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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 생태주의

<메타트로폴리스> - 생태 공동체와 미래 도시들 본문

감상, 분류, 규정/소설을 읽다

<메타트로폴리스> - 생태 공동체와 미래 도시들

OneTiger 2017. 8. 19. 20:00

지리학자 데이빗 하비는 현대 산업 문명이 어떻게 도시를 재편하는지 이야기하곤 합니다. 데이빗 하비는 상당히 좌파적인 학자이고 그래서 도시라는 공간을 빈부 격차와 환경 오염이라는 시각으로 관찰하죠. 하비에 따르면, 도시는 부자와 빈민의 터전을 가르고, 다양한 생산물을 빨아들이고, 엄청난 폐기물을 쏟아놓는 공간입니다. (당연히 그 배후에는 자본주의 체계가 존재합니다.) 도시를 고려하지 않는다면, 현대 문명의 빈곤 문제와 환경 문제를 절대 제대로 관찰하지 못하죠.


그래서 삼림 도시처럼 도시의 해악을 줄이려는 시도들이 많고요. 그렇다면 이런 빈부 격차나 환경 오염과 함께 미래의 도시는 어떻게 변할까요. 사실 수많은 SF 소설들이 미래 도시라는 공간적/문화적/사회적 요소에 주목합니다. 그걸 집중적으로 살피는 작품들 역시 존재합니다. <메타트로폴리스>는 그런 소설 중 하나에 해당합니다. 더 정확히 말한다면, 중편 소설 모음집입니다. 여러 작가들이 공통된 주제, 그러니까 지금까지 언급한 미래 도시와 환경 오염과 빈부 격차와 대안 공동체를 이용해 중편 소설들을 썼습니다.



소설들은 모두 다섯 개이고, 전반적으로 생태주의적 색깔을 강하게 뿜습니다. 대부분 소설들의 분위기는 루돌프 바로나 머레이 북친, 녹색당의 철학에 가깝습니다. 이들은 그저 환경 보호만 외치지 않습니다. 이들은 자연 생태계를 보호하고 빈민들을 돌보고 진정한 민주주의를 실현하기 위해 대안적인 공동체를 구성하죠. 이들은 직접 민주주의를 선호하고, 보다 평등한 사회 구조를 확립하고, 재생 에너지를 활용하고, 과도한 생산이나 소비를 멀리 하고, 사회주의적 혹은 무정부주의적 공동체를 꾸립니다. 코뮨은 생태주의 철학이 아주 좋아하는 공동체 유형이죠.


<메타트로폴리스>의 소설들도 이런 생태주의적인 대안 공동체를 살핍니다. 소설들은 도시가 빈민들을 위협하고 자연 환경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고 너무 비대해졌을 때, 대안 공동체가 진정한 해답이라고 말하는 듯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소설들의 분위기가 하나같이 비슷하다는 뜻은 아닙니다. 각 소설은 저마다 다른 시각을 드러내고, 특히, 존 스칼지의 소설은 다섯 개 중에서 제일 튀는군요. 존 스칼지는 선두 작가인 동시에 자신만의 개성인 배꼽 빠지는 유머와 유쾌·통쾌한 이야기를 주저하지 않고 전개합니다.



특이하게도 <메타트로폴리스>는 일반적인 소설 모음집과 다릅니다. 모음집에 참여하는 작가 다섯 명이 서로 머리를 맞대고 궁리했기 때문입니다. 작가 다섯 명, 존 스칼지, 제이 레이크, 토비어스 버켈, 엘리자베스 베어, 칼 슈뢰더는 하나의 공통된 설정을 구상했고, 그 설정에 따라 각 소설을 씁니다. 그래서 이 소설의 사건이 저 소설에 영향을 미치고, 저 소설의 사건이 그 다음 소설에 영향을 미칩니다. <메타트로폴리스>는 그저 미래 도시 소설을 다섯 개 모아놓는 것에 그치지 않았습니다. 애초에 다섯 작가가 하나의 공통된 세계와 그 세계의 이모저모를 살피기 위해 토론했고, 그 토론을 소설 모음집에 담았어요.


소설 속에서 전세계는 대재앙을 한 번 경험했고, 기후 변화를 거친 디스토피아 상황입니다. 혹은 환경 아포칼립스라고 부를 수 있겠군요. 소비 경제가 변화하고, 자원 역시 고갈 지경에 이르고, 유전자 조작과 사이버네틱 기술이 판을 칩니다. 작가들은 바이오펑크와 사이버펑크, 환경 아포칼립스를 소설들 곳곳에 버무렸습니다. 이런 도시 풍경은 다소 전형적일지 모르나, 소설 속의 대안 공동체는 어느 정도 파격적입니다.



