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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쥬라기 공원>의 티라노사우루스 그림과 문학 해석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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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쥬라기 공원>의 티라노사우루스 그림과 문학 해석

OneTiger 2019. 3. 29. 20:10

[애석하게도 철수는 잘못 해석했습니다. 하지만 정말 철수가 잘못했나요? 무엇이 근본적인 해석인가요?]



철수: 영희야, 소설 <쥬라기 공원>의 표지 그림은 티라노사우루스 골격이야. 이건 1917년에 헨리 오스본이 출판한 골격 그림과 비슷해. 1917년이 무슨 연도이지? 1917년에는 위대한 러시아 사회주의 혁명이 있어! 왜 소설 <쥬라기 공원>이 다른 연도가 아니라 1917년 헨리 오스본 골격 그림을 표지 그림에 넣었을까? 사실 티라노사우루스는 '쥬라기' 공룡이 아니야. 티라노사우루스는 백악기 공룡이야. 게다가 1917년 헨리 오스본 골격 그림은 구닥다리 복원이야. 이 골격 그림에서 티라노사우루스는 뻣뻣하게 직립 보행해.


소설 속에서 티라노우루스는 허리를 수평으로 세우나, 헨리 오스본 골격 그림에서 고지라처럼 티라노사우루스는 뻣뻣하게 서있어. 왜 <쥬라기 공원>이 소설 표지에 이런 모순적인 그림을 집어넣었지? 왜 <쥬라기 공원>이 '1917년 그림'을, '백악기 공룡' 티라노사우루스를, '구닥다리 복원 그림'을 집어넣었지? 작가 마이클 크라이튼은 공룡 사파리를 비판하기 원했어. 그래서 마이클 크라이튼은 의도적으로 모순적인 그림을 집어넣었지. 공룡 사파리가 모순적이기 때문에, '쥬라기' 공원에는 '백악기' 공룡이 있어. 러시아 사회주의 혁명은 자본주의를 비판하고, 소설 <쥬라기 공원>은 상업화된 과학 기술을 비판해. 어때, 영희야? 모든 것이 맞아떨어지지?



영희: 어, 글쎄…. 다른 공룡 매체들처럼, 소설 <쥬라기 공원>은 그저 유명한 티라노사우루스를 이용하고 싶었을 뿐이야. 나는 그렇다고 생각해. 정말 마이클 크라이튼이 1917년 사회주의 혁명을 상징하고 싶었을까? 물론 소설 <쥬라기 공원>은 상업화를 비판해. 마르크스주의가 상품화를 강렬하게 비판하는 것처럼, 소설 <쥬라기 공원>은 상업화를 비판해. 하지만 <쥬라기 공원>은 그저 자본주의 시장 경제보다 훨씬 국지적인 상업화를 언급할 뿐이야. 자본주의 사회에서 사람들은 자본주의가 문제라고 제대로 인식하지 못해. 자본주의 체계가 사람들을 세뇌하기 때문이야.


이른바 제도권 교육은 자본주의 노예들을 양산하는 과정이야. 마이클 크라이튼 역시 이런 한계를 넘지 못했고, 그래서 <쥬라기 공원>은 사회 구조적인 문제를 근본적으로 비판하지 못해. 만약 인류 문명이 자본주의 경제를 타파한다면, <쥬라기 공원> 같은 소설들은 줄어들 거야. 나는 이런 해석이 훨씬 논리적이라고 생각해. 너는 오직 표지 그림에만 집착할 뿐이야. 그건 너무 제한적인 해석이야. 너는 비단 표지 그림만 아니라 전반적으로 소설과 소설이 파생하는 과정을 살펴야 해. 철수야, 나는 너를 좋아…, 아니, 나는 네 해석을 존중하고 싶으나, 너는 너무 멀리 나간 것 같아.



네, 영희가 맞습니다. 철수는 너무 멀리 나간 것 같습니다. 분명히 소설 <쥬라기 공원>은 1917년 골격 그림을 표지 그림에 집어넣었습니다. 1917년에는 러시아 사회주의 혁명이 있었습니다. 소설 <쥬라기 공원>은 상업화된 과학 기술에 반대합니다. 상업화된 과학 기술은 자본주의 시장 경제에 기반합니다. 러시아 사회주의 혁명은 상업화된 과학 기술을 맹렬하게 비판할 겁니다. 로자 룩셈부르크나 블라디미르 레닌은 인젠 회사를 좋아하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마이클 크라이튼이 정말 러시아 사회주의 혁명을 상징하기 원했을까요?


