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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고 온건한 방파제의 연약함 본문

감상, 분류, 규정/생태 사회주의, 에코 페미니즘

작고 온건한 방파제의 연약함

OneTiger 2017. 5. 12. 20:00

<뒤 돌아보며>와 <에코토피아 뉴스>는 모두 사회주의 유토피아를 이야기합니다. 자유 시장이 사라지고, 착취와 오염이 줄어들고, 사람들은 평등하게 일하고, 노동의 진정한 가치가 살아나고, 이런 이야기들이 전개됩니다. 그렇다고 해서 두 소설의 사회주의 체계가 완전히 똑같지 않습니다. 게다가 이런 사회주의로 이행하는 과정 역시 다릅니다. <뒤 돌아보며>는 정당들이 평화롭게 사회주의 이행을 건설했고, 그래서 자연스럽게 자본주의가 사라졌다고 말합니다.


반면, <에코토피아 뉴스>는 그렇게 평화롭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인민들이 평등한 구조를 원해도 기득권은 권력을 쉽게 내려놓을 생각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엄청난 무장 투쟁이 벌어졌고, 피비린내와 화약 냄새가 진동하는 끝에 인민들은 사회주의로 이행할 수 있었습니다. <뒤 돌아보며>의 방법이 더 좋을 듯하지만, 안타깝게도 현실은 <에코토피아 뉴스>처럼 흘러갈지 모릅니다. 인민들이 정말 사회주의로 이행하기 바란다면, 지금의 권력층은 그걸 끝까지 방해할 겁니다. 그 결과 내전이 일어날지 모릅니다. 그건 슬픈 일이지만, 저항의 역사는 평화로운 약속 따위가 허구에 불과하다고 증명하죠.



이처럼 <뒤 돌아보며>와 <에코토피아 뉴스>의 사회주의 실현 방법은 각자 다릅니다. 하나는 평화로운 이행이고, 다른 하나는 무장 투쟁입니다. 하지만 급진적이라는 관점에서 두 소설은 비슷합니다. 평화롭게 정당을 건설하든, 칼과 소총과 대포로 무장 투쟁하든, 사회 구조는 급진적으로 바뀌었습니다. 두 소설은 그저 복지 정책이나 공정 무역 따위를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생산 수단은 국가나 인민들의 손에 들어갔고, 생산 방식은 아예 달라졌습니다.


이 소설들 속에서 정부는 더 이상 대기업들과 노동 조합의 사이를 중재하지 않습니다. 대기업과 환경 운동가들이 서로 으르렁거리지 않습니다. 그런 대기업은 아예 존재하지 않습니다. 대기업은 국가의 손으로 넘어가거나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대기업들은 더 이상 노동자들을 함부로 해고하거나 임금을 깎지 못합니다. 함부로 매연을 뿜거나 폐기물을 버리지 못합니다. <뒤 돌아보며>와 <에코토피아 뉴스>는 오직 이런 방법만이 착취와 오염을 없앨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급진적인 사회주의 실현이 아니라면, 착취와 오염은 영원히 이어질 거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현실을 돌아본다면, 그 말이 결코 틀리지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급진적인 사고 방식은 그리 대중적이지 않습니다. 심지어 노동 조합이나 환경 단체도 그리 급진적이지 않습니다. 그들은 자본주의 체계 안에서 뭔가를 시도할 뿐이고, 체계 그 자체를 뒤집지 않습니다. 때때로 노동 조합은 그저 단순한 노동 시간 단축이나 임금 상승만을 원할 뿐입니다. 그건 어느 정도 타협이 가능한 사항이고, 그래서 체계까지 뒤집을 이유가 없습니다. 환경 단체는 온건하고 좋은 정치인을 뽑는다면, 그 온건하고 좋은 정치인이 자연 환경을 지키고 대기업을 규제할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온건한 정치인에게 주목할 뿐이고, 체계까지 뒤집을 이유가 없습니다.


