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생태주의
<와인드업 걸> - 기이하고 다채로운 식량 디스토피아 본문
소설 <와인드업 걸>은 파올로 바치갈루피가 쓴 디스토피아입니다. 아니, 포스트 아포칼립스라고 할까요. 무지막지한 질병이 전세계를 휩쓸었고, 그래서 소설 속의 세계는 대재앙을 겪었습니다. 이 질병은 수많은 작물과 가축을 죽였고, 인류는 새로운 작물과 가축을 만들어야 했어요. 유전자 조작 기술 덕분에 인류는 질병에 맞설 수 있는 종자를 만들었으나, 상황은 그리 호전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여전히 인류는 질병을 추방하지 못했고, 게다가 다국적 식량 기업들은 이게 노다지가 된다고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다국적 식량 기업들은 유전자 해커를 고용하고, 다른 작물이나 가축의 유전자를 해킹합니다. 그리고 자신들의 종자에 저작권을 걸었죠. 따라서 사람들이 (병에 걸리지 않는) 건강한 음식을 먹고 싶다면, 식량 기업들이 조작한 작물과 가축을 사야 합니다. 이런 식량 기업들의 해킹 공격에 소규모 농민들은 버티지 못하는 듯합니다. 인생의 가장 중요하고 원초적인 요소, 식량이 대기업들의 손에 달렸죠. 사람들은 대기업에 자신의 먹거리를 맡겨야 하고요. 질병 아포칼립스가 식량 기업들의 디스토피아로 이어졌다고 할 수 있겠군요.
물론 이런 식량 디스토피아를 이야기하는 SF 소설들은 많습니다. 다국적 식량 기업, 유전자 조작 곡물, 생물 다양성 붕괴, 먹거리 안보, 농업 혁명. 20세기 중반 이후 이런 것들은 중요한 사회 문제로 떠올랐고, SF 작가들도 식량과 유전 공학과 자연 생태계와 자본주의와 민영화를 주목했습니다. 이 모든 것들이 한데 복잡하게 엉켰고, 사람들의 생존과 자본주의 체계를 움직이는 막대한 동력이 되었죠. 녹색 혁명은 뭔가 대단한 용어처럼 들리고, 사실 막대한 식량을 생산했습니다. 과학 기술은 인류의 빈곤을 해결할 수 있을 것처럼 보였죠.
하지만 노먼 볼로그가 인정했듯 과학 기술은 전부가 아니었습니다. 사회 인프라가 뒷받침하지 않는다면, 아무리 녹색 혁명을 시도해도 사람들이 계속 굶주렸죠. 문제는 강대국의 자본주의 체계가 약소국의 사회 인프라에 아무 관심이 없다는 점입니다. 오히려 녹색 혁명은 토지를 침식시켰고 농업 폐기물을 늘렸습니다. 아울러 소규모 농민들은 식량 회사에 종속되어야 했죠. 녹색 혁명은 과학 기술과 식량 문제와 환경 오염과 자본주의 체계가 절묘하게 어우러진 드라마였습니다. SF 작가들이 여기에 시선을 돌리지 않는다면, 아주 긴요한 소재를 놓치겠죠.
게다가 식량 문제는 시간이 갈수록 더욱 큰 고민거리를 부풀렸습니다. 유전자 조작 기술이 생활 속으로 깊숙이 들어왔기 때문에 환경 단체들은 일제히 반대의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했어요. '유전자 조작 기술'이라는 단어는 굉장한 상상 과학처럼 들리지만, 유전자 조작 기술은 이미 우리의 밥상에서 떨어지지 못하는 단어가 되었습니다. 예전부터 SF 작가들은 생명체 조작을 중요한 소재로 삼았고, 따라서 식량 디스토피아를 이야기하는 SF 소설들도 많죠. <트리피드의 날>처럼 식량 문제를 슬쩍 흘리는 소설부터 <생각보다 싱싱해>처럼 식량 문제가 전세계적인 재난으로 번지는 소설까지, 종류는 다양합니다.
<와인드업 걸>은 그런 식량 디스토피아의 핵심을 후비는 소설입니다. 하지만 이 소설은 그저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자본주의 체계가 세계 정세에 미치는 영향을 전반적으로 둘러봅니다. 게다가 디스토피아의 암울함은 밥상에만 드리우지 않았습니다. 동력은 고갈되고, 사람들은 여기저기에서 죽어가고, 폭력과 약탈과 비리가 곳곳에서 판칩니다. 파올로 바치갈루피는 역동적으로 죽어가는 세계를 창조했고, 이 세계는 암울한 만큼 독특하고 기이합니다.