철수는 과감하게 추측했으나, 애석하게도 결정적인 근거는 없습니다. 아무리 표지 그림 티라노사우루스가 1917년 그림이라고 해도, 이건 그저 우연에 불과할 겁니다. 소설 <쥬라기 공원>은 유전 공학 회사들을 부정적으로 묘사하나, 로자 및 레닌과 달리, <쥬라기 공원>은 자본주의 그 자체를 지적하지 않습니다. 이 소설은 그저 회사들이 상도를 지켜야 한다고 투덜거릴 뿐입니다. 로자와 레닌이 공룡 사파리에 들린다면, 두 사람은 훨씬 치밀하고 맹렬하게 자본주의 시장 경제를 분석하고 비판할 겁니다. <쥬라기 공원>은 그렇지 않습니다. <쥬라기 공원>이 러시아 사회주의 혁명을 긍정한다는 결정적인 근거는 없습니다.



철수는 또 다른 사실을 지적할지 모릅니다. 분명히 공룡 사파리 이름이 '쥬라기' 공원임에도, <쥬라기 공원>은 '백악기' 티라노사우루스 골격을 표지 그림에 집어넣었습니다. 왜 <쥬라기 공원>이 티라노사우루스를 표지 그림에 집어넣었을까요? 철수는 이게 쥬라기 공원이 모순적이라는 상징이라고 해석했습니다. 어쩌면 정말 마이클 크라이튼은 그걸 노렸을지 모릅니다. 공룡 사파리가 모순적이라고 보여주기 위해, 마이클 크라이튼은 의도적으로 '백악기' 공룡 티라노사우루스를 '쥬라기' 공원 표지 그림에 집어넣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이건 그저 우연에 불과한지 모릅니다. 예전부터 티라노사우루스는 공룡 아이돌이었고, 장난감부터 다큐멘터리까지, 온갖 공룡 매체들은 티라노사우루스를 내세웠습니다. 소설 <쥬라기 공원>은 그런 관례를 따랐을 뿐인지 모릅니다. 철수는 자신이 굉장한 사실을 발견했다고 의기양양하나, 철수는 헛다리를 짚었을 겁니다. 사실 철수 이외에 다른 독자들 역시 왜 <쥬라기 공원>이 '백악기' 공룡을 표지 그림에 집어넣었는지 궁금해합니다. 하지만 이런 독자들 역시 커다란 상징이 없을 거라고 추측합니다. 이건 그저 우연에 불과할 겁니다. 티라노사우루스가 유명하기 때문에, 소설은 아무 생각 없이 티라노사우루스 그림을 집어넣었을 겁니다.



철수와 영희에게는 간단한 방법이 있습니다. 만약 철수와 영희가 표지를 디자인한 화가에게 묻는다면, 철수와 영희는 정답을 알 수 있을 겁니다. 다행히 표지를 디자인한 화가 칩 키드는 어떻게 자신이 티라노사우루스 골격 그림을 만들었는지 밝혔습니다. TED 강연을 참고한다면, 영희와 철수는 이유를 알 수 있을 겁니다. 그리고 칩 키드는 그저 멋진 골격 그림을 골랐을 뿐입니다. 칩 키드는 사회주의 혁명 따위를 염두에 두지 않았어요. 영희와 철수는 TED 강연을 보고 표지 그림이 그저 우연에 불과하다고 깨달을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언제나 운이 좋을 수 있나요? 소설 <쥬라기 공원>은 아주 유명합니다. 그래서 영희와 철수는 여러 일화들을 찾을 수 있어요. 하지만 소설 <쥬라기 공원>이 별로 유명하지 않았다면? 칩 키드가 TED 강연에 나오지 않거나 표지 디자인 비화를 함구했다면? 아니, 심지어 칩 키드가 진실을 이야기하지 않았다면? 어쩌면 칩 키드와 마이클 크라이튼은 서로 짜고 1917년 골격 그림을 사용했을지 모릅니다. 누가 아나요? 칩 키드와 마이클 크라이튼이 진실을 말했다고 누가 완벽하게 장담할 수 있나요? 사실 많은 작가들은 자신들의 문학들을 일부러 왜곡하거나 자세히 밝히지 않습니다.


실비아 플래스는 자신의 시가 그저 골동품 수집을 묘사했을 뿐이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문학 평론가들은 실비아 플래스가 정말 골동품 수집을 묘사했을 거라고 믿지 않을 겁니다. 토마스 스턴스 엘리엇은 <황무지>가 그저 투덜거리는 운율에 불과하다고 말했으나, 문학 평론가들은 <황무지>가 엄청난 걸작이라고 호평합니다. 문학을 비평할 때, 문학 평론가는 작가에게 너무 의존하지 말아야 할 겁니다.



