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생태주의
<타임십> - 시간과 지성의 장대한 끝을 향하는… 본문
만약 21세기 현대인이 몇 만 년 전의 인류를 본다면, 뭐라고 생각할까요. 아마 격세지감을 느낄 겁니다. 그 시절, 인류는 육식동물들의 위협에서 안전하지 않았습니다. 질병이 퍼져도 제대로 손을 쓰지 못했죠. 식량이 충분하지 않을 때가 있었고, 그들은 어떻게 지진이나 해일이나 폭설을 해석해야 할지 몰랐습니다. 과거 인류는 사회를 조직하는 방법을 몰랐고, 공간과 시간의 제약을 뛰어넘지 못했습니다. 현대 문명은 전혀 다릅니다.
인류는 이제 육식동물을 별로 걱정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육식동물들이 멸종 위기에 몰렸습니다. 질병은 여전히 인류를 괴롭히지만, 그래도 인류는 천연두 같은 질병을 지구에서 추방했습니다. 인류는 자연 재해를 분석할 수 있고, 어느 정도 대처할 수 있습니다. 현대 문명은 생산량이 넘쳐나기 때문에 멀쩡한 음식을 마구 버립니다. 정보 통신은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상당히 뛰어넘었습니다. 21세기 인간은 지구 반대편의 다른 사람들과 소통할 수 있어요. 사실 고대 인류와 현대 인류는 완전히 다른 동물 같습니다. 두 인류의 생물적 특성은 똑같다고 해도 기술 및 사회적 격차가 너무 크기 때문입니다. 현대인이 고대인을 본다면, 몇 만 년의 아득한 느낌을 받겠죠.
스티븐 백스터의 <타임십>은 그런 아득한 소설입니다. 머나먼 미래를 바라보고, 그저 미래뿐만 아니라 다른 차원을 바라보고, 그래서 독자는 초연하고 관조적인 사상에 빠집니다. 그런 초연함은 현대인과 원시인의 격차만큼, 아니, 그것보다 훨씬 까마득합니다. 원시인들은 육식동물의 송곳니를 두려워했으나, 현대인은 외계 생명체를 기대합니다. 원시인의 삶은 현대인과 너무 다르고, 원시인의 고난은 현대인에게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원시인들은 힘겨운 나날을 헤쳐나갔으나, 그들 때문에 비통해하거나 울부짖는 현대인은 없습니다. 원시인들의 고난은 현대인에게 그저 역사적 이야기에 지나지 않습니다.
자신의 몇 세대 선조에게 공감하는 사람들은 많겠으나, 원시인들의 고난에 공감하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겁니다. 원시인들을 위해 추모회를 열거나 거리에서 시위하거나 기념일을 제정하는 경우는 없습니다. 그들은 이미 흘러간 과거입니다. 아득한 과거입니다. 솔직히 원시인들의 몸부림이 현대인에게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네안데르탈인이 멸종했다고 해서 누가 기념일을 제정하거나 추모회를 여나요. 하지만 원시인들은 분명히 우리의 선조이고, 그들이 험난한 과정을 이기지 못했다면, 우리 역시 존재할 수 없었을 겁니다.
<타임십>은 전반적으로 이런 것들을 논의합니다. 이 소설은 허버트 웰즈가 쓴 <타임 머신>의 속편을 자처하고, 그래서 <타임 머신>의 마지막 부분에서 다시 시작합니다. 시간 여행자는 동료들에게 놀라운 모험담을 들려줬으나, 다시 한 번 시간 속으로 모험을 떠납니다. 원작 소설에서 시간 여행자의 행방은 오리무중이지만, 스티븐 백스터는 그 이후의 이야기를 이어갑니다. 하지만 스티븐 백스터의 야심은 허버트 웰즈의 목적과 크게 다른 듯합니다. 본래 허버트 웰즈는 <타임 머신>에서 비관적이고 음울한 미래 하나만을 강조했습니다.
허버트 웰즈는 아무리 인류 문명이 회려해도 결국 언젠가 멸망할 거라고 봤습니다. 웰즈는 모든 생물들이 멸망하고 인류 역시 다르지 않을 거라고 예상했습니다. 인류의 지성은 놀랍지만, 그 빛은 언젠가 꺼지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시간 여행자는 모든 것들이 멸망한 세상을 떠돌았고, 웰즈는 계속 적막하고 기이한 미래를 보여줍니다. 하지만 백스터는 다릅니다. 백스터는 빅뱅의 순간부터 지구 형성을 거쳐 생명의 진화와 인류 문명의 발달을 보여주기 원했습니다. 비단 인류만 아니라 인류의 후손이나 다른 지적 존재들의 사회를 보여주기 원했습니다.
