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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 생태주의

<요나>, 거대 물고기와 누더기 사이버펑크 본문

SF & 판타지/크고 작은 괴수들

<요나>, 거대 물고기와 누더기 사이버펑크

OneTiger 2020. 9. 1. 19:47

 

 

이 동영상(링크)은 SF 단편 영화 <요나>입니다. 보잘것없는 해안 마을에서 가난한 청년은 거대 물고기를 촬영합니다. 거대 물고기 사진은 엄청난 화제가 되고, 해안 마을은 관광 명소가 됩니다. 물고기 인간으로서 청년은 엄청난 인기를 누립니다. 문자 그대로 하루 아침에 청년은 유명 인사가 됩니다. 언제나 그러는 것처럼, 갑작스러운 화제와 갑작스러운 인기는 커다란 후유증을 남깁니다. 후유증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뉩니다. 하나는 청년의 개인적인 후유증입니다. 청년은 유명 인사가 되었으나, 청년의 내면은 공허합니다. 청년은 뭔가를 스스로 이룩하지 않았습니다. 이건 그저 우연에 불과합니다.

 

청년의 엄청난 인기는 그저 우연에 불과합니다. 청년이 뭔가를 스스로 이룩하지 않았기 때문에, 청년은 이것을 감당하지 못합니다. 엄청난 인기는 무거운 짐이 되고, 청년은 무너집니다. 단편 영화 <요나>는 갑작스러운 인기가 행운이 아니라고 암시합니다. 아무리 호박이 넝쿨째 굴러들어온다고 해도, 호박은 행운이 아닐지 모릅니다. 비단 청년만 아니라 우리 역시 마찬가지인지 모릅니다. 우리는 뭔가를 스스로 이룩해야 합니다. 아무리 뭔가가 으리으리하고 번쩍인다고 해도, 만약 우리가 그것을 스스로 이룩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행운보다 무거운 짐과 공허한 내면으로 이어질지 모릅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수많은 사람들은 으리으리하고 번쩍이는 인생을 추구합니다. 다들 엄청난 돈을 벌기 원합니다. 다들 호박이 넝쿨째 굴러들어오기 원합니다. 자본주의 사회는 돈벌이를 부추깁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오직 돈벌이만 유일한 미덕이 됩니다. 돈방석 위에서 인간이 앉는 순간, 다른 것들은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습니다. 카를 마르크스와 프리드리히 엥겔스가 경고한 것처럼,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벌이가 모든 것을 바꾸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돈, 돈, 돈, 돈, 돈, 돈, 오직 돈만 추구합니다. 하지만 아무리 사람들이 많은 돈을 번다고 해도, 이게 행운인가요? 오히려 이게 무거운 짐이 아닌가요?

 

단편 영화 <요나>는 돈벌이 속에서 인간이 망가지고 무너진다고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마을이 관광 명소가 되는 동안, 엄청난 개발 열풍은 마을을 덮치고, 청년은 돈독이 오른 것 같습니다. 분량이 짧기 때문에, <요나>는 자세히 묘사하지 않으나, 돈벌이 때문에, 청년은 우정을 비롯해 많은 것들을 버리는 것 같습니다. 엄청난 돈벌이와 공허한 인생은 드문 소재가 아닙니다. 비단 <요나>만 아니라 많은 이야기들은 과도한 돈벌이를 경고합니다. 이 이야기들과 <요나>에게서 과도한 돈벌이는 유사성이 될 수 있습니다. 과도한 돈벌이 때문에, 청년이 망가지는 것처럼, 과도한 돈벌이는 우리를 무너뜨릴지 모릅니다.



"아놔, 씨발, 선비질 존나게 하네. 아무리 무거운 짐이 나쁘다고 해도, 나는 많은 돈을 벌기 원해. 오히려 나는 무거운 짐을 짊어지기 원해." 이렇게 어떤 사람들은 생각할지 모릅니다. 아무리 과도한 돈벌이가 나쁘다고 해도, 자본주의 사회가 돈, 돈, 돈, 돈, 돈, 돈, 오직 돈만 자극하기 때문에, 황금 만능주의가 좋든 나쁘든, 많은 사람들은 과도한 돈벌이를 원할 겁니다. 많은 사람들은 호박이 넝쿨째 굴러들어오기 원할 겁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여유로운 재물 없이, 인간은 비참한 지경으로 몰락할지 모릅니다. 심각한 사고가 터졌을 때, 만약 인간에게 재물이 없다면, 인간은 비참하게 파산할 겁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여유로운 재물 없이, 인간으로서 인간은 살아가지 못합니다. 천부적인 인권이고 지랄이고 나발이고, 인간으로서 살아가기 위해 인간에게는 재물이 있어야 합니다. 재물 없이, 인간은 인간이 되지 못합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재물은 인간성을 뒷받침합니다. 도덕 교과서는 인성이 중요하다고 외칠지 모르나, 자본주의 사회에서 사람들은 도덕 교과서를 믿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도덕 교과서보다 돈벌이를 믿습니다. 성인군자보다 대기업 간부가 훨씬 커다란 영향을 미치기 때문입니다. 돈벌이는 또 다른 도덕, 또 다른 종교가 되었습니다. 자본주의 사회는 돈벌이를 믿기 위한 종교 사회입니다.



