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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자의 화장실 청소 본문

사회주의/사회 공학

철학자의 화장실 청소

OneTiger 2017. 4. 7. 20:00

소설 <뒤 돌아보며>는 사회주의 유토피아를 이야기하는 책입니다. 여기 사람들은 현대 자본주의 체계와 전혀 다르게 살아가요. 당연히 이 사람들의 사고 방식은 자본주의 체계의 사람들과 전혀 다릅니다. 예를 들어, 이 사람들은 허드렛일이 뭔지 잘 모릅니다. 사회주의 구조 속에서 계급이라는 개념이 굉장히 희미해졌기 때문에 허드렛일이라는 개념도 사라졌습니다. 자본주의 체계에서는 화장실 청소나 주방 설거지 같은 일들이 모두 허드렛일이라는 취급을 받으나, 소설 속의 사회주의 유토피아는 그런 것들도 엄연한 노동을 대접하고 그에 따른 보상을 지급합니다. 사회 구조가 바뀌면, 사람들의 의식도 바뀌기 마련이죠. 개인의 사고 방식은 그 자체로 오롯이 존재하지 않고, 사회 구조 속에서 성립된다는 뜻입니다. 사실 우리의 의식, 도덕, 윤리 등은 굉장히 모호하고 추상적인 관념입니다. 이런 것들은 체계와 구조와 형식에 의해 얼마든지 변할 수 있어요. 사람들이 계급 구조가 희미한 세상에서 산다면, 그 사람들은 허드렛일이 뭔지 잘 모를 수 있죠. 그리고 보면, <빼앗긴 자들>도 비슷한 사례를 이야기했습니다. 자본주의 체계의 사람들은 화장실 청소를 더럽고 천하다고 생각하지만, 사회주의 체계의 사람들은 그게 마땅한 노동이자 작업이라고 생각하죠.


어쩌면 누군가는 이렇게 생각할지 모릅니다. 화장실 청소나 주방 설거지는 아무 지식이 필요하지 않기 때문에 허드렛일이 될 수 밖에 없고, 화장실 청소부는 쥐꼬리만한 보상을 받아야 한다고 말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왜 지식인은 화장실을 청소하면 안 될까요. 왜 지식인은 주방에서 설거지하면 안 될까요. 지식인은 무조건 강단에서 강연만 해야 하나요. 필요하다면, 지식인도 텃밭을 가꾸거나 변기를 닦거나 접시를 씻을 수 있습니다. 철학 박사라고 해서 무조건 책만 쓰고 강연만 하라는 법은 없습니다. 학교에서 철학을 전공했다고 해서 무조건 교수나 연구원이 되라는 법은 없습니다. 왜 전공 분야와 돈벌이가 항상 붙어다녀야 할까요. 철학을 전공한 사람은 그 철학을 돈벌이가 아니라 다른 곳에 이용할 수 있습니다. 가령, 우리는 살아가는 동안 여러 문제들을 마주칩니다. 그럴 때마다 무엇이 좋은 선택인지 헛갈릴 수 있죠. 낙태는 옳은가? 생체 개조는 옳은가? 성을 상품화해도 되나? 철학을 공부한 사람은 이럴 때 좋은 조언자가 될 수 있습니다. 공동체가 보다 좋은 삶을 가꾸도록 지원할 수 있습니다. 이 철학자는 주방에서 설거지하는 한편, 사람들에게 여러 조언을 던져주면서 좋은 삶으로 이끌어갈 수 있어요. 이것도 분명히 가치 있는 일입니다.


"인문학이 위기다." 뭐, 이런 소리가 종종 들립니다. 하지만 저는 인문학만이 위기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보다 '상품이 되지 못한 것들'이 위기라고 생각합니다. 자본주의 체계는 상품 가치가 있는 것만 선택하기 때문에 상품 가치가 없는 것들은 자연히 위기에 몰리기 마련입니다. 어디 인문학만 위기인가요? 아니죠, 텃밭을 가꾸는 농부도 위기이고, 보호 구역 끝자락의 원주민도 위기이고, 급속도로 줄어드는 생물 다양성도 위기입니다. 자본주의 체계 안에서는 저런 것들이 전부 위기입니다. 인문학만 꼭 집어서 위기라고 말할 이유가 없습니다. 아니, 생물 다양성 감소와 밑바닥의 10억 사람들 앞에서 그 무엇도 위기를 운운해서는 안 될 겁니다. 솔직히 멸종 동물들이나 가난한 흑인들 앞에서 인문학 교수가 위기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그거 정말 배부른 소리죠. 게다가 인문학이 정말 위기에 몰렸다면, 당연히 인문학자들은 이 착취적인 체계를 타파하기 위해 목소리를 높여야 합니다. 인문학의 위기는 사실 자본주의 체계의 착취 중 하나이고, 철학이나 문학을 공부했다면 당연히 그런 근본적인 문제를 직시할 수 있어야죠. 인문학은 우리가 좋은 삶을 꾸리기 위해 필수적입니다. 그렇다면 인문학이 힘들다 어쩐다 이런 소리를 하지 말고, 그 시간에 자본주의 체계를 뒤집는 게 나을 겁니다. 길거리에서 휴지를 주워도 인문학으로 좋은 삶을 가꿀 수 있는, 그런 체계를 만들어야 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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