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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 생태주의

존 발리의 성별 개조와 성 평등 운동 본문

감상, 분류, 규정/소설을 읽다

존 발리의 성별 개조와 성 평등 운동

OneTiger 2017. 6. 20. 20:00

<캔자스의 유령>과 <잔상>은 존 발리의 단편 소설 모음집입니다. 이런 단편 모음집을 보면, 그 작가의 일관된 특성이나 공통점이 드러납니다. 그러니까 작가가 좋아하는 소재, 자주 사용하는 설정 등이 있다는 뜻입니다. 어떤 작가들은 수많은 소재에 골고루 관심을 보이지만, 어떤 작가들은 특정한 소재를 계속 변주합니다. 존 발리는 후자 같습니다. 적어도 <캔자스의 유령>과 <잔상>에 실린 단편 소설들은 비슷한 소재들을 다양하게 변주합니다.


그런 소재들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개인적으로 바이오펑크가 눈에 뜨이더군요. 정확히 말하면, 신체 개조라고 해야 하겠죠. 단편 소설들 속에서 신체 개조는 여러 양상으로 나타납니다. 유전자 조작 수준이 있는가 하면, 그냥 겉모습을 변장하는 수준이 있습니다. 얼굴에 플라스틱 가면을 쓰고, 이 가면이 녹고, 얼굴에 들러붙고, 인공 치아를 끼우고, 하는 것들은 변장에 가깝습니다.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수술 이후 무릎이 뒤틀리거나 패드(육구)를 장착하기도 합니다. 심지어 몸 안에 보호막 발생기를 집어넣기까지 합니다.



제일 기괴한 신체 개조는 아마 성별 개조일 겁니다. 존 발리의 소설에서 성별은 더 이상 정체성을 구분하는 기준이 될 수 없습니다. 지구상의 대부분 사람들은 자신이 어떤 특정한 성에 속했다고 생각합니다. 남자, 여자, 그 외의 성으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구분하죠. 그런 성별이 정체성을 이루는 한 요소이고, 때때로 정체성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기도 합니다. 아니, 인류의 절반(남자)이 다른 인류의 절반(여자와 그 외의 성)을 차별하고 아예 자신의 쾌락 수단으로만 바라볼 수 있습니다. 사회적 관계 속에서 그런 정체성 형성을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죠.


하지만 존 발리의 소설들에서 그런 구분은 흐릿해 보입니다. 사람들이 마음대로 성별을 바꿀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런 성별 개조가 손쉬운 기술인지 어려운 기술인지 알 수 없습니다. 소설 속에서 성별 개조가 어렵다는 말은 나오지 않습니다. 하지만 신체 개조 자체가 그리 만만한 것처럼 보이지 않습니다. 따라서 누구나 원할 때마다 성별을 바꾸는 것 같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미 여러 사람들이 성별을 개조한 것처럼 보이고, 소설 주인공 역시 자기 성을 바꿉니다. 이 정도면, 성별은 정체성 형성에 영향을 덜 미치겠죠.



그렇다고 해서 성별 자체가 아예 무의미해지지 않았을 겁니다. 어쨌든 인간은 태어날 때 성별이 있을 테고, (수술을 받기 전까지) 그 성별로 살아갈 테니까요. 어떤 사람들은 '몇 번씩' 여자와 남자를 오고 가지만, 어떤 사람들은 평생 동안 태생적인 성으로 살아갈 겁니다. 여자로 태어났다면 계속 여자로 살아갈 수 있겠죠. 수술을 받지 않은 사람들은 자신의 태생적인 성을 자기 정체성으로 인식할 겁니다. 그런 사람들은 자신이 어떤 성에 속했고, 그 성이 차별을 받을 때 꽤나 분노하겠죠. 그런 사람들은 성 평등 운동을 벌일 겁니다.


