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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 생태주의

<물고기>와 <상흔>, 유사성을 위한 기준 본문

SF & 판타지/크고 작은 괴수들

<물고기>와 <상흔>, 유사성을 위한 기준

OneTiger 2020. 7. 24. 19:47

[거대 이동 도시는 스팀펑크입니다. 이 장면보다 스팀펑크 판타지가 주류 문학에게 가까울 수 있나요?]



"나는 너희 인간들이 믿지 못하는 것들을 봤어. 오리온 어깨에서 공격 함선은 불타올랐어. 나는 탄호이저 게이트 부근의 어둠 속에서 번쩍이는 C-빔을 봤어. 빗속의 눈물처럼, 시간 속에서 이 모든 기억은 사라질 거야." 이 대사에서 화자 로이는 빗방울들과 눈물을 동일시합니다. 만약 빗방울들이 얼굴을 적신다면, 이 상황에서 얼굴 위의 빗방울들과 눈물을 구분하기는 쉽지 않을 겁니다. 심지어 하늘이 빗줄기들을 뿌릴 때, 사람들은 하늘을 의인화하고 하늘이 운다고 표현합니다. 빗줄기(빗방울)와 눈물 사이에는 유사성이 있고, 로이는 유사성을 이용하고, 빗속의 눈물을 말하고, 슬픔을 강조합니다.


이 대사가 보여주는 것처럼, 문학에서 유사성은 소중한 미덕입니다. 문학이 뭔가를 강조하기 원할 때, 가장 흔하고 쉬운 방법은 유사성입니다. 유사성은 흔하고 쉬운 방법이나, 유사성은 훌륭한 효과를 발휘합니다. 수많은 사람들은 유사성을 사랑합니다. 심지어 평론가들조차 유사성이 진부하다고 투덜거리지 않습니다. 오히려 평론가들은 뜻밖의 유사성을 찾고 해석합니다. 에드워드 모르건 포스터는 <인도로 가는 길>을 썼습니다. 이 소설에서 동굴은 인간이 세상만물을 파악하지 못한다고 상징하는지 모릅니다. 무지와 어두운 동굴 사이에는 유사성이 있습니다. 동굴은 무지, 불가해한 것을 상징합니다.



우리가 뭔가를 깨달았을 때, 우리는 인간이 두 눈을 떴다고 표현합니다. "아랫집 수진은 산업 자본주의와 환경 오염에 무지했다. 하지만 이제 아랫집 수진은 생태 사회주의를 향해 두 눈을 떴다." 여기에서 '두 눈을 떴다'는 아랫집 수진이 두 눈을 정말 떴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건 수진이 깨달았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두 눈을 뜨고 빛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깨달음은 빛이 됩니다. 깨달음이 빛이기 때문에, 서구 근대화는 계몽주의입니다. 깨달음이 빛이기 때문에, 무지는 어둠입니다. 동굴은 너무 어둡습니다. 어두운 동굴은 불가해한 것입니다. 그래서 소설 <인도로 가는 길>은 동굴을 이야기합니다.


무지, 불가해한 것을 강조하기 위해 소설 초반 문구들은 동굴을 읊조릴 겁니다. 이 해석이 옳은가요? 분명히 동굴과 무지 사이에는 유사성이 있고, 이 해석은 유사성을 이용합니다. 하지만 언제나 유사성이 반드시 옳은가요? 캐서린 맨스필드는 <가든 파티>를 썼습니다. 정원은 행복한 곳이고, 하류층 거리는 불행한 곳입니다. 정원은 싱그러움과 맛있는 샌드위치들을 자랑하나, 하류층 거리에는 기이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심지어 하류층 거리에는 죽음이 있습니다. 하류층 거리에게 죽음이 있기 때문에, 여기는 지옥입니다. 하류층 거리와 정원이 대조적이기 때문에, 정원과 하류층 거리는 천국과 지옥입니다.