자본주의 사회는 오직 돈벌이만 추구하기 위한 광신입니다. 다들 돈벌이라는 광신에 빠지고, 청년 역시 다르지 않습니다. 광신자는 공허한 인생으로 흘러가고, 이건 커다란 후유증이 됩니다. 이 후유증은 청년의 후유증, 개인적인 후유증입니다. <요나>는 오직 개인적인 후유증만 제시하지 않습니다. 이 단편 영화는 사회적인 후유증을 함께 보여줍니다. 마을이 관광 명소가 되는 동안, 개발 열풍은 마을을 덮칩니다. <요나>는 화려한 편집 기술을 이용하고 어떻게 순식간에 개발 열풍이 마을을 둘러싸는지 강조합니다. 보잘것없는 해안 마을은 화려하고 시끌벅적한 관광 명소를 향해 신나게 질주합니다.

 

문자 그대로 개발 열풍은 질주입니다. 개발 열풍은 다른 것들을 고려하지 않습니다. 보잘것없는 마을이 시끌벅적한 관광 명소가 될 때까지, 개발 열풍은 달리고, 달리고, 달리고, 또 다시 달립니다. 그래서 개발 열풍 때문에, 마을 사람들이 부유해지나요? 모든 사람이 혜택을 골고루 누리나요? 흔히 사람들은 낙수 효과를 믿습니다. 만약 낙수 효과가 옳다면, 개발 열풍이 마을을 둘러쌌기 때문에, 마을 사람들 역시 부유해져야 합니다. 하지만 <요나>는 낙수 효과를 보여주지 않습니다. 개발 열풍은 마을 사람들에게 아무것도 주지 않은 것 같습니다. 마을은 관광 명소가 되었으나, 여전히 사람들은 가난합니다.



많은 자본금들은 관광 명소로 들어갔을 겁니다. 만약 많은 자본금들이 관광 명소로 들어갔다면, 왜 사람들이 부유해지지 못했나요? 이 자금들이 어디로 갔나요? <요나>는 자세하게 설명하지 않습니다. <요나>는 그저 시끌벅적한 관광 명소와 가난한 마을 사람들을 대조할 뿐입니다. 이 단편 영화에서 줄거리는 구체적이기보다 모호합니다. 분량이 짧고, 줄거리가 모호하기 때문에, 이 단편 영화는 다양한 해석들을 상정합니다. <요나>는 시끌벅적한 관광 명소에서 가난한 사람들이 살아간다고 보여줍니다. 왜 이 현상이 나타납니까? 여기에는 여러 해석들이 있겠으나, 어쩌면 대답은 잉여 자본인지 모릅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본가들은 이윤 극대화를 추구합니다. 언제나 자본가들은 경제 발전과 훨씬 높은 이윤을 외칩니다. 자본주의 사회는 제로 성장, 마이너스 성장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본주의는 제로 성장, 마이너스 성장을 혐오하고 비웃습니다. 훨씬 높은 이윤을 얻기 위해 자본가들은 온갖 비용들을 최대한 줄이기 원합니다. 비용들을 줄이기 위해 자본가들은 임금들을 낮추기 원합니다. 자본가에게 낮은 임금은 가장 쉽고 흔한 비용 감소 방법입니다. 한편으로 훨씬 높은 이윤을 얻기 위해 자본가들은 훨씬 많이 판매하기 원합니다. 훨씬 많이 판매하기 위해 자본가들은 훨씬 많은 상품들을 만듭니다.





