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생태주의
소설 <메그>를 둘러싼 추억 본문
"두 단어로 말하겠다. 쥐라기 상어." 소설 <메그>의 뒷표지에 박힌 홍보 문구입니다. 물론 <메그>의 주연은 메갈로돈이고, 메갈로돈은 쥐라기에 서식하지 않았습니다. 이 거대한 상어는 백악기 이후에 등장했죠. 아예 소설 첫머리는 백악기 후기이고, 메갈로돈이 바다에 빠진 티라노사우루스를 덮칩니다. '쥐라기 상어'라는 두 단어는 메갈로돈이 쥐라기에 서식했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 홍보 문구는 명백하게 <쥬라기 공원>을 가리킬 겁니다.
소설 <메그>는 영화 <쥬라기 공원>이 공전의 히트를 친 이후 출간되었습니다. <쥬라기 공원>은 공룡을 내세운 영화이고, 사람들은 모두 고대의 거대한 야생 동물들에게 열광했어요. 그 이전에 공룡을 내세우는 영화가 없지 않았습니다. 레이 해리하우젠이 시각 효과를 맡은 작품들이 제일 유명할 테고, <심해에서 온 괴물>도 있었고, 그 이전에 <잃어버린 세계> 같은 영화가 있었습니다. <킹콩> 역시 빼놓지 못하고, 공룡보다 훨씬 거대한 괴수가 등장하는 <고지라> 같은 영화가 1950년대에 등장했어요.
하지만 <쥬라기 공원>은 저런 영화들보다 훨씬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습니다. 공룡 SF를 이야기할 때, 그냥 지나가지 못하는 장벽이 되었죠. 아마 시각 효과가 월등히 진보했기 때문일 겁니다. 이 영화는 고전적인 미니어쳐 모형이나 슈트 액션에 기대지 않습니다. 컴퓨터 그래픽을 적극적으로 활용했고, 정말 실감나게 고대 야수들을 보여줬습니다. 이렇게 실감이 나는 티라노사루우스는 그 이전 영화에 존재하지 않았어요. 덕분에 사람들은 영화에 열광했고, 영화는 수많은 인구에 오르내리게 되었습니다.
덩달아 훨씬 많은 사람들이 공룡에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죠. 영화의 시각 효과가 강조한 것이 바로 공룡이기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은 공룡을 더욱 자세히 알기 원했습니다. 영화의 흥행은 공룡 열풍으로 이어졌어요. (이런 거대 야수가 지구상에 존재했다는 사실이 사람들에게 커다란 감탄을 불러일으켰을 겁니다.) 공룡은 대표적인 선사 시대 야수이고, 공룡 열풍 덕분에 다른 선사 시대 동물들도 주목을 받았습니다. 사람들은 고대에 활보했던 다양한 거대 야수들에게 환호성을 질렀고, 그런 야수들의 이야기를 읽기 원했습니다. 이런 분위기가 한창 달아올랐고, <메그>는 이런 분위기 속에서 출간되었습니다. 그래서 '쥐라기 상어'라고 불렸겠죠.
<메그>는 상어를 주연으로 내세웠고, 사실 <죠스>와 닮은 점이 많습니다. 하지만 <메그>를 <죠스>의 후계자라고 부르지 못할 겁니다. <메그>는 <쥬라기 공원>의 열풍을 이어갔고, 그런 분위기 속에서 유명세를 탔습니다. 덕분에 어떤 사람들은 마이클 크라이튼이 <메그>를 썼다고 착각하더군요. 만약 마이클 크라이튼이 <쥬라기 공원>을 쓰지 않았다면, <메그>는 어떤 소설이 되었을까요. 만약 영화 <쥬라기 공원>이 개봉하지 않았다면, <메그>는 고생물 열풍에 참가할 수 있었을까요.
