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생태주의
SF 소설은 좌파 사상의 징검다리가 될 수 있을까 본문
사실 할아버지는 2세대 세계 산업 노동 조합의 조합원이다. 미시시피에서 출발한 의회 공화국 '누군가의 로드리게즈'는 습지 복원과 소득 조정 작업의 진전, 유권자와의 소통 확대, 연안 철수 등의 사안에 대해 감사의 뜻을 표했다. 투덜이 레즈는 역시 불만을 터뜨렸다. “사회주의자들은 말만 잘할 뿐이야.” 할아버지가 웃음을 터뜨렸다. “그것이 감사해야 할 대목이란다. 나는 소득 조정이라는 단어 자체가 없던 시절을 기억한단다.” (중략) “해수면이 높아진다고 비난하지 말거라. 자본주의가 좀 더 일찍 무너졌다면, 지구 온난화를 그만큼 더 일찍 막았을 거야. 네가 하는 일의 절반은 피해를 억제하는 것 아니냐?” 할아버지가 제시를 타일렀다. (중략) 할아버지는 약간 슬픈 표정을 지었다. “나는 이미 늙었단다. 세계에는 80살이 넘은 나 같은 늙은이보다 치료를 기다리는 수많은 젊은이들이 있단다. 내가 사라져야 공평한 일이야. 그들이 말하는 것처럼 나는 그냥 스쳐 지나가는 거지.” (중략) 우리 모두 그랬다. 난 커피를 내왔다. 물론 공정한 거래다.
위 이야기는 단편 소설 <2077년의 추수 감사절 풍경>에서 발췌했습니다. 테리 비슨이 쓴 소설입니다. 내용을 보면 아시겠지만, 작가는 근미래에 자본주의가 무너졌고 사회주의가 득세했다고 가정했습니다. 그리고 그 세상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간접적으로 짤막하게 보여줍니다. 한 가족이 추수 감사절을 지내는 중이죠. 아직 자본주의를 기억하는 할아버지가 옛날 이야기를 해주고, 손주(젊은이)들에게 세상을 평등하고 지속 가능하게 가꾸라고 당부합니다.
이 소설은 대부분 현재의 여러 문제점들, 그러니까 환경 오염과 사회적 불평등과 전쟁, 과학 발전 등을 논의합니다. 우리 인류가 사회주의 체계를 이룩하면, 작금의 다양한 문제점을 해결할 수 있다고 주장하죠. 어디까지나 가정이기 때문에 작가의 가능성이 무조건 옳다고 할 수 없습니다. 몇몇 부분은 잘못 예상했다 싶고요. 미래를 정확히 예측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아무리 뛰어난 미래학자라도 완전히 정확한 미래를 상상할 수 없죠. SF 작가는 오죽할까요. 가끔 SF 소설이 미래 상황을 기가 막히게 예언할 수 있으나, SF 소설의 역할은 미래 예언이 아닙니다.
어차피 SF 소설가는 점쟁이가 아닙니다. SF 소설가가 미래를 정확하게 예측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저 논리적으로 가능성을 논한다면, 그걸로 족하죠. 만약 그 가능성이 들어맞으면 금상첨화겠으나, 작가의 미래 상황이 틀렸다고 해도 그건 별로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작가는 논리적인 상상력을 제시하고, 독자는 그 상상력을 토대로 현재의 여러 문제점을 고찰할 수 있거든요. 덕분에 경제학, 생태학, 미래학 서적들은 저런 식으로 종종 SF 장르를 언급합니다. 사회주의, 생태주의, 무정부주의, 지속 가능한 발전…. 이런 책들은 가끔 SF 장르에 눈길을 돌리죠. 그저 잠깐 관심을 기울일 수도 있고, 혹은 아예 단편 소설을 이야기할 수도 있습니다.
