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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 생태주의

2014년 <고지라>, 무토와 설정 공개 본문

SF & 판타지/크고 작은 괴수들

2014년 <고지라>, 무토와 설정 공개

OneTiger 2019. 12. 10. 20:16

※ 이 게시글에는 2014년 영화 <고지라>와 영화 <고지라: 괴수왕>의 내용 누설이 있습니다.



[사이언스 픽션에서 설정이 열매인가요, 뿌리인가요? 설정과 줄거리 사이에 무슨 관계가 있나요?]



다른 수많은 사이언스 픽션들이 그러는 것처럼, 2014년 영화 <고지라>에는 여러 설정들이 있습니다. 이 영화가 거대 괴수 생태계를 묘사하기 때문에, 영화 속에는 괴수 생태계 설정들이 있습니다. 영화 속에서 고지라와 무토는 천적 관계입니다. 무토는 고지라에게 기생하기 원하고, 고지라는 기생충들을 박멸하기 원합니다. 고지라에게 무토 하나는 상대가 되지 않으나, 무토 부부는 고지라를 밀어붙일 수 있습니다. 만약 무토들이 훨씬 많아진다면, 무토들은 고지라를 쓰러뜨리고 고지라에게 알들을 낳을 수 있을 겁니다. 새끼들은 고지라를 파먹고, 쑥쑥 자라고, 머릿수를 늘릴 겁니다.


그래서 무토들이 알들을 낳아야 할 때, 무토들은 고지라를 집단적으로 사냥합니다. 세리자와 박사는 고지라가 알파 프레데터, 최상위 포식자라고 말하나, 무토 떼거리는 고지라를 사냥할 수 있습니다. 아무리 1:1 상황에서 고지라가 무토를 깔아뭉갤 수 있다고 해도, 만약 무토 떼거리가 작정하고 덤빈다면, 고지라는 버티지 못할 겁니다. 2014년 <고지라>에서 거대 괴수들은 그저 셋(고지라와 수컷 무토와 암컷 무토)에 불과하나, 관객들은 어떻게 머나먼 고대에 무토들이 고지라를 쓰러뜨렸는지 추측할 수 있습니다. 영화 도입부 고지라 골격과 무토 고치는 추측하기 위한 단서가 될지 모릅니다.



결국 고지라는 괴수'왕'이 아닙니다. 사실 자연 생태계에서 '왕'이 존재할 수 있나요? 아무리 아무르 호랑이가 당당하다고 해도, 호랑이는 왕이 아닙니다. 게다가 무토들에게는 유사 EMP 방출 능력이 있습니다. 수컷 무토는 파장을 능동적으로 발산할 수 있고, 암컷 역시 파장을 어느 정도 두를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이건 고지라를 사냥하기 위한 능력인지 모릅니다. 방사 열선을 쏘기 위해 고지라는 방전해야 합니다. 그래서 고지라가 방사 열선을 쏘기 전에, 언제나 고지라 골판들은 파랗게 빛납니다. 고지라가 방전하는 동안, 만약 무토들이 파장을 발산한다면, 고지라는 방전하지 못할 겁니다.


유사 EMP 방출 때문에, 고지라 골판들은 빛나지 않을 겁니다. 고지라는 필살기를 잃을 겁니다. 무토들은 고지라를 신나게 두들겨팰 겁니다. 고지라가 다시 방전하기 원한다고 해도, 수컷 무토들이 파장을 계속 발산한다면, 수컷 무토들은 고지라를 연이어 방해할 겁니다. 고지라가 방사 열선을 쏘지 못하기 때문에, 고지라는 육박전을 벌어야 할 겁니다. 1:1 육박전에서 고지라가 유리하기 때문에, 만약 무토들이 적다면, 방사 열선 없이, 고지라는 무토들을 쓰러뜨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만약 무토 숫자가 많다면, 게다가 고지라 상태가 별로 좋지 않다면, 무토 떼거리는 고지라를 쓰러뜨릴 겁니다.