결국 자본가는 임금들을 최대한 줄이고 훨씬 많은 상품들을 만듭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상품들은 계속 늘어납니다. 하지만 임금들이 줄어들기 때문에, 무산자 계급은 수많은 상품들을 소비하지 못합니다. 자본가들에게는 막대한 자금이 있으나, 그들 역시 수많은 상품들을 소비하지 않습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생산은 늘어나나, 소비는 줄어듭니다. 이건 (상대적인) 과잉 생산이 됩니다. 자본주의 사회는 (상대적인) 과잉 생산으로 흘러갑니다. 과잉 생산 속에서 더 이상 상품 판매는 이윤을 얻지 못합니다. 이건 거품 경제입니다. 거품을 해소하기 위해 자본주의는 새로운 투자 기회를 찾아야 합니다.

 

이 상황에서 보잘것없는 해안 마을 청년은 거대 물고기를 목격합니다. 청년은 해안 마을이 관광 명소가 될 수 있다고 선전하고, 자본주의 사회에게 이건 거품 경제를 해소하기 위한 출구가 됩니다. 잉여 자본은 해안 마을로 들어갑니다. 개발 열풍은 해안 마을을 덮치고, 자본금들은 이것저것 신나게 만들기 시작합니다. 개발 열풍이 이것저것 신나게 만드는 동안, 어쩌면 마을 사람들은 부유함을 누렸는지 모릅니다. 그렇다고 해도 잉여 자본, 거품 경제에서 개발 열풍은 비롯했습니다. 먹고 살기 위해 마을 사람들은 경제를 스스로 발전시키지 않았습니다. 외부 자본은 외부 투자자에게로 돌아갑니다.



게다가 단편 영화 <요나>에서 해안 마을은 낙후된 주변부 지역입니다. 중심부 자본은 주변부 지역을 발전시키지 않습니다. 로자 룩셈부르크와 블라디미르 일리치 레닌부터 오늘날의 이매뉴얼 월러스틴과 데이빗 하비까지, 많은 좌파 지식인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중심부는 주변부를 착취합니다. 주변부는 가난하나, 태생적으로 주변부는 가난하지 않습니다. 중심부가 주변부를 착취하기 때문에, 중심부는 부유하고, 주변부는 가난합니다. 자유 민주주의가 제3세계를 착취하기 때문에, 자유 민주주의는 부유하고, 제3세계는 가난합니다. 자유 민주주의는 스스로 부유해지지 않았습니다. 이건 착취입니다.

 

소비에트 연방은 이 구도를 깨뜨리기 원했으나, 자유 민주주의가 1차 세계 대전, 2차 세계 대전, 베트남 침략을 비롯해 식민지 침략들을 저질렀기 때문에, 소비에트 연방은 착취 구도를 깨뜨리지 못했습니다. (코민테른의 자체적인 뻘짓들과 삽질들 역시 한몫을 했습니다.) 착취 구도 속에서 중심부 잉여 자본은 주변부 지역으로 흘러갔을 겁니다. 아무리 이 잉여 자본이 (중심부 잉여 자본보다) 주변부 잉여 자본이라고 해도, 세계적인 착취 구도 속에서 주변부가 잉여 자본을 받기 때문에, 결국 주변부는 제대로 발전하지 못합니다. 게다가 비단 중심부-주변부 착취만 아니라 자본가-노동자 계급 투쟁 역시 문제입니다.



중심부-주변부 착취 속에서 주변부 자본가는 주변부 노동자를 착취합니다. 이 상황에서 주변부 노동자는 이중적인 약자입니다. 주변부로서, 노동자로서 주변부 노동자는 이중적인 약자입니다. 만약 이 노동자가 여자라면, 주변부 여자 노동자는 '삼중적인 약자'가 됩니다. 자본주의 사회를 비롯해 여러 인류 사회들이 가부장 제도이기 때문에, 주변부 여자 노동자는 삼중적인 약자입니다. 삼중적인 약자로서 주변부 여자 노동자는 가장 취약합니다. 코로나 19 역시 예외가 아닙니다. "코로나 19 때문에, 모두 힘들어요." 이 문구는 현실을 직시하지 않습니다. 주변부 여자 노동자는 가장 고생합니다.

 

코로나 19 때문에, 모두 똑같이 힘들지 않습니다. 코로나 19 때문에, 다른 무엇보다 주변부 무산자 여자들은 가장 고생합니다. 자유 민주주의는 제3세계 무산자 여자들이 가장 고생한다고 입도 뻥긋하지 않으나, 자유 민주주의가 제3세계를 연이어 짓밟았기 때문에, 다른 무엇보다 주변부 무산자 여자들은 가장 고생하는 중입니다. 자유 민주주의가 제3세계를 연이어 짓밟았기 때문에, 세계적인 착취 속에서 계급 투쟁과 가부장 착취가 나타나기 때문에, 아무리 개발 열풍이 해안 마을을 둘러싼다고 해도, 마을 사람들은 부유해지지 못합니다. 단편 영화 <요나>는 이 추악한 현실을 반영하는지 모릅니다.