단편 소설 주인공 로라는 천국(정원)에 속합니다. 나중에 로라는 하류층 거리에 들리고 죽음을 목격합니다. 천국에서 로라는 나오고, 지옥에 들리고, 죽음을 겪습니다. 로라가 천국과 지옥과 죽음을 거치기 때문에, <가든 파티>는 유사 신화가 됩니다. 천국과 지옥과 죽음이 신화적인 소재이기 때문입니다. 고대 그리스 신화에서 등장인물들은 지옥으로 들어가거나 죽음을 거칩니다. <가든 파티>는 고대 그리스 신화와 비슷합니다. 서구 문화에서 고대 그리스 신화가 '오래된 문학'이기 때문에, 캐서린 맨스필드는 오래된 문학으로서 고대 신화를 단편 소설에게 적용했을 겁니다. 이 해석이 타당한가요?


분명히 하류층 거리와 지옥 사이에는 유사성이 있습니다. 지옥은 신화 소재입니다. 문학이 지옥을 말하기 때문에, 문학은 (유사) 신화가 됩니다. 만약 이 유사성이 옳다면, 이 해석 역시 타당할 겁니다. 하지만 정말 하류층 거리가 지옥인가요? 아무리 두 가지 사이에게 유사성이 있다고 해도, 정말 하류층 거리가 지옥이 될 수 있나요? 캐서린 맨스필드가 이것을 의도했나요? 에드워드 포스터는 어떤가요? 불가해한 것을 강조하기 위해 에드워드 포스터가 동굴을 소설 초반부에 집어넣었나요? 만약 독자가 작가에게 직접 묻거나 작가 인터뷰를 읽는다면, 독자는 정답을 알 겁니다. 하지만 이게 불가능하다면?



만약 독자가 캐서린 맨스필드에게 직접 묻지 못한다면, 독자는 스스로 해석해야 합니다. 그리고 많은 상황들에서 독자는 작가에게 직접 묻지 못합니다. 어떤 인터뷰에서 캐서린 맨스필드는 하류층 거리가 지옥이라고 말했는지 모르나, 만약 독자가 이 인터뷰를 찾지 못한다면, 독자는 스스로 해석해야 합니다. 많은 상황들에서 독자는 스스로 해석합니다. 그래서 독자는 유사성의 함정에 빠질지 모릅니다. "오오, 그대는 나의 태양입니다." 이 문구에서 유사성을 찾기는 어렵지 않습니다. 이 문구는 소중한 그대가 항성이라고 뜻하지 않습니다. 화자는 공전 행성이 아닙니다. 이 문구는 천문학을 설명하지 않습니다.


태양이 지구에게 빛과 열기를 주기 때문에, 지구는 생명의 요람입니다. 지구에게 태양은 빛과 열기입니다. 지구에게 태양은 아주 소중합니다. 태양 없이, 지구는 죽은 행성입니다. 이렇게 태양이 아주 소중하기 때문에, 소중한 것을 강조하기 위해 사람들은 태양을 운운합니다. 소중한 그대를 강조하기 위해 화자는 태양을 운운합니다. 소중한 그대와 태양 사이에는 유사성이 있습니다. 이건 소중한 그대가 항성계를 거느린다는 뜻이 아닙니다. 만약 독자가 소중한 그대와 태양을 천문학이라고 해석한다면, 이건 유사성의 함정일 겁니다. 하지만 이 비유가 아주 유명하기 때문에, 유사성의 함정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이 비유가 아주 유명하기 때문에, 많은 독자들은 유사성의 함정에 빠지지 않습니다. 하지만 <가든 파티>에서 하류층 거리가 지옥이 되는 것처럼, 어떤 해석들은 헛갈릴지 모릅니다. 엘리자베스 비숍은 <물고기>를 썼습니다. 제목이 가리키는 것처럼, <물고기>에서 화자는 물고기를 낚습니다. 이 시에서 낚시와 물고기는 가장 커다란 비중을 차지합니다. 만약 평론가들이 문학 속의 낚시와 물고기를 논의한다면, 이 감동적인 시는 빠지지 않을 겁니다. 어니스트 헤밍웨이는 <노인과 바다>를 썼습니다. 흔히 <노인과 바다>는 문학 속의 낚시와 물고기를 대표하나, 어떤 관점에서 <노인과 바다>보다 <물고기>는 낫습니다.