철수는 꽤나 기발하게 <쥬라기 공원>을 해석했습니다. 분명히 철수에게는 논리적인 근거가 있습니다. 문제는 논리적인 근거가 너무 제한적이라는 사실입니다. 만약 소설 속에서 등장인물들이 로자 룩셈부르크나 블라디미르 일리치 레닌을 강하게 언급했다면, 철수는 훨씬 설득력을 얻을 수 있을 겁니다. 만약 소설 속에서 등장인물들이 왜 '쥬라기' 공원에 '백악기' 공룡들이 있는지 물었다면, 많은 독자들은 철수에게 동의할 겁니다. 하지만 소설 속에는 철수를 뒷받침하기 위한 근거가 없습니다. 철수는 오직 표지 그림만 이용해 해석했을 뿐입니다. 철수는 전반적으로 해석하지 못하고 너무 작은 부분에 매달렸습니다.


독자가 오직 특정한 부분에만 초점을 맞춘다면, 이건 너무 제한적인 해석이 되거나 설득력을 잃거나 심지어 오류에 빠질지 모릅니다. 장편 소설에는 수많은 서술 문장들과 대사들이 있습니다. 독자는 이것들 중에서 하나를 고르고 이 대사에 특정한 가치를 부여할 수 있습니다. 소설 속에서 아이언 말콤은 엘리 새틀러의 각선미가 예쁘다고 칭찬합니다. 어떤 독자는 이 대사를 이용해 <쥬라기 공원>이 로맨스 장르라고 우길지 모릅니다. 하지만 이건 너무 제한적인 해석입니다. 아이언 말콤은 엘리 새틀러에게 관심이 없습니다. 예쁘다는 칭찬은 그저 인사에 불과합니다. 소설 속에서 언제나 아이언 말콤은 상업화된 과학 기술과 존 해먼드를 까느라 바쁩니다.



철수는 자신이 소설 <쥬라기 공원>을 해석한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이건 해석보다 제한적인 가치 부여에 가깝습니다. 철수는 티라노사우루스 표지 그림에 특정한 가치를 부여했습니다. 1917년이라는 연도에 별로 가치가 없음에도, 철수는 1917년에 매달렸고 이걸 이용해 소설을 해석했습니다. 철수는 열정적인 마르크스-레닌주의 지지자인지 모릅니다. 그래서 열정적인 마르크스-레닌주의자로서 철수는 자신의 사상을 소설에 집어넣기 원했을 겁니다. 이건 논리적인 해석을 방해합니다. 수많은 사람들에게는 특정하고 독특한 세계관들이 있고, 그들은 이런 특정하고 독특한 세계관들을 이용해 소설을 해석하고 싶어합니다. 그래서 소설이 하나라고 해도, 해석들은 수 백 가지가 될 수 있습니다.


작가가 이걸 막고 싶다고 해도, 작가는 막지 못할 겁니다. 작가는 그저 소설을 세상에 내놓고 결과를 지켜볼 뿐입니다. 작가가 수많은 해석들을 막고 싶다고 해도, 독자들은 작가에게 상관하지 않을 겁니다. 많은 독자들은 작가를 이용해 소설을 해석하나, 작가는 소설을 해석하기 위한 유일한 도구가 아닙니다. 심지어 작가는 소설과 대립할지 모릅니다. 많은 사람들은 가수 데이빗 보위의 성적 선호가 무엇인지 논의하곤 합니다. 데이빗 보위를 둘러싼 논의들은 다양합니다. 그리고 이런 성향은 무대 공연들과 의상들에 영향을 미쳤는지 모릅니다. 어떤 사람들은 데이빗 보위가 그저 상업적으로 양성애를 활용했을 뿐이고 그저 이성애자에 불과하다고 말합니다. 이게 사실인가요?



어떤 데이빗 보위 팬들은 데이빗 보위가 동성애에 취했기 때문에 멋진 퍼포먼스들이 나타났다고 믿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데이빗 보위가 이런 사실을 부인한다면? 데이빗 보위가 양성애나 동성애를 부인한다면, 뭐라고 팬들이 생각해야 하나요? 어디까지 팬들이 데이빗 보위를 믿어야 하나요? 정말 데이빗 보위가 성적 선호 발언들을 후회하나요? 아니면 이게 그저 형식적인 부정에 불과한가요? 데이빗 보위를 둘러싼 소문들이 사실인가요? 정말 성적 선호가 글램 록 퍼포먼스에 영향을 미쳤나요? 데이빗 보위가 글램 록 시절을 싫어하나요? 정답은 분명하지 않습니다.


