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생태주의
동물을 바라보는 환경 사회학 본문
사람들은 서로 끊임없이 이야기를 합니다. 사람은 이야기하는 동물이 아닐까 싶을 만큼 일상 속에서도 여러 가지를 이야기합니다. 물론 사람만 아니라 수많은 생명체들이 다양한 방법으로 소통하지만, 사람들은 창조적으로 이야기를 지어내거나 이야기하는 과정에서 기쁨을 즐깁니다. 덕분에 소설가라는 업종까지 생겼죠. 심지어 소설가들은 아주 환상적인 이야기까지 짓습니다. 사무엘 콜리지는 이걸 가리켜 불신의 유예라고 불렀고요.
그런데 수많은 시, 소설, 희곡, 대본 등을 보면, 그건 대부분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무슨 뜻인가 하면, 이야기의 주제나 소재가 전부 인간 중심적이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줄창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이야기만 합니다. 사람과 사람.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고, 사람이 사람과 만나고, 사람이 사람과 싸웠고, 기타 등등. 모든 이야기의 중심은 사람이고, 사람들만 득실거립니다. 물론 우리 자신이 사람이기 때문에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를 많이 하기 마련입니다. 그건 이상하거나 잘못된 일이 아닙니다. 아주 당연한 현상이죠. 하지만 이 지구상에는 인간 이외에 다양한 생물들이 살아갑니다. 우리 인간 역시 그런 생물들과 밀접한 관계를 맺습니다.
하지만 수많은 이야기들을 살펴보면, 이 세상에 오직 인간만이 살아가는 것 같습니다. 사람과 사람에 관한 이야기들만 난무하고, 그 외에 다른 이야기를 찾아보기 힘듭니다. 가령, 일상 생황에서 야생 동물을 이야기하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겁니다. 특정한 사람들, 생태학자, 동물원 사육사, 삼림 순찰대, 환경 보호 운동가 등이 아니라면, 아마 야생 동물을 별로 이야기하지 않을 겁니다. 대신 사람들의 주제는 언제나 돈벌이, 직업, 결혼, 전쟁, 투표, 뭐 이런 것들로 흘러갑니다. 정치권에서도 누가 아무르 표범이나 양쯔강 돌고래를 이야기하나요. 녹색당 같은 정당 이외에 꽤나 드물죠. 노동당 같은 죄파 정당은 그래도 녹색당의 의견을 지지하고요.
하지만 녹색당이나 노동당의 지지율은 꽤나 낮습니다. 흔한 주말 드라마 등을 봐도 야생 동물이나 야생 삼림을 이야기하는 경우는 별로 없습니다. 사실 인류 문명은 엄청난 야생 동식물을 말살했고, 지금도 말살하는 중입니다. 생태학자들이 기절초풍할 지경으로 생물 다양성이 사라지는 중입니다. 하지만 그런 것들은 별로 일상이나 드라마의 소재가 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마치 그런 생물들이 이 지구상에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취급합니다. 대왕 오징어부터 작은 풀씨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생물들이 죽어가지만, 그런 생물들은 우리의 이야기에 전혀 나오지 않습니다. 아무리 우리 자신이 인간이라고 해도 이건 너무 인간 중심적인 사고 방식이죠.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하루 종일 생물 다양성만 떠들 수 없는 노릇입니다. 대부분 사람들은 먹고 사는 문제에 급급합니다. 자기 앞길도 가릴 수 없는데, 어떻게 다른 동물들의 삶을 쳐다보겠어요. 희한한 점은 그토록 생물 다양성이 붕괴할 정도로 산업이 발전함에도 여전히 수많은 사람들이 먹고 사는 문제에 매달린다는 겁니다. 이상하죠. 도대체 그 많은 생산물들은 다 어디로 가는 걸까요. 자연 환경이 황폐해질 정도로 생산량이 많다면, 당연히 수많은 사람들이 충분히 먹고 살 수 있어야 합니다. 환경 오염은 사람들까지 위험에 빠뜨릴 지경이죠.
하지만 산업 자본은 그렇게 사람을 위험 속으로 밀어넣었음에도 생산물들은 모두에게 골고루 돌아가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사회 구조가 뭔가 잘못되거나 삐뚤어졌다고 생각할 수 있어요. 자연 환경과 인류 사회의 관계가 뭔가 어긋났거나 비틀렸다고 의심할 수 있습니다. 바로 이런 의심에서 출발하는 학문 분야가 환경 사회학입니다. 학자마다 환경 사회학을 서로 다르게 정의하지만, 가장 기본적인 전제는 '자연 환경과 인류 사회의 관계'입니다. 그리고 환경 오염과 생물 다양성 위기는 여기에서 빠질 수 없는 주제입니다.
