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생태주의
<최후의 Z>와 소녀 농민과 새로운 사회 본문
제목처럼, 로버트 오브라이언이 쓴 <최후의 Z>는 포스트 아포칼립스입니다. 여러 포스트 아포칼립스 장르들 중에서 이 소설은 방사선 아포칼립스에 속합니다. 방사선 낙진은 세상을 오염시켰고, 세상은 황폐해졌습니다. 다행히 깨끗한 외딴 골짜기에서 소설 주인공 소녀는 살아남았습니다. 하지만 외딴 골짜기에는 오직 소녀와 애완견만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없습니다. 외딴 골짜기 마을에서 소녀는 혼자 살아가야 합니다. 애완견은 소녀의 외로움을 달랠 수 있으나, 애완견은 인간이 아니고, 그래서 소녀는 자신이 혼자 살아간다고 느낍니다. 이런 상황은 고독을 강조할 수 있으나, 소설 <최후의 Z>는 발랄합니다.
소설 주인공 소녀는 크게 낙심하지 않습니다. 소녀는 10대 분위기를 퍼뜨리고 활기차게 살아갑니다. 다른 생존 조건들은 별로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무엇보다 먹거리는 충분합니다. 소녀는 농사를 짓고 넉넉하게 맛있는 요리들을 먹습니다. 소녀는 농사를 짓는 여자입니다. 흔히 사람들은 '농사를 짓는 사람'이 남자라고 생각합니다. 곡물 광고들이 늙은 할아버지들을 보여주는 것처럼, 농사는 남자의 영역입니다. 이른바 전통적인 농업 사회에서 여자는 아이를 낳고 살림을 맡습니다. 여자가 살림하는 동안, 남자는 농사를 짓습니다. 그래서 흔히 사람들은 전통적으로 농사가 여자의 영역보다 남자의 영역이라고 생각합니다.
여자는 아이를 낳고, 남자는 집안을 먹여살립니다. 이건 꽤나 지배적인 사고 방식입니다. 여전히 이런 사고 방식은 21세기 초반 도시 사회를 장악합니다. 그래서 수많은 사람들은 여자가 남자에게 빌붙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집에서 여자는 살림하고 애를 봐야 해." 아직 이런 편견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아직 집사람과 바깥분이라는 단어는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여전히 우리는 이런 단어들을 아무렇지 않게 바라봅니다. <에밀>에서 소피아(아내)가 에밀(남편)을 주인이라고 부르는 것처럼, 일본 사회에서 아내는 남편을 '주인'이라고 부릅니다. '집사람'과 '바깥분'과 '주인'이라는 단어는 여자가 살림을 맡고 남자가 산업 노동을 맡아야 한다고 나타냅니다. 하지만 이런 구분은 너무 억압적입니다.
흔히 사람들이 말하는 '전통적인' 농업 사회에는 억압적인 계급 구조가 있습니다. 이런 계급 구조 속에서 여자들은 살림을 맡았고 남자들은 농사를 맡았습니다. 전통적인 농업 사회에서 사람들은 평등하게 노동 분담을 논의하지 못했습니다. 억압적인 계급 구조는 이미 존재했고, 사람들은 계속 계급 구조 속으로 들어가야 했습니다. 누군가가 평등한 노동 분담을 주장할 때, 지배 계급은 그 사람을 짓밟았습니다. 유럽에서 디거스가 짓밟힌 것처럼, 지배 계급은 노동을 평등하게 논의하기 원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억압적인 상황 속에서 남자들은 농사를 맡았고 집안을 먹여살렸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남자가 중요한 산업 노동을 맡았다고 생각하나, 현실은 그게 아니었습니다. 사람들이 산업 노동을 언급하기 전에 사람들은 무슨 사회 구조 속에서 남자들이 산업 노동들을 맡았는지 말해야 합니다.
소설 <최후의 Z>가 보여주는 것처럼, 여자 역시 농사를 지을 수 있습니다. 사실 인류 문명에서 수많은 여자들은 농사를 지었습니다. 여전히 수많은 여자들은 농사를 짓고 공동체를 먹여살립니다. 심지어 여자들이 농사를 짓기 때문에, 여자들은 남자들에게 저항할 수 있습니다. 여자들이 농사를 짓지 않는다면, 농업 인력은 줄어들 테고, 식량 생산량은 부족해질 겁니다. 여자들과 남자들은 함께 식량을 생산해야 하고, 그래서 여자들은 저항할 수 있습니다. 이런 여자들에게 노동 사회화와 공유지는 중요한 발판입니다. 여자들은 노동 사회화와 공유지를 이용해 가부장 문화에 저항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가부장적인 전통 사회가 전부라고 생각하나, 이 세상에는 다른 사회들 역시 많습니다.
