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생태주의
<바다의 가장자리>에서 바다를 표현하기 위한 방법 본문
[이런 장면은 황홀합니다. 하지만 자연 풍경이 황홀한가요, 아니면 풍경을 묘사하는 그림체가 황홀한가요?]
소설 <해저 2만리>는 비경 탐험 소설이고 온갖 바다 풍경들을 묘사합니다. 잔잔한 해안부터 컴컴한 심해까지, <해저 2만리>는 바다를 구석구석 돌아다닙니다. 바다 풍경을 묘사할 때, 종종 쥘 베른은 박물학자가 되고 백과 사전을 씁니다. 쥘 베른은 숱한 정보들을 늘어놓습니다. 백과 사전이 정보들을 줄줄이 늘어놓는 것처럼, 쥘 베른은 정보들을 줄줄이 늘어놓습니다. 이런 백과 사전 같은 묘사는 마음보다 머리를 자극합니다. 여기에는 시적인 문구나 감성적인 도취가 없습니다. 어떤 독자는 문학적으로 백과 사전을 읽을지 모릅니다. 심지어 어떤 문학 평론가들은 문학적으로 스마트폰 설명서를 읽습니다.
카를 마르크스는 자신에게 문학적인 재능이 없다고 한탄했으나, 어떤 독자들은 문학적으로 <자본론>을 읽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만약 백과 사전이 문학적일 수 있다면, 쥘 베른이 늘어놓는 백과 사전 묘사 역시 마찬가지일 겁니다. 쥘 베른이 초록색 고생놀래기, 두 검은 줄무늬의 바르바리 숭어, 꼬리가 둥근 망둥이, 등이 푸르고 머리가 은빛인 고등어, 화려한 아주리, 줄무늬 감성돔, 여섯 띠들의 조니퍼 감성돔, 아올로 스토미, 1m짜리 대주둥치, 가시곰치를 늘어놓는다면, 독자의 머리는 이것들을 마음으로 전달할지 모릅니다.
정보는 감성이 될 수 있습니다. 생명 진화 역사는 42억 년에 가까울지 모릅니다. 42억 년은 엄청난 숫자입니다. 그 자체로서 42억은 엄청난 숫자입니다. 게다가 지구는 45억 살입니다. 만약 생명 진화 역사가 42억 살이라면, 지구에서 꽤나 빠른 시기에 생명체는 나타났을 겁니다. 중세 사람들과 달리, 20세기 사람들은 고대 바다 풍경을 묘사하고 감성에 젖을 수 있습니다. 비디오 게임 <압주>가 고대 바다와 둔클레오스테우스를 비롯해 온갖 해양 동물들을 묘사하는 동안, 게임 플레이어는 원시적인 향취에 빠질 수 있습니다. 고생물학자들이 고대 해양 생태계를 연구하기 때문에, 게임 플레이어는 감성에 젖을 수 있습니다.
이렇게 정보는 감성이 될 수 있습니다. 쥘 베른 역시 이런 효과를 노렸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백과 사전 묘사가 너무 정보에만 치우치기 때문에, 종종 이런 묘사는 너무 딱딱합니다. <해저 2만리>에서 쥘 베른은 바다 풍경들을 기계적으로 적고 어떻게 그것들이 유기적으로 이어지는지 말하지 않습니다. 바다 풍경들은 많으나, 유기적인 바다 생태계들은 없습니다. 비디오 게임 <압주>는 압도적인 물고기 떼와 함께 감미로운 음악을 들려주나, 소설 <해저 2만리>는 감미롭고 시적인 문구들에 인색합니다. 쥘 베른은 시인보다 박물학자가 되고 싶어합니다.
쥘 베른은 박물학자가 되고 싶어하나, 레이첼 카슨의 생각은 다소 다른 것 같습니다. 레이첼 카슨은 해양 생태학자입니다. 하지만 레이첼 카슨은 딱딱하게 정보들을 나열하지 않습니다. 레이첼 카슨은 시적이고 감미로운 문구들을 좋아합니다. 심지어 <센스 오브 원더>는 과학 서적보다 자연 풍경들을 찬양하는 수필에 가깝습니다. 해양 생태학 서적 <바다의 가장자리>에서 레이첼 카슨은 어떻게 해안 생태계가 유기적으로 이어지는지 설명합니다. 레이첼 카슨은 과학적인 정보들을 줄줄이 늘어놓고 동시에 자신이 거기에 감탄한다고 적습니다.
<바다의 가장자리>에서 레이첼 카슨은 독자들이 그저 해안 생태계를 배우기만 원하지 않습니다. 레이첼 카슨은 독자들이 해안 생태계에 감동하기 바랍니다. 레이첼 카슨은 얼마나 해안 생태계가 감동적이고 원대하고 인간을 넓게 품을 수 있는지 적습니다. <바다의 가장자리>를 읽는 동안, 독자들은 레이첼 카슨이 치열한 환경 운동가였다고 기억할지 모릅니다. 그래서 <바다의 가장자리>는 감동적일지 모릅니다. 하지만 독자가 그런 사실을 알지 못한다고 해도, 분명히 <바다의 가장자리>에는 넉넉한 감동이 있습니다. 생태계는 원대하고 살아있는 상호 작용이고, 레이첼 카슨은 이런 사실을 감성으로 승화시킵니다.