테리 비슨 역시 사회주의 사상을 전파하기 위해 위의 소설을 썼으니까요. 아마 몇몇 좌파 인사들은 SF 소설이 자신들의 주장을 뒷받침할 수 있다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사이언스 픽션의 진면목은 논리적인 상상력입니다. 그리고 좌파 세력들은 그런 상상력이 필요할 수 있습니다. 미래는 아직 닥쳐오지 않았지만, 좌파 세력들은 항상 미래를 이야기하고 현재의 불합리한 체계를 뛰어넘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인류는 현재의 착취적이고 억압적인 체계를 뛰어넘어 보다 새로운 세상으로 나가야 합니다. 따라서 좌파 세력은 그 새로운 세계를 대략적으로 제시할 수 있어야 합니다.
가끔 좌파 세력들은 비전을 제시하지 못한다고 비판을 받습니다. 사람들은 항상 비전을 원합니다. 좌파 세력이 구체적인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다면, 사람들은 미래를 바라보지 않을 겁니다. 현재 상황이 아무리 암울해도 굳이 현실을 인정하지 않고 그냥 안주할 겁니다. 혹은 대안이 없다고 생각하고, 현재의 불합리와 착취, 오염을 필요악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좌파 세력이 어떤 미래 상황을 보여주지 않는다면, 사람들은 어떻게 더 나은 체계로 갈 수 있느냐고 따질 겁니다. 항해를 할 때 육분의가 필요하듯 다른 체계로 가고 싶다면 육분의 역할로 미래 비전이 필요할 수 있습니다.
이럴 때 SF 소설은 일종의 '구체적인 비전'이 될 수 있습니다. 사람들에게 미래 모습을 보여줄 수 있습니다. 무정부주의자가 한 시간 동안 떠들어도 사람들은 귀를 기울이지 않을 수 있지만, 재미있는 소설이나 영화, 게임 등은 이목을 끌 수 있습니다. 그게 바로 창작물의 장점이죠. 창작물은 등장인물과 사건을 이용해 독자의 몰입도를 높일 수 있습니다. 독자는 이야기 속에 자신의 감정을 이입하고 보다 자연스럽게 작품의 사상이나 철학, 세계관을 흡수할 수 있습니다. 만약 누군가가 미래 상황을 이용해 현재 체계를 경고하고 싶다면, SF 소설은 그 사람과 찰떡 궁합이 될 겁니다.
꼭 좌파 성향의 작가가 아니라도 예전부터 사이언스 픽션은 다양한 사회 모습을 묘사했습니다. 생태주의나 공산주의는 세상을 풍요롭게 바꿀 수 있다고 예측했고, 그래서 SF 작가들은 의문을 품었습니다. 정말 좌파 세력의 예측처럼 풍요로운 세상이 도래할 것인가. 혹시 뭔가 엄청난 사고, 미처 예상하지 못했던 사고가 터지지 않을까. 그런 의문은 창작으로 이어졌고, 각종 유토피아, 디스토피아, 포스트 아포칼립스 작품이 등장했습니다. 윌리엄 모리스의 유토피아 소설부터 파울로 바치갈루피의 포스트 아포칼립스 소설까지 그렇습니다.
윌리엄 모리스 같은 경우는 작가 본인이 사회주의자였죠. 자본주의가 계속 문제점을 드러내고, 생물 다양성이 갈수록 심각하게 줄어들고, 밑바닥 사람들이 헐떡이는 이상, 이런 작품들은 끊임없이 나타나겠죠. 그리고 SF 소설은 사람들에게 길잡이가 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아직 좌파 사상을 낯설어하거나 의심한다면, SF 소설은 보다 친근하게 다가갈 수 있습니다. 이데올로기니 철학이니 하는 것들은 골치 아프고 거부감이 들잖아요. 하지만 사람들은 이야기를 좋아합니다. 사이언스 픽션은 가능성과 이야기를 품고, 급진적인 사상을 사람들에게 전할 수 있습니다.