<노인과 바다>에서 노인은 청새치를 낚고, 청새치는 노인에게 종속됩니다. 이 종속 관계는 깨지지 않습니다. 아무리 산티아고 노인이 고생한다고 해도, 결국 종속 관계는 깨지지 않습니다. 소설 <프랑켄슈타인>에서 인조인간이 빅토르 프랑켄슈타인에게 종속되는 것처럼, 소설 <노인과 바다>에서 청새치는 산티아고 노인에게 종속됩니다. 야생 동물은 인간에게 종속됩니다. 야생 동물은 자연에게 속하나, 이제 야생 동물은 인간(게다가 이 인간은 남자입니다)에게 종속됩니다. 남자는 자연을 지배합니다. 그리고 오래 전부터 (서구) 문화는 여자와 자연을 동일시했습니다. 빗방울과 눈물이 비슷한 것처럼, 여자와 자연은 비슷합니다.



[이 사진은 역동적인 생명력을 자랑합니다. 많은 문학들은 생명력이 남자보다 여자라고 표현합니다.]



이 유사성에서 남자는 여자를 지배합니다. 청새치가 산티아고 노인에게 종속되고, 청새치가 야생 동물이고, 야생 동물이 자연에게 속하고, 산티아고 노인이 남자이고, 여자와 자연이 비슷하기 때문에, <노인과 바다>에서 남자는 여자를 지배합니다. 여자는 남자에게 종속됩니다. <노인과 바다>는 여자가 남자에게 종속된다고 표현합니다. <노인과 바다>는 노벨 문학상을 받았으나, 노벨 문학상 수상 소설은 여자가 남자에게 종속된다고 표현합니다. 이게 타당한 해석인가요? 정말 이 소설이 여자가 남자에게 종속된다고 표현하나요? 어니스트 헤밍웨이가 이걸 의도했나요? 이 작가는 마초적이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어니스트 헤밍웨이가 마초적이었다고 해도, <노인과 바다>가 가부장 편견을 드러내나요? 분명히 (서구) 문화에서 여자와 자연은 비슷합니다. 많은 문학들과 기록들은 여자와 자연을 동일시합니다. <노인과 바다>가 이 문학들을 따르나요? 아무리 자연과 여자 사이에게 유사성이 있다고 해도, 이 유사성이 <노인과 바다>를 포괄할 수 있나요? 독자가 이 유사성을 <노인과 바다>에게 적용할 수 있나요? 어떤 독자는 고개를 끄덕일 테고, 어떤 독자는 고개를 저을 겁니다. 해석들이 다양하기 때문에, 정답은 존재하지 않을 겁니다. 평론가들 역시 이 소설이 가부장 편견이라고 단정하지 못합니다.



그렇다고 해도 분명히 <노인과 바다>에서 청새치는 산티아고 노인에게 종속됩니다. 반면, <물고기>에서 물고기는 화자 낚시꾼에게 종속되지 않습니다. 화자는 물고기를 구체적으로 관찰하고 무지게 감탄합니다. 결국 화자는 물고기를 풀어주고 물고기는 물 속으로 돌아갑니다. 물고기는 야생, 자연으로 돌아갑니다. 한때 물고기는 낚시꾼에게 종속되었으나, 결말에서 종속 관계는 사라집니다. <노인과 바다>는 종속 관계를 크게 의식하지 않으나, <물고기>는 종속 관계를 없앱니다. 이 관점에서 <노인과 바다>보다 <물고기>는 낫습니다. 그래서 <물고기>는 문학 속의 낚시를 대표할 수 있습니다.


