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생태주의
<붉은 화성> - 새로운 문명을 위한 담론들 본문
외계 행성 개척은 SF 소설의 흔한 소재 중 하나입니다. 19세기부터 SF 소설은 머나먼 우주를 바라봤고, 어떻게 인류가 그 우주에서 새로운 삶을 꾸릴 수 있는지 고민했습니다. 아니, 19세기 이전부터 사람들은 새로운 세계와 새로운 문명을 꿈구곤 했죠. 19세기 이후 과학 기술이 발달했기 때문에 그런 고민들은 보다 논리적이고 체계적으로 바뀌었고, SF 소설들은 외계 행성과 인류 개척자들을 묘사했습니다.
이런 창작물들을 살펴보면, 개척자들이 낯선 세상에서 안락하고 지속 가능한 삶을 꾸리기 위해 얼마나 고생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이런 창작물들은 외계 개척자들을 통해 문명이라는 것이 어떻게 꽃을 피우고 여물어가고 쇠락하는지 보여줍니다. <신비의 섬>처럼 SF 소설은 구태여 외계 행성으로 진출하지 않아도 이런 문명의 개화와 성숙과 흥망을 보여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외계 행성은 훨씬 극적이고 가혹한 환경이고, 생명의 요람 지구와 훨씬 멀리 떨어졌습니다. 따라서 외계 개척 소설은 새로운 장소의 새로운 문명을 보다 파격적으로 보여줄 수 있어요.
하지만 이런 외계 개척 창작물들은 기술적인 부분에만 집중할 경우가 많습니다. 각종 소설, 영화, 게임은 환경 공학적인 부분만 치중하죠. 로버트 하인라인은 <우주의 개척자>를 썼습니다. 이 소설에서 인류는 외계 위성을 개척하고, 농사를 짓기 위해 엄청나게 고생합니다. 하지만 개척자들은 열심히 농사를 짓거나 건물을 지을 뿐이고, 새로운 사회 구조를 고민하지 않습니다. 인류 문명의 미래를 논의하는 장면이 나오지만, 그런 논의는 현실의 자본주의 체계에서 그리 멀리 나가지 않습니다. 이 소설이 청소년 SF 소설이라는 점을 감안해도, 자본주의 체계가 지구만 아니라 모든 개척 행성을 뒤덮고, 그 와중에 새로운 사회 구조는 절대 등장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우주의 개척자>처럼 외계 개척 창작물들이 인류 문명의 미래를 논하거나 문명을 비판한다고 해도 그 비판적 사고는 현재의 틀 안에 머물 수 있습니다. 그런 경우가 꽤나 많습니다. 자본주의 체계 이외에 인류가 어떤 사회 구조를 시도할 수 있는지, 어떻게 그런 구조가 작동하는지 절대 살피지 않아요. 자본주의 체계에 문제가 많다고 해도 그 체계에서 벗어나려는 시도를 눈곱만큼도 하지 않습니다. (SF 소설들도 그러한데, 하물며 <인터스텔라> 같은 블록버스터는 훨씬 더 그렇습니다.)
하지만 왜 우리가 외계 행성에서조차 자본주의 체계를 유지해야 할까요. 만약 인류가 새로운 행성을 개척한다면, 새로운 사회 구조를 시도할 수 있지 않을까요. 문명이 이제 막 꽃을 피운다면, 기득권들이 제대로 장악하지 못할 수 있습니다. 어쩌면 외계 행성의 새로운 거주지 안에서는 대기업이나 강대국의 입김이 보다 약할지 몰라요. 대기업이나 강대국이 끼어들기 원해도 지구와 외계 행성의 거리가 워낙 멀기 때문에 기득권들이 함부로 간섭할 수 없겠죠.