게다가 노동 해방이나 환경 보존에 관심이 없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더욱 급진적인 사고 방식에서 멀어집니다. 사회주의 혁명을 폭동이나 깡패들의 패싸움 정도로 여깁니다. 사실 대부분 사람들은 갑작스러운 변화를 싫어합니다. 사회 구조가 갑작스럽게 변한다면, 사람들은 거기에 쉽게 적응하지 못할 겁니다. 게다가 그런 갑작스러운 변화가 무슨 결과를 초래할지 정확히 예상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급진적인 변화를 경계하고, 조금씩, 천천히 세상이 나아지기 바랍니다.



어쩌면 그 방법이 옳을 수 있습니다. 세상은 조금씩 천천히 바뀌어야 하는지 모릅니다. 급히 밥을 먹는다면 체할지 모릅니다. 온건하고 착한 정치인이 뭔가를 조금씩 바꾼다면, 우리는 거기에 만족해야 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저는 세상이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온건하고 착하고 작은 변화는 결국 도루묵이 되기 쉽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런 온건하고 작은 변화가 나쁘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런 작은 변화도 나름대로 가치가 있고, 저는 그 가치를 존중하고 싶습니다.


하지만 기득권의 힘은 엄청나게 강하고, 세상은 너무 빨리 변하는 중입니다. 온건하고 작은 변화는 (온건하고 작기 때문에) 별로 힘이 없고, 빠른 변화를 따라가기에 너무 느립니다. 그래서 아무리 온건하고 착한 정치인들이 권력을 잡아도 나중에 이른바 '수구 꼴통들'이 그 착한 정치인들의 뒤를 잇습니다. 온건하고 착한 정치인들이 온건하고 작은 변화를 만들면, 수구 꼴통들은 그걸 너무 쉽게 부수거나 없앱니다. 어차피 온건하고 착하고 작았기 때문에 없애거나 부수기도 쉽습니다. 아주 쉽습니다. 그러면 온건한 정치인들의 행위는 뒤로 몇 발자국 물러납니다. 착취와 오염은 여전히 만연하고, 밑바닥 사람들과 동물들은 고통을 받고, 대기업의 이윤만 신나게 늘어납니다.



저는 버락 오마바 대통령이 이런 상황을 단적으로 대변한다고 생각합니다. 오바마 대통령은 정말 많은 호평을 받았습니다. 이렇게 호평을 받는 대통령이 어디에 있을까 싶을 정도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오바마 대통령의 퇴임을 안타까워했고, 오바마의 온건하고 착하고 올바른 정책들을 칭송했습니다. 네, 오바마 대통령은 좋은 사람이죠. 하지만 왜 도널드 트럼프 같은 대통령이 그렇게 훌륭한 오바마의 뒤를 이어야 했을까요. 왜 그렇게 수구 꼴통 같은 인물이 그렇게 온건하고 착한 인물의 뒤를 이어야 했을까요.


왜 환경 오염이 이렇게 심각할 때, 왜 기후 변화가 이렇게 심각할 때, 트럼프 같은 대통령이 오마바의 뒤를 이었을까요. 우리는 이런 점을 한 번 생각해봐야 할 겁니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그렇게 훌륭하다면, 왜 민주당 집권기 8년 동안 기후 변화나 생물 다양성 위기가 크게 회복되지 않았을까요. 왜 여전히 대기업들은 여기저기에서 설치고, 심지어 엄청난 파탄을 저질렀음에도 떵떵거리며 보너스를 챙겼을까요. 왜 원주민들과 야생 동물들은 여전히 고통을 받는 반면, 재벌들은 더 많은 이득 속에서 웃을까요.



저는 그게 너무 온건하고 작은 변화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결국 작은 변화는 뒤로 물러나기 쉽습니다. 얼마 전진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만큼 후퇴하기 쉽습니다. 저는 오바마 대통령이 나쁘다고 욕을 먹어야 한다고 말하는 게 아닙니다. 아무리 오바마 대통령이 좋은 사람이라고 해도 작은 변화는 뒤로 물러나기 쉽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작은 변화가 좋다고 생각할지 몰라도 대기업들은 결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대기업들은 이윤을 축적할 수 있다면, 수단과 물불을 가리지 않습니다. 이건 어디 독재 국가에서 벌어지는 현상들이 아닙니다. 이런 현상들은 우리가 문명적이고 선진국이라고 생각하는 북미와 유럽과 동아시아와 호주에서도 얼마든지 벌어집니다.