<물고기>가 문학 속의 낚시를 대표하기 때문에, <물고기>와 <상흔>은 비슷할 수 있습니다. 차이나 미에빌은 <상흔>을 썼습니다. <상흔>에서 가장 인상적인 사건들 중에서 하나는 낚시입니다. 소설에서 주된 배경 무대는 아르마다입니다. 아르마다는 선단 도시입니다. 크고 작은 수많은 선박들은 아르마다라는 도시를 구성합니다. 아르마다는 도시이고, 동시에 아르마다는 거대 선박입니다. 거대 선박으로서 아르마다는 항해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아르마다가 너무 거대하기 때문에, 아르마다는 느립니다. 허스키들이 썰매를 끄는 것처럼, 만약 물 속에서 뭔가가 선단 도시를 끈다면, 아르마다는 빠르게 항해할 겁니다.



그래서 아르마다 지도자들은 초~거대 괴수 아방을 낚기 원합니다. 아방은 평범한 물고기가 아닙니다. <물고기>에서 물고기는 평범한지 모르나, <상흔>에서 아방은 초~거대 괴수입니다. 거대 바다 괴수를 붙들기는 쉽지 않고, 아르마다는 대대적인 낚시 준비 과정에 돌입합니다. 아방을 낚기 위해 아르마다는 온갖 과정들을 거칩니다. 심지어 아르마다 시민들은 목숨을 걸고 모기 인간들을 방문합니다. 모기 인간들 중에서 뛰어난 학자가 비전 문서를 연구했고, 이 문서가 어떻게 아방을 낚는지 알려주기 때문입니다. 아방을 낚기 위해 아르마다는 도서관을 뒤지고, 문서들을 연구하고, 학자들을 초빙합니다.


이렇게 아르마다가 난리법석을 겪은 이후, 마침내 아르마다는 주문을 시전합니다. 다른 세계에서 이 세계로, 아방은 건너오고, 아르마다는 아방을 붙듭니다. 거대한 쇠사슬들은 바다 괴수를 붙들고, 이제 아방은 허스키 썰매견이 됩니다. 허스키가 썰매를 끄는 것처럼, 아방은 선단 도시를 끕니다. 선단 도시는 빠르게 항해하고, 아르마다 시민들은 쾌재를 부릅니다. <상흔>에서 낚시 과정은 아주 커다란 비중을 차지합니다. 심지어 이 낚시는 소설 결말에게 결정적인 영향을 미칩니다. 아방 낚시 없이, 소설은 결말로 향하지 못합니다. 아르마다에게 아방은 생체 동력이고, '거대 선박+생체 동력'은 아주 독특한 설정입니다.



스팀펑크 판타지에서 거대 탈것+생체 동력이 전형적인 설정인가요? 이게 주류 설정인가요? 그건 아닐 겁니다. 스페이스 오페라에서 생체 우주선이 주류 설정보다 이질적이고 기괴한 설정이 되는 것처럼, 스팀펑크 판타지에서 거대 탈것+생체 동력은 주류 설정이 아닐 겁니다. 위어드 테일의 대가로서 차이나 미에빌은 아주 독특한 설정을 만들었습니다. 이게 주류 설정이 아니기 때문에, 이게 이질적인 설정이기 때문에, <상흔>에서 아방은 아주 두드러집니다. 하지만 <상흔>은 이 낚시를 긍정적으로 관조하지 않습니다. 이건 종속 관계입니다. <노인과 바다>처럼, 선단 도시는 바다 괴수를 종속합니다.