백스터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습니다. 서로 다른 종족들의 미래와 사회에서 그치지 않았고, 다른 차원들을 서로 연결하고 시간의 경계를 넘고 지성이 어디까지 도달할 수 있는지 논합니다. <타임십>은 그저 단순한 시간 여행이나 타임 패러독스 이야기가 아닙니다. 시간이 흐르면 언젠가 모든 것은 끝에 도달하기 마련이고, 백스터는 그 끝이 무엇인지 의문을 품습니다. 그리고 지성이 과연 그 끝을 돌파하고 무한 그 자체에 도달할 수 있을지 알아봅니다. 수많은 SF 소설들이 세상을 뒤집고 우주를 돌파하고 인식의 한계에 다가가지만, 이 소설만큼 지성 그 자체의 끝까지 무한히 돌파하는 경우는 드물 듯합니다.
백스터의 설정과 상상력에 동의하지 않더라도 아마 무한 그 자체를 묘사하는 필력은 누구나 탄복하게 할 겁니다. 솔직히 머리가 어질어질합니다. 필력 역시 대단하지만, 작가의 시선은 그보다 훨씬 더합니다. 백스터는 더욱 머나먼 미래를 향하고 끝내 미래의 미래와 과거의 과거를 향합니다. 사실 시간을 여행할 수 있다면, 왜 특정 시기에만 매달려야 할까요. 끝의 끝까지 계속 나갈 수 있지 않겠습니까.
어쩌면 이렇게 너무 멀리 바라보기 때문에 <타임십>은 가까운 것들을 놓칠 수 있었을지 모릅니다. 너무 멀리 보면, 가까운 것들을 놓칠 수 있죠. 하지만 이 소설은 무궁무진한 끝을 향해 질주하는 동시에 인간들의 작은 삶이나 일상을 놓치지 않습니다. 이 소설은 거의 교대로 인간과 인간 이외의 지적 존재를 논의합니다. 다른 종족의 세계를 보여주고, 그 다음 인간 세계를 보여주고, 다시 다른 종족의 세계를 보여줍니다. 그럴 때마다 인간의 세상과 다른 종족의 세상은 너무 커다란 차이를 드러냅니다.
이 소설은 인간의 미래를 그리 낙관하지 않는 듯합니다. 다른 종족들은 광활하고 평등한 세상을 구축했고, 무한한 끝을 향해 손을 내밉니다. 저마다 차이는 있으나, 다른 종족들은 눈 앞의 물욕이나 단기적인 전쟁보다 지성의 끝없는 질주와 영원불멸한 탐구심을 불태웁니다. 하지만 인류는 그들과 다릅니다. 시간대에 따라 여러 인류 문명이 나타나지만, 인류 문명은 모두 단기적인 이익에만 매달립니다. 물론 백스터는 사소한 인간미에 희망을 걸지만, 인류의 전반적인 초상화는 그리 밝지 않군요.
개인적으로 꽤나 마음에 들었던 것은 미래의 사회주의 공동체입니다. 내용 누설 때문에 자세히 밝힐 수 없으나, 이 종족들은 일종의 사회주의 유토피아를 이뤘습니다. 흠, 유토피아라고 불러야 할까요. 아마 다른 독자들은 이 종족들의 문명이 기괴하다고 생각할지 모르겠으나, 저는 이게 유토피아라고 생각합니다. 최소한 이들은 계급을 차별하지 않고 아무도 고통에 빠뜨리지 않고 서로 조화를 이룹니다. 이들은 모든 것을 사회적으로 소유합니다. 심지어 이들은 자기 집이나 자기 주거지라는 관념조차 없습니다. 그래서 탁 트인 공간에서 엄청난 이들이 한꺼번에 살고, 사생활이나 자기만의 공간 등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모든 것이 개방되고 공유됩니다. 사회적이든 생물적이든. 물론 이런 사회주의 공동체를 당장 인류 문명에 적용할 수 없겠죠. 소설 속의 사회주의 공동체는 엄청난 기술을 발달시켰고, 현대 인류는 그 기술 근처에도 다가가지 못합니다. 사실 저 종족이 그렇게 잘 사는 이유는 그들이 평등 사상을 존중하기 때문이 아니라 기술이 모두를 먹여살리기 때문일 겁니다. 이안 뱅크스의 컬처 세력과 비슷하다고 할까요. 그래도 저는 이렇게 광범위한 사회적 소유가 정말 부럽습니다. 현대 인류가 이것의 10%만 실현한다면, 기후 변화 같은 아주 심각한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테죠.