글쎄요, 장담하기 어렵군요. 메갈로돈은 티라노사우루스와 함께 고대의 거대 포식자를 대표하는 동물이고, 소설 <메그>는 그런 인식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을 겁니다. 소설은 (주연을 띄워주기 위해 홍보성 문구처럼) 지상에 티라노사루우스가 있다면 바다에 메갈로돈이 있다고 지겹게 강조합니다. 그리고 메갈로돈은 티라노사우루스보다 훨씬 크고 사나운 포식자이고요. 고대 야수의 이야기에 목이 마른 독자들은 이런 대조에 열광했겠죠. (하지만 <쥬라기 공원>이 생명의 경이를 놓치지 않는 반면, <메그>는 주연 야수의 폭력적인 측면만 너무 강조하는 듯합니다. 둘을 비교한다면, <메그>가 훨씬 얄팍해 보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메그>가 단순히 고대 야수의 열풍에 편승했다고 하기 어려울 겁니다. <메그>를 단순무식한 테크노 스릴러 소설이라고 보는 사람도 있으나, 이 소설은 나름대로 깜짝쇼를 준비했습니다. 작가는 메갈로돈의 위상을 강조하기 위해 주인공 해양학자를 영리하게 이용합니다. 메갈로돈이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이전까지 소설의 긴장과 갈등을 담당하는 인물은 주인공 해양학자입니다. 그리고 이 해양학자는 메갈로돈에 집착하지만, 불행히도 학계에서 그리 잘 나가는 처지가 아닙니다.
사실 소설 초반부터 해양학자는 온갖 조롱과 모욕과 수치를 감내하는 중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수치, 모욕, 조롱, 위기는 소설 중반부(메갈로돈이 비중을 더 많이 차지할 때)까지 이어집니다. 주인공 해양학자가 조롱을 감내하는 이유는 순전히 메갈로돈 때문이고요. 이 고대의 상어 덕분에 주인공 해양학자는 밑바닥을 경험하고, 자신이 나락에 떨어졌음을 몇 번이고 깨닫습니다. 하지만 주인공은 밑바닥에 내려온 만큼, 올라갈 때 아주 수월하고 더 높이 올라갈 수 있었어요. 메갈로돈은 주인공이 아주 높은 곳까지 올라가도록 도와줬고요.
작가는 메갈로돈의 위상을 강조하기 위해 주인공의 위치를 마구 뒤흔듭니다. 주인공 해양학자는 (메갈로돈 탓에) 밑바닥까지 떨어지고 (메갈로돈 덕분에) 슈퍼맨처럼 급상승합니다. 메갈로돈의 출현을 기점으로 해서 주인공의 위치는 수직 상승합니다. 이런 수직적 이동은 메갈로돈의 출현과 맞물리고, 바다 괴수의 등장을 훨씬 극적으로 꾸밉니다. 저는 이게 꽤나 효과적인 장치라고 생각하고, 작가가 머리를 잘 굴렸다고 생각합니다. 괴수물을 쓸 때, 창작가는 괴수와 인간들 사이의 관계를 고민하기 마련입니다. 아무리 흉악한 괴수도 인간들과 관계를 맺지 않는다면, 소설 속에서 자신만의 입지를 확보하지 못합니다.
비주류적인 하드 SF 소설이나 기이한 뉴 위어드 소설은 그럴 수 있을지 모르겠으나, 대부분 괴수물 창작가는 괴수와 인간들 사이의 관계를 고려해야죠. 소설 <메그>에서 주인공은 메갈로돈 덕분에 수직적으로 이동합니다. 이건 거의 신분 상승과 마찬가지입니다. 주인공이 밑바닥에서 상류층으로 상승할 때, 독자는 짜릿함을 맛볼 겁니다. 게다가 그 이유가 바로 괴수 때문이죠. 물론 이런 기법(수직적 신분 상승)은 꽤나 전형적이고 진부하지만, 메갈로돈은 실존한 거대 상어임에도 그리 잘 알려지지 않았고, 그래서 메갈로돈의 참신함이 진부함을 뒤덮었습니다.