종종 철학자들은 그런 이야기를 합니다. “시물레이션 철학을 한 시간 동안 떠드니, 차라리 영화 <매트릭스>를 보여주겠다.” 뭐, 일부 골수 SF 팬들은 <매트릭스>를 꽤 싫어하고, 솔직히 이 영화의 철학은 그다지 깊은 편이 아니라고 합니다. 그 말이 맞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중요한 건 이겁니다. 깊이가 없다고 해도 <매트릭스>는 꽤나 재미있는 창작물이고, 사람들에게 가상과 현실의 부조리를 알려줄 수 있습니다. 아니, 알려줄 수 없다고 해도 최소한 생각을 유도할 수 있죠. 그것만 해도 큰 소득 아니겠습니다. 하등 관심도 없는 사람이 일말의 관심을 보인다는 것….
그리고 그 사람은 시뮬레이션 철학을 좀 더 알기 원할 테고, 이것저것 철학 서적을 뒤지겠죠. 그러던 중 풍부하고 깊은 지식을 쌓을 수 있어요. 철학계만 아니라 과학계도 그렇습니다. 과학 뉴스 잡지 등을 보면, 가끔 칼 세이건, 닐 타이슨, 리처드 도킨스, 제인 구달 같은 대중 과학자가 필요하다고 이야기합니다. 왜 그럴까요. 저 양반들은 말빨(?)이 좋거든요. 이렇게 표현해도 좋을지 모르겠으나, 뻐꾸기를 잘 날립니다. 사람들은 과학이 딱딱하다고 생각하지만, 대중 과학자들은 딱딱한 이야기를 재미있고 부담 없이 들려줍니다. 사이언스 픽션 역시 그렇게 과학의 흥미를 북돋울 수 있죠.
SF 소설이 좌파 사상의 교과서가 될 수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어쨌든 소설은 소설이고, 소설은 사람들의 이목만 끌어당길 따름입니다. 누군가가 무정부주의적인 SF 소설을 읽었다고 해서 반드시 그 소설의 주제와 사상에 동감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SF 소설은 알찬 교과서가 되지 못한다고 해도 대략 길잡이나 나침반이 될 수 있을 겁니다. 사람들이 본격적으로 사상이나 철학을 공부하기 이전에 그 사상으로 향하는 매개체와 징검다리가 될 수 있을 겁니다.
물론 SF 소설들은 '유토피아적인 허상'이라는 비판을 들을 수 있습니다. 마르크스나 엥겔스 같은 사람들이 강조했듯 현재의 모순이 미래의 상상력보다 훨씬 중요하죠. 사람들이 현재의 불합리를 해결하기 위해 너무 미래의 상황에만 매달리면, 그건 유토피아적 허상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누구도 미래를 정확히 그리거나 예지할 수 없습니다. 저는 SF 소설이 미래를 정확히 그려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저 나침반이 될 수 있다는 뜻입니다. 게다가 현재의 모순을 비판하기 위해 미래를 거울로 이용한다면, 그것 또한 의미가 있는 행위일 겁니다.
아울러 좌파 성향의 작가들이 항상 좌파 철학을 논하기 위해 소설을 쓴다는 뜻도 아닙니다. 그런 소설가도 있으나, 어떤 작가들은 그저 소설 속의 가상 세계를 좀 더 현실적으로 그리기 위해 좌파 사상을 이용합니다. SF 소설가들은 (성향을 막론하고) 예전부터 환경 오염을 지속적으로 경고했습니다. 현실에서 환경 오염은 커다란 문제이고, 그래서 작가들은 그걸 자신의 가상 세계에 반영했습니다. 독자는 작가가 제기하는 문제를 받아들이고, 그걸 실제 현실에 적용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SF 소설이 뭐 더 나은 체계로 향하는 만능 열쇠나 해결책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소설은 소설이고, SF 소설 역시 창작물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미래를 바라보고 싶다면, 적어도 논리적인 상상력을 발휘하고 싶다면, SF 소설은 (고성능 망원경이 될 수 없겠지만) 일종의 망원경이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지속가능한 발전 서적이 SF 장르를 언급하거나 <2077년의 추수 감사절 풍경> 같은 소설이 등장했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