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생태주의
<쥬라기 공원>, 복제 공룡과 근대 신화 본문
[이런 장면은 정말 압도적이고 신화적입니다. 하지만 또 다른 관점에서 이건 신화인지 모릅니다.]
영화 <쥬라기 공원>은 엄청난 인기를 끕니다. 이 영화는 가장 대표적인 블록버스터입니다. 아이들부터 어른들까지, 수많은 사람들은 이 영화를 좋아합니다. 이 영화는 동명 원작 소설에 기반합니다. 하지만 영화와 소설은 다릅니다. 영화와 소설은 공룡 사파리를 보여주나, 영화와 소설에서 공룡 사파리는 다르게 존재합니다. 영화는 첨단 특수 효과를 동원하고 복제 공룡들을 생생하게 보여줄 수 있습니다. 관객들은 어떻게 브라키오사우루스가 우는지 들을 수 있습니다. 소설에서 이건 불가능합니다. 독자들은 어떻게 브론토사우루스가 우는지 직접 듣지 못합니다.
소설은 브론토사우루스가 코끼리와 비슷한 나팔 소리를 낸다고 묘사하나, 독자는 공룡 울음소리를 직접 듣지 못합니다. 독자는 그저 브론토사우루스 울음소리와 나팔 소리가 비슷하다고 상상할 뿐입니다. 한때 지구 환경에서 브론토사우루스는 생존했으나, 이 동물은 멸종했고, 독자는 어떻게 브론토사우루스가 우는지 정확히 듣지 못합니다. 적어도 영화는 (가상의) 울음소리를 직접 들려줄 수 있으나, 소설은 울음소리를 직접 들려주지 못합니다. 그래서 소설 독자들은 브론토사우루스 울음소리를 다양하게 상상할 겁니다. SF 소설에게는 이런 한계가 있습니다.
SF 소설로서 <쥬라기 공원>에서 비단 공룡 울음소리 묘사만 아니라 공룡 생김새 묘사 역시 한계에 부딪힙니다. 문제는 SF 소설이 글자 매체라는 사실입니다. 소설 <쥬라기 공원>은 스테고사우루스 생김새를 구체적으로 묘사하지 않습니다. 만약 이 소설이 스테고사우루스 생김새를 훨씬 구체적으로 묘사한다고 해도, 독자들이 브론토사우루스 울음소리를 다양하게 해석/상상하는 것처럼, 독자들은 스테고사우루스 생김새를 다양하게 해석/상상할 겁니다. 심지어 어쩌면 소설 작가 마이클 크라이튼조차 스테고사우루스 생김새를 구체적으로 설정하지 않았는지 모릅니다.
만약 소설 작가가 공룡 생김새을 구체적으로 묘사했다고 해도, 소설은 글자 매체입니다. 소설은 글자들을 이용합니다. 글자는 시각적이지 않습니다. 글자는 추상적입니다. 글자는 그림이 아닙니다. 글자 매체로서 소설은 대상을 시각적으로 묘사하지 못합니다. 아무리 소설 작가가 뛰어난 필력을 발휘한다고 해도, 글자 매체로서 소설은 특정한 한계를 뛰어넘지 못합니다. 이건 다른 형식들이 완벽하게 시각적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그림, 만화, 영화, 게임 역시 특정한 한계를 뛰어넘지 못합니다. 우리 인간은 불완전한 존재이고, 그림, 소설, 만화, 영화, 게임은 불완전한 형식입니다.
불완전한 존재 인간이 만화를 그리고, 영화를 촬영하고, 게임을 프로그램하기 때문에, 만화와 영화와 게임 역시 불완전합니다. 만화와 영화와 게임은 대상을 완벽하게 묘사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소설보다 만화와 영화와 게임은 훨씬 시각적입니다. 여러 <쥬라기 공원> 만화들이 보여주는 것처럼, 만화는 공룡 외형을 시각적으로, 구체적으로 묘사합니다. 만화에서 글자들보다 그림들은 주된 형식이고, 그래서 만화는 대상을 시각적으로, 구체적으로 묘사합니다. 만약 만화 작가가 시각적인 묘사를 의도적으로 우회하고 회피하기 원한다고 해도, 만화에는 가능성, 잠재력이 있습니다.