 

 

전염병 사태에서 공공 의료는 가장 중요한 사항입니다. 하지만 사회주의가 공공 의료를 외쳤을 때, 자본주의는 이것을 비웃었고 모욕했습니다. 쿠바 같은 국가들이 공공 의료를 주도했을 때, 자본주의는 의료 민영화를 열심히 떠들었습니다. 자본주의에게 의료는 건강하고 풍요로운 인생보다 그저 돈벌이를 위한 기회에 불과합니다. <조류 독감: 전염병의 사회적 생산>에서 마이크 데이비스가 지적한 것처럼, 오히려 자본주의는 전염병 공장이 됩니다. 아무리 위험한 전염병이 유행한다고 해도, 이게 제3세계 가난한 전염병이기 때문에, 세계화 자본주의는 백신 연구에게 관심을 기울이지 않습니다.

게다가 전염병 사태에서 건강한 식량 역시 중요합니다. 충분한 영양분 없이, 인간은 병마를 이기지 못합니다. 그 자체로서 든든한 식사는 보약입니다. 하지만 식민지 수탈과 기후 위기 때문에, 제3세계는 충분한 식량을 얻지 못합니다. 충분한 식량 없이, 가난한 민중들은 치명적인 전염병을 이기지 못합니다. 아니,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전염병보다 한끼 식사를 걱정합니다. 코로나 19 사태가 유행하기 전에, 이미 가난한 사람들에게 먹고 사는 문제는 지옥과 마찬가지였습니다. 현실에서 중심부-주변부 착취 문제는 너무 심각하고, 단편 영화 <요나>는 해안 마을을 이용하고 현실을 반영하는지 모릅니다.



단편 영화 제작자들이 이것을 의도했나요? 어쩌면 그들은 뭐라고 데이빗 하비가 설명하는지 알지 못하는지 모릅니다. 도시 지리학자로서 데이빗 하비는 왜 주변부 도시가 가난해지는지 설명하나, 단편 영화 제작자들은 이것을 인식하지 못했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현실(세계화 자본주의) 속에서 <요나>는 나타납니다. 아무리 <요나>가 환상적인 거대 물고기를 보여준다고 해도, 환상적인 거대 물고기가 비(非)현실 설정이라고 해도, 비현실 속에서 <요나>는 나타나지 않습니다. 오직 현실에서만 <요나>는 존재합니다. 비현실 세계보다 오직 현실에서만 단편 영화 제작자들은 <요나>를 촬영했습니다.

 

현실에서 <요나>는 벗어나지 못합니다. 현실은 세계화 자본주의입니다. 그래서 만약 데이빗 하비가 주변부 착취 문제를 <요나>에게 대입한다면, 이건 오류가 아닐 겁니다. 요란한 광고판들 때문에, <요나>는 누추한 제3세계 사이버펑크 같습니다. 많은 사이버펑크들이 자본주의 모순을 반영하는 것처럼, 누더기 사이버펑크 역시 자본주의 모순을 반영했는지 모릅니다. 그리고 사이버펑크에서 환경 오염은 중요한 소재입니다. 개발 열풍, 관광 명소는 엄청난 쓰레기들을 버립니다. 만약 먹고 살기 위해 마을 사람들이 경제를 스스로 발전시켰다면, 마을 사람들은 그들의 고향을 쓰레기 더미로 만들지 않았을 겁니다.



하지만 먹고 살기 위해 마을 사람들은 경제를 스스로 발전시키지 않았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외부 잉여 자본은 개발 열풍을 떠받들었습니다. 외부 잉여 자본은 마을 사람들에게 상관하지 않았습니다. 거품 경제 속에서 이윤을 얻기 위해 외부 잉여 자본은 해안 마을을 주목했습니다. 이윤을 얻기 위해 잉여 자본은 과도한 생산과 소비를 부추기고, 이건 온갖 쓰레기들과 폐기물들로 이어집니다. 자본주의가 비용을 최대한 낮추기 원하기 때문에, 자본주의는 정화 비용을 제대로 지불하지 않습니다. 자본주의가 정화 비용을 제대로 지불하지 않기 때문에, 자본주의는 환경 오염 범죄자입니다.