<와인드업 걸>의 소설 표지에는 마천루 건물들과 재래 시장, 거대한 코끼리가 보입니다. 이 거대한 코끼리는 일반적인 동물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공장을 운영하기 위해 조작한 거대 동물입니다. 동력이 고갈되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공장을 운영하거나 총기를 쏘기 위해 다양한 방법을 고안했습니다. 유전자 조작 코끼리는 그 중 하나입니다. 더 이상 석탄이나 석유, 가스를 이용하지 못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고전적인 방법, 동력(동물의 힘)을 이용합니다. 소나 말이 쟁기를 끌었던 것처럼 소설 속에서 유전자 조작 코끼리가 공장을 돌립니다. 생체 발전소라고 할까요.
물론 이렇게 거대한 동물이 폭주한다면, 한 편의 괴수물을 찍을 수 있겠죠. <와인드업 걸>은 초반부터 그런 처절한 참사를 보여줍니다. 유전자 조작과 동력 고갈과 괴수가 서로 맞물리고 거창한 핏빛 비극을 연출합니다. 이런 독특한 분위기가 소설 전체에 골고루 퍼졌습니다. 이 소설은 도시의 다양한 장소들을 보여주고, 그때마다 독자는 추악하고 잔인하지만 동시에 매력적이고 기이한 풍경에 빠져듭니다. 도시의 뒷골목에는 투명 고양이가 돌아다니고, 어떤 사람들은 유전자 재앙을 끝내기 위해 신종 종교에 몸을 던집니다.
희한하게도 이 소설의 주된 무대는 태국입니다. 미국 작가가 쓴 소설이지만, 배경은 태국의 도시입니다. 아마 다국적 기업의 압박과 약소국의 대립을 보여주기 위해 일부러 태국을 배경으로 삼은 듯합니다. 태국은 자신들만의 작물을 조작했고, 다국적 기업들은 아직 이 작물의 유전자를 해킹하지 못했습니다. 덕분에 기업들의 식량 상품이 태국 시장에 침투하지 못했어요. 게다가 태국은 시장을 열지 않고 자유 무역에 반대하기 때문에 다국적 기업들은 본격적으로 태국에 진입하지 못합니다. 다국적 식량 기업들은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겠죠. 끊임없는 시장 확장은 자본주의 체계의 피할 수 없는 속성이 아닙니까.
하지만 태국은 영원히 성문을 지키지 못할 것처럼 보입니다. 다국적 기업들은 온갖 방법으로 시장을 점유하기 원하고, 회유와 뇌물과 협박이 밥 먹듯이 오고 갑니다. 태국의 환경 경찰들은 다국적 기업의 상품들을 쫓아내지만, 약소국의 경찰이 세계 자본주의의 확장을 얼마나 막을 수 있겠어요. 이 소설은 일종의 공성전입니다. 다국적 기업들은 태국의 성문을 열기 위해 공세를 펼치고, 환경 경찰들은 죽어라 성문을 지키는 수비군입니다. 그게 진짜 성벽이 아니라 보호 무역의 성벽일 뿐이죠.
현실의 약소국들이 자유 무역과 시장 개방과 민영화 앞에서 쓰러지는 것처럼 이 소설 역시 희망적인 구석을 별로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소설의 전반적인 분위기는 가련하고 처절합니다. 작가는 특정한 세력이나 인물을 전적으로 동정하지 않지만, 독자의 눈길은 저항하는 자들에게 쏠리곤 하죠. 하지만 저항하는 자들의 힘은 너무 미약하고, 거대한 압박이 사방에서 해일처럼 밀려옵니다. 저항자들의 문제는 외부의 압박만이 아닙니다.
내부적인 문제 역시 산더미처럼 쌓였고, 저항을 서서히 갉아 먹습니다. 식량 자본주의가 밀려오기 이전에도 사람들은 수많은 피를 흘렸고, 그 피는 또 다른 피를 부릅니다. 외부의 압박과 내부의 부패가 양쪽에서 덮쳐오고, 소설은 산이 무너지는 듯한 절망을 선사합니다. 물론 소설의 분위기가 밑도 끝도 없는 나락으로 굴러 떨어진다는 뜻은 아닙니다. 하지만 사건이 전개되는 동안 희망은 제대로 고개를 들지 않는군요. 이 모든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어디에서부터 손을 대면 좋을지 아무도 알지 못합니다. 저항자들은 싸우고 싸우고 또 싸우지만, 어느 순간 수많은 모순들과 문제들이 사방을 포위했습니다.