만화에는 대상을 시각적으로 묘사하기 위한 가능성, 잠재력이 있습니다. 소설에는 가능성, 잠재력이 없습니다. 소설은 그저 글자들을 늘어놓을 뿐입니다. 아무리 소설 작가가 차은우 외모를 열심히 묘사한다고 해도, 소설 독자는 오직 글자들만 읽고 차은우 외모를 구체적으로 파악하지 못할 겁니다. 반면, 만약 만화 작가가 차은우 외모를 열심히 묘사한다면, 만화 독자는 차은우 외모를 시각적으로 파악할 겁니다. 적어도 소설 독자보다 만화 독자는 훨씬 시각적으로 파악할 겁니다. 소설에게는 한계가 있습니다. 무엇보다 차은우와 달리, 복제 스테고사우루스는 SF 설정입니다.
현실에서 복제 스테고사우루스는 존재하지 않고, 이건 또 다른 문제입니다. 복제 스테고사우루스는 SF 설정, 바이오펑크 설정입니다. 복제 스테고사우루스는 비일상적인 상상력입니다. 현실에서 복제 스테고사우루스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소설 <쥬라기 공원> 해석들은 훨씬 다양해집니다. 아무리 소설이 차은우 외모를 시각적으로 묘사하지 못한다고 해도, 차은우는 얼굴 천재 동아시아 성인 남자이고, 현실 속에서 우리는 얼굴 천재 동아시아 남자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차은우가 얼굴 천재 동아시아 남자 범주에 속하기 때문에, 현실 속에서 우리는 범주를 참고할 수 있습니다.
멋있고 잘생겼다는 감정은 주관적이고, 그래서 '얼굴 천재' 동아시아 남자에게는 다양한 기준들이 있으나, 적어도 우리는 현실에서 얼굴 천재 동아시아 남자들이 존재한다고 확인할 수 있습니다. 비록 소설이 차은우 외모를 구체적으로 묘사하지 못한다고 해도, 만약 소설이 얼굴 천재 동아시아 남자를 묘사한다면, 현실에서 소설 독자는 범주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얼굴 천재 동아시아 남자와 달리, 현실에서 복제 스테고사우루스를 비롯해 복제 공룡들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SF 독자들은 범주를 확인하지 못합니다. SF 독자들이 범주를 확인하지 못하기 때문에, SF 독자들은 스스로 해석합니다.
비디오 게임 <쥬라기 공원 빌더>는 모사사우루스를 묘사합니다. 하지만 게임 플레이어들은 물을 수 있습니다. 게임 속의 모사사우루스가 정말 모사사우루스인가요? 쥬라기 공원은 복제 고대 생명체들을 전시합니다. 복제 과정에서 다른 어떤 요인들은 고대 생명체들에게 영향을 미쳤는지 모릅니다. 모사사우루스 그 자체는 정말 존재했으나, <쥬라기 공원 빌더>가 바이오펑크이기 때문에, 천연 모사사우루스와 복제 모사사우루스는 다르고, 게임 속의 모사사우루스는 진짜 모사사우루스가 아닌지 모릅니다. 모사사우루스에게는 상어 꼬리가 있어야 하나, 게임 속의 모사사우루스에게는 상어 꼬리가 없습니다.
어떤 게임 플레이어들은 이게 고증 오류라고 지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쥬라기 공원 빌더>는 고생물학 다큐멘터리가 아닙니다. 바이오펑크로서 비디오 게임 <쥬라기 공원 빌더>는 천연 모사사우루스보다 복제 모사사우루스를 보여줍니다. 심지어 공원 경영진과 공원 관계자들조차 복제 기술이 완벽하지 않다고 인정합니다. 그래서 공원 과학자들은 공룡 유전 형질에 다른 것들을 덧붙여야 했습니다. 심지어 그들은 복제 고대 생명체를 '조작'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복제 모사사우루스에게는 상어 꼬리가 없는지 모릅니다. 복제 모사사우루스는 바이오펑크 설정이고, 현실 속에서 우리는 이것을 확인하지 못합니다.
