. 현실 속에서 치즈 김밥과 티라노사우루스가 존재하기 때문에, 현실을 표현하기 위해 우리는 기표를 사용합니다.
기표는 절대 순수한 형식이 되지 못하고 현실 속에서 기의를 담아야 합니다. 게다가 티라노사우루스는 꽤나 비일상적인 단어입니다. 일상에서 사람들은 치즈 김밥이라고 아무렇지 않게 말할 수 있으나, 티라노사우루스라고 아무렇지 않게 말하지 못할 겁니다. "치즈 김밥이 어디에 있나요?" 분식집에서 이렇게 사람들은 물을지 모릅니다. 이건 아주 평범한 의문문입니다. "티라노사우루스가 어디에 있나요?" 이렇게 누군가가 물었을 때, 왜 그 사람이 이걸 물었을까요? 이 사람이 누구일까요? 왜 이 사람이 티라노사우루스를 찾는 중일까요?
어쩌면 여기는 장난감 가게이고, 이 사람은 티라노사우루스 장난감을 찾는 중인지 모릅니다. 아니면 이 사람은 이모이고, 이모는 어린 조카와 함께 공룡 그림책을 보는 중인지 모릅니다. 이모는 조카에게 티라노사우루스가 어디에 있는지 물었을지 모릅니다. 일반적으로 어른은 아이에게 존댓말을 사용하지 않으나, 종종 어른은 아이에게 존댓말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사람이 장난감이나 그림이 아니라 진짜 티라노사우루스 렉스를 찾는다면? 어쩌면 이 사람은 고생물학자이고, 고생물학자는 대학원 학생들과 함께 티라노사우루스 화석을 발굴하는 중인지 모릅니다.
지도 교수가 학생들을 존중하기 때문에, 고생물학자는 존댓말을 썼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만약 이 사람이 살아있는 티라노사우루스 렉스를 찾는다면? 여기에서 "티라노사우루스가 어디에 있나요?"라는 문장을 해석할 때, 독자는 주류 문학을 넘어 SF 소설로 들어가야 합니다. 일반적인 주류 문학은 살아있는 티라노사우루스를 말하지 못합니다. 살아있는 티라노사우루스는 모두 멸종했습니다. 고생물학자들은 물수리가 공룡이라고 말할 수 있으나, 물수리는 티라노사우루스가 아닙니다. "티라노사우루스가 어디에 있나요?"라는 문장에서 화자가 진짜 살아있는 티-렉스를 찾을 때, 이 문장은 SF 소설에서 비롯했을 겁니다.
"아무르 호랑이가 어디에 있나요?"와 "티라노사우루스가 어디에 있나요?"는 서로 다릅니다. 야생 보호 구역에서 동물학자들은 어디에 아무르 호랑이가 있는지 물을 수 있습니다. 반면, 현실 속에서 아직 아무도 살아있는 티라노사우루스를 본 적이 없습니다. 따라서 "티라노사우루스가 어디에 있나요?"는 SF 소설에서 비롯했을지 모릅니다. 사실 소설 <쥬라기 공원>에서 답사 인원들이 멋진 저녁 노을을 바라볼 때, 앨런 그랜트는 어디에 티-렉스가 있는지 묻습니다. 만약 독자가 "샤이-훌루드가 어디에 있나요?"라는 문장을 읽는다면, 독자는 이게 SF 소설에서 비롯했다고 훨씬 확신할 수 있을 겁니다.
아무리 독자가 사전을 뒤적인다고 해도, 독자는 샤이-훌루드를 찾지 못할 겁니다. 현실에 아예 샤이-훌루드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치즈 김밥이 어디에 있나요?"와 "티라노사우루스가 어디에 있나요?"와 "샤이-훌루드가 어디에 있나요?"라는 세 문장들은 형식적으로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하지만 내용에는 엄청난 차이들이 있죠. 이렇게 문장 형식들이 크게 다르지 않다고 해도, 내용들은 엄청나게 다를 수 있고, 따라서 독자는 오직 형식에만 주목하지 못할 겁니다. 독자는 현실에서 내용을 이끌어내고 분석할 수 있습니다. 게다가 심지어 부드러운 발음을 분석할 때조차 저는 군대가 쓸데없이 군기를 잡는다고 사회 현상을 비판했습니다. 형식이 정말 그저 형식에 불과한가요?
물론 이건 아주 간단한 사례입니다. 심지어 이건 너무 조악한 사례일지 모릅니다. 기호학자들이 소설을 분석할 때, 기호학자들은 훨씬 복잡하게 분석합니다. 그렇다고 해도 이런 사례(치즈 김밥과 티-렉스와 샤이-훌루드)는 기표와 기의가 떨어지지 않는다는 사례가 될 수 있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