소설 <메그>는 일반적인 괴수 소설의 전형을 따르는 한편, 주인공의 갈등 상황을 계속 끌고 나갑니다. 주인공의 신분은 상승했으나, 그 주위에 언제나 질투하는 자들이 존재하곤 하죠. 이런 인물들의 관계는 (메갈로돈의 사냥이나 난동과 함께) 소설을 이끄는 원동력입니다. 메갈로돈의 난동이 전형적인 전개임을 고려한다면, 주인공과 다른 적대적 인물들의 갈등이 훨씬 흥미로울지 모르겠습니다. 주인공 해양학자와 메갈로돈의 관계가 너무 끈끈하기 때문에 주인공을 미워하는 인물들은 한두 명이 아닙니다.
그들은 나름대로 사건을 지저르고, 그런 사건들이 모이고 모여서 소설을 이끕니다. 아마 그 중에서 고물 노틸러스와 메갈로돈의 싸움이 제일 극적이지 않나 싶습니다. 상어가 잠수함을 이기다니…. 뭐, 소설 속의 노틸러스는 완전히 고물 잠수함이지만, 바다 괴수와 군함의 싸움은 언제나 흥미롭죠. 작가는 그 밖에 폭력적인 상황을 계속 연출하고, 피바다를 지속적으로 보여줍니다. 인간과 인간의 갈등 사이에 피바다가 쉬지 않고 흐릅니다. 게다가 희생양은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호의를 보이는 고래들입니다. 그런 고래들이 피범벅 육편으로 변합니다. 지루할 틈이 없는, 자극적인 소설이죠.
아쉽지만, <메그>는 깊은 사변이나 사이언스 픽션의 전복과 별로 인연이 없습니다. 분명히 자극적이고 재미있는 소설이지만, 결국 <메그>는 전형적인 테크노 스릴러에 머뭅니다. 아마 작가는 그 이상 나갈 마음이 없었을 겁니다. 세상을 전복시키는 본격적인 사이언스 픽션의 영역에 들어올 마음이 없었을 겁니다. <메그> 이후 작가 스티브 앨튼은 꾸준히 바다 괴수 소설들을 썼고, 저는 그것들을 모두 읽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아무래도 이 양반은 SF 작가보다 테크노 스릴러 작가에 가까운 듯하군요. 공룡을 이용해 전복적인 반전을 노리는 로버트 소여 같은 작가와 다르죠. 하지만 <메그>는 작가의 의도에 충실한 소설이고, 독자들도 원하는 바를 얻었을 겁니다. 무엇보다 사람들의 시각이 고대 지상에 쏠렸을 때, <메그>는 고대 바다에도 모사사우루스 이외에 뭔가가 더 있다고 소리쳤어요. 문학적인 의미보다 대중적인 고생물학에 더 큰 영향을 끼쳤다고 할 수 있겠죠. 그래서 얄팍하다는 소리를 듣겠지만, 뭐, 바다 괴수를 읽기 원하는 독자에게 좋은 선택이 될 겁니다.
바다 괴수를 이용한 보다 전복적인 이야기를 읽고 싶다면, <메그> 이외에 다른 선택들이 많습니다. 아쉽게도 우리나라에 소개되는 작품이 별로 없는 듯하지만, 바다 괴수는 SF 소설 쪽에서 빠지지 않는 소재이고, 그걸 기가 막히게 이용하는 작가들도 많습니다. <메그>는 그런 소설이 아니고, 분명히 인지도 높은 SF 소설들에 비해 실망스러운 점이 있으나, 저는 비판보다 칭찬을 해주고 싶습니다.
어쩌면 이 소설이 1990년대의 그 공룡 열풍을 여전히 간직했고, 제가 아직 그 향수에서 빠져나오지 못했기 때문일지 모릅니다. 소설을 소설 그 자체로 평가하지 않고, 소설을 둘러싼 분위기로 평가하기 때문일지 모릅니다. 만약 그런 분위기를 겪지 않은 독자는 이 책에 좀 더 박한 평가를 내릴 겁니다. 어쨌든 언젠가 그런 열풍이 다시 밀려올지 모릅니다. 어떤 작품이 도화선을 태울지 알지 못하지만, 언젠가 그런 작품이 또 등장하고 다시 열풍이 몰려올지 모르죠. 어쩌면 그때 사람들은 다시 <메그>를 좀 더 호의적으로 봐줄지 모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