복제 스테고사우루스와 복제 모사사우루스처럼, 사이언스 픽션은 다양한 해석들로 이어집니다. 이른바 주류 문학 역시 다양한 해석들로 이어지나, 주류 문학은 일상적으로 상상합니다. 주류 문학과 달리, 사이언스 픽션이 비일상적으로 상상하기 때문에, 사이언스 픽션은 훨씬 다양한 해석들로 이어집니다. 여기에서 어떤 사람들은 지적할지 모릅니다. "아니, 왜 사이언스 픽션이 비일상적으로 상상하는가? 현실에서 복제 모사사우루스는 존재하지 않으나, 사이언스 픽션은 복제 모사사우루스를 상상한다. 사이언스 픽션은 현실 도피적이다. 현실 속에서 우리는 살고, 우리는 현실을 말해야 한다."
네, 맞습니다. 현실 속에서 우리는 살아가고, 우리는 현실을 말해야 합니다. 문제는 이겁니다. 우리가 모든 현실을 말할 수 있나요? 우리 인간은 불완전한 존재입니다. 인간보다 현실은 훨씬 거대합니다. 인간보다 현실이 훨씬 거대하기 때문에, 우리는 자연과 우주를 완벽하게 파악하지 못합니다. 생명 진화 역사는 현실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생명 진화 역사를 완벽하게 파악하나요? 그건 아닙니다. 심해 생태계는 현실입니다. 우리가 심해 생태계를 완벽하게 파악하나요? 그건 아닙니다. 외계 행성들은 현실입니다. 우리가 외계 행성들을 완벽하게 파악하나요? 그건 아닙니다. 우리는 불완전합니다.
우리가 불완전하기 때문에, 우리는 신이 아닙니다. 우리는 신을 동경하나, 만약 우리가 완전하다면, 우리는 신을 동경하지 않을 겁니다. 완전한 우리가 신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불완전하고, 그래서 우리는 신을 만듭니다. 우리가 신을 만드는 것처럼, 우리가 삼라만상을 파악하지 못하기 때문에, 인류 인식에서 커다란 공백이 존재하기 때문에, 우리는 신화를 만듭니다. 우리가 생명 진화 역사를 완벽하게 파악하지 못하기 때문에, 거대한 원통 우주선은 생체 로봇들을 만듭니다. 우리가 심해 생태계를 완벽하게 파악하지 못하기 때문에, 고대 상어는 수면으로 올라옵니다. 외계 행성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외계 행성들을 완벽하게 파악하지 못하기 때문에, 바이오스피어 우주선은 외계 행성을 테라포밍하나, 이건 실패합니다. 외계 생명체들은 지구화를 거부합니다. 외계 생명체들이 지구화를 거부하기 때문에, 우리 인류는 지구를 훨씬 아껴야 합니다. 생체 로봇들, 고대 상어, 외계 행성 테라포밍은 신화입니다. 이것들은 유사 신화입니다. 생명 진화 역사와 심해 생태계와 외계 행성은 '현실'이나, 우리가 모든 자연과 우주를 파악하지 못하기 때문에, '현실'을 말하기 위해 우리는 신화를 만들어야 합니다. 사이언스 픽션은 황당무계한 공상이 아닙니다. 사이언스 픽션은 현실을 말하기 위한 수단입니다.