사실 우리나라, 한국 역시 엄청난 '선진국'입니다. 경제 수치를 따진다면, 한국만큼 대단한 나라도 별로 없을 겁니다. 하지만 한국의 대기업들은 그렇게 윤리적이나 도덕적이지 않죠. 윤리와 도덕은 상당히 가변적인 요소지만, 한국의 대기업들은 그것조차 제대로 지키지 않습니다. 대기업들이 이윤 축적에만 눈이 멀었다면, 그걸 위해 물불을 가리지 않는다면, 과연 온건하고 작은 변화가 그런 이윤 축적의 탐욕에 제대로 맞설 수 있겠습니까. 압도적이고 어마어마한 파도가 몰려올 때, 작은 방파제 하나로 그걸 막을 수 있겠어요.



만약 그렇게 온건하고 작은 변화가 좋다면, 왜 우리나라 독립 투사들은 총을 쏘거나 폭탄을 던졌을까요. 왜 누군가는 테러에 만족하지 못하고 아예 독립군까지 결성했을까요. 왜 의열단은 일본 제국과 타협하거나 작은 변화를 추구하지 않고, 목숨을 걸고 폭탄을 던졌을까요. 의열단은 그것 이외에 다른 방법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일본 제국은 협상이나 타협이나 작고 온건한 변화 따위를 들어줄 생각이 없었고, 그래서 의열단은 아주 급진적인 방법이 최고라고 생각했습니다. 우리는 그런 의열단의 테러와 희생을 숭고하다고 평가합니다.


하지만 동시에 우리는 사회가 조금씩 천천히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의열단의 급진적인 테러를 호평하는 한편, 사회주의 혁명의 급진성을 부정적으로 평가합니다. 상당히 모순적인 태도입니다. 아, 어쩌면 누군가는 지금 이 시대가 평화롭기 때문에 의열단의 급진성이 필요하지 않다고 주장할지 모릅니다. 그런 주장은 널리고 널렸습니다. 평화로운 시대…. 그런데 정말 이 시대가 그렇게 평화롭나요. 우리가 그저 평화로운 광경만 보는 게 아닐까요. 세상이 그렇게 평화롭다면, 왜 아이들이 주말에 놀이터조차 제대로 나가서 놀 수 없는 겁니까. 이게 정말 평화로운 세상이 맞습니까.



저항의 역사를 살펴보면, 온건하고 작은 변화보다 급진적인 투쟁이 많은 것들을 바꿨습니다. 노동 운동이나 환경 운동이 급진적으로 싸웠을 때, 노동 시간이 줄어들고 임금이 올라가고 규제 정책이 탄생했습니다. 얼마 전에 대선이 있었죠. 누군가는 평화로운 촛불 집회가 성공했다고 말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평화로운 촛불 집회 이전에, 불과 1년 전에, 민중 총궐기의 인민들은 폭우 속에서 물대포를 맞아야 했습니다. 그 가운데 누군가는 세상을 떠나야 했습니다. 사람이 물대포에 맞고 죽어야 했습니다.


이게 과연 평화로운 집회인가요. 하지만 사람들은 촛불 집회의 온건함만 이야기할 뿐이고, 민중 총궐기의 핏방울을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불과 1년 전에 사람이 피를 흘렸음에도 다들 온건함만 이야기하고 온건함만 찾습니다. 물론 저는 당장 쇠파이프와 죽창으로 수구 꼴통들을 때려잡아야 한다고 말하는 게 아닙니다. 저도 그런 방법이 위험하다고 생각하고 그건 순리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중요한 건 우리가 작은 변화에만 만족하지 말아야 한다는 겁니다. 눈에 보이는 것보다 이 시대는 훨씬 위험하고, 작은 변화는 그런 어마어마한 위험 속에 묻힐 겁니다.



이전에도 말했지만, 이건 당장 쇠파이프와 죽창을 들라는 뜻이 아닙니다. 누가 폭력을 좋아하겠어요. 좌파 정당들만 지지해도 많은 것이 급진적으로 바뀔 수 있습니다. 저는 거기에서 더 나가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그래도 좌파 정당들이 더욱 큰 목소리를 낼 수 있다면, 온건하고 느린 변화보다 훨씬 나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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