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생태주의
<제노블룸>과 트위터 페미니즘 연결, 분류 본문
"이른바 트페미들은 태극기 할배들과 비슷하다. 트페미들과 태극기 할배들은 자본주의를 비판하지 않는다. 양쪽 사이에는 근본적인 유사성이 있다." 이 서술이 옳은가요? 언뜻 이 서술은 틀린 것 같습니다. 트페미들과 태극기 할배들은 너무 다릅니다. 트페미들은 정치적 올바름에 가깝습니다. 태극기 할배들은 수구 보수에 가깝습니다. 트페미들은 도널프 트럼프를 싫어하나, 태극기 할배들은 도널드 트럼프를 지지합니다. 트페미들은 당당한 여자를 외치나, 태극기 할배들은 여자가 조신해야 한다고 외칩니다. 트페미들은 노동 조합들을 지지하나, 태극기 할배들은 노동 조합들을 싫어합니다.
만약 트페미와 태극기 할배가 만난다면, 트페미와 태극기 할배는 옥신각신 싸울 겁니다. 트페미는 자유로운 연애와 비(非)혼인을 인정하나, 태극기 할배는 여자가 결혼하고 아기를 낳아야 한다고 주장할 겁니다. 트페미는 유교적인 명절이 사라져야 한다고 주장하나, 태극기 할배는 유교적인 명절이 전통이라고 반박할 겁니다. 트페미는 동성애 차별 금지법에 찬성하나, 태극기 할배는 동성애가 정신병이라고 모욕할지 모릅니다. 이렇게 트페미들과 태극기 할배들 사이에는 너무 커다란 차이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첫째 문장은 트페미들과 태극기 할배들이 근본적으로 유사하다고 지적합니다.
트페미들과 태극기 할배들이 너무 다름에도, 여러 측면들에서 양쪽이 옥신각신 싸움에도, 왜 양쪽이 근본적으로 유사한가요? 트페미들이 자유 한국당을 싫어하고, 태극기 할배들이 자유 한국당을 지지함에도, 왜 양쪽 사이에 근본적인 유사성이 있나요? 자본주의 시장 경제가 기준이 되기 때문입니다. 트페미들은 자본주의를 비판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트페미들이 노동 조합들을 지지한다고 해도, 트페미들은 자본주의가 문제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트페미들은 그저 인간적인 노동 조건을 응원할 뿐입니다. 트페미들은 자본주의 그 자체를 뒤집기 원하지 않습니다. 태극기 할배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태극기 할배들은 자본주의가 민주주의라고 믿습니다. 태극기 할배들은 자본주의가 자유롭고 부유하다고 믿습니다. 태극기 할배들은 이미 인류 역사가 종착역에 다다랐다고 믿습니다. 인류 역사에게 종착역은 자본주의 시장 경제입니다. 더 이상 인류 역사는 바뀌지 않습니다. 자본주의가 종착역이기 때문에, 자본주의 관점에서 태극기 할배들은 세상을 바라봅니다. 아무리 자본주의가 극악무도한 개망나니 짓거리들을 벌인다고 해도, 태극기 할배들은 자본주의가 옳다고 믿습니다. 태극기 할배들과 달리, 트페미들은 자본주의가 절대적으로 옳다고 믿지 않습니다. 트페미들은 자본가 계급을 비판합니다.
하지만 트페미들이 자본가 계급을 비판한다고 해도, 이건 자본주의 비판으로 이어지지 않습니다. 트페미들은 사회 구조로서 자본주의를 비판하지 않습니다. 트페미들은 자본주의를 사회 구조적으로 비판하지 않습니다. 트페미들은 그저 자본가 계급이 인간적이어야 한다고 주장할 뿐입니다. 트페미들은 자본주의, 임금 노동 제도를 빙자하는 임금 노예 제도가 사라져야 한다고 비판하지 않습니다. 심지어 본질적으로 자본주의가 가부장 문화를 형성함에도, 트페미들은 자본주의가 사라져야 한다고 비판하지 않습니다. 자본주의가 돌봄 노동들을 착취함에도, 트페미들은 이것을 지적하지 않습니다.
잉여 생산물들을 차지하기 위해 자본주의는 돌봄 노동들을 착취합니다. 하지만 트페미들은 자본주의가 사라져야 한다고 주장하지 않습니다. 돌봄 노동들을 착취하기 위해 자본주의는 여자들을 돌봄 노동들에 '억지로' 밀어넣습니다. 하지만 트페미들은 자본주의가 사라져야 한다고 주장하지 않습니다. 자본주의가 돌봄 노동들을 착취하기 때문에, 돌봄 노동들은 보조적인 것, 열등한 것, 미천한 것이 됩니다. 하지만 트페미들은 자본주의가 사라져야 한다고 주장하지 않습니다. 돌봄 노동들이 열등한 것, 미천한 것이고, 많은 돌봄 노동자들이 여자들이기 때문에, 여자들은 열등하고 미천한 존재가 됩니다.
하지만 트페미들은 자본주의가 사라져야 한다고 주장하지 않습니다. 여자가 열등하고 미천하기 때문에, 가부장 문화는 남자가 여자를 정복하고 지배해야 한다고 왜곡합니다. 하지만 트페미들은 자본주의가 사라져야 한다고 주장하지 않습니다. 남자가 여자를 정복하고 지배해야 하기 때문에, 불평등한 사회 구조 속에서 끔찍하고 무서운 성 폭행들은 나타납니다. 하지만 트페미들은 자본주의가 사라져야 한다고 주장하지 않습니다. 여자들에게는 국경이 없으나, 자본주의 체계는 여자 착취를 은폐하고 민족 국가를 강조합니다. 하지만 트페미들은 자본주의가 사라져야 한다고 주장하지 않습니다.