<밤의 숲 속에서>는 제일 먼저 등장하는 소설입니다. 생태 공동체에 영웅 신화를 집어넣은 소설처럼 보입니다. 사람들은 울창한 삼림 속에서 살아가고, 당연히 이 대안 공동체는 무정부주의 성격을 강하게 드러냅니다. 삼림 속에서 생존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생체 공학 기술을 이용하고, 무정부주의 공동체답게 권위나 권력에 기대지 않습니다. 현실의 역사 속에서 그랬던 것처럼 대도시는 이런 대안 공동체가 별로 반갑지 않을 겁니다. 자본 친화적 제국주의가 여러 사회주의 공동체를 무너뜨리고 쿠데타를 주선한 것처럼, 소설 속에서 대도시는 첩보 요원을 파견하고 대안 공동체를 무너뜨리기 위해 애씁니다.


이 소설은 분량이 길고, 따라서 여러 주제들을 둘러봅니다. 아마 첫째 소설이기 때문에 그만큼 여러 주제들을 한꺼번에 나열하려고 한 것 같습니다. 누군가는 유토피아를 건설하고, 누군가는 구세주가 되고, 누군가는 첩보 요원으로 활약하고, 누군가는 생태주의 가치를 역설하고…. 하지만 여러 주제들을 건드리는 것에 비해 사건 전개가 너무 안일하고 평이한 듯합니다. SF 특유의 상상력이나 긴장이 넘치는 사건 전개보다 주제를 둘러보는 것에 초점을 맞췄다고 할까요.



<돼지는 꿀꿀거리는 소리 말고 버릴 게 없다>는 존 스칼지가 썼습니다. 모음집의 다른 소설들이 암울한 분위기와 절망적인 상황을 강조한다면, 이 소설은 처음부터 끝까지 유머로 무장했습니다. <노인의 전쟁>이나 <휴먼 디비전>을 접한 독자는 이 소설의 분위기를 대략적으로 짐작할 수 있을 겁니다. <유령 여단>이나 <신 엔진>과 달리 그리 무게를 잡지 않는군요. 소설의 주제 역시 딱히 무겁지 않습니다. 다른 소설들과 달리 이 소설은 대안 공동체를 진지하게 모색하거나 사회를 전복시키는 데에 관심이 없는 듯합니다.


어쩌면 존 스칼지 본인이 그렇게 혁명적이고 반체제적인 작가가 아니기 때문에 이런 소설이 나왔을지 모르죠. (<작은 친구들의 행성>은 그 결론이 참 순진하게 굴러가죠.) 아니면 스칼지는 독자들이 한 차례 쉬어갈 수 있도록 배려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작가 본인이 '다른 소설들의 틈을 채우기 위해' 이 소설을 썼다고 말했기 때문입니다. 다른 작가들이 진지한 이야기를 전개할 수 있도록 스칼지는 좀 더 쉽고 재미있는 소설을 썼겠죠. 이 소설의 재미는 두 말할 필요가 없을 겁니다. 사람들이 존 스칼지에게 바라는 모든 것들이 담겼을 겁니다. 어쩌면 제일 가볍지만, 제일 인상적인 소설일지 모르겠습니다.



<확률 도시>는 소규모 무력 시위를 이야기합니다. 현대 자본주의 체계에 반대하는 집단들은 다양한 시위를 펼치고, 그 중에 독특한 것들이 많죠. 이 소설은 그런 독특한 시위 문화에서 영감을 받지 않았나 싶습니다. 이 소설의 시위 문화는 불안한 치안 상황에서 비롯합니다. 기후 변화가 지나간 이후, 정부는 치안을 도저히 맡지 못하고, 대신 용병들이 도시를 관리합니다. 중동이나 아프리카의 분쟁 지역만큼 암울하거나 폭력적이지 않으나, 용병들이 도시에 몰렸기 때문에 상황의 대략적인 골격은 비슷하죠.


당연히 경제적으로 도시는 붕괴하는 중이고, 덕분에 곳곳에 빈 건물들이 늘어섰습니다. 이 빈 건물들의 소유자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이걸 차지하기 원하는 집단이 등장합니다. 주인공은 전직 군인이고, 이 집단을 도와요. 특이하게 이들의 폭동은 네트워크 기술과 값싼 교통 수단을 이용합니다. 마치 리듬 게임을 플레이하는 것처럼 이들의 시위 역시 박자가 딱딱 맞아 떨어집니다. 네트워크 기술과 교통을 이용하는 시위가 현실적인지 확신하지 못하겠으나, 이런 리듬감 넘치는 시위는 소설적인 상상력으로 나쁘지 않군요. 아기자기하게 읽는 재미가 넘친다고 할까요.



