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생태주의
<경계 기관> - 외부에서 X 구역을 바라보기 본문
소설 <경계 기관>은 서던 리치 시리즈의 두 번째 책입니다. 이야기는 전작에서 이어지고, 여전히 X 구역의 비밀을 다루죠. 전작 <소멸의 땅>에서 12차 탐사대는 X 구역의 적막한 자연 환경을 떠돌았습니다. 이 소설의 장점은 기이하고 고요하고 인적이 없는 분위기와 거대하고 낯선 자연 속에서 나 자신이 아닌 뭔가 다른 것이 된 듯한 느낌일 겁니다. 그래서 주인공 생물학자는 바위투성이 해안가에서, 사람들이 없는 뒷골목에서, X 구역의 공허한 자연 속에서 뭔지 모를 친밀감을 느꼈을 겁니다.
복잡하고 산만하고 빽빽하고 시끄러운 현대 문명인에게 저런 해안가와 뒷골목과 자연은 꽤나 낯선 공간으로 다가오고, <소멸의 땅>은 그런 느낌을 시종일관 유지합니다. 물론 그것만이 전부가 아닙니다. 무지와 무지를 이어가는 여정 또한 매력적입니다. 이 소설은 명확한 해답을 건네지 않습니다. 그 무엇도 확실하지 않고, 독자는 수많은 것들을 전혀 다른 방향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아마 작가조차 명확한 설정이나 해답을 정하지 않았을 겁니다. 이 소설에는 명쾌하고 딱 부러지는 설정이 없어요.
사실 사건이 진행될수록 의문은 풀리지 않습니다. 실마리와 단서는 다음 의문으로 이어지는 단계에 불과합니다. 탐정 소설의 논리적이고 직관적인 구조를 좋아하는 독자는 이런 모호하고 흐릿한 소설을 좋아하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소설이 무조건 해답을 내려야 할 필요는 없겠죠. 우리 인류는 이성적이라고 자부하지만, 세상과 우주의 비밀을 속속들이 알지 못합니다. <타임십> 같은 소설은 지적 존재가 시간의 끝까지 지성을 넓힐 거라고 말하지만, 글쎄요, 무궁무진한 수수께끼가 우리를 둘러쌌습니다. <소멸의 땅> 같은 소설을 읽고 그런 수수께끼를 느끼는 것 역시 나쁘지 않겠죠.
오히려 그런 수수께끼와 각종 의문들은 이 소설을 빛나게 합니다. 이런 장점은 <경계 기관>에서 계속 이어집니다. 하지만 배경과 화자는 전혀 다릅니다. <소멸의 땅>은 기이하고 적막한 자연 환경을 끊임없이 강조하지만, <경계 기관>은 문명 세계로 시점을 옮깁니다. 주인공은 X 구역을 감시하는 기관의 국장입니다. 이 국장은 탐사대가 무슨 사건을 겪었고 X 구역의 비밀이 무엇인지 파헤칩니다. 당연히 그런 시도는 계속 흐릿한 안개 속으로 빠집니다.
<소멸의 땅>에서 생물학자는 기이한 자연 환경을 떠돌았으나, <경계 기관>에서 신임 국장은 사무실과 연구실, 구내 식당을 떠돕니다. <경계 기관>은 X 구역을 직접 보여주지 않습니다. 대신 신임 국장을 비롯한 각종 요원들이나 과학자들이 어떻게 X 구역을 조사하는지 보여주죠. <소멸의 땅>이 비경 탐험물이라면, <경계 기관>은 첩보물 혹은 추리물에 가깝습니다. 신임 국장은 첩보원이었고, 그래서 조직의 음모나 각종 단서와 실마리들을 끊임없이 뒤쫓고 추리합니다. 비록 범죄 집단이 등장하지 않으나, 어느 정도 하드보일드한 느낌도 풍기는군요.
자연 환경을 탐험하는 재미는 사라졌으나, 대신 그 자연 환경을 둘러싼 각종 이론과 설정을 살펴볼 수 있어요. 주인공이 첩보원이기 때문에 설정을 보다 자세히 파고들 수 있죠. <소멸의 땅>이 배경을 제시했다면, <경계 기관>은 그 배경을 설명하는 편입니다. 그래서 적막하고 기이한 느낌은 덜하지만, 여전히 전작의 감수성을 잃지 않습니다. X 구역의 여러 이야기를 원하는 독자는 이 소설이 훨씬 더 마음에 들 겁니다.