남한 사장 놈팽이들이 동남 아시아 비정규직 여자 노동자들을 폭행한다고 해도, 트페미들은 자본주의가 사라져야 한다고 주장하지 않습니다. 트페미들은 그저 사장 놈팽이들을 개인적으로, 윤리적으로 비판할 뿐입니다. 트페미들은 남한 사장 놈팽이들과 동남 아시아 비정규직 여자 노동자들이 사회 구조적인 계급(자본가-임금 노동자)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트페미들이 이것을 인식한다고 해도, 트페미들은 사회 구조를 뒤집기 원하지 않습니다. 태극기 할배들이 자본주의를 비판하지 않는 것처럼, 트페미들은 자본주의를 비판하지 않습니다. 양쪽 모두 자본주의 그 자체가 문제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트페미들과 태극기 할배들 사이에는 결정적인 유사성이 있습니다. 트페미들과 태극기 할배들 '배후'에는 자본주의 시장 경제라는 근본적인 유사성이 있습니다. 문제는 '기준'입니다. 왜 자본주의 시장 경제가 기준이 되어야 하나요? 트페미들과 태극기 할배들 사이에 많은 차이들이 있음에도, 왜 다른 무엇보다 자본주의가 기준이 되어야 하나요? 왜 당당한 여자 정체성, 비(非)혼인, 자유 연애, 자유 한국당, 동성애, 노동 조합이 기준이 되지 않나요? 왜 당당한 여자 정체성과 노동 조합보다 자본주의 시장 경제가 훨씬 중요한 기준이 되나요? 자본주의 시장 경제가 가장 지배적인 사회 구조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유기체 동물입니다. 유기체 동물로서 인간은 다른 많은 동물들과 비슷합니다. 동물들이 먹고 살아야 하는 것처럼, 인간은 먹고 살아야 합니다. 동물들이 교미하고 새끼들과 알들을 낳는 것처럼, 인간은 섹스하고 아기를 낳아야 합니다. 아무리 인류에게 수많은 상대적인 정체성들이 있다고 해도, 먹고 사는 문제와 사회적인 재생산 문제는 아주 원초적입니다. 여기에는 예외가 없습니다. 북유럽 동성애 백인 남자와 아마존 이성애 원주민 여자는 똑같이 먹고 살아야 합니다. 양쪽은 똑같은 필멸자입니다. 먹고 사는 문제와 사회적인 재생산 문제에 예외가 없기 때문에, 두 가지 문제는 가장 원초적입니다.
먹고 사는 문제와 사회적인 재생산 문제는 인류 문명을 가장 원초적으로 뒷받침합니다. 만약 인간이라는 생물종이 아주 크게 바뀌지 않는다면, 시대에 상관없이, 두 가지 문제는 인류 문명을 가장 원초적으로 뒷받침할 겁니다. 먹고 살기 위해 인간은 자연 환경을 가공해야 합니다. 자연 환경 속에서 인간은 벌집을 따고, 버섯을 줍고, 고구마를 캐고, 물고기를 낚아야 합니다. 하지만 만약 특정한 소수가 자연 환경을 차지한다면? 다른 많은 사람들은 자연 환경을 가공하지 못할 겁니다. 먹고 살기 위해 다른 많은 사람들은 특정한 소수에게 복종해야 합니다. 생산 수단과 먹고 사는 문제는 떨어지지 못합니다.
특정한 소수가 자연 환경을 차지하기 때문에, 특정한 소수는 지배 계급이 됩니다. 피지배 계급들은 묻습니다. "아니, 왜 우리가 당신들을 떠받드나요? 왜 당신들이 자연 환경을 차지하나요?" 지배 계급은 대답합니다. "신이 우리를 지정했기 때문이고, 우리 혈통이 고귀하기 때문이고, 우리가 우월한 백인이기 때문이고, 우리가 근면 성실한 자본가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지배 계급은 명분을 들이대고, 이건 지배적인 관념이 됩니다. 지배적인 관념은 피지배 계급들을 세뇌하고, 그들은 지배 계급에게 복종합니다. 지배 계급이 자연 환경을 차지하기 때문에, 지배 계급은 잉여 생산물들을 차지하고 권력을 강화합니다.
여기에서 오직 생산 수단(자연 환경)만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지배 계급은 돌봄 노동들을 착취해야 합니다. 사회적인 재생산이 인류 문명을 가장 원초적으로 뒷받침하기 때문에, 막대한 이득을 얻고 착취 경제를 유지하기 위해 지배 계급은 돌봄 노동들을 반드시 착취해야 합니다. 지배 계급은 명분을 다시 내세웁니다. 여자는 임신합니다. 여자는 아기에게 젖을 먹입니다. 그래서 여자에게 양육, 돌봄 노동은 의무입니다. 여자의 두 젖가슴은 여자에게 돌봄 노동이 의무라는 증거입니다. 여자들이 돌봄 노동들을 의무적으로 맡기 때문에, 지배 계급은 돌봄 노동자들에게 댓가를 지급하지 않습니다.