가령, 남아메리카 국가가 사회주의 운동을 일으킬 때, 미국 같은 강대국은 쉽게 그 국가를 침략하거나 뒤엎을 수 있습니다. 그런 사례를 역사 속에서 무수히 찾아볼 수 있어요. 하지만 외계 행성에서 사회주의 혁명이 일어난다면, 지구의 기득권은 그걸 무마하기 어려울 수 있습니다. 거리가 너무 멀고, 진압 부대가 우주를 항해하는 동안 사회주의 세력이 확고하게 자리를 잡을 수 있어요. 파리 코뮌이나 러시아 소비에트가 기득권의 침략 때문에 무너졌다는 사실을 고려한다면, 이런 지리적 위치는 사회주의 세력에게 커다란 이점이 될 겁니다.
이런 상황을 묘사하는 소설 중 하나가 <붉은 화성>입니다. 제목처럼 <붉은 화성>은 화성인 개척자들을 이야기합니다. 이들은 일련의 과학자들이고, 미국이나 소련 출신이 두드러집니다. 화성 개척자들은 우주선 아레스를 타고 화성을 향해 떠납니다. 그들 앞에 장대한 화성과 새로운 개척지와 낯선 미래가 기다립니다. 이 소설은 개척자들의 우주 항해와 새로운 문명 건설을 주로 노래합니다. 작가 킴 스탠리 로빈슨은 최대한 하드한 감성을 발휘하고 어떻게 인류가 화성에서 새로운 문명을 꽃 피울 수 있는지 서술합니다.
소설은 기술 공학적인 부분에 상당한 비중을 할애하고, 우주선에서 화성 표면으로, 화성 표면에서 새로운 개척지로, 새로운 개척지에서 문명의 성장으로 시선을 옮깁니다. 따라서 <붉은 화성>은 일종의 문명 건설 시뮬레이션을 보는 듯합니다. 과학자들은 각각 식량, 의료, 건축, 자재 공급 등의 여러 분야에서 활약하고, 그런 분야들이 서로 맞물리고 톱니바퀴처럼 착착 돌아갑니다. 처음에는 황량한 붉은 행성 위에 산만한 거주지가 흩어지지만, 점차 개척지가 자리를 잡고 사람들이 사는 곳으로 바뀝니다.
우리나라에서는 비록 이 소설의 초반부만 번역이 되었습니다. 안타깝게도 불새 출판사가 미처 나머지 부분을 출판하지 못했어요. (<인터스텔라>가 천만 관객을 찍는다고 해서 우리나라 사람들이 사이언스 픽션을 좋아한다는 뜻은 아니죠.) 하지만 저는 그 초반부만으로도 이 소설이 특색을 읽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주선 아레스의 항해는 우주 탐사물의 로망을 충분히 담았습니다. 아무것도 장담할 수 없는 그 무한하고 공허한 공간. 거기에서 우주선에 의지해 미지의 바다를 건너는 사람들. 갑작스러운 우주 재난과 우주선의 작동 원리와 사람들의 독특한 일상. 이 소설은 비경 탐험물이 아니지만, 미지의 바다로 항해한다는 설렘을 하드한 방식으로 설명합니다.
아레스가 화성에 도착한 이후 소설은 본격적인 문명 확장에 돌입합니다. 삭막한 붉은 빈 터에서 어느덧 작은 집터들과 아늑한 건축물들이 생기고, 외계 행성의 풍경은 점차 바뀝니다. 낯선 환경에서 수많은 요소들이 상호 작용하고, 그런 것들이 하나로 맞물릴 때 마침내 문명은 눈을 뜹니다. 이 소설을 다니엘 디포의 <로빈슨 크루소> 같은 소설과 비교할 수 있을까요. 저는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로빈슨 크투소>의 주제는 생존이고, <붉은 화성>의 주제는 새로운 문명 건설입니다. 로빈슨 크루소는 혼자 농사를 짓고 가축을 키우고 집을 만드느라 끙끙거렸습니다. 화성 개척자들은 최첨단 장비를 이용하고 뛰어난 과학 지식을 발휘합니다.