당연히 그 성 평등 운동을 둘러싸고, 수많은 논쟁이 벌어지겠죠. 현실의 우리들이 그러는 것처럼요. 하지만 그 논쟁의 양상은 현실과 좀 다를 겁니다. 왜냐하면 수많은 사람들이 성별을 바꿀 수 있으니까요. 누군가는 남자에서 여자로 변하고, 누군가는 여자에서 남자로 변할 겁니다. 아니면 그 외의 성으로 변할 수 있죠. 그런 사람들이 논쟁에 참여한다면, 한쪽 성만 고수한 사람과 달리 좀 더 복합적으로 이야기하겠죠. 그게 어떤 이야기일지 잘 모르겠습니다. 성 평등 운동을 지지할 수 있을까요.



어쩌면 어떤 남자는 여자로 바뀐 이후 여자들의 처지에 공감했을 수 있습니다. 이 남자는 평소 아무렇지 않게 뒷골목을 걸었으나, 여자로 바뀐 이후 함부로 뒷골목을 걷지 못합니다. 이 남자는 평소 사람들이 우글거리는 버스를 아무렇지 않게 탔으나, 여자로 바뀐 이후 함부로 버스를 타지 못합니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 이 남자는 여자들의 처지에 보다 공감할 수 있을지 모릅니다. 치한이 이 (여자로 바뀐) 사람을 추행한다면, 그 사람의 기분이 꽤나 더러울 테니까요. 추행을 당하고도 기분이 나쁘지 않을 사람은 별로 없겠죠.


그 반대 현상도 벌어질 수 있습니다. 어떤 남자가 여자로 바뀐다고 해서 여자들의 처지에 무조건 공감한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게다가 어떤 사람들은 여자들에게 성별을 바꾸라고 요구할 수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여자가 차별을 받는다면, 왜 굳이 여자로서 살아야 하느냐고 물을 수 있습니다. 정말 사회적으로 여자가 약자라면, 여자들이 남자로 변하면 됩니다. 그러면 약자의 위치를 피할 수 있죠. 실제로 그러는 여자들도 있겠죠. 물론 이런 현상은 그리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인권 향상이라는 근본적인 취지를 무시하고, 표면적인 문제만 해결하니까요.



(불새 번역본들 중에서) 성별 개조를 강조하는 대표적인 소설은 <캔자스의 유령>과 <역행하는 여름>입니다. 다른 소설에도 신체 개조 등이 나오지만, <캔자스의 유령>과 <역행하는 여름>은 성별 개조가 주제입니다. <캔자스의 유령>에서 주인공은 남자 혹은 여자로 몇 번 몸을 바꿉니다. <역행하는 여름>에서 주인공에게는 쌍둥이 누나가 있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주인공은 누나의 복제인간입니다. 복제인간이기 때문에 유전자는 똑같습니다. 그저 성별만 다를 뿐이죠.


사실 주인공 남자와 주인공의 누나는 동일 인간이고, 주인공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주인공이 누나를 자신과 똑같은 사람으로만 바라보지 않는 듯합니다. 누나도 마찬가지입니다. 소설을 보면, 누나는 주인공에게 섹스하지 않겠느냐고 물어봅니다. 주인공도 섹스를 원하는 듯합니다. 문제는 조난 상황이었기 때문에 그렇게 하지 못했다는 점입니다. 하지만 조난 상황이 아니었다면, 주인공과 누나는 얼마든지 섹스했을지 모릅니다. 복제인간과 섹스한다면, 자기 자신과 섹스하는 셈일까요. 이 외에도 존 발리의 소설에는 파격적인 섹스들이 몇몇 나옵니다. 저는 이런 섹스가 제일 골 때리더군요.



사람이 이처럼 성별을 바꿀 수 있다면, 그러니까 누나와 남동생이 오빠와 여동생으로 바뀔 수 있다면, 성 평등 운동도 달라질 겁니다. 솔직히 그게 어떤 모습일지 상상이 안 갑니다. 성 차별이 상당히 사라지게 될까요. 사회적 강자가 되고 싶은 여자들이 우르르 남자로 변할까요. 상당수의 남자들이 여자들의 처지를 직접 경험하고 성 평등 운동에 동참할까요. 글쎄요, 알 수 없습니다. 뭔가 분명히 바뀔 것 같은데, 그게 뭔지 알 수 없군요.