지배 계급이 돌봄 노동자들에게 댓가를 지급하지 않기 때문에, 지배 계급은 막대한 이득을 빼돌리고 권력을 강화합니다. 돌봄 노동자들이 댓가를 받지 못하기 때문에, 돌봄 노동은 노동이 아닙니다. 돌봄 노동보다 재화 생산 노동은 훨씬 우월합니다. 돌봄 노동은 보조적이고 열등하고 미천합니다. 여자들이 돌봄 노동들을 맡기 때문에, 여자들 역시 보조적이고 열등하고 미천합니다. 하지만 이건 엉터리 주장입니다. 분명히 오직 여자에게만 두 젖가슴이 있고, 오직 여자만 아기에게 젖을 먹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오직 수유만 돌봄 노동의 전부인가요? 아니, 남자 역시 얼마든지 모성이 될 수 있습니다.
모성, 돌봄은 오직 여자만을 향하지 않습니다. 임신, 출산, 수유가 돌봄 노동의 전부가 아니기 때문에, 남자는 얼마든지 모성, 돌봄 노동자가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만약 성별에 관계없이, 사회 구성원들이 돌봄 노동들을 대대적으로 맡는다면, 지배 계급은 돌봄 노동들을 쉽게 착취하지 못할 테고, 지배 계급은 막대한 이득을 빼돌리지 못할 겁니다. 지배 계급은 권력을 강화하지 못할 겁니다. 그래서 지배 계급은 돌봄 노동과 여자를 '억지로' 연결하고, 여자(의 육체)를 왜곡하고, 오직 재화 생산 노동만 중요하다고 세뇌해야 합니다. 자본주의 시장 경제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자본주의는 가부장적입니다.
하루 종일 이모가 어린 조카딸을 돌본다고 해도, 자랑스러운 반공 독재 국가 헬조선 정부는 이모가 돌봄 노동자라고 인정하지 않습니다. 돌봄 노동자로서 이모는 댓가를 받지 못합니다. 돌봄 노동자들이 고생하기 때문에, 아기가 자라고 성인이 되고 노동력을 발휘함에도, 지배 계급은 돌봄 노동들을 인정하지 않고 댓가들을 지불하지 않습니다. 자본주의 시장 경제에서 노동력은 상품입니다. 참치 통조림이 상품인 것처럼, 인간 노동력은 상품입니다. 임금 노동자는 노동력을 판매하고, 자본가는 임금을 줍니다. 상품으로서 참지 통조림에게 생산 비용이 있는 것처럼, 노동력에게는 생산 비용이 있습니다.
어떻게 사회적으로 비용이 나타납니까? 어떻게 사람들이 비용을 인식하나요? 인류 문명에는 물물 교환 개념이 있습니다. 물물 교환은 어떤 재화와 어떤 재화에 비슷한 비용이 있다고 간주합니다. 만약 물물 교환 과정에서 사람들이 생선 다섯 마리와 버섯 스무 송이를 바꾼다면, 생선 다섯 마리와 버섯 스무 송이에게는 비슷한 비용이 있을 겁니다. 어떻게 사람들이 생선 다섯 마리와 버섯 스무 송이에게 비슷한 비용이 있다고 간주할 수 있나요? 대답은 (사회적인 평균) 노동 시간입니다. 만약 생선 다섯 마리를 낚기 위해 사회 구성원들이 평균적으로 하루를 소모한다면, 생선 다섯 마리 비용은 하루가 됩니다.
만약 버섯 스무 송이를 캐기 위해 사회 구성원들이 평균적으로 하루를 소모한다면, 버섯 스무 송이 비용은 하루가 됩니다. 생선 다섯 마리와 버섯 스무 송이에게 사회적인 평균 노동 시간으로서 하루는 비슷한 비용이 되고, 물물 교환 과정은 생선 다섯 마리와 버섯 스무 송이를 바꿀 수 있습니다. 이렇게 재화 생산은 노동 시간을 요구합니다.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에서 고블린들이 "시간은 금이야, 친구."라고 말하는 것처럼, (노동) 시간은 비용입니다. 돌봄 노동 역시 노동 시간을 요구합니다. '하루 종일' 이모가 어린 조카딸을 돌보는 것처럼, 돌봄 노동 역시 시간을 요구합니다. 돌봄 노동 시간은 비용이 됩니다.
노동력에게 생산 비용이 있기 때문에, 돌봄 노동자들이 댓가들을 받아야 함에도, 자본가 계급은 이것을 빼돌립니다. 지배적인 관념은 돌봄 노동이 노동이 아니라고 세뇌합니다. 여자에게 두 젖가슴이 있기 때문에, 돌봄 노동은 여자 의무입니다. 이건 신성한 의무입니다. 자랑스러운 반공 독재 국가 헬조선에는 공교육 과정이 있습니다. 공교육 과정이 돌봄 노동을 가르치나요? 경제학 교과서들, 사회학 교과서들, 생물학 교과서들이 정당한 노동으로서 돌봄 노동을 가르치나요? 아니, 오히려 헬조선 공교육은 돌봄 노동 착취가 당연하다고 세뇌합니다. 학생들을 세뇌하는 헬조선은 자랑스러운 독재 국가입니다.
독재 국가 헬조선에서 여자가 미천하고 열등한 존재가 되기 때문에, 끔찍하고 무서운 성 폭행들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가부장 문화는 성 폭행들을 미화하고, 신경 쇠약에서 여자들은 벗어나지 못합니다. 언제나 여자들은 잠재적인 성 범죄자들을 두려워해야 합니다. 노예 제도 사회에서 수많은 것들이 흑인 차별로 이어지는 것처럼, 가부장 사회에서 수많은 것들은 여자 차별로 이어집니다. 그래서 이른바 '여자 혐오 만물 이론은 팩트'에 가깝습니다. 자본주의 사회가 가부장 제도이고, 노예 제도 사회가 흑인들을 착취하고 차별하는 것처럼, 가부장 제도가 돌봄 노동들을 착취하고 여자들을 차별하기 때문입니다.
