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생태주의
<빛의 세계> - 기이한 야생과 세상의 전복 본문
제프 밴더미어의 <빛의 세계>는 서던 리치 시리즈의 마지막 작품입니다. <소멸의 땅>, <경계 기관>에 이은 세 번째 소설이고 시리즈의 대미를 장식하는 소설이죠. <소멸의 땅>에서 12차 탐사대는 X 구역이라는 원시적이고 기이한 야생을 떠돌아 다닙니다. <경계 기관>은 누가 탐사대를 조직했고 왜 탐사대를 그 기이한 야생 지역으로 보냈는지 설명합니다. 물론 아무리 <경계 기관>이 열심히 설명한다고 해도 모든 의문이 풀리지 않습니다.
오히려 의문은 더욱 높이 쌓입니다. <빛의 세계>는 대미를 장식하기 위해 그 모든 것들을 망라해야 합니다. 그래서 새로운 뭔가를 제시하는 대신 전작의 여러 인물들을 불러옵니다. <소멸의 땅>에서 주인공은 생물학자였습니다. <경계 기관>에서 주인공은 신임 국장이었습니다. 반면, <빛의 세계>에서 특정한 주인공은 눈에 뜨이지 않습니다. 이전 소설들의 여러 인물들이 번갈아 등장하고, 각자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그 중에서 가장 비중이 두드러지는 인물이 하나 있으나, 그 사람이 주인공이라고 확신할 수 없군요. 중요한 건 과거와 현재를 아우르는 전반적인 윤곽선입니다.
만약 작가가 독자에게 전반적인 밑그림을 보여주기 원한다면, 여러 사람들의 시점을 빌려야 할 겁니다. 시점이 많을수록 보다 다양한 이야기를 할 수 있고, 그것들이 전반적인 윤곽선을 형성할 수 있겠죠. 한 사람의 시점만 이용하면 설명하기 힘들 겁니다. 그래서 작가는 중요 인물들을 다시 불러오고, 난해한 현상들을 정리합니다. 작가는 설정을 점점 키우고 아찔하게 판을 벌리지만, 한편으로 정리와 뒷수습을 잊지 않습니다. 솔직히 이런 부류의 작품에서 종종 작가가 자기 설정을 감당하지 못하고 무너질 수 있어요. 그런 경우를 자주 봅니다.
만약 작가가 무턱대고 설정을 키운다면, 독자는 그 거대한 설정에서 경이로움을 맛볼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설정이 너무 커졌을 때, 작가가 그걸 미처 정리하지 못하고 무너질 수 있죠. 흔히 이런 사태를 두고 "떡밥을 회수하지 못했다."고 말하죠. 거대한 설정은 재미있는 이야기를 뽑아낼 수 있으나, 작가는 그걸 통제하고 감당할 수 있어야 합니다. <빛의 세계>에서 작가는 전복적인 설정을 시도하지만, 그리 멀리 나가지 않습니다. 그래서 결말이 좀 평범하다고 할까요. 저는 그렇게 느꼈습니다.
이런 부류의 소설에 익숙한 독자는 결말을 대략적으로 유추할 수 있을 겁니다. 무엇보다 이런 우주적 공포 소설은 논리적으로 설정을 늘어놓지 않습니다. 하드 SF 소설은 되도록 설정을 자세히 설명해야 하지만, 우주적 공포 소설은 설정을 자세하게 들추지 않습니다. 오히려 우주적 공포 소설은 설정을 감추려고 애씁니다. 그게 우주적 공포 소설의 미덕입니다. 하워드 러브크래프트의 말처럼 공포는 무지에서 비롯하기 때문에 공포 소설은 설명을 아낄 필요가 있습니다.
<빛의 세계>는 그런 미덕에 충실합니다. 이 책은 단순히 설명을 아끼는 것에서 멈추지 않습니다. 그보다 새로운 의문들을 늘어놓고 옛날 의문들을 뒤덮습니다. 그 무엇도 진실이 될 수 없고, 가능성은 한없이 열렸습니다. 인류의 지성은 한계가 있고, 절대 모든 것을 파악하지 못합니다. 이 우주는 너무 거대하고, 인류의 지성은 그 앞에서 초라할 뿐입니다. 인류는 자신이 만물의 영장이고 이성적인 지적 존재라고 말하지만, 사실 인류의 지성은 우주의 비밀을 한 꺼풀조차 벗기지 못했습니다. 따라서 소설은 인류의 지성을 예찬하지 않습니다. 소설은 끝없이 진실을 탐구하지만, 무엇이 진실인지 말하지 않아요.
이런 구조는 <소멸의 땅>과 <경계 기관>에서 꾸준히 반복되었습니다. 솔직히 저는 <경계 기관>의 후반부가 약간 지루했습니다. 작가가 똑같은 수법을 너무 많이 반복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뭔가 좀 색다른 전개가 끼어들었다면 훨씬 좋았겠지만, 소설은 한없이 의문만 던지고 그 이상 나가지 않습니다. <빛의 세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따라서 이런 부류의 이야기에 익숙한 독자는 무슨 사건이 전개될지 예측할 수 있을 겁니다. 그래서 시리즈의 대미가 그리 감동적이거나 인상적이지 않았습니다.
작가는 좀 더 파격적으로 나갔을 수 있었을 겁니다. 하지만 몸을 사린다고 할까요. 장르의 특성에 안주한다고 할까요. 차라리 유치한 설정이라도 줄줄 늘어놨다면 어땠을까 싶군요. 하지만 모든 사건들이 정해진 수순, 뻔한 절차대로 흘러가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이런 소설들이 그런 수법을 자주 써먹지만, 저는 작가가 그런 수법을 비틀 수 있을 거라고 기대했습니다. 음, 어쩌면 작가는 <소멸의 땅>부터 크게 무리하지 않거나 욕심을 내지 않고, 안정적인 전개를 고려했을지 모르죠. 어쨌든 소설은 그렇게 안정적으로 마무리를 짓습니다.