선단 도시로서 아르마다는 문명입니다. 문명은 남자입니다. 오래 전부터 거대 문명들은 남자가 주체라고 주장했습니다. 수많은 지도자들, 과학자들, 탐험가들, 철학자들, 예술가들은 남자들입니다. 문명은 남자입니다. 반면, 자연은 여자입니다. 많은 (서구) 문학들은 자연이 여자라고 표현합니다. 바다 괴수는 문명보다 자연에게 가깝습니다. 그래서 아르마다는 남자이고, 아방은 여자입니다. 문명이 자연을 지배하는 것처럼, 아르마다는 아방을 종속하고, 남자는 여자를 종속합니다. 문명-아르마다-남자는 이어지고, 자연-아방-여자는 이어집니다. <노인과 바다>처럼, <상흔>은 여자가 남자에게 종속된다고 표현합니다.



하지만 <노인과 바다>와 달리, <상흔>은 이 종속 관계를 부정적으로 바라봅니다. <물고기>가 종속 관계를 없애는 것처럼, <상흔>에서 종속 관계는 긍정적이지 않습니다. 이 소설은 아래로부터의 민중 혁명을 암시합니다. 민중 혁명과 종속 관계는 어울리지 않습니다. 두 가지가 어울리지 않기 때문에, 종속 관계는 부정적입니다. 지배 계급과 피지배 계급이 부정적인 것처럼, 문명은 자연을 종속하지 않고, 남자는 여자를 종속하지 않습니다. 이 해석들이 타당한가요? 아르마다와 아방이 문명과 자연, 남자와 여자인가요? 분명히 아르마다와 문명과 남자, 아방과 자연과 여자 사이에는 유사성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게 너무 자의적인 해석이 아닌가요? <상흔>은 아방이 여자라고 직접 설명하지 않습니다. <상흔>이 직접 설명하지 않기 때문에, 독자들은 바다 괴수가 여자거나 여자가 아니라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해석들은 다양하고, 여기에서 정답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심지어 차이나 미에빌조차 바다 괴수가 여자거나 여자가 아니라고 단정하지 못할 겁니다. 게다가 이 해석들에서 오직 아방과 여자만 문제가 아닙니다. 이 해석들은 <물고기>와 <상흔>이 비슷하다고 주장합니다. <물고기>와 <상흔>에게는 커다란 교집합이 있습니다. <물고기>와 <상흔>에서 해양 동물(물고기와 아방)은 핵심 소재입니다.



화자 낚시꾼은 물고기를 낚습니다. 낚시꾼이 물고기를 낚는 것처럼, 선단 도시는 거대 바다 괴수를 낚습니다. 하지만 <물고기>는 종속 관계를 없앱니다. <상흔>은 종속 관계를 부정적으로 바라봅니다. 이렇게 양쪽은 비슷하나, <물고기>는 주류 문학입니다. <상흔>은 스팀펑크 판타지 소설입니다. 어떻게 주류 문학과 스팀펑크 소설이 비슷할 수 있나요? 필립 리브는 <모털 엔진>을 썼습니다. <모털 엔진>은 스팀펑크 소설입니다. <상흔>과 <모털 엔진>이 스팀펑크이기 때문에, <물고기>보다 <상흔>과 <모털 엔진>은 비슷합니다. 양쪽은 똑같은 장르에 속합니다. <물고기>는 스팀펑크가 아닙니다.


하지만 <물고기>에서 해양 동물, 야생, 자연은 핵심 비중을 차지합니다. <상흔>에서도 해양 동물, 야생, 자연은 핵심 비중을 차지합니다. 반면, <모털 엔진>은 이것들을 말하지 않습니다. <모털 엔진>은 문명(남자)이 자연(여자)을 붙든다고 표현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상흔>과 <모털 엔진>이 똑같은 스팀펑크라고 해도, 이건 그저 표면적인 유사성에 불과합니다. 만약 독자가 해양 동물, 야생, 자연을 읽고 원초적인 영성에 흠뻑 젖기 원한다면, <물고기>와 <상흔>은 탁월한 선택일 겁니다. 반면, <모털 엔진>은 엉터리 선택일 겁니다. 이 소설에서 독자는 야생과 자연을 읽지 못합니다. 이 소설은 오직 문명만 표현합니다.