남자들이 여자를 차별할 때, 많은 남자들은 "집구석에서 여자는 애나 봐라."라고 말합니다. 이건 여자가 돌봄 노동자가 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이런 발언은 돌봄 노동을 무시합니다. "여자는 돌봄 노동자가 되어야 한다."는 여자를 무시하고 차별합니다. 반면, 남자들이 여자를 차별할 때, 남자들은 "여자는 대기업 정규직이 되어야 한다."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남자들은 돌봄 노동을 무시하나, 남자들은 대기업 정규직을 무시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남자들을 비롯해 수많은 사람들은 대기업 정규직을 선망합니다. 대기업 정규직이 되기 위해 사람들은 스펙들을 아주 열심히 쌓습니다. 이유가 무엇인가요?
돌봄 노동자가 되기 위해 사람들은 스펙들을 쌓지 않습니다. 왜 돌봄 노동자가 되기 위해 사람들이 스펙들을 쌓지 않나요? 왜 돌봄 노동이 무시 대상이고, 왜 대기업 정규직이 선망의 대상인가요? 돌봄 노동과 대기업 정규직 사이에서 가장 커다란 차이가 무엇인가요? 대답은 안정적이고 높은 임금입니다. 왜 사람들이 대기업 정규직을 선망하나요? 사람들은 좋은 직장을 원합니다. 좋은 직장이 안정적이고 높은 임금을 보장하기 때문입니다. 돌봄 노동은 댓가를 받지 못하나, 대기업 정규직은 댓가로서 안정적이고 높은 임금을 받습니다. 노동이 댓가를 받기 때문에, 사람들은 대기업 정규직을 선망합니다.
돌봄 노동이 댓가를 받지 못하기 때문에, 많은 남자들은 "집구석에서 여자는 애나 봐라."라고 말합니다. 대기업 정규직이 댓가를 받기 때문에, "여자는 대기업 정규직이 되어야 한다."는 발언은 여자를 무시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랑스러운 헬조선에서 이런 발언은 축복이 될 겁니다. 그래서 남자들이 여자를 무시할 때, 남자들은 대기업 정규직을 운운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남자들은 돌봄 노동을 운운합니다. 자본가 계급이 잉여 노동 시간을 반드시 착취해야 하기 때문에, 대기업 정규직은 정당한 댓가를 받지 못합니다. 하지만 대기업 정규직 연봉이 정당한 댓가가 아니라고 해도, 이건 높고 안정적인 댓가입니다.
대기업 정규직 연봉이 높고 안정적인 댓가이기 때문에, 여자를 무시하기 위해 남자들은 대기업 정규직을 운운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여자 차별 문제에서 노동과 댓가는 핵심적인 요소입니다. 이건 오직 돌봄 노동 착취만 가부장 문화를 형성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돌봄 노동 착취 이외에 다른 많은 요소들은 가부장 문화를 형성할 겁니다. 그래서 돌봄 노동 사회화는 절대적이고 완벽한 대안이 되지 못합니다. 돌봄 노동 사회화 이외에 수많은 성 해방 교육들, 운동들, 캠페인들은 중요할 겁니다. 심지어 남자는 정말 태생적으로 가부장적인지 모릅니다. 남자에게 자지가 있기 때문에, 남자는 태생적으로 폭력적인지 모릅니다.
만약 남자가 태생적으로 가부장적이고, 자지가 무기이기 때문에, 남자가 태생적으로 폭력적이라면, 성 해방은 집단 자살이 되어야 할 겁니다. 성 차별을 없애기 위해 남자들은 집단 자살하거나 남자들은 자지들을 뎅겅뎅겅 잘라야 할 겁니다. 아니면 진보한 과학 기술은 성별 차이를 없애야 할지 모릅니다. 문제는 이겁니다. 아무리 성 차별을 없애기 위해 남자들이 집단 자살하거나 남자들이 자지들을 뎅겅뎅겅 자른다고 해도, 본질적으로 자본주의는 착취 경제입니다. 이 세상에서 모든 남자가 사라지고, 오직 여자들만 존재한다고 해도, 여자들의 세상에서 자본주의는 계속 착취할 겁니다.
자본주의가 계속 착취하기 때문에, 여자들의 세상은 또 다른 차별들을 저지를 겁니다. 백인 여자들이 원주민 여자들을 무시하는 것처럼, 지배 계급 여자는 피지배 계급 여자들을 착취하고, 지배적인 관념은 차별 문화를 형성할 겁니다. 아무리 진보한 과학 기술이 성별을 없앤다고 해도, 자본주의는 계속 착취할 겁니다. 이건 '성 해방'이 아닙니다. 적어도 종속-해방 문제는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아무리 남자들이 자지들을 스스로 뎅겅뎅겅 자른다고 해도, 여전히 자본주의는 너무 심각한 문제입니다. 무엇보다 가부장적인 자본주의 사회에서 남자들이 자지들을 스스로 자를 수 있나요?