소설 <최후의 Z>처럼, 포스트 아포칼립스는 인류 문명을 무너뜨리고 새로운 뭔가를 보여줄 수 있습니다. 그래서 포스트 아포칼립스를 비롯해 사이언스 픽션들은 새로운 사회를 쉽게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어떤 무인도에 생존자들이 표류했을 때, 그들은 작은 사회를 이룰 겁니다. 이런 사회는 가부장적인 문화를 내쫓을 수 있습니다. 외계 행성에서 우주 비행사가 혼자 표류한다면, 우주 비행사는 지구와 거리를 둘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주 비행사는 지구와 자본주의 사회를 좀 더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을 겁니다. 포스트 아포칼립스가 인류 문명을 무너뜨린다면, 사람들은 새로운 사회를 고안할 수 있습니다. 이런 새로운 사회는 사이언스 픽션들이 선사하는 여러 재미들 중에서 하나입니다.
로버트 오브라이언은 새로운 사회에 별로 관심을 기울이지 않습니다. 새로운 사회 구조를 보여주기 위해, 여자가 농사를 짓는다고 강조하기 위해, 로버트 오브라이언은 소설을 쓰지 않았을 겁니다. 하지만 포스트 아포칼립스를 비롯해 사이언스 픽션에게는 잠재력이 있습니다. 사이언스 픽션에게는 새로운 사회를 보여주기 위한 잠재력이 있습니다. 독자는 새로운 사회를 읽고 현실을 다시 고찰할 수 있습니다. 소설 <최후의 Z>는 어떻게 소녀가 혼자 농사를 짓는지 보여줍니다. 소녀가 혼자 농사를 지을 수 있다면, 수많은 여자들이 함께 농사를 짓지 못하는 이유는 없을 겁니다.
<최후의 Z>에서 새로운 사회가 중요하지 않다고 해도, 소설 속에서 소녀는 혼자 살아남아야 합니다. 이건 꽤나 핵심적인 요소이고, 그래서 독자는 기존 사회에서 좀 더 떨어질 수 있습니다. 독자는 소녀가 혼자 먹고 산다고 인식할 수 있습니다. <최후의 Z>와 달리, 가부장 사회는 여자들에게 먹고 살기 위한 능력이 없다고 세뇌합니다. 지배적인 관념은 비단 농업만이 아니라 수렵 및 채집 역시 남자의 영역이라고 말합니다. 수렵 및 채집 사회에서도 남자들은 집안을 먹어여살립니다. 여자들은 그저 '보조적인' 육아와 살림을 담당할 뿐입니다. 이렇게 지배적인 관념은 주장합니다. 흔히 사람들은 남자 사냥꾼들이 식량 공급을 맡았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많은 부족 사회들에서 사냥처럼 채집은 중요하거나 사냥보다 채집은 훨씬 중요합니다. 여전히 부족 사회들은 사냥보다 채집이 중요하다고 보여줍니다. 사실 사냥은 너무 위험합니다. 사냥은 쉽지 않습니다. 고기는 많은 열량을 자랑하나, 사냥이 위험하기 때문에, 이득보다 손해는 훨씬 커질지 모릅니다. 남자 사냥꾼들이 매머드를 사냥하고 부족 전체가 실컷 먹을 때, 이건 그저 20세기 도시 사람들이 생각하는 과장에 불과합니다. 1991년 고전 플랫폼 게임 <고인돌 Prehistorik>은 남자 사냥꾼이 야생 동물들을 때려잡고, 온갖 고생길들을 거치고, 가족을 먹여살린다고 묘사하나, 이건 다소 과장입니다. 아무리 이 게임이 익살스럽다고 해도, '진지병스러운' 시각을 제외한다고 해도, 여기에는 가부장적인 편견이 있습니다.
분명히 고대 사람들은 숱한 매머드들을 잡아먹었겠으나, 그렇다고 해도 사냥은 반드시 식량 공급의 전부가 아니었습니다. 이누이트 같은 극지 사람들에게 사냥은 필수적일지 모르나, 다른 지역들에서 사냥보다 채집과 낚시는 훨씬 중요할 수 있습니다. 수두룩한 조개 껍데기 유물들이 증명하는 것처럼, 인류 문명에서 사냥은 전부가 아니었습니다. 게다가 사냥은 우리가 생각하는 '남성적인' 행위가 아닙니다. 여러 지역들에서 사냥꾼은 지속 가능성을 존중합니다. 비디오 게임 <어쌔신 크리드 3>에서 라둔하게둔이 야생 동물 영혼을 위로하는 것처럼, 사냥꾼들은 지속 가능성이 중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종종 사냥꾼들은 무분별하게 동물들을 학살했으나, 그렇다고 해도 지속 가능성을 존중하는 풍습 그 자체는 존재했습니다.