사람들이 야생 동물에 관심이 없는 것처럼 사회학도 오랜 동안 자연 환경을 무시했습니다. 사회학의 중요한 개념들, 문화, 경제, 정치, 종교, 규범, 계급 등은 어디까지나 인간들의 이야기였습니다. 야생 동물 따위는 아무 관련이 없었어요. 사회학자들은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사회학은 오직 인간만 이야기했고, 환경 오염이 인간들에게 피해를 끼칠 때 가끔 자연 생태계를 돌아봤을 뿐입니다. 하지만 그것조차 주류가 되지 못했습니다. 사회학자들은 적극적으로 자연 환경을 이야기하지 않았어요. 물론 어떤 학자들은 윌리엄 모리스나 카를 마르크스를 거론할지 모르겠습니다.
윌리엄 모리스는 <에코토피아 뉴스>를 비롯해 여러 곳에서 무분별한 산업 발전을 비판했습니다. 이런 무분별한 산업 발전이 노동자를 도탄에 빠뜨리고 풍성한 자연 환경을 망친다고 비판했죠. 윌리엄 모리스는 너무 낭만적이라고 비판을 받지만, 요즘처럼 환경 아포칼립스가 도래한 시대에서 모리스의 주장을 되새겨볼 필요가 있습니다. 한편, 카를 마르크스는 공산주의자이고, 그래서 대량의 공장 건설과 공산품 양산을 찬양한 바 있습니다. (아, 물론 그 공산은 그 공산이 아닙니다.) 그래서 환경 보호 운동가들은 마르크스를 비롯한 공산주의자를 싫어하죠.
하지만 마르크스는 '인간이 자연에서 소외된다'는 개념 또한 주장했습니다. 마르크스는 노동을 상당히 강조했죠. 인간은 재화를 얻기 위해 자연을 변형시키는데, 이게 바로 노동입니다. 인류 문명이 발전할 수 있었던 까닭은 이런 노동들이 모이고 모였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자동화 기계와 인공지능과 로봇이 대단해도 애초에 인간 노동자가 존재하지 않았다면 로봇들도 등장할 수 없었을 겁니다. 하지만 이런 노동력이 착취를 당하면 자연 상태는 노동자가 아니라 다른 뭔가를 위해 바뀝니다. 마르크스는 그걸 자본주의의 착취라고 봤습니다.
노동자는 자신을 위해 노동하지 않고, 대신 이윤 축적을 위해 노동합니다. 이윤 축적은 자연 생태계 따위에 관심이 없기 때문에 노동자는 어쩔 수 없이 자연을 오염시킵니다. 카를 마르크스를 변호(?)하는 공산주의자들은 마르크스가 생태계에 그리 적대적인 사람이 아니었다고 항변해요. (따라서 공산주의가 환경을 오염시킨다면, 그게 정말 공산주의인지 의심해야 할 겁니다.) 이런 사람들처럼 고전적인 사회학도 환경 문제를 아주 외면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이런 사람들의 주장은 사회학의 주류가 되지 못했고, 주류 사회학은 오직 인간만을 이야기했습니다.
유럽이나 미국에서 1970년대부터 인간 중심주의에 맞서 생태주의가 떠오릅니다. 탈핵, 동물 권리, 녹색당 등이 커다란 화두로 떠오르죠. 사회학도 여기에 영향을 받았고, 결국 환경 사회학이 탄생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니까 환경 사회학은 사회학의 막내라고 할 수 있겠군요. 하지만 환경 사회학은 큰 형님들(주류 사회학)을 아주 호되게 비판합니다. 주류 사회학이 환경에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환경 오염이 학문적으로 연구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분명히 대기업들이 매연을 뭉큼뭉클 내뿜는데도 사회학은 그걸 멍청하게 바라봤죠.
환경 사회학은 그런 멍청한 행위를 용납할 수 없다고 당돌하게 비판합니다. 덕분에 환경 사회학은 사회학 중에서 드물게 야생 동물이나 자연 생태계에 큰 관심을 보입니다. 가령, 우리나라 환경 사회학에서 새만금 간척 사업이나 4대강 사업 등은 빠질 수 없는 논쟁입니다. 그리고 이런 사업들을 논할 때, 수많은 야생 동물들, 갯벌 생물들과 하천 생물들이 무더기로 죽었음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죠. 환경 사회학은 사람만 말하지 않습니다. 어느 강연에서 윤순진 교수가 이야기한 것처럼 지구에는 사람만 살지 않습니다.
