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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 생태주의

<소멸의 땅> - 무지와 무지의 생태계 탐사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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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멸의 땅> - 무지와 무지의 생태계 탐사

OneTiger 2017. 7. 14. 20:00

SF 소설들은 비일상적인 요소를 다루곤 합니다. 당연히 이런 현상들에는 어떤 원인이 있을 겁니다. 만약 죽은 사람들이 다시 살아나거나 갑자기 돌연변이 괴물들이 인류를 습격하거나 식물들이 수정으로 변한다면, 거기에 뭔가 분명한 이유가 있겠죠. 수많은 SF 소설들은 (상상 과학이라는 이름답게) 그런 이유를 합리적이고 논리적으로 밝히기 위해 애씁니다. 왜 죽은 사람들이 살아났는지, 왜 돌연변이 괴물들이 탄생했는지, 왜 식물들이 수정으로 변하는지….


하지만 모든 SF 소설들이 그런 해명에 충실하다고 볼 수 없습니다. 어떤 소설들은 논리와 합리를 최대한 강조하지만, 어떤 소설들은 중요한 부분에서 구렁이가 담을 넘어가듯 은근슬쩍 넘어갑니다. 이런 소설들은 설정을 자세히 밝히지 않고, 그저 전문 용어 몇 가지를 나열하거나 아주 어려운 계산만 내놓고, 해답을 밝히기 포기합니다. 겉보기에 뭔가 상상 과학처럼 보이지만, 사실 이런 소설들은 해답을 밝히지 않아요. 또 어떤 소설들은 아예 처음부터 두 손을 듭니다. 이런 소설들은 인류가 해답을 절대 알 수 없을 거라고 주장합니다.



불가해성은 SF 소설과 그리 어울릴 것 같지 않습니다. SF 소설은 상상 과학을 중시하는 장르이고, 따라서 SF 소설은 논리적이고 과학적으로 접근해야 합니다. 하지만 불가해성은 이런 논리적이고 과학적인 접근을 거부합니다. 아무리 인간이 노력해도 그런 노력은 물거품이 됩니다. 어떤 비일상적인 현상이 벌어졌을 때, 인간들은 그 비밀을 풀기 위해 노력하지만, 그런 시도는 언제나 무위로 돌아갑니다. 최첨단 과학이나 분석적인 추론이나 합리적이고 빛나는 이성과 지성 따위는 비일상적인 불가해성 앞에서 헛다리만 짚기 일쑤입니다.


이런 현상들 앞에서 인류는 아무것도 아니고 오히려 이 장대한 우주의 먼지에 불과할 뿐입니다. 하지만 어떤 소설이 불가해성을 다룬다고 해서 그 소설이 인류를 무조건 비웃는다는 뜻은 아닙니다. <라마와의 랑데부>에서 라마 우주선은 불가해성 그 자체입니다. 하지만 이 소설은 인류를 비웃지 않습니다. 오히려 우주 승무원들의 탐사를 경이롭게 바라보죠. <솔라리스>에서 살아있는 플라즈마 바다 역시 불가해성입니다. 하지만 이 소설은 인류를 비웃지 않습니다. 그보다 다른 대상과 소통하지 못하는 인간을 동정적으로 바라봅니다.



하워드 러브크래프트의 소설에서 이런 불가해성은 공포로 등장합니다. 인간은 자신이 이해할 수 없는 대상을 공포라고 생각합니다. 다곤, 크툴루, 요그-소토스, 이상한 선율, 우주의 색깔, 그 밖에 수많은 요소들은 전부 비일상적이고 불가해합니다. 그것들이 인류를 해칠 때, 인간은 그저 무력하게 그걸 바라봅니다. 그걸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사람들은 광기에 빠져듭니다. 러브크래프트는 이런 광기를 즐겨 묘사하고, 그래서 어떤 소설은 아예 제목이 '광기의 산맥'입니다. 스트루가츠키 형제의 <세상이 끝날 때까지 아직 10억 년>이나 <노변의 피크닉>은 불가해성을 비극적인 운명으로 쳐다봅니다.