그런 차이가 존재함에도 '인적이 없는 빈 터에서 새로운 정착지가 파생하는 과정'은 서로 닮았습니다. 로빈슨 크루소와 화성 개척자들은 모두 낯선 땅에 도착했습니다. 그 땅에는 문명의 흔적이 없습니다. 그들은 여기에서 식량을 키워야 하고 집을 지어야 합니다. 그 과정은 고생이지만, 새 삶이 시작하는 과정은 독자에게 커다란 즐거움을 선사합니다. 이를 창조의 즐거움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겁니다. 글을 쓰거나 그림을 그리거나 조각을 깎는 행위만이 창조는 아니죠. 맨땅에 헤딩(?)하고 무에서 유를 만드는 것, 무질서에서 질서를 뽑아내는 것.
새로운 거주지를 만드는 행위 역시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고 조각을 깎는 것만큼 즐거운 창조입니다. 그 창조의 대상이 글이나 그림이나 조각이 아니라 새로운 개척지일 뿐입니다. 이건 조악한 비유지만, <붉은 화성>을 건설 경영 시뮬레이션 게임에 비유할 수 있을 겁니다. <스타토피아>, <플래닛 베이스>, <언클레임드 월드> 같은 비디오 게임들이 어떨까요. 이런 게임 속에서 플레이어는 자신만의 상상력과 자유와 창조력을 발휘하고, 자신만의 문명을 만들 수 있습니다. 그런 즐거움이 <붉은 화성>에 존재합니다. 훨씬 하드 SF답게.
붉은 화성이 도화지라면, 화성 개척민들과 과학 기술은 붓과 물감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화성 개척지가 등장했을 때, 독자는 그림이 완성된 듯한 즐거움을 느낄 수 있을 겁니다. 이런 비유가 적당하지 않다면, 이를 레고 조립에 비유할 수 있을 겁니다. 레고 그 자체는 그저 흩어진 블록들에 불과합니다. 레고 그 자체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하지만 누군가가 상상력을 발휘하고 자기 입맛대로 블록들을 조립할 때, 마침내 레고는 정형화된 결과물을 보여줍니다. 제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이런 창조의 즐거움입니다.
레고 블록 같은 장난감, <언클레임드 월드> 같은 비디오 게임, <붉은 화성> 같은 하드 SF 소설. 모두 그런 창조의 즐거움을 포함합니다. 특히, <붉은 화성>은 SF 소설답게 그런 즐거움을 각종 과학 기술에서 뽑아냅니다. 어쩌면 21세기 시각에서 이 소설의 외계 개척 과정이 시시하게 보일 수 있습니다. 저는 과학도가 아니기 때문에 이 소설이 얼마나 치밀하게 고증하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과학 지식을 잘 모른다고 해도 '뭔가 과학스러워 보이는 창조의 기쁨'은 분명히 존재합니다. 특히 우리를 둘러싼 환경을 우리 스스로 만든다는 행위는…. 단순히 로봇을 만들거나 복제 동물을 만드는 것보다 훨씬 의미심장하지 않나 싶습니다.
이처럼 새로운 문명을 건설하는 SF 소설들은 많고 많을 겁니다. 그런 소설들과 <붉은 화성>의 가장 큰 차이점은 바로 킴 스탠리 로빈슨이 혁명적인 사회 구조를 노린다는 점입니다. 소설 속에는 다양한 인물들이 등장합니다. 그 중에서 저는 아르카디라는 러시아 과학자와 앤이라는 미국 과학자에 주목하고 싶습니다. 아르카디 보그다노프는 전형적인 사회주의자처럼 보입니다. 아마 <붉은 별>을 쓴 러시아 작가 알렉산드르 보그다노프의 오마쥬일 겁니다.