어른 무토들이 고지라를 쓰러뜨린 이후, 고지라는 새끼 무토들을 위한 맛있는 먹거리가 될 겁니다. 이상하게도 2014년 영화 속에서 무토 부부는 고지라를 사냥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수컷 무토는 고지라를 계속 회피하고 전략 병기를 새끼들에게 줍니다. 암컷 역시 고지라에게 구태여 덤비지 않습니다. 어쩌면 무토 부부는 고지라와 싸우기 원하지 않았는지 모릅니다. 머나먼 고대 생태계와 달리, 21세기 초반에는 다른 무토들이 없습니다. 만약 무토 부부가 고지라에게 잘못 덤빈다면, 오히려 고지라는 무토 부부를 없앨지 모릅니다. 무토 부부는 고지라 사냥보다 번식이 우선이라고 판단했는지 모릅니다.


게다가 21세기 초반 인류 문명에 다른 핵 영양분(전략 병기)이 있기 때문에, 무토 부부에게는 고지라를 구태여 사냥하기 위한 이유가 없을 겁니다. 하지만 고지라는 무토 부부를 그냥 놔두지 않습니다. 고지라는 기생충들을 박멸해야 합니다. 만약 고지라가 무토 부부를 그냥 놔둔다면, 언젠가 그것들은 고지라를 쓰러뜨리고 알들을 낳을지 모릅니다. 고지라는 새끼 무토들을 위한 먹거리가 되기 원하지 않을 겁니다. 기생충들을 위한 먹거리. 이게 너무 끔찍하지 않습니까. 만약 관객들이 이런 사실을 고려한다면, 관객들은 왜 2014년 <고지라>에서 고지라가 인간들에게 상관하지 않는지 알 수 있을 겁니다.



2014년 영화 속에서 고지라는 인간들에게 거의 상관하지 않습니다. 몇몇 상황에서 심지어 고지라는 인간들을 우회합니다. 왜 고지라가 인간들에게 상관하지 않거나 인간들을 우회하나요? 고지라는 빨리 무토 부부를 처치하기 원했을 겁니다. 무토 부부가 서로 부르는 동안, 고지라는 무토 부부 신호를 들었을 겁니다. 고지라는 무토 부부가 교미할 거라고 판단했을 겁니다. 만약 무토 부부가 교미한다면, 암컷은 알들을 낳을 테고, 어쩌면 무토 부부는 고지라를 사냥할지 모릅니다. 결국 무토 부부는 고지라 사냥보다 전략 병기를 선택했으나, 고지라는 자신의 목숨이 위험하다고 판단했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무토 부부가 만나기 전에, 1:1 상황에서 고지라는 무토를 쓰러뜨려야 했습니다. 적어도 무토 부부가 알들을 낳기 전에, 고지라는 무토 부부를 쓰러뜨려야 했습니다. 어쩌면 고지라는 어디에 무토 둥지가 있는지 알기 원했는지 모릅니다. 만약 고지라가 어디에 둥지가 있는지 알지 못한다면, 새끼 무토들이 깨어날 때까지, 고지라는 아무것도 하지 못할 겁니다. 고지라가 무토 부부를 쓰러뜨린다고 해도, 만약 수많은 새끼 무토들이 태어난다면, 고지라에게 이건 너무 불리한 상황일 겁니다. 고지라에게는 여유가 없었습니다. 고지라는 빨리 무토 부부를 쓰러뜨리거나 둥지를 파괴해야 했습니다.



이런 이유들 때문에, 고지라는 인간들을 구태여 공격하지 않았는지 모릅니다. 자신의 코가 석 자이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무토들과 달리, 고지라는 영양분을 섭취하지 않습니다. 고지라는 대양을 가로질렀고, 이건 꽤나 힘든 여정이었을 겁니다. 고지라가 힘든 여정을 마쳤음에도, 고지라는 영양분을 섭취하지 않았습니다. 무토 부부를 빨리 처치하기 위해 고지라는 식사 시간을 아꼈는지 모릅니다. 목숨이 위기에 달했기 때문에, 고지라에게는 여유로운 식사 시간이 없었을 겁니다. 만약 관객들이 이런 설정들을 참고한다면, 관객들은 2014년 영화 <고지라>를 훨씬 재미있게 관람할 수 있을 겁니다.