어떤 팬들은 이게 중요하지 않다고 간주할 겁니다. 데이빗 보위가 동성애에서 영향을 받았든 그렇지 않든, 분명히 데이빗 보위는 환상적인 퍼포먼스들을 남겼고, 엄청난 패션들을 주도했고, 새로운 장을 열었습니다. 솔직히 중요한 것은 이런 무대 공연들과 패션들입니다. 데이빗 보위가 동성애를 긍정하거나 부정한다고 해도, <Hero>나 <Life On Mars>나 <Under Pressure>는 환상적인 노래입니다. 하지만 동성애를 힐난하는 성 차별론자들은 이게 마음에 들지 않을지 모릅니다. 프레디 머큐리가 성 소수자였기 때문에, 일부 동성애 차별론자들이 <Bohemian Rhapsody>를 죽어라 까는 것처럼. 이런 사람들은 노래로서 노래를 평가하지 않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엉뚱한 사실을 노래에 덧붙이고 노래를 힐난합니다.



이런 평론은 평론보다 비난에 가깝습니다. 동성애 차별론자들은 <Bohemian Rhapsody>보다 그저 동성애를 욕하기 원할 뿐입니다. 프레디 머큐리가 아주 유명하기 때문에, 프레디 머큐리는 그저 표적이 되었을 뿐입니다. 만약 데이빗 보위 팬들이 너무 양성애 발언에 치중한다면, 데이빗 보위 팬들은 비슷한 함정에 빠질지 모릅니다. 양성애는 글램 록에 영향을 미쳤는지 모릅니다. 아니면 이건 영향을 미치지 않았는지 모릅니다. 데이빗 보위 팬들이 오직 여기에만 몰두한다면, 그들은 훨씬 폭넓은 평가와 해석을 놓칠 겁니다. 문학 작가 역시 별로 다르지 않습니다.


문학 작가와 문학 사이에는 특별한 관계가 없을 수 있습니다. 서정주는 뛰어난 시인입니다. 동시에 서정주는 거대 권력의 나팔수입니다. 어떤 독자들은 어떻게 시 <화사>가 거대 권력을 찬양하는지 분석하기 원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아무리 서정주가 권력의 앞잡이라고 해도, <화사>는 그저 자극적인 언어들을 이용해 원초적인 감성을 노래할 뿐입니다. <화사>에서 독자가 관능적인 매력과 욕정을 찾는다면, 이런 해석에는 커다란 무리가 없을 겁니다. 하지만 독자가 "스며라! 배암"이 독재 정부에 충성하는 뜻이라고 해석한다면, 여기에는 논리적인 근거가 없을 겁니다. 따라서 독자들이 작가에게 너무 의존한다면, 독자들은 오류에 빠질지 모릅니다.



이건 독자가 작가를 이용해 해석하지 말아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소설을 해석할 때, 작가는 아주 중요한 도구입니다. 독자가 소설 모음집 <바람의 열두 방향>을 읽는다면, 독자는 어슐라 르 귄이 다카기 마사오 같은 수구 꼴통을 찬양할 거라고 기대하지 않을 겁니다. 독자가 소설 <뉴욕 2140>을 읽는다면, 독자는 킴 스탠리 로빈슨이 자연 생태계 변화와 자본주의 문제를 중시할 거라고 기대할 겁니다. 가부장적인 지식인들은 페미니즘 이론이 오직 섹스에만 매달린다고 머저리 같은 헛소리들을 나불거립니다. 이런 상황에서 독자는 조안나 러스 소설들을 읽고 격려를 느낄 수 있을 겁니다. 작가들은 꾸준히 특정한 주제들을 탐구합니다. 독자가 소설을 해석할 때, 작가의 세계관은 아주 중요한 도구입니다.


중요한 것은 독자가 제한적인 부분에 집착하지 말아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대사 한 줄, 표지 그림 하나, 작가의 어떤 발언…. 독자가 여기에 특정한 가치를 부여하고 오직 이것만으로 소설을 해석한다면, 그건 한계에 부딪힐 겁니다. 독자는 총체적으로, 전반적으로 소설을 해석해야 합니다. 사실 이건 상식에 가깝습니다. 하지만 수많은 독자들은, 심지어 문학 평론가들조차 총체성을 버리고 좁은 해석에 빠지곤 합니다. 어쩌면 그들은 소설을 해석하기 원하지 않는지 모릅니다. 그들은 이미 정답을 정하고 소설 속에서 정답을 찾고 싶어하는지 모릅니다. (이미 그들이 지정한) 정답을 찾기 위해, 독자들과 문학 평론가들은 소설을 해석하는지 모릅니다.