아레스가 화성에 도착하기 전에 이미 아르카디는 동료 개척자들에게 그들이 평등하고 혁명적인 사회를 만들 수 있다고 선언합니다. 왜 안 되겠습니까? 자유 시장은 수많은 사람들을 억압하고, 화성 개척자들은 그런 오류를 되풀이할 이유가 없습니다. 아르카디는 많은 비판을 받고, 어떤 과학자 동료는 왜 러시아 혁명을 화성에서 다시 시도하느냐고 묻습니다. 하지만 아르카디는 자본주의 체계가 계속 사람들을 억압한다면, 그런 시도를 거부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아르카디가 혁명적인 사회주의자라면, 앤 클레이본은 열렬한 환경 보호론자입니다. 앤은 개척자들이 함부로 테라포밍을 시도해서는 안 된다고 여깁니다. 왜냐하면 화성은 40억 년 이상 고유한 환경을 유지했고, 인류는 아직 그 환경을 제대로 연구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화성에 생명체가 살지만, 인류는 아직 그 생명체를 인식할 수 없을지 모릅니다. 앤은 테라포밍에 강렬하게 반대하고, 어떻게든 화성의 고유한 환경을 지키자고 말합니다.
하지만 이런 의견은 문명 확장과 경제 성장의 논리에 부딪힙니다. 어쩌면 일반적인 환경 보호론자들도 서로 의견이 갈릴지 모르겠습니다. 화성의 환경을 보존하자는 것과 지구의 환경을 보존하자는 것은 서로 다릅니다. 우리가 지구의 환경을 보존하는 이유는 우리 자신과 다른 동물들을 위해서입니다. 하지만 화성에는 인간이나 동물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뭘 위해 화성의 환경을 보존해야 할까요. 이건 답하기 어려운 문제죠. 21세기의 생태주의 철학은 이에 답할 수 있을까요.
한편으로 이 소설에서 흥미로운 부분은 정치 혐오나 정치적 중립성입니다. 어떤 과학자들은 정치를 혐오하거나 정치에 물립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자연 과학자이기 때문에 정치 활동이나 정치 철학에 관심이 없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자연 과학자들은 정치에 관심이 없을지라도 정치는 자연 과학에 관심이 많을 겁니다. 19세기 이전부터 수구 세력들은 자신들의 이데올로기를 정당화하기 위해 각종 자연 과학을 동원했습니다. 자연 과학 속에서 인간은 이기적이고 공격적인 개체로 거듭납니다.
그리고 이런 이기적이고 공격적인 인간상은 자유 시장이나 가부장제를 옹호하는 수단으로 변모합니다. 자연 과학은 결코 정치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았고, 자연 과학자 역시 정치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아니, 과학자 본인이 인류 사회에 몸을 담은 이상, 정치적 행위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자연 과학자가 중립을 지킨다고 말해도 그런 중립은 기득권만 이롭게 할 겁니다. 사실 그건 중립이 아니죠. 암묵적으로 기득권을 지지할 뿐입니다. 설사 개념적인 중립은 존재할지 모르지만, 현실에서 중립은 기득권을 지지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처럼 <붉은 화성>은 흥미로운 물음들을 던집니다. 그저 개척자들이 뚝딱뚝딱 건물만 짓지 않고, 사회의 작동 원리나 환경 파괴를 치밀하게 논의하죠. 아마 이게 기술 공학적인 분야에만 치중하는 SF 소설들과 <붉은 화성>의 가장 큰 차이점일 겁니다. 안타깝게도 불새 출판사가 더 이상 활동하지 않기 때문에 <붉은 화성>은 미완성 번역본입니다. <푸른 화성>이나 <녹색 화성> 같은 속편까지 바라지 않지만, <붉은 화성>만이라도 제대로 나왔다면 좋았을 겁니다. 하지만 이 미완성 번역본만으로도 <붉은 화성>의 독특한 재미를 느낄 수 있다고 봅니다. 사실 이건 반쪽짜리 소설이지만, 그래도 여느 미래학 서적들 못지않은 큰 울림이 있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