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생태주의
평등한 동력원의 환경 사회학 본문
[소설 <레비아탄> 시리즈는 개조 생체 동력원을 보여줍니다. 하지만 동력원이 진보의 전부일까요.]
스팀펑크 소설은 19세기 유럽에 마법과 첨단 과학을 짬뽕한 문학입니다. 시대 배경은 반드시 19세기일 필요가 없으나, 수많은 소설들은 19세기 유럽 분위기를 자주 차용하죠. 19세기 배경을 차용하지 않는다고 해도 현대적인 기술보다 고전적인 증기 기관을 주로 선보입니다. 가령, <파반> 같은 소설은 표지 그림에 증기 기관 차량을 내보였습니다. 소설의 첫머리도 증기 기관 차량의 금속성과 매연과 강력한 힘을 이야기하죠.
그렇다고 해서 모든 스팀펑크 소설들이 증기 기관 묘사에 매달린다는 뜻은 아닙니다. 스팀펑크 소설들도 저마다 다르기 때문에 <아누비스의 문>처럼 증기 기관 따위에 아예 관심이 없는 도심 판타지도 있습니다. 하지만 스팀펑크 소설은 제목처럼 증기 기관을 앞세우곤 하고, 독자는 칙칙한 매연과 굴뚝과 공장과 함선과 비행선을 구경할 수 있습니다. 스팀펑크 이외에 디젤펑크나 아토믹펑크 등은 각각 디젤 기관과 핵 발전 등을 주요 소재로 삼습니다. 이런 디젤펑크나 아토믹펑크는 스팀펑크만큼 공식적으로 자리를 잡지 못했으나, 그래도 사이언스 픽션의 한 기둥을 이루었습니다.
스팀펑크, 디젤펑크, 아토믹펑크 등은 모두 동력원과 에너지를 뜻합니다. 우리가 산업 혁명을 떠올릴 때 증기 기관부터 생각하는 것처럼 스팀펑크 역시 증기 기관을 상징으로 삼았습니다. 자동차나 핵 발전소가 1930년대나 현대적인 발전을 상징하는 것처럼 디젤펑크와 아토믹펑크는 디젤 기관과 핵 발전을 상징으로 삼았습니다. 바이오펑크 역시 종종 이런 경향을 보입니다. 소설 <와인드업 걸>에서 사람들은 공장을 운영하기 위해 거대한 개조 코끼리를 이용합니다.
화석 연료가 모두 떨어졌고 핵 발전을 이용할 기술이 없기 때문에 공장 기계를 돌리고 싶다면 개조 코끼리를 동력원으로 사용해야 합니다. <와인드업 걸>은 이 거대한 개조 코끼리로 첫머리를 장식합니다. 거대한 개조 코끼리가 공장 안에서 난동을 부리고, 공장 임원은 코끼리를 처치하기 위해 애쓰죠. 이렇듯 각종 SF 소설들은 동력원을 장르의 상징으로 삼았습니다. 아니, 비단 이런 소설들만 아니라 대부분 SF 소설들은 가상의 동력원이나 과장된 동력원을 필수적으로 묘사합니다. 기술적으로 진보된 사회는 특별한 동력원 없이 원활히 돌아가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비단 저런 SF 소설들만이 아닙니다. 우리 주변을 둘러보면, 에너지 없는 생활을 상상할 수 없습니다. 조리, 조명, 난방, 냉방, 수송, 운영, 통신, 각종 생활 요소들은 모두 에너지를 요구합니다. 시대와 사회에 따라 에너지는 바뀔 수 있으나, 에너지가 없다면 인류 문명은 유지되지 못할 겁니다. 동물들은 식물을 먹거나 다른 동물의 살을 먹거나 다른 미생물과 공생해서 에너지를 얻습니다. 원시적인 인간들 역시 그렇게 에너지를 얻었을 겁니다. 하지만 인류는 불을 사용했고, 동물을 가축으로 삼았습니다. 황소나 군마는 엄청난 엔진이었습니다.
황소는 밭을 갈 수 있고, 군마는 중장 기사를 태울 수 있습니다. 중장 기마병은 현대적인 장갑차와 마찬가지일 겁니다. 말은 풀을 먹고, 장갑차는 석유를 먹을 뿐이겠죠. 인간은 자연 에너지를 이용할 줄 알았고, 풍차를 돌리거나 물레방아를 돌렸습니다. 전열함은 강대국의 상징이지만, 바람을 이용할 수 없었다면 전열함도 아무 소용이 없었겠죠. 노예들이 열심히 노를 저을 수 있었겠지만, 항해사들이 풍력 에너지를 이용할 수 있었기 때문에 범선들이 드넓은 대양을 누빌 수 있었습니다. 뭐, 어쨌든 노예 역시 강력한 동력원이었고, 통치자들은 농사를 짓기 위해 수많은 노예들을 착취했죠.