이런 해석은 정말 '답정너' 해석이 됩니다. 이미 정답은 정해졌습니다. 이미 정답이 정해졌기 때문에, 사람들은 소설을 파악하지 않고 소설에서 정답을 끌어내기 원합니다. 이런 노력은 집착입니다. 이건 해석보다 집착입니다. 소설 <쥬라기 공원>이 러시아 사회주의 혁명을 나타낸다고 철수가 해석했을 때, 이미 철수는 정답을 정했는지 모릅니다. 철수는 열정적인 마르크스-레닌주의자이고, 그래서 철수는 <쥬라기 공원>에게서 러시아 사회주의 혁명을 끌어내기 원했을 겁니다. 철수가 마르크스-레닌주의에 너무 심취했기 때문에, 마르크스-레닌주의는 색안경이 되고, 철수는 이런 색안경으로 1917년 티라노사우루스 골격 그림을 바라봤을 겁니다.


철수에게 마르크스-레닌주의는 정답입니다. 이미 철수는 마르크스-레닌주의라는 정답을 정했습니다. 정답을 이야기하기 위해 철수는 1917년 티라노사우루스 골격 그림을 언급했습니다. 이건 해석이 아닙니다. 이건 집착입니다. 소설 <쥬라기 공원>이 유명하기 때문에, 철수는 그저 유명한 SF 소설을 이용해 마르크스-레닌주의를 떠들고 싶었을 뿐인지 모릅니다. 철수는 사소한 사례가 아닙니다. 철수처럼, 수많은 사람들은 정답들을 이끌어내고 싶어합니다. 인간에게는 특정한 세계관이 있고, 인간은 특정한 세계관을 증명하고 싶어합니다. 문학은 수많은 해석들을 낳을 수 있고, 그래서 인간은 문학을 이용해 특정한 세계관을 증명합니다.



여기에서 문제는 문학이 진실을 모두 말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문학은 모든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김유정이 쓴 단편 소설 <동백꽃>은 점순이가 소설 주인공을 사랑한다고 이야기합니다. 일반적으로 문학 평론가들은 <동백꽃>이 연애 이야기라고 해석합니다. 이게 정말입니까? 정말 소설 <동백꽃>이 연애 이야기입니까? 사실 <동백꽃>에서 점순이는 소설 주인공에게 "나는 너를 사랑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점순이는 사랑한다고 고백하지 않습니다. 점순이는 연이어 소설 주인공을 괴롭힙니다. 따라서 철수는 반박할 겁니다. "사랑? 아, 웃기는 소리하네. 점순이는 사랑한다고 말하지 않았어!"


네, 맞습니다. 점순이는 사랑한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동백꽃>은 연애 이야기가 아닙니다. <동백꽃>은 상위 계급이 하위 계급을 괴롭힌다고 이야기합니다. 김유정은 점순이(상위 계급)와 소설 주인공(하위 계급)을 이용해 사회적인 부조리를 고발하고 싶었을 겁니다. <동백꽃>은 지주가 소작농을 괴롭힌다고 고발합니다. 소설 주인공은 점순이에게 저항하기 원합니다. 이건 계급 투쟁입니다. 소설 주인공은 프롤레타리아 계급에 속하지 않으나, 그렇다고 해도 열정적인 마르크스-레닌주의자 철수는 <동백꽃>에게서 치열한 계급 투쟁을 느낄 겁니다. 철수는 소설 주인공(하위 계급)이 점순이(상위 계급)에게 반기를 들고 혁명을 외치기 원할 겁니다. 김유정은 나로드니키 계급 혁명을 바랐을지 모릅니다.



소설 <동백꽃> 마지막 부분에서 점순이와 소설 주인공은 동백꽃밭으로 넘어집니다. 소설 주인공은 아찔한 향기에 취합니다. 문학 평론가들은 이게 키스나 애무나 섹스를 뜻한다고 해석합니다. 하지만 정말 이게 애무인가요? 철수는 반박할 겁니다. "뭐? 애무? <동백꽃>은 소설 주인공이 점순이의 젖가슴을 더듬거나 점순이와 소설 주인공이 키스한다고 말하지 않아. 왜 이게 애무야? 점순이는 그저 발을 헛디뎠을 뿐이야. 주변이 꽃밭이기 때문에, 소설 주인공은 그저 아찔한 향기를 맡았을 뿐이야. 왜 문학 평론가들이 소설이 말하지 않는 것들을 억지로 갖다붙이지?" 철수의 반박에는 근거가 없지 않습니다.


철수가 지적하는 것처럼, 소설 <동백꽃>은 주인공이 점순이의 젖가슴을 더듬거나 점순이와 주인공이 키스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너 말하지 마!"라는 대사는 은밀한 섹스가 아니라 죽은 닭을 가리킬 겁니다. 소설 속에 애무나 섹스를 표현하는 서술들이 없음에도, 왜 문학 평론가들은 점순이와 주인공이 애무하거나 심지어 섹스한다고 해석하나요? 점순이가 사랑한다고 고백하지 않았음에도, 왜 문학 평론가들이 <동백꽃>을 풋풋한 연애 이야기라고 해석하나요? 만약 정말 <동백꽃>이 연애 이야기라면, 점순이와 소설 주인공이 예쁘게 사랑할 수 있을까요? 점순이는 상위 계급이고, 소설 주인공은 하위 계급입니다. 두 사람이 계급 차별을 뛰어넘을 수 있을까요?