가부장적인 자본주의 사회에서 남자들이 집단 자살할 수 있나요? 가부장적인 자본주의 사회에서 과학 기술이 성별 차이를 없앨 수 있나요? 돌봄 노동 착취를 미화하기 위해 자본주의 시장 경제에게는 여자들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자본주의에게 여자(의 육체)는 착취를 미화하기 위한 너무 좋은 명분입니다. 여자의 젖꼭지는 아기를 먹입니다. 그래서 여자는 돌봄 노동을 의무적으로 맡아야 합니다. 이건 자연이 여자에게 부과한 의무입니다. 자연은 여자에게 두드러진 특성, 젖꼭지를 부여했습니다. 그래서 여자는 돌봄 노동을 반드시 맡아야 합니다. 자본주의에게 임신, 출산, 수유는 너무 좋은 핑계거리입니다.
어쩌면 이 세상에서 이것들보다 훨씬 좋은 핑계거리는 없을지 모릅니다. 이렇게 여자(의 육체)가 좋은 핑계거리가 됨에도, 지배적인 관념이 오직 여자들만의 세상을 환영할까요? 아니, 자본주의는 오직 여자들만의 세상을 가로막을 겁니다. 아무리 성 해방을 위해 오직 여자들만의 세상이 진정한 대안이라고 해도, 만약 자본주의가 사라지지 않는다면, 남자들은 집단 자살하지 못할 겁니다. 여자들이 남자들을 학살하기 원한다고 해도, 자본주의는 이것을 가로막을 겁니다. 아무리 여자들이 남자들의 자지들을 자르기 원하거나 성별이 사라져야 한다고 해도, 성 해방에게 자본주의는 너무 커다란 걸림돌일 겁니다.
이렇게 자본주의가 심각한 문제임에도, 트페미들은 자본주의가 사라져야 한다고 주장하지 않습니다. 가부장 사회에서 '여자 혐오 만물 이론이 팩트'에 가까움에도, 트페미들은 가부장 사회가 사라져야 한다고 주장하지 않습니다. 가부장 사회가 성 폭행들을 미화함에도, 트페미들은 이것을 사회 구조적으로 방관합니다. 그래서 트페미들과 태극기 할배들은 별로 다르지 않습니다. 이건 드문 사례가 아닙니다. 이미 19세기 진보 좌파들 역시 그저 온갖 좋은 말들을 떠들었을 뿐입니다. 그래서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아무리 진보 좌파들이 급진적이라고 해도, 그들이 자본주의를 비판하지 않기 때문에, 결국 진보 좌파들은 자본가 계급 앞잡이가 된다."고 경고했습니다.
트페미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트페미들 중에는 많은 여자들이 있을 겁니다. 가부장 사회에서 여자들이 피지배 계급이 되고, 피지배 계급으로서 여자들이 착취를 당하고 왜곡을 당함에도, 여자 트페미들은 착취와 왜곡을 사회 구조적으로 방관합니다. 태극기 할배들처럼, 트페미들은 지배 계급 앞잡이가 됩니다. 이건 너무 심각한 상황입니다. 물론 트페미들이 자본주의를 지적하지 않는다고 해도, 이건 트페미들 잘못이 아닙니다. 지배적인 관념이 민중들을 세뇌하기 때문입니다. 자랑스러운 헬조선 공교육은 학생들을 세뇌합니다. 헬조선 문화는 민족 국가 정부를 강조하고 여자 착취를 은폐합니다. 어떻게 이런 상황에서 개인이 지배적인 관념을 쉽게 비판할 수 있나요?
자본주의는 "여자가 가정적이기 때문에, 여자는 산업 노동에 어울리지 않는다."라고 주장하고 비정규직 여자 노동자들을 착취합니다. 여자들이 너무 좋은 착취 대상, 핑계거리이기 때문에, 자본주의는 성별을 없애기 원하지 않을 겁니다. 여자 트페미들이 이런 가부장 사회를 방관한다고 해도, 이건 여자 트페미들 잘못이 아닙니다. 심지어 트페미들이 잘못된 분노를 쏟아낸다고 해도, 이건 트페미들 잘못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들은 트위터 페미니즘이 페미니즘 이미지를 망쳤다고 힐난하나, 이건 멍청한 헛소리입니다. 버지니아 울프가 친절하고 겸손한 남자 Z씨를 언급하는 것처럼, 트위터 페미니즘은 문제가 아닙니다.
본질적으로 자본주의가 가부장적이기 때문에, 트페미들이 잘못된 분노를 쏟아내지 않는다고 해도, 자본주의 속에서 지배적인 관념은 성 해방 사상들을 열심히 무시하고 조롱하고 탄압합니다. 마르크스주의 혁명가들이 여자 정체성을 무시하고 외면한 것처럼, 심지어 지배적인 관념에서 마르크스주의 혁명가들조차 쉽게 벗어나지 못합니다. 마르크스주의 혁명가들에게 지배적인 관념이 너무 험한 장벽이기 때문에, 트페미들에게 지배적인 관념은 훨씬 높고 단단한 장벽입니다. 트페미들이 지배 계급 앞잡이가 된다고 해도, 근본적인 문제는 지배적인 관념이고, 자본주의 시장 경제에서 지배적인 관념은 비롯합니다.
트위터 페미니스트들과 태극기 할배들이 대조적이라고 해도, 근본적인 문제는 자본주의입니다. 트위터 페미니스트들과 태극기 할배들이 비슷하든, 양쪽이 대조적이든, 근본적인 문제는 자본주의입니다. 이건 '팩트'이고, 이건 바뀌지 않습니다. 이 게시글은 트위터 페미니스트들과 태극기 할배들이 비슷하다고 주장하나, 많은 사람들은 여기에 동의하지 않을 겁니다. 많은 사람들은 이 게시글이 틀리다고 주장할 테고, 이런 주장에는 논리적인 근거들이 있을 겁니다. 남자로서 태극기 할배들과 여자로서 (여자) 트위터 페미니스트들이 너무 다르기 때문에, 양쪽은 대조적입니다. 이것 역시 논리적인 주장입니다.