유전 공학과 자연 생태계는 '현실'입니다. 그래서 인류 문명이 현실, 유전 공학과 자연 생태계를 완전하게 파악하고 통제하나요? 아니, 인류 문명은 유전 공학과 자연 생태계를 완전하게 파악하지 못하고 통제하지 못합니다. 인류 문명보다 자연 환경은 훨씬 거대하고 원초적입니다. 거대하고 원초적인 현상을 이야기하기 위해 고대 신화가 자연의 여신(비일상적인 상상력)을 상정한 것처럼, 근대 인류 문화 역시 비일상적으로 상상해야 합니다. 근대 인류 문화에게는 근대 신화가 필요합니다. 바이오펑크 수족관 설정은 근대 신화가 될 수 있습니다. 바이오펑크 수족관 설정은 근대적인 자연의 여신입니다.
바이오펑크 <쥬라기 공원 빌더>는 근대적인 자연의 여신입니다. 만약 수족관에서 살아있는 복제 모사사우루스가 탈출한다면, 모사사우루스가 해양 생태계를 교란하지 않을까요? 만약 모사사우루스가 해양 생태계를 교란한다면, 유전 공학 회사들이 대처할 수 있을까요? 아니, 영리 기업들은 유전자 조작 생명체들을 책임지지 않을 겁니다. 만약 유전자 조작 생명체들이 자연 생태계를 교란한다고 해도, 영리 기업들은 책임지지 않을 겁니다. 영리 기업들에게 이윤 극대화가 가장 커다란 목적이기 때문입니다. 빅토르 프랑켄슈타인이 인조인간을 책임지지 않은 것처럼, 영리 기업들은 책임지지 않을 겁니다.
[복제 모사사우루스는 해양 생태계를 교란할지 모릅니다. 유전 공학 바다 괴수는 근대 유사 신화가 됩니다.]
만약 영리 기업들이 유전 공학 기술들을 차지한다면, 자연 생태계는 심각한 위기에 부딪힐지 모릅니다. 인류 문명은 영리 기업들, 상업화한 과학 기술들을 없애고 복제 모사사우루스가 옳은지 논의해야 합니다. 이렇게 근대 신화로서 사이언스 픽션은 '현실'을 이야기합니다. 이건 오직 근대 신화로서만 사이언스 픽션에게 가치가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사이언스 픽션은 현실과 비(非)현실을 대조하고 현실을 부각할 수 있습니다. <쥬라기 공원 빌더>가 공룡들(비현실)을 보여주기 때문에, 공룡들은 현실(홀로세 자연 생태계)을 훨씬 뚜렷하게 부각합니다. 사이언스 픽션에게는 보색 효과가 있습니다.
무엇보다 사이언스 픽션은 '시대 격차'를 제시합니다. 시대는 고정적이지 않습니다. 시대는 바뀝니다. 인류 문명과 자연 환경은 계속 바뀝니다. 19세기 서구 근대화가 엄청난 시대 격차를 일으켰기 때문에, 19세기 서구 근대화가 진화 이론과 대륙 이동 가설, 역사 유물론을 설명하는 것처럼, SF 장르 역시 시대 격차에 주목합니다. 시대가 바뀌기 때문에, 고정 관념은 존재하지 못합니다. 고정 관념에서 SF 팬들은 벗어나고 인식의 지평선을 넓힐 수 있습니다. 바이오펑크 기술이 고대 야생 동물들을 만드는 것처럼, 그래서 고대 야생 동물들이 홀로세 생태계에 끼어드는 것처럼, 자연 환경은 바뀝니다.
심지어 미래 인류 문명은 외계 소행성들을 테라포밍하고, 외계 소행성들은 우주 야생 보호 구역이 될지 모릅니다. 시대가 바뀌기 때문에, SF 팬들은 문명과 자연과 우주를 거시적으로 바라보고 인식의 지평선을 넓힐 수 있습니다. SF 장르에서 시대 격차, 인식의 지평선은 가장 커다란 특성입니다. 이렇게 SF 장르는 보색 효과와 시대 격차를 제시합니다. 보색 효과, 시대 격차와 함께 (고대 수족관 설정이 자연의 여신이 되는 것처럼) 근대 신화로서 SF 장르에게는 가치가 있습니다. 이미 오래 전부터 인류 문화는 신화를 이야기했고, 사이언스 픽션은 신화를 근대적으로 계승합니다.