<소멸의 땅>이 전적으로 생물학자의 탐험이었다면, <경계 기관>에서 신임 국장은 여러 사람들과 부딪힙니다. 생물학자는 자연 환경을 탐험했기 때문에 그리고 다른 사람들을 기피했기 때문에 혼자 적적하게 지냈습니다. 하지만 신임 국장은 조직의 여러 인물들을 만나야 하고, 조직의 알력이나 텃세, 권력 다툼에 적극적으로 개입합니다. 덕분에 치밀한 심리전이나 암투, 음모론과 배신 등이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군요.
어떤 관점에서 본다면, 생물학자와 신임 국장의 입장은 정반대입니다. 생물학자는 사람을 기피하지만, 신임 국장은 사람들을 적극적으로 만납니다. 생물학자는 자연 환경을 떠돌았으나, 신임 국장은 문명 세계에 머뭅니다. 물론 국장의 사무실 너머 X 구역이 펼쳐졌기 때문에 국장은 완전히 문명 세계에만 머문다고 할 수 없어요. 오히려 문명과 야생의 경계에서 방황한다고 할까요. 게다가 이 야생은 일반적인 자연 생태계가 아니라 뭔가 알 수 없는, 위험하고 거친 야생입니다. 신임 국장은 이 야생의 정체를 알아내기 위해 백방으로 애쓰지만, 그런 노력은 좌절을 키울 뿐입니다.
<소멸의 땅>이 나름대로 긍정적인 분위기를 품었다면, <경계 기관>은 보다 비극적입니다. 생물학자는 이런 적막한 자연을 마음에 들어했으나, 신임 국장은 기이한 자연 환경과 거리가 먼 사람입니다. 국장은 이 괴악한 야생의 비밀을 풀기 위해 애쓰지만, 그럴수록 좌절감만 쌓입니다. 온갖 수수께끼들이 국장의 숨통을 옥죄는 것 같습니다. 여러 인물들의 알력 관계와 갈등은 이런 좌절을 부채질하고, 신임 국장을 탈진과 스트레스, 광기로 몰아갑니다.
아무리 자연 환경이 기이하다고 해도 사람들의 갈등만 못한 듯하군요. 그런 관점에서 부국장은 거의 악역이나 마찬가지고, 국장과 함께 사건을 적극적으로 이끌어 나갑니다. 아니, 어쩌면 부국장이 주인공처럼 보이는군요. 생물학자는 비교적 자유롭게 활동했고 제약이 없었다면, 신임 국장은 뭘 할 때마다 벽에 부딪힙니다. 부하도 벽이고, 본사도 벽이고, 상관도 벽이고, 각종 서류도 벽이고, 업무도 벽이고…. 정말 자연 환경보다 인간 관계가 더 무서운 것 같습니다. 차라리 저 기이한 자연 속으로 떠나는 편이 낫겠습니다.
이렇게 기이한 자연 생태계를 소개하는 SF 창작물은 거대 괴수를 보여줘야 인지상정이죠. 하지만 <소멸의 땅>이 감질나게 수중 파충류들을 언급한 것처럼 <경계 기관> 역시 거대 괴수를 아주 잠깐 보여줄 뿐입니다. <소멸의 땅>은 거대 수중 파충류들이 위험하다고 줄곧 말하지만, 정작 그 괴수들은 본격적으로 등장하지 않아요. <경계 기관> 역시 바다 괴수를 연이어 언급하지만, 그런 괴수들은 막연한 몽상 속에 존재할 뿐입니다. 어쩌면 작가는 바다 괴수를 직접 보여주는 것이 소설 분위기를 해칠 수 있다고 판단했을지 모르겠습니다.
바다 괴수가 난동을 부리고 작가가 그걸 자세히 묘사한다면, 너무 상투적이거나 진부하게 보일 수 있습니다. 독자의 시선이 소설의 분위기나 음모가 아니라 바다 괴수의 폭주에 쏠릴 수 있죠. 솔직히 어마어마한 괴수가 도시를 짓밟거나 사람들을 공격한다면, 당연히 독자의 이목은 거대 괴수를 향할 겁니다. 그래서 종종 창작가들은 괴수의 난동이나 액션을 되도록 자제합니다. 어쩌면 어떤 독자는 거대 괴수의 비중이 너무 작다고 불평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작가는 어쩔 수 없었을 것 같습니다.