이 우주의 엄청난 힘이 인류에게 뭔가를 강요한다면, 어떻게 인류가 거기에 맞설 수 있을까요. 인류가 그런 우주의 질서를 이해할 수 있을까요. 감히 인류의 제한적인 이성으로 우주의 거대한 비밀과 질서를 파악할 수 있을까요. 어쩌면 불가해성이야말로 SF 소설의 핵심 주제일지 모릅니다. 인류는 아직 모르는 것이 많기 때문이고, 영원히 우주의 정수에 다가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지성은 한없이 뻗어가지만, 그 지성은 아득한 지평선에 닿지 못하겠죠.



<소멸의 땅>은 이런 불가해성을 주제로 삼은 소설입니다. 줄거리는 간단합니다. 'X 구역'이라는 장소가 있습니다. 무슨 음모론자들이 좋아할 것 같은 이름입니다. 이 구역 안에서 이상한 현상들이 벌어지고, 당연히 정부 기관은 이를 조사하기 원합니다. 그래서 정부 기관은 11차례 탐사대를 파견했습니다. 하지만 탐사대는 모두 기이한 일을 겪었습니다. 소설 주인공은 12차 탐사대원이고, 12차 탐사대는 이 이상한 구역으로 들어갑니다.


현대 문명의 전자 장치는 이 구역 안에서 작동하지 않습니다. 탐사대는 그 이유를 모릅니다. 12차 탐사대는 X 구역의 경계선을 넘었으나, 어디가 그 경계인지 확실하지 않습니다. 탐사대는 어떤 동굴을 발견하지만, 정작 이전의 탐사대들은 그런 동굴을 찾은 적이 없습니다. 12차 탐사대는 그 이유를 모릅니다. X 구역은 원시적인 야생 풍경을 보여주지만, 탐사대는 왜 이 지역이 원시적으로 변했는지 알지 못합니다. 탐사대는 경계 장치를 보유했으나, 그 경계 장치가 무엇을 경고하는지 어떻게 경고하는지 알지 못합니다. 탐사대는 뭐 제대로 아는 것이 없습니다.



<소멸의 땅>은 이런 이야기를 계속 풀어갑니다. 사건은 전개되지만, 실마리나 단서 따위는 없습니다. 탐사대가 어디를 가든, 의문과 호기심만 계속 샘솟을 뿐입니다. 탐사대가 실마리나 단서를 찾아도 그 모든 것들은 무지로 이어지고, 소설 주인공은 계속 그들이 아무것도 모른다는 사실만을 확인합니다. 무지는 다른 무지로 이어지고, 그 무지는 또 다른 무지로 이어지고, 결국 모든 것들이 무지와 무지 사이를 방황합니다.


만약 이 소설이 전형적인 추리 소설이라면, 소설 주인공이 전형적인 탐정이라면, 시간이 지날수록 주인공은 사건의 윤곽선을 그리고 범인을 추리할 수 있을 겁니다. 마침내 주인공 탐정은 사건의 원인을 밝히고 의외의 범인을 체포할 겁니다. 독자는 명쾌한 기쁨을 얻겠죠. 하지만 이런 불가해성 SF 소설은 절대 그런 공식으로 나가지 않습니다. 무지는 더 큰 무지로 이어집니다. 명쾌하거나 합리적인 이유 따위는 없습니다. 어떤 독자는 해결의 빛이 보일 거라고 기대할지 모르겠으나, 그런 기대는 여지없이 무너집니다. 당혹감이 파도처럼 덮쳐오고, 소설의 분위기를 처음부터 끝까지 지배합니다.



하지만 당혹감과 무지와 혼돈이 소설을 지배한다고 해도 주인공까지 거기에 질식하지 않습니다. 이 소설은 이성적인 인물이 무지와 혼돈에 질식하는 과정을 보여주지 않습니다. 하워드 러브크래프트는 그런 방법을 잘 써먹었으나, <소멸의 땅>은 그렇지 않습니다. 사실 소설 주인공은 뭔가 비인간적이고 적막한 풍경에 매혹을 느끼는 인물입니다. 어렸을 때부터 주인공은 적막하고 인간이 없는 자연 풍경에 매료되었고, 그래서 생물학자가 됩니다.