하지만 한편으로 <확률 도시>는 생태주의의 진부한 한계를 보여줍니다. 이 소설은 문명을 어느 정도 뒤로 돌리자고 말하고, 기술을 포기한다면 세상이 좀 더 좋아질 거라고 말합니다. 물론 구구절절 옳은 이야기입니다. 문제는 기술 문명을 뒤로 돌린다는 것이 그렇게 쉽지 않다는 뜻입니다. 만약 각 가정이 모두 냉장고를 포기한다면, 자연 환경은 좀 더 깨끗해질 겁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그렇게 쉽게 냉장고를 포기할 수 있을까요. 사실 이런 생태주의의 한계는 <에코토피아 비긴스> 같은 소설에서도 나타나고, <메타트로폴리스>의 다른 소설들에서도 종종 드러납니다.


저는 생태주의에 전반적으로 지지를 보내고 싶으나, 이런 전술이나 방법론은 다소 관념적이지 않나 싶습니다. 넷째 소설 <하늘에서 붉은 것은 우리의 피>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인류가 기술적 진보를 부정한다면, 당연히 자연 환경은 깨끗해질 겁니다. 문제는 인류가 그렇게 쉽게 진보를 포기하지 못한다는 점입니다. 아니, 인류는 그럴 수 있으나, 자본주의 기득권은 그렇게 하지 않을 겁니다. 왜? 기술 혁신은 자본주의 체계를 구원하기 때문입니다. 카를 마르크스가 <자본론>에서 지적한 것처럼 자본주의 체계는 기술 혁신을 통해 자유 시장에서 경쟁자를 밀어냅니다. 따라서 인류가 기술적 진보를 포기하고 싶다면, 그 전에 자본주의 체계부터 때려잡아야 할 겁니다. 하지만 <메타트로폴리스>는 그런 점에 별로 관심이 없는 듯합니다.



개인적으로 <하늘에서 붉은 것은 우리의 피>에서 생태주의보다 더 눈에 들어오는 것은 어머니의 고군분투였습니다. 아이를 키우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무너진 도시에서 아이를 키우는 일은 훨씬 어렵습니다. 그저 먹거리나 주거 문제만 아니라 범죄 역시 심각한 수준이죠. 어머니는 최선을 다해 홀로 아이를 키우지만, 결국 한계에 부딪힙니다. 소설은 좌파적인 연대가 이런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결국 연대가 해답이라는 논리지만, 어머니의 고군분투는 나름대로 인상적입니다.


<머나먼 실레니아에서>는 다섯째 소설이고, 다른 소설들보다 사이버네틱 기술을 적극적으로 활용합니다. 다른 소설들이 도시 그 자체의 공간과 공동체에 주목한다면, <머나먼 실레니아에서>는 실제 물리적 도시와 그 도시의 가상 공간을 말합니다. 가상 공간을 실제 도시에 덮어씌우고, 그 도시의 거주자들까지 가상 공간에 참여합니다. 그래서 가상 세계를 조작하는 사람은 실제 사람을 아바타처럼 조종할 수 있습니다. 실제 도시, 가상 공간의 도시, 실제 인물, 아바타. 이 모든 것들이 뒤섞이고, 사이버펑크 특유의 '진짜와 가짜를 구분하지 못하는' 상황에 이릅니다. 상투적인 가상 공간 이야기가 아니기 때문에 마음에 들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지구 반대편에 있는 사람을 조작하고, 그 사람의 생활을 대신 즐길 수 있습니다. 문제는 우리 모두가 누군가의 아바타가 될 수 있다는 점입니다. 다소 충격적인 도시 생활이죠.



총평을 내리자면, 저는 이 소설 모음집이 자본주의 체계를 너무 간과했기 때문에 생태주의의 한계를 적나라하게 드러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저는 소설 속의 생태 철학들이 구구절절 옳은 말이라고 생각하지만, 의외로 이 책은 자본주의의 모순과 체계를 논리적으로 파악하지 않습니다. 그저 재난이 닥치고,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대안 공동체를 이루고, 그게 희망이 됩니다. 두어 가지 소설은 영웅주의에 너무 기대한 듯하고요. 저는 작가들의 생태적 사상에 공감하지만, 그저 모두가 착하게 살아야 한다는 설교는 너무 낭만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은 윌리엄 모리스가 살던 시대가 아니죠. 소설들이 자본주의 체계를 좀 더 논리적으로 분석했다면, 훨씬 현실적으로 보였을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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