혹은 작가는 괴수에게 별로 관심이 없었을 수 있습니다. 작가는 그저 기이한 분위기와 각종 음모론을 원했을 뿐이고, 거대 괴수 자체에 관심이 없었을지 몰라요. 물론 서던 리치 시리즈는 3부작이고, <소멸의 땅>과 <경계 기관> 이외에 <빛의 세계>가 있습니다. <빛의 세계>는 시리즈의 대미를 장식할 테고, 마지막에 거대 바다 괴수를 짜잔~ 보여줄지 모릅니다. <백경> 같은 소설이 그렇죠. <백경>은 아주 두꺼운 소설이지만, 주인공 포경선은 소설의 끄트머리에서 모비 딕과 마주칩니다.
여느 3부작 소설과 다르게 서던 리치 시리즈는 하나의 소설이라고 봐도 무방할 겁니다. 각 소설들의 출판 간격이 그리 크지 않기 때문이죠. 따라서 거대 바다 괴수는 대미를 장식하는 주인공이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거대 괴수의 유무에 상관없이 <경계 기관>은 그 분위기와 음모론만으로 매력적입니다. (게다가 괴수물 매니아가 아닌 독자는 거대 괴수 따위에 뭐 그리 관심이 없겠죠.) 신임 국장이 너무 많은 벽에 부딪히기 때문에 사건 진행이 너무 반복적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래도 마지막 장까지 추진력을 잃지 않는군요. 개인적으로 플롯이 좀 단조롭고 반복적이라고 봅니다. 그 점은 약간 아쉬워요.
양쪽 소설 중에 뭐가 더 재미있느냐고 묻는다면…. 글쎄요, 둘 다 재미있습니다. 그리고 두 소설이 서로를 보완하는 것 같습니다. 저는 비경 탐험물을 더 좋아하지만, <소멸의 땅>은 설명이 참 부족합니다. 생물학자는 그저 일개 탐사대원에 불과하기 때문에 X 구역을 피상적으로 둘러볼 뿐입니다. 반면, <경계 기관>은 설명이 많습니다. 비록 의문은 시원하게 해소되지 않으나, 주인공은 조직의 국장이고 덕분에 이런저런 사실들을 접할 수 있습니다.
아마 작가는 소설의 배경을 제시하고 그 배경을 설명하기 위해 <소멸의 땅>과 <경계 기관>을 연이어 쓴 것 같습니다. 위에서 말한 것처럼 저는 서던 리치 3부작을 별개의 책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것들은 하나의 소설입니다. 작가가 그걸 의도했는지 알 수 없으나, 결과적으로 서던 리치 3부작은 하나의 소설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어느 소설이 좋다고 말하기 좀 그렇군요. "책의 첫부분이 좋으냐, 중간 부분이 좋으냐?"라고 물어보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역시 비경 탐험이 첩보물보다 좋습니다.)
<경계 기관> 역시 환경 오염이나 자연 생태계를 꾸준히 언급하지만, 이 소설이 환경 오염을 경고하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소멸의 땅>이 그랬듯 환경 오염이나 자연 생태계는 분위기 조성과 사건 전개를 위한 장치에 불과한 듯합니다. 비인간적인 분위기를 조성하고 싶다면, 문명 세계를 떠나 자연 환경으로 들어가야 할 테죠. 따라서 환경 오염을 정말 경고하는 일련의 소설들, <우주 상인>이나 <생각보다 너무 싱싱해>, <인간 종말 리포트> 같은 책들과 <경계 기관>을 비교할 수 없겠죠.
만약 작가에게 그런 의도가 있었다고 해도 환경 오염이라는 소재는 이 소설에서 그리 짙지 않아요. <물에 잠긴 세계> 같은 소설은 <경계 기관>과 비슷할 수 있으나, <물에 잠긴 세계>는 환경 오염을 경고하는 작품이 아니죠. <물에 잠긴 세계> 역시 낯선 자연 환경과 그게 인간에게 미치는 영향을 묘사하는 작품입니다. 이런 작품에서 중요한 것은 자연 생태계가 어떻게 변하느냐가 아니죠. 그 고요하고 비인간적인 분위기를 즐기는 것 자체가 중요할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