솔직히 저는 성 평등에 관한 책을 별로 읽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현재의 성 담론이 어떻게 진행되는지, 무엇이 진짜 문제인지, 성 평등이 무엇을 추구하는지, 어떤 계파가 있는지 전혀 모릅니다. 만약 제가 이런 것들을 알았다면 좀 더 자세한 상상력을 펼칠 수 있겠지만, 그저 둘러보는 것이 한계로군요. 어쩌면 성별 개조는 '기술적으로 성 평등을 이룩'할 수 있을 겁니다. 인간이 쉽게 성별을 바꿀 수 있다면, 성 평등 사회에 한 발 가까워질지 모릅니다. 생산량이 넘쳐나는 공산주의 사회처럼 기술은 유토피아를 이룩할 수 있는 수단이죠. 성별을 바꾸는 사회는 성 평등 사회에 다가설 수 있을지 모릅니다. 언젠가 그런 시절이 올지 모르죠.



하지만 그런 시기가 온다고 해도 문제는 현실이죠. 지금 이 순간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받거나 폭행을 당할 겁니다. 누군가는 목숨이 위급하겠죠. 설사 기술적인 성 평등 사회가 다가온다고 해도 현재의 운동을 멈출 수 없겠죠. 공산주의 사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언젠가 홍수처럼 생산량이 넘쳐흐를지 모릅니다. 그러면 저절로 공산주의 사회가 찾아오겠죠. 또한 재생 에너지가 대규모로 보급되고, 인구가 급속도로 줄어들고, 자본주의 모순이 없어지면, 생물학적 다양성이 크게 늘어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건 머나먼 이야기입니다. 설사 그런 세상이 찾아와도 그건 미래 이야기입니다. 지금 이 순간에는 수많은 빈민들이 굶어죽고, 수많은 생물들이 사라지는 중입니다. 기술적인 성 평등 사회가 미래에 도래한다면 다행(?)이겠으나, 그것과 상관없이 현재의 성 평등 운동은 더욱 커져야만 할 겁니다. 적어도 하나의 목숨을 구할 수 있을 테니까요. 기술은 궁극적으로 인간을 구원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지금 당장은 아닌 것 같습니다.



존 발리 본인이 성 평등에 관심이 많은지 모르겠습니다. 제임스 팁트리 같은 작가는 성 평등 사상의 일환으로 온갖 기발한 설정을 짜냅니다. 개인적으로 <휴스턴, 들리는가?>가 퍽 인상적이었습니다. 하지만 존 발리는 그런 사상 때문에 설정을 짜내는 것 같지 않습니다. 제가 존 발리를 잘 모르기 때문에 함부로 말하기 힘들군요. 하지만 소설 속의 모습을 보면, 존 발리는 성 평등보다 뭔가 획기적이고 파격적인 설정에 관심이 많은 듯합니다.


그리고 성별을 깨부수면, 그건 파격적인 설정으로 이어지기 쉽습니다. 주인공과 누나가 동일 인간의 복제인간이고, 그런 복제인간끼리 섹스한다면, 꽤나 파격적이지 않겠어요. 아마 필립 딕도 이런 생각을 제대로 못했을 걸요. 존 발리 소설에서 아주 가끔 필립 딕의 진한 향기(?)가 풍기기도 합니다. <기억 은행에서의 초과 인출>처럼. 여하튼 존 발리 본인은 성 평등 운동에 관심이 없었을지라도 소설 속의 설정으로 성 평등 사회를 상상해볼 수 있겠죠. 흠, 실제 성 평등 운동가들은 이런 사회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하군요. 나중에 성 평등 강연회에 가서 한 번 물어볼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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