사냥꾼에게 지속 가능성을 존중하는 풍습이 아주 중요함에도, 오늘날 수많은 '사냥' 비디오 게임들은 이런 풍습을 구현하지 않습니다. <몬스터 헌터>와 <호라이즌 제로 던>과 <파 크라이 3>처럼, 블록버스터 게임들은 사냥(을 빙자하는 학살)을 이야기합니다. 여기에는 지속 가능성을 존중하기 위한 풍습이 없습니다. 게임 플레이어들은 그저 열심히 죽이고, 죽이고, 죽이고, 죽이고, 다시 죽이고, 또 다시 죽이고, 계속 죽이고, 영원히 죽일 뿐입니다. 뭐, <어쎄신 크리드 3> 역시 이로쿼이 사상에 크게 관심을 기울이지 않습니다. <파 크라이 3>에서 게임 플레이어가 숱한 동물들을 죽일 때, 이건 사냥이 아닙니다. 이건 사냥을 빙자하는 학살입니다. <몬스터 헌터>와 <호라이즌 제로 던>과 <파 크라이 3>는 사냥 게임보다 학살 게임에 가깝습니다.
사냥과 학살은 다릅니다. 사냥은 재화를 얻기 위해 사회 구성원이 자연을 가공하는 행위에 가깝습니다. 반면, 학살은 지배 계급의 탐욕에서 비롯합니다. 이건 언제나 사냥이 지속 가능성을 존중했다는 뜻이 아닙니다. 풍습은 법칙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풍습을 존중하나, 풍습은 사회 질서를 완전하게 장악하지 않습니다. 오늘날 서구 근대 문화는 이로쿼이 같은 북아메리카 부족 문화와 어머니 자연을 (낭만적으로) 연결하나, 이런 연결은 필연적이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해도 사냥과 지속 가능성은 떨어지지 않습니다. 사냥이라는 개념은 지속 가능성을 포함합니다. 마리아 미스 같은 에코 페미니즘 지식인들 역시 사냥을 완전히 평가 절하하지 않습니다. 반면, 오늘날 많은 '사냥' 비디오 게임들은 지속 가능성 풍습을 외면하고 오직 살상 과정만 강조합니다. 어쩌면 마리아 미스는 이게 '람보화 문화'라고 비판할지 모릅니다.
이렇게 인류 문명에는 다양한 식량 생산 노동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21세기 도시 사회에서 사람들은 다양한 식량 노동들을 쉽게 인식하지 못할 겁니다. 사람들이 다양한 식량 생산 노동들을 인식한다고 해도, 사람들은 이것들이 전근대적인 것이라고 간주할지 모릅니다. 다양한 식량 생산 노동들이 전근대적이기 때문에, 사람들은 오직 가부장적인 자본주의 농업만 옳다고 착각할지 모릅니다. 사이언스 픽션들은 새로운 사회, 새로운 노동을 제시하고 이런 고정 관념을 깨뜨릴 수 있습니다. 독자가 소설 <최후의 Z>를 비롯해 여러 SF 소설들을 읽는 동안, 독자는 새로운 사회, 새로운 노동을 머릿속에 떠올릴 수 있습니다. 사이언스 픽션들은 인류를 새로운 상황으로 밀어넣고 식량 생산과 노동 사회화를 다시 고민합니다.
물론 <최후의 Z>는 새로운 사회, 새로운 식량 생산 노동에 치중하지 않습니다. 이런 측면들은 아예 없지 않으나, 작가는 그것들보다 소녀가 느끼는 위기와 희망과 고독을 말합니다. 그렇다고 해도 소녀가 느끼는 여러 감성들은 소녀가 혼자 살아간다는 상황에서 비롯합니다. 소녀는 1인 사회를 구성하고, 1인 사회 속에서 소녀는 살아갑니다. 그래서 독자는 기존 사회에서 몇 걸음을 물러나고 어떻게 인간이 살아가는지 다시 바라볼 수 있을 겁니다. 이건 사이언스 픽션이 반드시 고정 관념을 깨뜨린다는 뜻이 아닙니다. 지배적인 관념이 독자를 좀비로 만든다면, 사이언스 픽션은 해독제가 되지 못할 겁니다. 그렇다고 해도 사이언스 픽션에게는 해독제가 되기 위한 잠재력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