소설 마지막 부분에서 점순이(상위 계급)는 아래로 내려가고 소설 주인공(하위 계급)은 위로 올라갑니다. 어머? 왜 상위 계급이 아래로 내려가고 하위 계급이 위로 올라가나요? 이게 두 사람이 계급 차별을 뛰어넘는다는 뜻인가요? 아니면 두 사람이 헤어지기 때문에, 이게 두 사람의 앞날이 순탄하지 못할 거라는 암시인가요? 소설 속에서 점순이와 소설 주인공은 두 닭을 죽어라 괴롭힙니다. 이건 정말 동물 학대입니다. 동물을 사랑하는 앨런 그랜트 박사가 이런 광경을 본다면, 그랜트 박사는 크게 분노할지 모릅니다. 어쩌면 <동백꽃>은 학대를 당하는 수컷 닭을 이용해 동물 권리를 부르짖는지 모릅니다. 점순이와 소설 주인공은 동물들을 괴롭히는 천하의 소시오패스일 겁니다.


김유정은 동물들을 괴롭히는 두 소시오패스를 맹렬하게 비판하기 원했을지 모르죠. 물론 이런 해석들은 그저 농담에 불과합니다. 문학 강의 시간에 학생이 이런 평론을 발표한다면, 문학 강사는 높은 점수를 주지 않을 겁니다. 철수는 소설 <동백꽃>이 계급 투쟁 이야기라고 주장하나, 많은 문학 평론가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동백꽃>은 연애 이야기일 겁니다. 점순이는 소설 주인공을 괴롭히나, 이건 점순이가 소설 주인공을 사랑한다는 반증입니다. 점순이는 애정을 구박으로 표현했습니다. 흔히 일본 덕후들은 이런 것을 '츤데레'라고 부릅니다. 소설 초반부에서 점순이는 츤츤츤데레에 가까우나, 소설 마지막 부분에서 점순이는 츤을 버리고 데레로 흘러갑니다.



현실 속에서 우리는 이런 유형들을 많이 구경할 수 있습니다. 사랑이 수줍고 부끄럽기 때문에, 사람들은 사랑을 직설적으로 표현하지 못합니다. 사랑을 표현하기 위해 사람들은 간접적으로 말을 건네거나 선물을 건네거나 구실을 만듭니다. 심지어 이런 구실은 구박이나 괴롭힘이 될 수 있습니다. 영희가 철수에게 숙제를 도와달라고 부탁한다면, 이건 데이트 신청일지 모릅니다. 사랑이 수줍고 부끄러운 감정이기 때문에, 영희는 쉽게 애정을 표현하지 못합니다. 점순이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트와이스 노래 <시그널>은 애타게 외칩니다. "널 보며 웃으면 알아채야지. 오늘만 몇 번째 널 보며 웃는데. 자꾸 말을 걸면 좀 느껴야지. 계속 네 곁에 머물러있는데." 애정 표현은 간접적입니다. 현실 속에서 우리는 그걸 체험합니다. 이런 현실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소설 <동백꽃>에서 점순이가 소설 주인공을 사랑한다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동백꽃>에서 점순이가 직접 고백하지 않는다고 해도, 현실 속에서 우리가 일상을 겪기 때문에, 우리는 점순이가 애정을 표현한다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꽃밭에서 소설 주인공은 아찔한 향기에 취했고, 이건 점순이의 향기로운 살내음인지 모릅니다. 현실 속에서 사람들은 예쁜 여자를 꽃에 비유하고, 그래서 점순이는 꽃향기가 될 수 있습니다.


만약 독자가 현실을 대입하지 않는다면, 오직 <동백꽃>이라는 소설 속에서만 독자가 머무른다면, (철수가 헛다리를 짚는 것처럼) 독자는 점순이가 소설 주인공을 좋아한다고 해석하지 못할 겁니다. 소설 속에서 점순이가 절대 직접 고백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소설은 모든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소설 <동백꽃>은 동백꽃이 생강나무꽃의 사투리라고 절대 말하지 않습니다. 독자가 이걸 알기 원한다면, 독자는 소설 밖으로 나오고 사투리들을 연구해야 합니다. 따라서 독자는 소설에서 벗어나고 소설을 둘러싼 여러 요소들을 바라봐야 합니다. 그때 독자는 '총체적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철수가 1917년 사회주의 혁명을 언급했을 때, 철수는 '총체적으로' 해석하지 못했습니다. 철수가 점순이와 소설 주인공의 계급 투쟁을 언급했을 때, 철수는 '총체적으로' 해석하지 못했습니다. 철수는 제한적인 측면에 너무 몰두했습니다. 철수는 마르크스-레닌주의라는 정답을 이미 정했습니다. 철수는 이런 정답으로 <쥬라기 공원>과 <동백꽃>을 평가했습니다. 동성애 차별론자들이 성 차별로 <Bohemian Rhapsody>를 힐난하는 것처럼, 철수는 제한적인 요소로 소설 전체를 판단하기 원했습니다.