심지어 트위터 페미니즘을 일면적으로 규정하기는 불가능하거나 너무 어려울지 모릅니다. 트위터 페미니즘이 무엇인가요? 누가 트위터 페미니스트들인가요? 트위터 페미니즘이 고정적인 실체인가요? 어디에서부터 어디까지, 트위터 페미니즘인가요? 오직 트위터 유저만 트페미가 되나요? 비록 어떤 인터넷 사용자들이 트위터를 이용하지 않는다고 해도, 만약 그들이 트위터 페미니즘 논조에 동의한다면, 그들은 트페미 범주에 속할 겁니다. 이런 인터넷 사용자들이 정말 트위터 페미니즘인가요, 아니면 그저 동조자에 불과한가요? 비단 트위터 페미니즘만 아니라 분류, 규정, 연결은 너무 어려운 문제입니다.
마르크스주의가 고정적인 실체인가요? 클라라 체트킨과 에르네스토 체 게바라는 마르크스주의자입니다. 하지만 두 사람이 똑같은 마르크스주의자인가요? 클라라 체트킨과 테오도어 아도르노가 똑같은 마르크스주의자인가요? 경제학 서적 <자본의 축적>과 우주 탐사 소설 <안드로메다 성운>이 똑같이 마르크스주의 서적인가요? 어떻게 경제학 서적과 우주 탐사 소설이 똑같이 마르크스주의 서적이 되나요? 클라라 체트킨, 에르네스토 체 게바라, 이반 예프레모프, 테오도어 아도르노는 모두 똑같은 마르크스주의에 기반하나, 네 사람들은 크게 다릅니다. 그래서 마르크스주의 계보는 복잡합니다.
그래서 마르크스주의에서 수정주의, 교조주의 논쟁들은 끊이지 않습니다. 심지어 지식인들이 마르크스·엥겔스 전집을 아직 완전히 연구하지 못했기 때문에, 여전히 소비에트 연방에게 모호한 부분들이 있기 때문에, 어떤 사람들은 마르크스주의가 존재하지 못한다고 주장합니다. 이런 주장은 지배 계급 앞잡이가 될지 모르나, 분명히 마르크스·엥겔스 연구는 아직 완전하지 않습니다. 마르크스주의 계보가 너무 복잡한 것처럼, SF 장르는 너무 복잡합니다. SF 팬들은 무엇이 SF인지 인식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SF 울타리 안에 너무 다양한 것들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어떻게 이것들이 하나가 될 수 있나요?
샬롯 퍼킨스 길먼은 페미니즘 유토피아, 모성 사회 소설을 썼습니다. 이게 SF 울타리에 들어가나요? 제임스 팁트리 주니어는 샬롯 퍼킨스 길먼을 오마쥬하고 <휴스턴, 휴스턴, 들리는가?>를 쓴 것 같습니다. 분명히 <휴스턴, 휴스턴, 들리는가?>는 SF 소설입니다. 제임스 팁트리 주니어는 SF 작가입니다. 그래서 샬롯 퍼킨스 길먼이 SF 작가가 되나요? 이렇게 뭔가를 규정, 분류하기는 헛갈리고,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이 게시글이 트위터 페미니즘을 너무 단순하고 편협하게 분류한다고 비판할지 모릅니다. 이런 비판은 타당합니다. 하지만 어떤 트위터 유저들이 성 해방을 격렬하게 외침에도, 만약 그들이 자본주의를 방관한다면, 이런 외면은 태극기 할배들과 다르지 않을 겁니다.
그래서 자본주의 시장 경제는 훨씬 근본적인 문제, 아주 중요한 기준이 됩니다. 트페미-태극기 할배 사례가 보여주는 것처럼, 우리가 뭔가와 뭔가를 연결할 때, 우리는 분류 그 자체보다 분류 '배후'와 분류 '기준'을 파악해야 할 겁니다. 생태학 SF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비디오 게임 <제노블룸>은 외계 식생들과 대체 진화 역사를 제시합니다. 만약 게임 플레이어가 <제노블룸>을 플레이하고 자본주의 시장 경제를 비판한다면, 이런 연결이 타당한가요? '외계 식생들-대체 진화 역사-자본주의 비판'이 타당한 연결, 타당한 분류인가요? 소설 <세상을 가리키는 말은 숲>과 영화 <아바타>와 비디오 게임 <문명: 비욘드 어스>처럼, 비디오 게임 <제노블룸>은 생태학 SF 범주에 속합니다.
[외계 식생들은 생태학 SF 설정입니다. 그래서 <제노블룸>과 자본주의 환경 오염이 이어질 수 있나요?]
소설 <세상 숲>과 영화 <아바타>와 비디오 게임 <비욘드 어스>와 <제노블룸>은 모두 외계 식생들을 묘사합니다. 소설 <세상 숲>과 영화 <아바타>와 비디오 게임 <비욘드 어스>는 자본주의 시장 경제를 비판합니다. 적어도 소설 <세상 숲>과 영화 <아바타>와 비디오 게임 <비욘드 어스>에는 자본주의를 비판하기 위한 가능성, 잠재력이 있습니다. <아바타>는 탐욕스럽고 폭력적인 다국적 기업, 아니, 다행성 기업을 보여줍니다. 하지만 <제노블룸>은 영리 기업이 자연 환경을 파괴한다고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아바타>와 <제노블룸>은 똑같이 외계 식생들을 제시하고, 양쪽은 생태학 사이언스 픽션입니다.