"가장자리의 세계 해안은 장구한 세계다. 해안은 끊임없는 창조와 끈질긴 삶의 본능에 관한 감각이 생생하게 살아 있는 세계이기도 하다. 해안에 들어설 때마다 나는 하나의 생명체가 다른 생명체, 그리고 자신을 둘러싼 환경과의 관련성 속에서 생명이라는 복잡한 옷감을 직조한다는 사실을 느끼고 그 아름다움과 참다운 의미를 새삼스레 깨닫곤 한다." 이런 문구들은 생태계가 원대하다는 사실을 이용해 원대한 감성을 소환합니다. 소설 <해저 2만리>에는 이런 감성이 없습니다. 종종 박물학자에서 감동적인 시인으로 쥘 베른은 자리를 옮깁니다.
하지만 시인으로서 쥘 베른은 겸손해지지 않습니다. 레이첼 카슨은 겸허하게 해안 생태계를 둘러보나, 쥘 베른은 계몽적이고 진보적인 시각으로 바다를 바라봅니다. 쥘 베른이 감동을 말한다고 해도, 그건 계몽적이고 진보적인 감동입니다. 비단 <해저 2만리>만 아니라 소설 <그랜트 선장의 아이들>이나 소설 <신비의 섬>에서도 쥘 베른은 계몽적이고 진보적인 감동을 숨기지 않습니다. <해저 2만리>와 <그랜트 선장의 아이들>과 <신비의 섬>에서 바다를 바라볼 때, 쥘 베른은 계몽적이고 진보적인 감동을 덧붙이기 원합니다. 레이첼 카슨은 다릅니다. 카슨은 자신을 둘러싼 유기적인 것들에게 경탄을 보냅니다.
이렇게 소설 <해저 2만리>와 생태학 서적 <바다의 가장자리>는 바다를 다르게 바라봅니다. <해저 2만리>가 소설이고 <바다의 가장자리>가 과학 서적임에도, <해저 2만리>보다 <바다의 가장자리>는 훨씬 시적입니다. <해저 2만리>가 시적이라고 해도, 이런 시적인 감동에는 계몽주의와 진보적인 서구화가 있습니다. 쥘 베른과 레이첼 카슨은 다릅니다. 쥘 베른은 19세기 유럽 백인 남자 지식인이었습니다. 19세기 유럽 남자 지식인으로서 쥘 베른은 진보적인 서구화에 찬성했고, 기계 문명을 믿었고, 그걸 소설에 반영했습니다. 그래서 쥘 베른과 레이첼 카슨이 똑같이 바다를 바라본다고 해도, 두 사람은 서로 다른 바다를 묘사합니다.
두 사람의 사상과 인생관과 철학이 서로 다르기 때문에, 쥘 베른과 레이첼 카슨이 똑같은 바다를 바라본다고 해도, 두 사람은 서로 다른 바다를 묘사합니다. 독자가 <해저 2만리>나 <바다의 가장자리>를 읽을 때, 독자는 그 자체로서 바다를 읽지 않습니다. 독자는 쥘 베른이 생각하는 바다나 레이첼 카슨이 생각하는 바다를 읽습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바다가 아니라 '생각'입니다. <바다의 가장자리>를 읽는 동안, 독자는 그냥 바다가 아니라 레이첼 카슨이 '생각'하고 '표현'하는 바다를 읽습니다. 중요한 것은 바다보다 '생각'과 '표현'입니다. <바다의 가장자리>에서 바다는 생각과 표현에 기반합니다.
<바다의 가장자리>에서 바다는 그냥 바다가 아닙니다. 이 책에서 바다는 레이첼 카슨이 '생각'하고 '표현'하는 바다입니다. 글을 읽거나 그림을 보거나 음악을 들을 때, 사람들은 그 자체로서 사물을 주목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생각과 철학과 표현을 주목합니다. 화가 프리다 칼로는 <인생 만세 Viva la vida>라는 그림을 그렸습니다. 그림 <인생 만세>에는 수박이 있습니다. 프리다 칼로는 수박을 그렸습니다. 하지만 현실 속에서 이 수박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프리다 칼로는 그저 수박만을 그리기 원하지 않았습니다. 프리다 칼로가 오직 수박만을 묘사하기 원했다면, 프리다 칼로는 사진을 찍어야 했을 겁니다. 21세기 초반 오늘날에는 아주 놀라운 고해상도 사진 기술이 있으나, 여전히 화가들은 그림들을 그리고, 사람들은 그림들을 감상합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사물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인생 만세>를 감상할 때, 수박이라는 사물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프리다 칼로는 수박에게 특별한 가치를 부여했습니다. 프리다 칼로는 수박을 바라보는 자신의 관점을 표현하기 원했습니다. <인생 만세>를 구경할 때, 사람들은 오직 수박만을 인식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수박과 함께 프리다 칼로가 수박을 바라보는 관점을 감상합니다. 중요한 것은 이런 관점입니다. 만약 프리다 칼로와 파블로 피카소가 똑같은 수박을 관찰한다고 해도, 프리다 칼로와 파블로 피카소는 서로 다른 두 수박을 그릴 겁니다. 두 화가의 관점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수박이라는 사물은 하나이나, 프리다의 그림과 피카소의 그림은 서로 다르게 수박을 '표현'합니다. 사람들은 '표현'을 보기 원합니다. 사실 사진 작가들 역시 사진에 생각과 표현을 담을 수 있습니다.