만약 괴수를 좋아하는 독자가 이 책에서 괴수의 본격적인 출현을 기대했다면, 그 기대를 살짝 접는 편이 나을 듯합니다. 괴수를 향한 애정이 약간 엿보이지만, 작가는 그런 애정을 적극적으로 풀어놓지 않습니다. 저는 '괴수가 본격적으로 출몰하는 이야기'를 기대했으나, <빛의 세계>는 그런 기대를 충족하지 않았습니다. 뭐, 우주적 공포 소설이 무조건 괴수를 이야기해야 한다는 의무는 없습니다. 하워드 러브크래프트 역시 괴수가 나오지 않는 공포 소설을 좋아했습니다. 이상한 선율이나 우주의 색깔을 좋아했죠.
하지만 서던 리치 시리즈는 뭔가 거대한 바다 괴수가 튀어나올 것 같은 분위기를 연이어 조장합니다. 그래서 저는 그에 걸맞는 절정이 등장할 거라고 기대했지만, 소설의 전개는 제 기대와 벗어나는군요. 그게 나쁘다는 뜻은 아닙니다. 바다 괴수의 상륙은 개인적인 취향에 불과하죠. 어쩌면 작가는 괴수가 너무 날뛰는 장면이 유치하거나 진부하다고 느꼈을 수 있습니다. 혹은 (제가 느낀 바와 달리) 작가가 바다 괴수를 별로 좋아하지 않을 수 있죠.
그렇다고 해서 소설이 재미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부정적인 소리를 떠들었지만, 소설 자체는 신비롭고 경이적이고 묵시적인 분위기를 계속 변주합니다. 소설은 인간적인 친근함을 한없이 벗어나고 인적이 없는 세계를 향해 열심히 질주합니다. 저는 이런 분위기가 너무 매혹적이더군요. 문명의 손길이 닿지 못하는 세계. 인류 문명은 이 기이한 자연에 정착하려고 노력하지만 덧없이 부서지고, 대신 기괴한 것들이 그 자리를 채웁니다. 이 신비로운 야생은 자신의 자리를 과감하게 외치고, 인류 문명은 그 앞에서 움찔거리며 물러납니다.
인류 문명은 계속 이 기괴한 야생과 싸우지만, 싸움은 매번 인류의 패배를 선언합니다. 물론 이는 싸움이 아닐 수 있습니다. 이 기괴한 야생은 싸울 생각이 없을 수 있습니다. 숱한 과학자들이 솔라리스 행성의 의도를 파악하지 못한 것처럼 경계 기관은 X 구역의 의도를 파악하지 못합니다. 중요한 점은 인류 문명이 이 기괴한 야생에게 계속 밀려난다는 겁니다. 아마 대부분 사람들은 이런 결과를 환영하지 않겠죠.
여느 훌륭한 SF 소설처럼 <빛의 세계> 역시 인류 문명의 전복을 노래합니다. X 구역이 워낙 모호하기 때문에 그런 전복 역시 모호합니다. 이 소설을 포스트 아포칼립스라고 부를 수 없겠으나, 분명히 아포칼립스가 도래한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그 과정은 안개처럼 흐릿하고, 독자는 세상의 전복을 자세히 파악할 수 없습니다. 작가는 종말 이후보다 종말 이전에 주목하는 것 같습니다. <인간 종말 리포트> 같은 소설이 포스트 아포칼립스임에도 종말 이전에 주목했던 것처럼.
따라서 독자는 세상의 파국을 유추할 수 있지만, 그걸 직접 보지 못합니다. 설정은 거대하지만, 이야기 규모는 비교적 작죠. 그렇다고 해서 작가가 무턱대고 규모를 키울 수 없었을 겁니다. 안정적인 전개와 결말이지만, 작가는 자기 설정과 이야기를 책임질 수 있어야죠. 뭐, 댄 시몬스 같은 작가는 너무 규모만 키운다고 욕을 먹습니다. 그것보다 차리리 안정적인 전개가 나을 듯합니다. 사실 뚜렷한 결말보다 모호하고 기이한 분위기가 더욱 중요하죠.
야생을 묘사하는 소설답게 <빛의 세계>는 환경 오염의 위험을 곳곳에서 경고하는 듯합니다. 하지만 <소멸의 땅>과 <경계 기관>처럼 <빛의 세계>는 환경 오염을 본격적으로 언급하지 않습니다. 서던 리치 시리즈는 환경 오염을 걱정하는 것보다 적막한 야생을 탐사하기 위한 장치로 활용합니다. 아마 이 책을 읽고 환경 오염이나 동물 권리를 강하게 느끼는 독자는 많지 않을 듯하군요.
물론 작가는 환경 오염을 염두에 뒀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작가가 무엇을 생각했든 이 소설은 환경 오염을 그저 일종의 장치로서만 활용합니다. 대안을 제시하지 않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현재 상황을 대놓고 비판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해도 이 소설은 자연 생태계를 색다르게 노래하고, 그걸 따라가는 과정은 즐겁니다. 저는 그런 과정이 이 책의 가장 큰 즐거움이 아닌가 싶습니다. 작가는 기괴한 야생을 설정하고, 다양한 방법으로 그 야생을 보여줍니다. 명확한 결론이나 자세한 설정이 무슨 소용이겠어요. 작가를 따라 그런 자연 생태계를 탐사하고 조사할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즐겁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