이런 광범위한 상상력이나 설정과 별개로 각종 오마쥬들도 눈에 들어옵니다. <타임십>은 <타임 머신>의 속편을 자처하는 소설이고, 그래서 허버트 웰즈를 곳곳에서 찬미합니다. 물론 일방적으로 찬미하지 않고, 비판적인 시각 역시 분명합니다. 옛날 사람들이 그랬듯 허버트 웰즈 역시 다소 엘리트주의적인 경향을 보였습니다. 스티븐 백스터는 웰즈를 찬미하는 한편 이런 시각을 분명하게 짚고 넘어갑니다.
그렇다고 해서 백스터가 허버트 웰즈의 사회주의 사상을 아예 부정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백스터는 극도의 엘리트 경향이 부정적이라고 판단한 것 같습니다. 사실 엘리트 권력은 부패하기 마련이죠. 그래서 사회주의는 그걸 막기 위해 생산 수단의 사회적 소유를 주장하고요. 허버트 웰즈는 사회주의자이나, 당시 문명을 비판하는 과정에서 몇 가지 실수를 저질렀습니다. 조지 오웰도 이를 비판했죠. 아, 소설 속에 조지 오웰도 잠깐 나오는군요. 별로 좋은 대접을 못 받습니다. 그 세상은 너무 디스토피아이기 때문에. 아이구야. 오웰 아저씨가 이런 대접을 받는다니. 세상이 변하면 오웰도 어쩔 수 없겠죠.
스티븐 백스터는 시간 여행 특유의 인과 관계도 놓치지 않습니다. 사실 허버트 웰즈는 시간 여행의 인과 관계에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습니다. 작가 본인이 그걸 모르지 않았을 겁니다. 웰즈의 다른 단편 소설들은 시간 속에서 순환하는 사건을 그립니다. 따라서 웰즈는 <타임 머신>으로 그런 것들을 이야기할 수 있었을 겁니다. 어쩌면 <타임 머신>을 쓸 때, 그런 순환 관계를 잘 몰랐을 수 있죠. 어쨌든 웰즈의 첫째 목표는 지성의 한계와 인류 문명 및 지구 생태계의 종말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외에 다른 이야기를 하지 않았어요.
하지만 웰즈 이후 타임 패러독스는 시간 여행기의 주요한 소재가 되었고, 백스터는 그걸 모른 척할 수 없었습니다. 오히려 백스터는 그걸 열렬히 탐구하고, 거기에서 지성의 끝없는 항해를 논의합니다. 지성의 대장정, 오딧세이라고 할까요. 이런 인과 관계가 굉장히 복잡하게 얽히기 때문에 저는 따라가기 힘들었습니다. 이 소설은 백스터 특유의 하드한 설정을 여지없이 쏟아붓습니다. 하지만 그만큼 작가의 설정을 따라가는 과정은 벅차고 감동적입니다.
백스터는 이 책에 수많은 것들을 한꺼번에 종합하려고 한 것 같습니다. 미래 문명은 기본입니다. 생명의 진화와 우주 개척 역시 기본입니다. 단기적인 안목의 어리석음과 원대한 은하 문명이 서로 대조를 이룹니다. 시간선은 과거와 미래를 향해 동시에 뻗고, 그 가운데에서 개개의 지성은 한 가지 점에 지나지 않습니다. 소설을 모두 읽은 이후 저 자신이 너무 작아졌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흠, 이런 경이적인 SF 소설의 특징이죠. 그렇다고 해서 너무 미래에만 시선을 돌릴 수 없겠죠.
아무리 미래가 거대하고 찬란하다고 해도 결국 저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중입니다. 이 시대에는 이 시대만의 고통이 있고, 저는 그런 것을 간과할 수 없겠죠. 비단 저만 아니라 각 시대를 살아가는 수많은 이들은 모두 그렇게 생각할지 모릅니다. 백스터 역시 원대한 이야기를 논하지만, 그런 점을 놓치지 않습니다. 저 머나먼 지성의 대장정도 감동적이지만, 그 무엇보다 기억에 남는 것은 (아주 사소하지만) 잔잔하고 천진난만한 미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