비디오 게임 <쉘터 2>는 모자이크처럼 자연 풍경을 독특하게 묘사합니다. <쉘터 2>는 다른 비디오 게임이 모방하지 못하는 독특한 그림체를 자랑합니다. 게임 플레이어들은 <쉘터 2>가 묘사하는 자연 풍경에 감탄합니다. 여기에서 게임 플레이어들은 <쉘터 2>가 묘사하는 '자연 풍경'이 아니라 '<쉘터 2>가 묘사하는' 자연 풍경에 감탄합니다. 자연 풍경에 감탄하기 전에 게임 플레이어들은 표현 방법에 감탄합니다. 게임 <쉘터 2>를 플레이하는 동안, 게임 플레이어들은 이런 표현 방법을 이용해 자연 풍경을 바라봅니다. 어떤 게임 플레이어는 <쉘터 2>가 감동적이고 BBC 다큐멘터리 <살아있는 지구>가 시시하다고 느낄지 모릅니다. <살아있는 지구>에 독특한 모자이크 그림체가 없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어떤 게임 플레이어는 진짜 스라소니보다 게임 속의 스라소니를 훨씬 좋아할지 모릅니다. 현실 속에서 스라소니에게는 독특한 모자이크 그림체가 없습니다. 이렇게 글과 그림과 음악에서 사물보다 표현 방법은 훨씬 중요합니다. 수많은 글들과 그림들과 음악들은 똑같은 사물을 서로 다르게 '생각'하고 '표현'합니다. 사람들이 글들을 읽고 그림들을 구경하고 음악들을 듣는 이유는 '생각'과 '표현' 때문입니다. 사물 그 자체보다 '생각'과 '표현'은 훨씬 중요합니다. '생태학을 좋아하는 것'과 '생태학 소설을 좋아하는 것'은 서로 다릅니다.
아니, 심지어 생태학을 좋아할 때조차 우리는 언어라는 표현 방법을 이용해야 합니다. 언어 없이 우리가 자연 생태학을 사고할 수 있나요? 복잡한 생태 과학을 이해할 때, 언어라는 표현 방법 없이, 우리가 생태 과학을 이해할 수 있나요? 그래서 우리가 생태학을 표현할 때, 언어는 아주 중요할 겁니다. 생태학 소설에서 언어는 훨씬 중요할 겁니다. 과학은 도표와 그림과 수식을 동원할 수 있으나, 소설은 훨씬 많이 언어에 의존합니다. 아무리 생태학 SF 소설이 과학 지식들을 늘어놓는다고 해도, 결국 소설은 언어에 의존합니다. 그래서 오타 하나는 분위기와 감동을 완전히 뒤집을지 모릅니다. 며칠 전, 3월 25일 게시글에서 저는 댄 시몬스가 테크노 스릴러 작가라고 말했습니다.
이건 오타입니다. 저는 댄 브라운을 댄 시몬스라고 썼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저를 비판할 겁니다. "아, 또 다시 오타야? 왜 이렇게 <SF 생태주의>에 오타들이 많아? 오타가 인생의 낙인가? 이렇게 오타들을 많이 내는 사람이 언어를 분석할 수 있나? 왜 자꾸 이 양반이 덩범대지? 오타들이 자랑인가?" 오타들은 자랑이 아닙니다. 제가 오타들을 많이 내는 이유는 제가 오타쿠이기 때문…이 아닙니다. 사실 이런 오타는 작은 실수에 속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테크노 스릴러 작가 댄 시몬스'를 '테크노 스릴러 작가 댄 브라운'으로 스스로 여과할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생태학 소설이 '거울 같은 호수'를 '겨울 같은 호수'로 잘못 쓴다면, 이건 정말 커다란 실수일 겁니다. 잔잔하고 반반한 호수가 차갑고 혹독한 호수가 되기 때문이죠. 만약 소설 작가와 교정 편집자가 모두 이걸 놓친다면, 생태학 소설 속에서 영원히 거울 같은 호수는 겨울 같은 호수라고 오해를 받을 겁니다. 거울처럼 잔잔하고 맑은 호수에서 생태학자는 담수 생태계를 아름답게 관찰할 수 있어요. 반면, 혹독한 호수에서 생태학자는 서릿장 같은 기운을 느낄 겁니다. 이런 분위기는 풍성한 생명력을 예찬하지 못합니다. 오타는 별 것이 아닐지 모르나, 어떤 상황에서 오타는 아주 커다란 실수로 이어집니다. 호수라는 사물보다 호수를 표현하는 생각과 묘사(거울 같은)가 중요하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