이 생물학자는 야생 지역에서 자연 생태계를 관찰할 때마다 무한한 경이에 휩싸입니다. 심지어 야외 탐사를 나가지 못했을 때, 주인공은 도심지의 텅 빈 뒷골목을 방문합니다. 거기는 비인간적이고 적막하기 때문에. 그래서 소설 주인공은 원시적이고 야생적인 구역 안에서 급작스러운 공황에 빠지지 않습니다. 주인공 생물학자는 미치거나 절망하거나 정신이 나가지 않습니다. 비록 기이한 현상을 겪을지언정 <소멸의 땅>에서 주인공은 침착하게 무지를 시인할 뿐입니다. 하지만 무지가 무지로 이어진다고 해도 그 과정 또한 발견의 연속일 겁니다.



이 소설은 무지를 그냥 무지로써 바라보지 않습니다. 주인공은 자신이 무지하다는 사실을 '발견'합니다. 뭔가를 아는 것만이 깨달음은 아닙니다. 나 자신이 무엇을 모르는지 아는 것 역시 중요합니다. 그런 관점에서 소설 주인공은 수많은 것들을 발견합니다. 자신이 무엇을 모르는지 발견하죠. 비록 이 소설은 불친절하고 답답하고 모호하지만, 그런 무지의 발견이 이어지기 때문에 주인공의 탐사 또한 흥미롭습니다.


한편으로 이 소설은 비경 탐험물의 낭만을 어느 정도 간직했습니다. 이른바 문명 세계를 떠나고 낯선 자연 생태계로 진입하고 희한한 동식물들을 마주하는 과정이 잘 살아있습니다. 물론 X 구역의 진짜 생태계는 형용할 수 없는 상태입니다. 소설 주인공은 거대한 수중 파충류들이 강변에 우글거린다고 걱정하지만, 12차 탐사대는 그런 거대 파충류를 한 번도 만나지 않습니다. 괴수물 매니아는 이런 책에 실망할 겁니다. 괴수를 감질나게 언급만 할 뿐이고, 직접 보여주지 않아요. 솔직히 그런 거대 파충류가 정말 강물 속에 살아있을지 의문입니다. 그것 역시 무지로 인한 착각일 수 있죠.



비경 탐험물은 낯선 자연 생태계와 그 생태계 속의 위험한 포식자를 보여주곤 합니다. <해저 2만리>의 해양 생태계와 거대 오징어처럼. 그게 비경 탐험물의 미덕이죠. <소멸의 땅>은 그런 미덕을 철저하게 배반(?)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생태계를 바라보는 감흥까지 잃지 않습니다. 소설 주인공은 생물학자보다 생태학자처럼 보입니다. 왜냐하면 끊임없이 자연 생태계의 순환이나 상호 작용을 상기하기 때문입니다. 작은 웅덩이의 생태계부터 드넓은 해안가의 생태계까지, 주인공은 자연 생태계의 상호 작용을 연이어 주절거립니다.


어쩌면 작가는 심각한 환경 오염이나 생물 다양성 위기를 경고하고 싶었는지 모르죠. 하지만 저는 <소멸의 땅>이 환경 오염을 경고하는 소설 같지 않습니다. 주인공이 자연 생태학을 좋아하는 이유는 적막하고 비인간적인 것에 매력을 느끼기 때문이고, 그게 이 소설의 주된 감성이기 때문입니다. 환경 오염을 운운하는 것은 그걸 위한 장치일 뿐입니다. 하지만 이유가 무엇이든, 이 소설은 자연 생태계를 색다른 관점에서 바라보고, 그 점이 마음에 들었습니다. (그래도 그 거대 수중 파충류가 한 번쯤 액션 장면을 연출했다면 어땠을지.)



<소멸의 땅>은 불친절하지만 흥미로운 소설입니다. 번역자는 <노변의 피크닉>과 <크리스털 세계>를 언급하더군요. 그 두 가지를 종합하면, 이런 소설이 나오겠죠. 저도 동의하지만, 저는 거기에 <미사고의 숲>을 집어넣고 싶군요. 만약 이런 소설들을 흥미진진하게 읽은 독자라면, <소멸의 땅> 역시 인상적인 작품이 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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