만약 관객들이 이런 설정들을 참고한다면, 왜 고지라가 무토 부부를 추격하는지, 왜 수컷 무토가 파장을 발산하는지, 왜 고지라가 열선을 자주 쏘지 못하는지, 왜 무토 부부가 고지라를 밀어붙일 수 있는지, 왜 고지라가 인간들에게 상관하지 않는지, 관객들은 짐작할 수 있을 겁니다. 문제는 이것들이 배경 설정이라는 사실입니다. 영화 속에서 이런 설정들은 직접 나오지 않습니다. 등장인물들은 설정들을 자세히 설명하지 않습니다. 심지어 세리자와 박사와 비비안 그레이엄 박사와 다른 모나크 과학자들조차 자세한 설정들을 말하지 않습니다. 관객들에게는 추측하기 위한 단서들이 별로 없습니다.



이 게시글은 여러 설정들을 늘어놓으나, 2014년 <고지라>는 이런 설정들을 직접 알려주지 않습니다. 2014년 영화 <고지라>가 배경 설정들을 자세히 가르쳐주지 않기 때문에, 어떤 사람들은 이 게시글이 해석이랍시고 엉뚱한 헛소리들과 개인적인 망상들을 너무 열심히 지껄인다고 비판할지 모릅니다. 2014년 <고지라>에 구체적인 설정들이 없기 때문에, 관객들은 왜 무토가 파장을 발산하는지 스스로 추측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관객들은 이런 추측들이 맞는지 보장하지 못했습니다. 관객들은 혼란스럽다고 느꼈을 겁니다. 2014년 <고지라>는 설정들을 자세히 풀어놓지 않습니다. 이런 연출이 옳은가요? 영화 제작진이 설정을 감춰야 했나요? 사실 SF 작가들에게 이건 꽤나 골치가 아픈 문제입니다.


사이언스 픽션은 비일상적인 상상력을 묘사합니다. 그래서 사이언스 픽션은 설정을 어느 정도 설명해야 합니다. 하지만 사이언스 픽션이 설정을 너무 많이 설명한다면, 사이언스 픽션은 이야기보다 설정 백과 사전에 가까워질 겁니다. 게다가 만약 설정이 너무 많이 드러난다면, 사건 전개들은 힘을 잃을지 모릅니다. 소설은 설정 사전이 아닙니다. 그래서 SF 작가들은 고민합니다. 설정이 많이 나타나야 하는가? 작가가 얼마나 많은 설정들을 감춰야 하는가? 무슨 설정이 드러나고, 무슨 설정이 숨어야 하는가? 만약 설정이 너무 많이 드러난다면, 이게 사건 전개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지 않는가? 설정이 뿌리인가, 아니면 열매인가? 정답은 없을 겁니다. 기성 작가들 역시 정답을 쉽게 찍지 못할 겁니다.



주제, 사상, 분위기, 시점, 필력, 분량에 따라서 작가들은 다양한 방법들을 선택할 겁니다. 하지만 2014년 영화 <고지라>는 설정들을 너무 많이 감췄는지 모릅니다. 2014년 <고지라>에게는 설정들을 설명하기 위한 백과 사전이 될 필요가 없었으나, 2014년 <고지라>는 설정들을 좀 더 드러내야 했습니다. 만약 세리자와 박사와 그레이엄 박사가 몇몇 설정을 설명했다면, 관객들은 혼란스럽다고 느끼지 않았을 겁니다. 2019년 <고지라: 괴수왕>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영화 속에서 모스라는 고지라를 보조하고 기도라와 싸웁니다. 하지만 왜 모스라가 고지라를 돕나요? 왜 오직 모스라만 기도라와 적대하나요?