[엄청난 환경 오염은 유사성을 분류하기 위한 기준이 될 수 있고, <물고기>와 <상흔>은 비슷합니다.]



주류 문학은 거대 괴수를 묘사하지 못합니다. 사이언스 픽션을 비롯해 사변 문학은 거대 괴수를 묘사하고 웅장하고 원초적인 자연을 강조할 수 있습니다. 사변 문학에게는 이 장점이 있으나, <모털 엔진>은 이 장점에게 관심을 기울이지 않습니다. <모털 엔진>은 자연과 야생을 주목하지 않습니다. <물고기>는 거대 괴수를 묘사하지 못하나, <물고기>는 해양 동물에게 원초적인 광휘를 두르고 자연과 야생을 주목합니다. 이 관점에서 <모털 엔진>보다 <물고기>와 <상흔>은 훨씬 가깝습니다. 하지만 어떻게 스팀펑크보다 주류 문학과 스팀펑크가 가까울 수 있나요? 이게 유사성의 함정이 아닌가요?


문학에서 유사성은 많은 사랑들을 누리나, <물고기>와 <상흔>이 보여주는 것처럼, 유사성은 함정이 될지 모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유사성을 해석할 때, 사람들은 물어야 합니다. "왜 내가 이 유사성을 선택하는가? 왜 다른 기준들보다 이 유사성을 분류하기 위한 기준이 높은 가치를 얻는가?" <물고기>와 <상흔>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왜 종속과 해방이 중요한가요? 왜 자연과 문명 관계가 높은 가치를 얻나요? 왜 스팀펑크보다 해양 동물이 높은 가치를 얻나요? 가부장 제도와 기후 변화는 대답이 될 수 있습니다. 현실에서 우리는 살아갑니다. 오직 현실에서만 우리는 살아갑니다. 현실에서 우리는 절대 벗어나지 못합니다.



아무리 차이나 미에빌이 바스-라그를 쓴다고 해도, 오직 현실에서만 차이나 미에빌은 바스-라그를 씁니다. 차이나 미에빌은 바스-라그로 건너가지 못하고 아방과 함께 헤엄치지 못합니다. 이건 불가능합니다. 차이나 미에빌이 거대 바다 괴수와 함께 헤엄치지 못하는 것처럼, 오직 현실에서만 우리는 살아갑니다. 현실에서 자본주의는 아주 지배적입니다. 심지어 산업 자본주의가 온갖 환경 오염들을 저지르고 지구 생물권을 짓밟기 때문에, 자본주의는 가장 지배적입니다. 지구 생물권을 짓밟기 위해 자본주의는 자연과 문명을 분리하고 문명이 자연을 지배한다고 떠벌입니다. 이건 엉터리 거짓말입니다.


자본주의는 여자 무급 노동에게 기생합니다. 비록 여자 무급 노동이 여러 이견들에게 부딪힌다고 해도, 분명히 자본주의는 여자 무급 노동에게 기생합니다. 자본주의는 가부장 제도입니다. 가부장 제도에서 여자들은 착취를 당하고, 여자들은 약자, 피지배 계급이 됩니다. 모든 인간은 문명에게 평등하게 속하지 않습니다. 심지어 환경 보호론자들조차 문명이 자연의 적이라고 착각하나, 이 '문명'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윤을 축적하기 위해 자본주의는 자연과 문명을 분리합니다. 그래서 여자와 남자 관계, 자연과 문명 관계는 높은 가치를 얻고, 스팀펑크보다 해양 동물은 높은 가치를 얻습니다.



※ 사진 출처: NOAA's National Ocean Service,

https://www.flickr.com/photos/usoceangov/34185942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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