작가는 이렇게 기묘한 공간과 산적한 문제들을 강조하기 위해 네 명의 주연 인물들을 보여줍니다. 배경은 태국이지만, 주연 인물 중 태국인은 하나입니다. 화이트 셔츠라고 불리는 환경 경찰이죠. 이 환경 경찰은 자신들이 식량 시장 개방을 막을 주역이라고 생각하지만, 현실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아요. 태국의 내부 문제와 외부 문제가 화이트 셔츠를 포위했기 때문이죠. 배경이 태국이고 소설의 커다란 주제가 식량 시장이기 때문에 화이트 셔츠가 주인공처럼 보이지만, 다른 세 명의 인물들 역시 골고루 비중을 나눠 가집니다.
다국적 기업의 직원은 그 중 하나이고, 유일한 서구인입니다. 이 남자는 태국의 식량 시장을 살피고, 대기업이 태국 시장에 진입할 수 있도록 유도해요. 사실 악의 제국에 봉사하는 남자인 것 같지만, 작가는 상황을 개인의 윤리에 기대지 않습니다. 사회 구조에 중점을 두죠. 이 남자는 어떤 매춘부를 하나 만나고, 그 여자가 바로 '와인드업 걸'입니다. 인조인간이기 때문에 그런 별명이 붙었죠. 이 인조인간은 일본인…, 아니, 일본에서 왔습니다.
인조인간의 이야기가 으레 그렇듯 이 와인드업 걸 역시 자유를 바랍니다. 하지만 인간들도 억압과 압박에 시달리는 중입니다. 인조인간이 쉽게 자유를 얻지 못하죠. 이 인물은 네 명의 주연들 중에서 유일한 여자이고 동시에 개조 생명체입니다. 음, 어쩌면 이 때문에 작가가 제목을 와인드업 걸로 정했는지 모릅니다. 와인드업 걸이 제일 많이 착취를 당하기 때문에. 개인적인 추측이고, 딱히 근거는 없습니다. 마지막 주연 인물은 중국 노인입니다. 이 인물은 태국에서 살아가는 중이지만, 본인이 원해서 이민하지 않았습니다. 피를 부르는 역사에 쫓겼고 어쩔 수 없이 태국에 머무르는 중이죠.
중국이라는 대륙 국가의 영향 때문인지 노인은 시종일관 코쟁이들(서구인들)을 깔보고 자신의 진정한 위상을 차지하기 위해 애씁니다. 게다가 이 노인은 다국적 기업의 공장에서 일해요. 태국을 둘러싼 동(남) 아시아 정세를 제일 여실히 드러내는 인물인 듯합니다. 도시가 복잡한 만큼, 주연 인물들 또한 복잡한 관계를 이루고, 그 갈등은 절정에서 도시 자체를 뒤집습니다. 여기에서 SF 소설 특유의 전복이 터지는 듯합니다. (재미있게도 태국인 환경 경찰은 다른 세 주연 인물들과 깊이 얽매이지 않는군요.)
이처럼 <와인드업 걸>은 다채롭고 풍부한 소설입니다. 질병 아포칼립스의 참혹함과 바이오펑크의 기이함이 뒤섞였습니다. 자본주의 체계의 비인간적인 폐해와 식량 개방의 문제를 날카롭게 해부합니다. 서로 다른 개성적인 인물들이 하나의 공간에서 맞물리고, 온갖 세력들이 폭력적으로 부딪힙니다. 그리고 이런 요소들이 독특한 공간과 사건을 조성하고, 독자를 태국의 추악하고 이질적인 도시로 안내합니다. 파올로 바치갈루피는 기발한 착상에 치중하는 한편, 사회 구조의 부조리를 절대 놓치지 않고, 동시에 개성적인 인물들까지 집어넣는군요. 일종의 만찬과 같은 소설이죠.
한 가지 아쉬움이라면, 작가가 이런 디스토피아를 해결할 수 있는 대안을 제시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어쩌면 작가는 뚜렷한 대안보다 부정적인 상황을 고발하기 원했을지 모르겠군요. 하지만 생태 사회주의적인 대안을 제시했다면 어땠을까 싶습니다. 식량 문제와 민영화와 환경 오염이 합친 만큼, 생태 사회주의는 이런 상황에 좋은 대안이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결국 우리가 저런 문제들을 해결하고 싶다면, 생태 사회주의를 지지해야 할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