하지만 <아바타>와 <제노블룸>이 똑같이 외계 식생들을 제시하고, 양쪽이 똑같이 생태학 SF 울타리에 들어간다고 해도, <아바타>와 달리, <제노블룸>은 다국적 영리 기업이 폭력적이라고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제노블룸>이 폭력적인 영리 기업을 이야기하지 않음에도, 어떻게 게임 플레이어가 <제노블룸>과 자본주의 비판을 연결할 수 있나요? '배후'와 '기준'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전반적으로 생태학 SF 장르에서 환경 보호가 가장 커다란 주제이고, <제노블룸>이 생태학 SF 장르에 속하기 때문에, <제노블룸>이 환경 오염을 직접 이야기하지 않는다고 해도, 게임 플레이어는 자본주의를 비판할 수 있습니다.
<제노블룸>은 외계 식생들을 제시하나, 현실 속에는 외계 식생들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적어도 우주 생물학자들은 신비로운 외계 식생들을 아직 찾지 못했습니다. 현실 속에 외계 식생들이 존재하지 않음에도, 왜 생태학 SF 소설들, 영화들, 게임들이 외계 식생들을 묘사하나요? 우리가 추상을 감각으로 전환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자연 환경이 신비롭고, 낯설고, 기이하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신비롭고 낯설고 기이한 감정은 추상적입니다. 우리는 신비로움을 직접 구경하지 못하고 직접 만지지 못합니다. 반면, <제노블룸>에서 게임 플레이어는 외계 식생들을 직접 구경하고 직접 조성할 수 있습니다.
신비로운 감정은 추상적이나, 외계 식생들은 감각적입니다. 심지어 <제노블룸>에서 게임 플레이어가 작은 신이 되고 자연 생태계를 관리하기 때문에, <제노블룸>은 인간적입니다. <제노블룸>에서 외계 식생 관리는 자연 환경이 감각적이고 인간적이라고 표현/비유합니다. 비록 픽셀 그래픽이 너무 단순하다고 해도, 대체 진화 역사, 외계 식생을 관리한다는 개념 그 자체는 신비롭습니다. 물론 어떤 게임 플레이어들은 반박할지 모릅니다. "어떻게 단순한 픽셀 그래픽이 신비로운 외계 식생들을 표현하지? 형식과 감성은 일치해야 해! 형식이 단순한 픽셀 그래픽이기 때문에, 외계 식생들은 신비롭지 않아!"
이런 반박은 틀리지 않습니다. 영화 <아바타>처럼, 신비로운 외계 식생들을 묘사하기 위해 생태학 SF는 엄청난 비용을 투자해야 할지 모릅니다. 그렇다고 해도 외계 식생이라는 단어에는 신비롭고 낯설고 기이한 감정이 있습니다. 비단 <제노블룸>만 아니라 전반적으로 생태학 SF 울타리에서 외계 식생들은 신비롭고 낯설고 기이한 감정을 가리킵니다. 해석들이 다양하기 때문에, 어떤 게임 플레이어들은 단순한 픽셀 그래픽이 그저 퍼즐에 어울릴 뿐이라고 느낄 테고, (비록 그래픽이 조잡하다고 해도) 어떤 게임 플레이어들은 외계 식생 설정이 신비롭다고 느낄 겁니다. 두 가지 해석은 합의하지 못합니다.
심지어 어떤 게임 플레이어들은 픽셀 그래픽 게임으로서 <제노블룸>이 외계 식생들을 다채롭고 섬세하게 표현한다고 느낄지 모릅니다. <제노블룸>과 <어스텅>을 비교해 보세요. 양쪽에서 생태계 시뮬레이션, 픽셀 그래픽, 외계 식생들, 작은 신으로서 게임 플레이어, 2D 측면 시점은 근본적인 유사성들입니다. 하지만 <어스텅>보다 <제노블룸>은 외계 식생들을 훨씬 다채롭고 섬세하게 표현합니다. 분명히 <어스텅>에서 여러 (외계) 버섯들과 <제노블룸>에서 여러 외계 식생들은 다릅니다. 그래서 어떤 게임 플레이어들은 <제노블룸>이 외계 식생들을 신비롭고 기이하게 묘사한다고 느낄지 모릅니다.
이렇게 비디오 게임 같은 창작물들은 다양한 해석들을 제시합니다. 많은 상황들에서 해석들은 일치하지 않습니다. 며칠 전에 1월 24일 게시글(링크)은 <어스텅>이 재미있는 퍼즐로서 외계 자연을 묘사한다고 설명했고, 이런 설명은 논리적이나, 그렇다고 해도 어떤 게임 플레이어들은 외계 행성 균류 풍경이 신비롭다고 느낄지 모릅니다. 비디오 게임 <스텔라리스>가 기절할 정도로 멋진 우주 풍경들(Stunning Space Visuals)을 자랑하는 것처럼, 어떤 게임 플레이어들은 외계 행성 균류 풍경이 신비롭고 기이하다고 느낄지 모릅니다. 다른 게임 플레이어들은 반박할 테고, 여러 반박들은 합의하지 못할 겁니다.