그래서 저는 환경 사회학 책을 읽을 때, 종종 SF 소설을 떠올립니다. 누군가는 환경 사회학과 사이언스 픽션이 무슨 관계냐고 반문할지 모르겠습니다. 뭐, 환경 오염과 사회 변화는 SF 소설들의 아주 중요한 소재입니다. 데이빗 브린, 할 클레멘트, 프레데릭 폴, 존 브러너, 커트 보네거트, 마가렛 앳우드, 마이클 크라이튼 등등 하드 SF 소설부터 소프트 소설가를 거쳐 테크노 스릴러 작가까지, 수많은 작가들이 환경 사회학을 이야기했죠. 하지만 저는 그저 이런 이유 때문에 사이언스 픽션을 떠올리지 않았습니다.
앞에서 이야기했듯 인간들의 수많은 이야기는 오직 인간만을 말합니다. 주류 사회학이 오직 인간만을 말한 것처럼요. 하지만 사이언스 픽션은 인간만이 아니라 다른 생물들을 이야기합니다. 마치 환경 사회학이 사회학 중에서 거의 유일하게 자연 생태계를 논하는 것처럼요. 사이언스 픽션에는 아주 작은 미생물부터 개조 동물을 거쳐 집채만한 괴수까지 등장합니다. 이런 생물들은 사이언스 픽션의 주된 소재이고, 그래서 SF 독자는 인간만 아니라 다른 생물들을 바라볼 수 있습니다. 환경 사회학자가 인간만 아니라 다른 동물들을 바라보는 것처럼.
그러니까 이건 비유적인 의미입니다. 환경 사회학은 우리가 자연 생태계를 바라봐야 한다고 외칩니다. 마찬가지로 사이언스 픽션은 우리가 다른 생물들을 바라봐야 한다고 외칩니다. 환경 사회학과 사이언스 픽션은 그저 인간만을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저는 환경 사회학을 볼 때 사이언스 픽션을 떠올립니다. 비유적인 의미로. 어쨌든 이 지구상에는 우리 인류 이외에 수많은 생물들이 살아갑니다. 그게 현실입니다. 생물 다양성을 말살하면, 인류도 결코 제대로 살 수 없습니다.
미세 먼지, 고준위 폐기물, 온갖 오물과 쓰레기, 기후 변화. 이런 것들은 야생 동물만 아니라 인류에게까지 피해를 끼칩니다. 누군가는 발전과 경제 성장을 외치치만, 결국 경제가 성장하는 발판은 착취와 오염입니다. 중산층들도 혜택을 받지만, 그건 착취와 오염의 혜택이고, 게다가 이득의 대부분은 대기업들 호주머니로 들어가죠. 미세 먼지를 뿜고 온실 가스를 뿜어도 밑바닥 사람들은 지옥 속에서 살아가고, 금융 산업은 뻥뻥 거품을 터뜨립니다. 무분별한 산업 발전과 삶의 질은 정확히 비례하지 않습니다. (이것 역시 환경 사회학의 주요 논점이죠.)
그래서 저는 환경 사회학적인 관점을 틔우고 싶다면, SF 소설이 좋은 방법이 아닌가 싶습니다. SF 독자는 인간만 아니라 다른 생물에게 눈을 돌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더군다나 다양한 환경 아포칼립스 소설들을 고려한다면, 환경 사회학은 SF 소설과 훨씬 밀접한 관계가 있을지 모릅니다. 온갖 디스토피아 소설과 포스트 아포칼립스 소설은 산업 발전과 사회 구조와 생태계 파괴를 논합니다. 덕분에 <불온한 생태학>처럼 환경 사회학 책들은 가끔 SF 작품들을 인용하죠.
고장원님은 <대재앙 이후의 생존자>에서 환경 사회학적 화제 때문에 SF 소설들도 환경 문제를 주목하기 시작했다고 이야기했습니다. SF 소설은 환경 사회학적인 관점을 튀우기 위한 좋은 밑거름이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하다못해 <고지라> 같은 블록버스터 영화도 (틀에 박히고 뻔한 논리지만) 핵 발전의 위험을 경고합니다. 좌파는 이런 영화에서 (뻔하고 뻔하지만) 환경 보존 담론을 이끌어낼 수 있어요. <고지라>는 인간 이외의 존재(각종 괴수들)과 자연 생태계의 오염(핵 발전소 붕괴)를 모두 설명합니다. 이 어찌 좋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