인간 노동력과 동물 노동력은 훌륭한 동력원이었고, 풍력이나 수력 또한 그랬습니다. 산업 혁명 이후 석탄은 새로운 동력원으로 떠올랐고, 20세기 이후 석유와 천연 가스가 급부상합니다. 전기 역시 19세기부터 동력원이 되었고, 여러 사람들은 기타 다양한 동력원들이 미래 사회를 이끌 거라고 예상하죠. 이런 동력원 덕분에 인류는 거대한 문명을 확장하고 자연에 맞설 수 있었습니다. 나무로 불을 피우고, 석탄으로 불을 피우고, 석유와 전기 난로를 이용하기 때문에 인류는 추운 겨울에도 얼어죽지 않았습니다.
소가 쟁기를 끌었기 때문에, 바람이 배를 밀어줬기 때문에, 기차가 석탄을 태웠기 때문에, 자동차가 석유를 먹었기 때문에 인류는 문명을 발전시킬 수 있었습니다. 이렇듯 동력원은 문명을 떠받치는 밑거름입니다. 당연히 SF 소설들도 이를 놓치지 않았습니다. <해저 2만리>에서 아로낙스 박사는 네모 선장에게 노틸러스의 동력원을 물어봤고, 네모 선장은 노틸러스가 전기로 움직인다고 말하고 전기가 미래의 동력원이 될 거라고 예상했습니다. 우리는 스팀펑크 소설들이 증기 기관을 주로 이야기한다고 생각하지만, 노틸러스처럼 19세기에도 전기 잠수함이 이미 등장했죠.
소설 <베헤모스>에는 개조 동물을 이용하는 세력과 보행 병기를 이용하는 세력이 나옵니다. 영국과 독일이 각각 양쪽을 대표합니다. 영국은 다윈주의자들이라고 불리고, 독일은 철컥이들(클랭커)라고 불립니다. 영국의 비행선은 거대한 부유 고래입니다. <와인드업 걸>처럼 영국 다윈주의자들은 거대한 생체 동력원을 이용하죠. 뭐, <와인드업 걸>의 태국 기술자들은 상황이 너무 암울했기 때문에 생체 동력원을 이용했으나, <베헤모스>의 다윈주의자들은 자신들의 생체 동력원을 자랑으로 생각합니다.
이에 비해 독일 철컥이들은 강력한 증기 기관을 이용하고, 보행 전차나 다관절 함선을 만들었습니다. 철컥이들의 다관절 함선은 굴뚝에서 검은 연기를 푹푹 뿜으며 움직입니다. 영국 해군과 독일 해군이 싸우면, 거대한 두족류 괴수가 다관절 증기 함선을 공격합니다. 이처럼 SF 소설 속에서 동력원의 차이는 문명을 완전히 바꿀 수 있습니다. 비단 소설만의 이야기가 아니죠. 인류 문명은 동력원 때문에 달라졌다고 볼 수 있습니다. 동력원이 문명을 바꾼 전부는 아니지만, 동력원의 변화는 우리의 일상과 거대 산업을 혁신적으로 바꾸었습니다.
사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핵 잠수함 등은 현대 군사력을 상징하는 요소입니다. 왜 이름이 핵 잠수함이겠어요. 핵 발전이 없었다면 이런 잠수함들이 그렇게 오랜 동안 대양을 돌아다니지 못했을 겁니다. 핵 잠수함들이 여유롭게 대양을 돌아다닐 때, 디젤 잠수함들은 끙끙거리며 가까운 바다를 돌아다닐 뿐이죠. 그래서 루이스 멈퍼드는 <기술과 문명>에서 동력원이 사회 구조와 발전 양식을 대대적으로 바꿨다고 주장했습니다. 동력원이 아주 주요한 원인이고 핵심적인 역할이었습니다. 루이스 멈퍼드는 동력원에 따라 시대를 여러 가지로 나누었습니다.
생태 기술 시대는 나무와 물, 관개 기술을 뜻합니다. 화석 기술 시대는 석탄과 석유를 뜻합니다. 새로운 기술 시대는 수력과 풍력, 태양력 등을 뜻합니다. 아울러 이런 동력원은 더 많은 생산량과 생존을 보장합니다. 값싼 공산품이 등장한 이유는 공장이 돌아갈 수 있었기 때문이고, 공장은 석탄을 먹고 삽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석탄이 노예를 해방시켰다고 말하죠. 석탄 덕분에 공장이 돌아갔고, 그래서 전통적인 인간 동력원이 사라졌다는 뜻입니다. 대신 이 인간 동력원들은 공장을 운영하기 위한 노동자가 되었죠. 인간 동력원이 노예에서 노동자로 바뀌었다고 할까요.