비단 1월 24일 게시글만 아니라 다른 게시글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이 블로그는 여러 해석들을 제시하나, 아무리 이런 해석들이 논리적이라고 해도, 논리는 전부가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은 이 블로그 해석에 논리적으로 반박하고 새로운 해석들을 제시할 겁니다. 비단 <제노블룸>과 <어스텅>만 아니라 수많은 소설들, 만화들, 영화들, 게임들은 새로운 해석들을 제시합니다. 그래서 예술가들과 철학자들과 평론가들은 무엇이 타당한 해석인지 논쟁을 벌입니다. 도서관에서 많은 평론 서적들은 자신들이 가장 타당한 해석이라고 주장합니다. <제노블룸> 해석들이 충돌한다고 해도, 이건 이상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제노블룸>은 오직 개별적으로만 존재하지 않습니다. <제노블룸>은 생태학 SF 범주에 속합니다. 게임 플레이어가 <제노블룸>을 플레이하는 동안, 게임 플레이어는 <제노블룸>을 오직 개별적으로만 인식하지 않을 겁니다. 만약 게임 플레이어가 생태학 SF 공식에 익숙하다면, 게임 플레이어는 훨씬 많은 것들을 인식할 겁니다. 비록 게임 플레이어가 많은 것들을 느끼지 못한다고 해도, 사회 관계 앙상블 속에서 인간이 나타나는 것처럼, 생태학 SF 전형 속에서 <제노블룸>은 나타납니다. 만약 개별적인 <제노블룸>보다 생태학 SF 전형이 우선한다면, 어떻게 생태학 SF 장르가 나타납니까?
현실 속에서 우리가 자연 환경을 느끼지 못한다면, 생태학 SF 장르는 나타나지 않을 겁니다. 우리가 자연 환경을 느끼고 추상을 감각으로 전환하기 때문에, 생태학 SF 장르는 나타납니다. 생태학 SF 장르에게 자연 환경(과 자연 환경을 바라보기 위한 시선)은 생산 조건입니다. 결국 신비로운 외계 식생들 '배후'에는 현실 속의 자연 환경이 있습니다. 하지만 자본주의는 자연 환경을 수탈합니다. 잉여 생산물들을 차지하기 위해 자본주의가 생산 수단들을 빼앗고 돌봄 노동들을 착취하는 것처럼, 자본주의는 자연 환경을 수탈합니다. 그래서 <아바타>는 외계 식생들을 이용하고 다행성 기업을 비판합니다.
<아바타>와 달리, <제노블룸>이 폭력적인 영리 기업을 직접 보여주지 않는다고 해도, 외계 식생들 배후에 지구 자연 환경이 있고, 자본주의가 지구 자연 환경을 수탈하기 때문에, 게임 플레이어는 자본주의를 비판할 수 있습니다. 이건 게임 플레이어가 자본주의를 반드시 비판해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많은 게임 플레이어들은 <제노블룸>과 자본주의 비판을 연결하지 않을 겁니다. 이건 해석 문제이고, 해석들은 다양합니다. 트페미-태극기 할배 해석들이 다양할 수 있는 것처럼, <제노블룸>은 다양한 해석들을 제시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트페미-태극기 할배 '배후'에서 자본주의는 중요한 '기준'입니다.
트페미-태극기 할배 '배후'에서 자본주의가 중요한 '기준'이 되는 것처럼, 외계 식생들 '배후'에 지구 자연 환경이 있기 때문에, 자본주의 비판은 중요한 '기준'이 됩니다. 온갖 생태학 서적들, 자연 다큐멘터리 서적들은 기후 변화를 걱정합니다. 자연 과학으로서 생태학에게 환경 운동이 목표가 아님에도, 온갖 생태학 서적들, 자연 다큐멘터리 서적들은 기후 변화를 걱정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제노블룸>은 혼자 예외가 되지 못할 겁니다. 전반적인 생태학 SF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만약 소설, 만화, 영화, 게임 같은 창작물들이 근대 생태학과 비일상적인 상상력을 합친다면, 이것들은 생태학 SF 장르에 속할 겁니다.
생태학 SF '배후'에는 근대 생태학이 있습니다. 생태학 SF 장르에게 근대 생태학은 생산 조건입니다. 소설 <소멸의 땅>이 생태학 SF 범주에 속하나요, 아니면 속하지 않나요? 해석들은 다양할 겁니다. 하지만 <소멸의 땅>이 생태학 SF 범주에 속하지 않는다고 해도, <소멸의 땅>에게 근대 생태학, 여자 생물학자는 생산 조건입니다. 아무리 아시시의 성인 프란체스코가 동물들에 친숙하다고 해도, 중세 프란체스코 성인과 근대 여자 생물학자는 다릅니다. <소멸의 땅>이 생태학 SF 범주에 속하든, 이 소설이 속하지 않든, 근대 생태학은 근본적인 생산 조건입니다. 그리고 근대 생태학은 기후 변화를 걱정합니다.
생태학 SF 장르에게 근대 생태학이 근본적인 생산 조건이고, 근대 생태학이 기후 변화를 걱정하기 때문에, 개별적인 생태학 SF 소설들, 만화들, 영화들, 게임들이 자본주의를 직접 비판하지 않는다고 해도, 전반적인 생태학 SF 장르에는 자본주의를 비판하기 위한 가능성, 잠재력이 있습니다. '배후'가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에, SF 평론가들이 생태학 SF 범주를 분류하고 규정하는 동안, SF 평론가들은 자본주의 환경 오염을 외면하지 못할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