이런 제한적인 해석은 별로 설득력을 얻지 못할 겁니다. 물론 소설 <쥬라기 공원>은 1917년 티라노사우루스 골격 그림과 상업화된 인젠 회사를 이용해 정말 1917년 사회주의 혁명을 상징하고 싶어했는지 모릅니다. 누가 아나요? 표지 그림을 디자인한 화가 칩 키드가 티라노사우루스 골격 그림을 제안했을 때, 마이클 크라이튼은 내심 그게 1917년 사회주의 혁명을 나타낼 거라고 좋아했는지 모릅니다. 누가 마이클 크라이튼의 마음 속에 들어간 적이 있나요? 아무도 없습니다. 아무도 그런 적이 없기 때문에, 우리는 확신하지 못합니다. 심지어 마이클 크라이튼 본인조차 자신의 무의식을 완전히 파악하지 못했을 겁니다.


어쩌면 정말 철수는 옳은지 모릅니다. 어쩌면 정말 <동백꽃>은 연애 이야기가 아닌지 모릅니다. <동백꽃>은 불쌍하게 피를 흘리는 수컷 닭을 동정하는지 모릅니다. 꽃밭에서 소설 주인공은 점순이를 애무하지 않았을지 모릅니다. 숱한 문학 평론가들은 틀리고 철수는 옳은지 모릅니다.



문학 평론가가 소설 <쥬라기 공원>으로 동물 권리를 말할 수 있나요? 이건 가능할 겁니다. <쥬라기 공원>이 생명 윤리를 복잡하게 다루고, 동물 권리 역시 생명 윤리에 들어가기 때문입니다. 이것처럼, 문학 평론가가 소설 <동백꽃>으로 동물 권리를 말할 수 있나요? 이건 다소 어렵습니다. 아이언 말콤이나 엘리 새틀러와 달리, 점순이와 소설 주인공은 동물 권리나 생명 윤리나 비인간 생명에게 관심을 기울이지 않습니다. 소설 <동백꽃>은 닭이 피를 처절하게 흘린다고 묘사하나, 닭을 별로 동정하지 않습니다. <동백꽃>은 닭이 불쌍하다고 직접 말하지 않습니다. 만약 문학 평론가가 <동백꽃>을 이용해 동물 권리를 말하고 싶다면, 문학 평론가는 소설이 속하는 현실을 말해야 합니다.


<쥬라기 공원>은 1990년 미국 소설입니다. 1990년 미국은 1970년대 유럽 녹색 정치를 목격했고 동물 권리를 인식할 수 있었습니다. 반면, <동백꽃>은 1936년 일제 강점기 소설입니다. 이런 암울한 시기에 한반도 사람들은 동물 권리에 쉽게 관심을 기울이지 못했습니다. 1990년 미국에서 하버드 의대 출신은 테크노 스릴러를 대중적으로 쓸 수 있었으나, 1930년대 한반도에서 그건 어려웠습니다. 1930년대 한반도에는 사이언스 픽션들이 없지 않았으나, 아직 사이언스 픽션은 대중적이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현실과 사회 구조는 소설에 커다란 영향을 미칩니다. 현실과 사회 구조는 아주 중요한 생산 조건입니다. 문학 평론가가 소설을 평가하고 싶다면, 문학 평론가는 현실과 사회 구조를 언급해야 합니다.