메리 셸리가 '근대 프로메테우스'를 언급한 것처럼, 사이언스 픽션은 근대 신화입니다. 고대 신화들이 전설을 이용하고 온갖 낯설고 거대한 동물들을 늘어놓은 것처럼, <쥬라기 공원 빌더>는 유전 공학 기술들을 이용하고 온갖 낯설고 거대한 동물들을 늘어놓습니다. 외계 행성 테라포밍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차은우와 달리, 외계 행성 생태계는 너무 비일상적입니다. 그래서 언뜻 사이언스 픽션, 우주 개척 이야기는 황당무계한 공상 같습니다. 일상 속에서 우리는 차은우가 훤칠한 얼굴 천재라고 대화합니다. 이런 대화는 친숙합니다. 반면, 지구 외부, 외계 생명체는 미지의 세계입니다.
언뜻 외계 생명체는 '현실'에 속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현실에서 외계 행성들은 존재합니다. 현실에서 외계 행성들은 존재하나, 불완전한 우리는 외계 행성들을 구체적으로 알지 못합니다. 어쩌면 어떤 외계 행성에는 미생물 생태계가 있는지 모릅니다. 만약 나중에 개척 과학자들이 외계 행성을 테라포밍한다고 해도, 외계 미생물 생태계는 지구화를 거부할지 모릅니다. 그래서 인류 문명에게 지구 환경은 소중합니다. 만약 외계 행성 테라포밍이 불가능하다면, 인류 문명은 지구 환경을 훨씬 아껴야 할 겁니다. 하지만 세계화 자본주의는 생물 다양성을 파괴합니다.
최근에 코로나 19 때문에, 사람들은 난리법석을 일으킵니다. 하지만 이미 세계화 자본주의는 온갖 자연 생태계들을 교란했고 전염병들을 자극했습니다. 만약 기후 변화가 심각해진다면, 또 다른 대혼란들은 나타날지 모릅니다. 생태학자들은 무분별한 산업 개발이 전염병들을 자극한다고 지적합니다. 원 헬스(One Health) 개념은 비단 인류 문명만 아니라 여러 생태계들을 함께 고려하나, 자본주의에서 원 헬스는 존재하지 못합니다. 자본주의는 오직 이윤 극대화만 추구하고, 이윤 극대화를 위해 자본주의는 자연 환경을 상품화해야 합니다. 지구 환경은 자연보다 상품이 됩니다.
만약 인류 문명이 자본주의를 없애지 않는다면, 인류 문명은 지구 환경을 아끼지 못할 겁니다. 인류 문명은 자본주의를 없애야 합니다. 근대 유사 신화로서 사이언스 픽션은 인류 문명이 세계화 자본주의를 없애고 지구 환경을 아껴야 한다고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근대 유사 신화로서 사이언스 픽션을 이용하고 거대한 자연과 우주를 바라볼 수 있습니다. SF 장르는 서구 근대화를 신화에 덧붙이고, 신화 흐름을 계승하고, 근대 신화가 됩니다. 그래서 SF 장르에게 서구 근대화는 아주 결정적인 생산 조건입니다.
서구 근대화 때문에, 중세 판타지 바닷속의 크라켄과 바이오펑크 수족관 속의 모사사우루스는 다릅니다. 하지만 어떻게 서구 근대화가 나타났나요? 근대 신화로서 SF 장르에게 서구 근대화가 결정적인 생산 조건이기 때문에, SF 평론가들은 서구 근대화가 무엇인지 물어야 합니다. 이런 물음 없이, SF 평론가들은 근대 신화로서 SF 장르를 평가하지 못합니다. SF 평론가들이 서구 근대화를 파악한 이후, SF 평론가들은 근대 신화로서 SF 장르를 평가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