 

기후 변화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몇 십 년 이후, 만약 기후 변화가 훨씬 심각해진다면, 과학자들이 암울하게 경고하는 것처럼, 엄청난 폭염이나 엄청난 폭풍은 인류 사회를 무너뜨릴지 모릅니다. 다행히 이게 예측이기 때문에, 이 예측은 빗나갈지 모릅니다. 어쩌면 암울한 경고보다 미래 기후 변화는 훨씬 경미할지 모릅니다. 어쩌면 미래 기후 변화는 대단한 것이 아닐지 모릅니다. 하지만 아무리 미래 기후 변화가 경미하다고 해도, 이미 생물 다양성은 너무 심각하게 줄어들었고, 이미 기후 난민들은 현실입니다. 이미 엄청난 병충해와 폭염과 가뭄은 현실입니다. 그래서 자본주의, 끔찍한 환경 오염 범죄자는 사라져야 합니다.





단편 영화 <요나>에서 거대 물고기 역시 환경 오염, 온갖 쓰레기들을 피하지 못합니다. 거대 물고기 관점에서 이 현상은 환경 아포칼립스입니다. 거대 물고기가 야생 동물이기 때문에, 환경 아포칼립스는 훨씬 두드러집니다. 많은 사람들은 인간이 문명에 속하고 야생 동물이 자연에 속한다고 간주합니다. 이건 너무 얄팍한 이분법이나, 분명히 야생 동물들은 핵 발전소를 짓지 않습니다. 야생 동물들은 대규모 산업 단지를 짓지 않고, 거대 유조선을 건조하지 않고, 스페이스 데브리(우주 쓰레기)를 버리지 않습니다. 야생 동물들이 핵 발전소를 짓지 않기 때문에, 야생 동물들은 자연을 상징할 수 있습니다.

 

야생 동물들이 자연을 상징하기 때문에, 야생 동물들은 환경 아포칼립스를 강조할 수 있습니다. 비디오 게임 <엔들링 Endling: Extinction is Forever>에서 마지막 엄마 여우가 아기 여우들을 돌보는 것처럼, 단편 소설 모음집 <곰과 함께>가 야생 동물(곰)을 제목에 집어넣은 것처럼, 마가렛 앳우드가 개조 야생 동물 천국을 상상하는 것처럼, 환경 아포칼립스에서 야생 동물들은 주연이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곰과 함께>는 진짜 곰을 보여주지 않습니다. 이건 무슨….) 거대 괴수 역시 야생 동물입니다. 많은 거대 괴수들은 동물 형태입니다. 가장 대표적인 거대 괴수 고지라 역시 야생 동물 형태입니다.

 

 

비단 SF 장르만 아니라 <던전스 앤 드래곤스>에서도 자연 성직자 드루이드는 야수로 변신하고 야수 동료와 함께 여행합니다. <던전스 앤 드래곤스>에서 누구보다 드루이드들(과 레인저들)은 환경 오염을 경계합니다. 자연 성직자 드루이드가 야수로 변신하는 것처럼, 야생 동물은 자연을 강조합니다. 단편 영화 제작자들이 이것을 의도했나요? 야생 동물이 환경 아포칼립스를 부각하기 때문에, 단편 영화 제작자들이 거대 물고기를 연출했나요? 어쩌면 이건 의도적인 연출인지 모릅니다. 아니면 우연히 그들은 거대 물고기를 연출했는지 모릅니다.

 

의도가 무엇이든, 고지라와 마지막 엄마 여우와 불쌍한 소라게와 개조 동물들과 야수 변신처럼, 환경 아포칼립스와 거대 물고기는 타당한 연결 고리입니다. 하지만 이건 전부가 아닐 겁니다. YouTube에서 다양한 SF 단편 영화들은 다양한 썸네일들을 보여주나, 다양한 썸네일들 중에서 거대 물고기 썸네일은 가장 두드러집니다. 어떤 시청자들은 우주선이나 기이한 항공기나 인간 형태 로봇 썸네일이 두드러진다고 느낄지 모르나, 거대 물고기 썸네일에게는 고유한 특성이 있습니다. 거대 괴수, 야생 동물은 자연을 강조합니다. 자연은 원초적입니다.

 

 

인간은 자연을 만들지 않았습니다. 인간은 우주선과 기이한 항공기와 인간 형태 로봇을 만들 수 있으나, 인간은 자연을 만들지 못합니다. 인간이 나타나기 전에, 이미 자연은 존재했습니다. 자연이 스스로 나타났기 때문에, 자연 속에서 인간은 나타났습니다. 자연은 원초적인 대상, 어머니입니다. 야생 동물, 거대 괴수는 원초적인 대상, 어머니를 강조합니다. 그래서 우주선과 기이한 항공기와 인간 형태 로봇보다 어머니, 자연, 거대 괴수 썸네일은 훨씬 독특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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