전아리 작가가 쓴 <한 달간의 사랑>은 10대 성장 소설입니다. 소설 제목은 풋풋한 첫사랑 느낌을 풍기나, <한 달간의 사랑>은 쓰라리고 처절하고 고통스러운 학교 폭력, 집단 따돌림, 일진, 조직 폭력배, 빈곤과 밑바닥 계급, 성 폭행을 이야기합니다. 소설 초반부는 두근거리고 설레는 분위기를 풍기나, 이내 이런 분위기는 날카로운 송곳이 되고 사회적인 부조리들을 푹푹 찌릅니다. 문제는 전아리 작가가 아무도 편들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소설 <한 달간의 사랑>은 절망적이고 암울한 현실 그 자체를 편듭니다. 이 소설은 여러 등장인물들에게 여러 상황들이 있다고 말합니다. 소설은 누군가가 잘했다고 칭찬하거나 누군가가 잘못했다고 탓하지 않습니다. 왜 전아리 작가가 학교 폭력, 집단 따돌림, 일진, 조직 폭력배, 빈곤과 밑바닥 계급, 성 폭행을 늘어놓았을까요? 전아리 작가가 사회 부조리들을 고발하기 원했을까요? 아니면 전아리 작가가 세상이 존나게 좆 같고 개X랄 같다고 한탄하기 원했을까요? 정답은 없습니다. 소설은 그저 보여줄 뿐입니다. 소설은 그저 현실을 반영할 뿐입니다.


하지만 이것 하나는 확실합니다. 폭력적이고 억압적인 자본주의 사회가 있기 때문에, 전아리 작가는 <한 달간의 사랑>을 쓸 수 있었습니다. 자본주의가 무한 입시 경쟁을 부추기기 때문에, 자본주의가 빈곤들을 양산하기 때문에, 자본주의가 오직 돈벌이만 중시하고 연대와 화합을 왜곡하기 때문에, 자본주의가 진정한 교육보다 임금 노예들을 바라기 때문에, 젊은 영혼들은 다치고 병들고 시들고 서러운 눈물을 흘리며 죽어갑니다. 따라서 문학 평론가가 <한 달간의 사랑>을 제대로 평가하고 싶다면, 문학 평론가는 자본주의라는 폭력적이고 억압적인 생산 조건을 말해야 합니다.



하지만 숱한 문학 평론가들은 생산 조건을 말하지 않습니다. 숱한 문학 평론가들은 절대 생산 조건을 말하지 않습니다. 숱한 문학 평론가들은 생산 조건을 입도 뻥긋하지 않습니다. 숱한 문학 평론가들은 생산 조건을 죽어도 입에 올리지 않습니다. 그들은 오직 윤리와 도덕과 선행을 남발하고 민중들을 차별할 뿐입니다. 동성애를 차별하는 수구 세력 할아버지는 민중입니다. 행인을 칼로 찌르는 가난한 흑인 범죄자는 민중입니다. 학교 교육이 입시 경쟁에 치우치고 학생들이 삐뚤어진다고 해도, 삐뚤어진 학생들 역시 민중입니다. 수구 세력 할아버지와 가난한 흑인 범죄자와 탈선한 학생들은 지옥에서 기어올라오는 악마가 아닙니다. 그들은 민중입니다.


가부장적인 자본주의가 계속 폭력들을 휘두르고 사람들을 억압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폭력과 억압을 받아들입니다. 따라서 문학 평론가들은 윤리와 도덕과 선행보다 사회 구조를 말하고 지배 계급을 비판해야 합니다. 하지만 숱한 문학 평론가들은 절대 지배 계급을 비판하지 않습니다. 가부장적인 자본주의 체계 속에서 심지어 문학 평론가들조차 왜곡되고 세뇌를 받기 때문입니다. 가부장적인 자본주의 체계는 비단 문학만 아니라 왜곡된 문학 평론들을 생산합니다. 이렇게 문학 평론가들은 지배 계급의 앞잡이가 됩니다. 사회 구조적인 문제는 너무 복잡합니다. 그렇다고 해도 근본적인 문학 평론은 사회 구조라는 생산 조건을 지적해야 합니다. 아니, 이런 상황 속에서 문학 평론은 훨씬 크게 생산 조건을 외쳐야 할 겁니다.



철수가 마이클 크라이튼의 속마음을 짐작하지 못하는 것처럼, 독자는 문학을 이용해 어느 하나를 확신하지 못합니다. 문학은 유용한 도구가 될 수 있으나, 그 자체로서 문학은 정답이 아닙니다. 문학은 그저 나름대로 현실을 반영하고 모방하고 배치할 뿐입니다. 독자는 문학과 현실 사이에 무슨 관계가 있는지 파악해야 합니다. 철수는 1917년 사회주의 혁명이라는 현실을 인식했으나, 철수는 어떻게 이게 <쥬라기 공원>과 관계를 맺는지 파악하지 않았습니다. 철수보다 영희는 훨씬 총체적으로 해석했습니다. 영희는 어떻게 사회 구조와 작가와 소설이 관계를 맺는지 이야기했습니다.


문학을 함부로 해석하기 전에, 독자는 어떻게 현실이 문학에 영향을 미치는지 인식해야 합니다. 독자가 이런 생산 관계를 외면하고 오직 한쪽에만 집착하거나 이미 정답을 정한다면, 문학 해석은 제한적인 함정을 피하지 못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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