어떻게 모스라와 고지라가 소통하나요? 과거에도 모스라와 기도라가 적대했나요? 모스라가 먹구름을 뚫고 나타날 때, 기도라가 '아놔, 망할, 저 빌어먹을 나방 계집년, 또 다시 끼어들고 방해하네.'라고 생각하나요? 머나먼 과거에도 모스라가 실을 내뱉었고 기도라를 묶었나요? 고지라 팬들은 이것들을 묻지 않습니다. <고지라: 파이널 워즈>가 보여준 것처럼, 관습적으로 고지라와 모스라는 함께 킹기도라와 싸웁니다. <고지라: 행성 포식자>가 보여준 것처럼, 모스라가 고지라를 싫어한다고 해도, 모스라는 외계 침략자 기도라에게 적대적입니다. 2019년 영화 <고지라: 괴수왕>은 이런 관습을 따릅니다.



하지만 고지라 팬들 이외에 일반 관객들은 이런 관습을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어떤 관객들이 왜 갑자기 모스라가 고지라를 돕는지 헛갈렸습니다. 영화 <고지라: 괴수왕>은 2014년 <고지라>가 반면 교사라고 여기고 설정들을 자세히 설명해야 했는지 모릅니다. 만약 <고지라: 괴수왕>이 사이언스 픽션이 아니었다면, 관객들은 현실을 참고하고 해석할 수 있었을 겁니다. 만약 주류 문학이 심각한 가난과 성 차별을 묘사한다면, 주류 문학이 왜 가난과 성 차별이 나타나는지 직접 설명하지 않는다고 해도, 독자는 현실을 참고하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자본주의 시장 경제는 잉여 노동/재생산을 착취합니다.


자본주의가 잉여 노동/재생산을 착취하기 때문에, 남자 자본가 계급은 부유해지고, 극심한 가난과 끔찍한 성 폭력들은 나타납니다. 심지어 이건 세계 대전과 행성급 환경 오염으로 확장합니다. 주류 문학이 자본주의 시장 경제를 직접 구체적으로 비판하지 않는다고 해도, 심지어 주류 문학이 자본주의를 찬양한다고 해도, 독자는 현실을 참고하고 문학이 현실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한다고 비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너무 너무 너무 너무 애석하게도) 현실 속에서 모스라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현실 속에서 관객들은 살아있는 모스라를 연구하지 못합니다. 모스라는 그저 사이언스 판타지 설정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관객들은 머나먼 과거에 모스라가 기도라에게 실을 찍찍 뿜었는지 확신하지 못합니다. 관객들은 기도라가 모스라를 보는 순간 기도라가 빌어먹을 나방 계집년이라고 투덜거리는지 확신하지 못합니다. 이렇게 사이언스 픽션을 비롯해 여러 사변 장르(Speculative Fiction)들에서 설정이 뚜렷하지 않기 때문에, 독자가 현실을 참고하지 못하기 때문에, 어떤 사람들은 사이언스 픽션을 싫어할지 모릅니다. 분명히 사이언스 픽션에게 이건 단점, 한계입니다. <고지라: 괴수왕>은 그저 요란한 블록버스터 영화에 불과하나, 훨씬 진지한 사이언스 픽션들에게도 비슷한 단점, 한계가 있습니다.


아무리 하드 SF 소설이 외계 소행성 테라포밍을 이야기한다고 해도, SF 독자는 생태학을 참고하지 못합니다. 만약 하드 SF 소설에서 개조 합성 미생물들이 기초 생태계를 이룩한다면, SF 독자가 생태학을 참고하고 이것을 비판할 수 있나요? SF 독자가 "뭐야! 이건 엉터리야! 어떻게 극악한 외계 환경에서 개조 합성 미생물들이 생존하고 기초 생태계를 이룩할 수 있어?"라고 반박할 수 있나요? 그건 아닐 겁니다. 현실 속에 개조 합성 미생물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만약 하드 SF 소설이 생태학을 너무 거스르지 않는다면, SF 독자는 개조 합성 미생물이 SF 설정이라고 인정해야 합니다.



[사이언스 픽션에게는 커다란 한계가 있습니다. 하지만 왜 많은 사람들이 사이언스 픽션을 좋아하나요?]