저런 이론에 의문을 던질 수 있겠으나, 여기에서 말하고자 하는 바는 그게 아닙니다. 말했다시피 막대한 동력원은 더 많은 생산과 생존을 보장한다는 점입니다. 18세기 이후 사회학은 인류 역사의 주요한 법칙이 '진보'라고 규정했습니다. 사상적인 진보는 자유의 확대를 뜻하고, 기술적인 진보는 경제 발전을 뜻합니다. 경제 발전은 생산량의 증대를 가리킵니다. 진보는 생산량과 비례하고, 사람들은 더 많이 생산할수록 더 진보합니다. 이런 사상은 21세기 지금도 별로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항상 경제 발전을 외칩니다. 무슨 일이 생겨도 경제 발전이 가장 중요한 목표입니다. 아마 경제 발전에 우선하는 논리는 별로 없을 겁니다. 글쎄요, 전쟁이나 안보는 경제 발전보다 앞서겠죠. 하지만 경제가 발전하지 않는다면, 안보 역시 지킬 수 없습니다. 핵 잠수함이 그냥 하늘에서 뚝 떨어지지 않기 때문이죠. 경제가 발전하고 산업이 성장해야 핵 잠수함 같은 물건도 나오겠죠. 그리고 경제가 성장하기 위해 막대한 동력이 필요합니다. 결국 진보는 동력원과 떨어질 수 없습니다.
레슬리 화이트 같은 인류학자는 동력과 기술의 성장이 문화적 발전의 주요 원인이라고 말했습니다. 아마 루이스 멈퍼드의 <기술과 문명>과 대충 상통하는 이론이 아닌가 싶습니다. 레슬리 화이트는 재화와 용역의 생산 규모를 진보의 척도로 가늠했고, 동력 소비와 동력 효율이 진보에 필수적이라고 봤습니다. 이런 이론을 들어보면, 더 많은 동력, 더 많은 에너지, 더 많은 발전소야말로 진보의 지름길 같습니다. 더 많은 동력이야말로 행복의 열쇠이고 문명의 든든한 밑거름인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요.
조지 바살라처럼 이런 '진보=동력 소비'를 비판하는 학자도 있습니다. 문명은 곧 에너지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막대한 동력 소비가 무조건 행복으로 이어진다고 할 수 없겠죠. 설사 막대한 동력 소비가 행복으로 이어진다고 해도 그 행복이 '누구의 행복'인지 물어봐야 할 겁니다. 댐은 막대한 수력을 이용할 수 있으나, 댐 공사 때문에 어떤 사람들은 정든 고향에서 떠나야 했습니다. 핵 발전소는 엄청난 전력을 일으키지만, 송전탑 때문에 시골 주민들은 감옥에 갇혀야 했습니다. 자, 정말 막대한 동력 소비가 행복으로 이어지는 지름길일까요.
막대한 동력은 인류 문명을 떠받쳤고, 지금도 그렇고, 아마 앞으로도 그럴 겁니다. 그 점을 부인할 수 없을 겁니다. 하지만 그런 진보가 곧 만인의 행복이나 평등은 아닙니다. 핵 발전소가 어마어마한 전력을 생산해도 그 전력은 불균형적으로 배분될 수 있고, 여전히 밑바닥 사람들은 추위에 벌벌 떨어야 할 겁니다. 뭐, 환경 오염과 생물 다양성 감소까지 말할 필요는 없겠죠. 창공의 미세 먼지들을 보세요. 누군가는 그것 때문에 병에 걸릴 테고, 동물들은 죽음에 내몰리겠죠. 막대한 동력원은 문명을 떠받치지만, 그 문명 속의 개인들은 결코 평등한 진보를 이룩하지 못합니다.
우리는 그 점을 기억해야 할 겁니다. 거대한 생체 엔진이든, 과장된 증기 기관이든, 우리는 동력원의 발전이 결코 모든 인간들애게 골고루 혜택을 주지 않는다는 점을 명심해야 할 겁니다. 아니, 오히려 상당히 많은 사람들은 그것 때문에 고통을 받을 수 있습니다. 결국 기술만이 능사가 아닙니다. 루이스 멈퍼드는 시대를 동력원에 따라 구분했으나, 한편으로 카를 마르크스의 시대 구분도 중요할 겁니다. 마르크스는 시대를 계급 투쟁에 따라 구분했죠. 멈퍼드도 옳지만, 마르크스도 옳습니다. 핵 발전소만 바라보지 말고, 핵 발전소 때문에 감옥에 들어가는 사람들도 생각해야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