그래서 독자가 SF 소설을 평가할 때, 독자는 SF 설정 그 자체를 평가하지 못합니다. 독자는 SF 설정 그 자체보다 SF 설정 '배후'를 평가해야 합니다. 그래픽 노블 <시녀 이야기> 표지 문구는 전체주의를 운운합니다. 전체주의는 멍청하고 한심한 단어입니다. 자본주의 사회는 전체주의 사회입니다. 지질학적인 단위에서 산업 자본주의가 행성급 환경 오염을 일으킴에도, 자본주의 사회는 지질학적인 단위의 행성급 환경 오염을 미화하고 왜곡하고 은폐합니다. 사람들은 이런 세뇌를 받아들이고 좀비가 됩니다. 충성스러운 자본주의 좀비로서 사람들은 "탐욕스러운 인류, 인간 중심주의가 자연 환경을 파괴한다."고 지껄여댑니다. 자본주의 사회는 너무 억압적이고 악랄한 전체주의입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자본주의가 자유롭다고 떠듭니다. 이건 정말 우스꽝스러운 착각입니다. 자본주의가 억압적이고 악랄한 전체주의임에도, 사람들은 전체주의가 나쁘다고 말하고, 동시에 사람들은 자본주의가 자유롭다고 좋아합니다. 그래서 전체주의라는 개념은 모순입니다. 사실 전체주의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전체주의가 존재하지 않음에도, 그래픽 노블 <시녀 이야기> 표지 문구는 전체주의를 운운합니다. 보수 우파 지식인들이 전체주의라는 용어를 퍼뜨리기 때문입니다. 자본주의 만만세를 외치기 위해 보수 우파 지식인들은 존재하지 않는 것을 퍼뜨립니다. 그래픽 노블 <시녀 이야기> 표지 문구는 이런 세뇌를 충성스럽게 따르고 멍청하고 한심한 단어 전체주의를 운운합니다.



아무리 길리아드가 사변 소설 설정이라고 해도, 전체주의는 멍청하고 한심한 단어입니다. 그래픽 노블 <시녀 이야기>는 억압과 세뇌를 비판하는 것 같으나, 그래픽 노블 표지 문구는 세뇌를 충성스럽게 따릅니다. 억압과 세뇌를 비판하는 그래픽 노블조차 억압과 세뇌를 충성스럽게 따르는 것처럼, 자본주의는 억압과 세뇌입니다. 길리아드가 무슨 사회이든, 이렇게 독자는 그래픽 노블 표지 문구 '배후'가 문제라고 비판할 수 있습니다. 독자는 길리아드 설정 그 자체보다 '배후'를 비판할 수 있습니다. 독자가 길리아드 설정 그 자체를 평가하기 원한다고 해도, 현실 속에서 길리아드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이건 쉽지 않거나 불가능합니다.


주류 문학 설정에게도 배후가 있으나, 사이언스 픽션이 소행성 테라포밍과 엄마 거대 괴수 같은 비일상적인 것들을 이야기하기 때문에, 사이언스 픽션에서 '배후'는 훨씬 두드러집니다. 어떤 사람들에게 이런 배후 문제는 단점, 한계가 될지 모릅니다. 하지만 사이언스 픽션에 이런 단점, 한계가 있음에도, 사이언스 픽션은 주제를 과장하고 극적으로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사이언스 픽션은 이른바 과학, 계몽, 이성, 진보가 무엇인지 극적으로 강조할 수 있습니다. 관객들은 머나먼 과거에 모스라가 기도라에게 실을 뿜었는지 확신하지 못하나, 그렇다고 해도 모스라는 자연 생태계와 산업 폐기물을 과장하고 극적으로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하드 SF 독자는 극악한 외계 환경에서 개조 미생물들이 생존할지 확신하지 못하나, 그렇다고 해도 외계 소행성 테라포밍은 자연이 고정적인 개념이 절대 아니라고 과장하고 극적으로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하드 SF 소설이 소행성 테라포밍을 말하지 않는다고 해도, SF 독자는 자연이 고정적이지 않다고 생각할 수 있고 진보와 과학을 고민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외계 소행성 테라포밍 덕분에, 이런 고민은 훨씬 깊어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이언스 픽션에 한계가 있다고 해도, 사람들은 사이언스 픽션을 좋아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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