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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 생태주의

보이지 않는, 간접적인 착취 본문

감상, 분류, 규정/생태 사회주의, 에코 페미니즘

보이지 않는, 간접적인 착취

OneTiger 2017. 5. 26. 20:00

<밑바닥 사람들>은 잭 런던이 쓴 일종의 르포입니다. 잭 런던은 <강철 군화>의 작가답게 가난한 계층에게 관심이 많았고, 본인이 그 삶을 직접 체험하기 원했습니다. 그래서 지저분한 옷을 입고, 신분을 감추고, 직접 뒷골목이나 구호소를 전전했습니다. 가난한 계층이 얼마나 절박하고 비참하게 사는지 설명했고, 가난하지만 그들 역시 우리와 같은 사람임을 보여줬죠. 잭 런던은 그들이 문자 그대로 밑바닥에서 살아간다고 강조하기 위해 책의 제목을 <밑바닥 사람들>이라고 지은 듯합니다.


어쩌면 이 밑바닥 사람들이라는 문구가 영어권의 관용어일지 모르겠군요. 여하튼 저는 잭 런던이 제목을 참 잘 지었다고 생각합니다. 어쩌면 가난한 계층은 이런 문구를 모욕적으로 생각할지 모릅니다. 밑바닥 사람들. 솔직히 듣기 좋은 말은 아닙니다. 그냥 빈민, 하층민 같은 단어들이 훨씬 나을지 모릅니다. 그래도 저는 종종 밑바닥 사람들이라는 문구가 그 어떤 문구보다 가난한 계층의 상황을 직설적으로 표현한다고 생각합니다. 이 세상은 결코 공정하거나 둥글지 않습니다. 누군가는 밑바닥에서 신음하고 죽어갑니다.



아마 이 때문에 차이나 미에빌은 <언런던> 같은 소설을 썼을 겁니다. <언런던>은 제목 그대로 뭔가 '부정적인 런던' 같은 느낌을 풍깁니다. <언런던>은 도심 판타지 소설이고, 언런던은 런던의 또 다른 모습입니다. 런던의 온갖 쓰레기들은 언런던으로 흘러오고, 그래서 언런던은 쓰레기 세상처럼 보입니다. 쓰레기통이 무술 경호원이 되는가 하면, 기이한 유령처럼 보이는 소년이 떠돌고, 런던에서 사라진 사람들이 여기에서 살고, 버려진 잡동사니들이 생명력을 얻습니다. 어쩌면 차이나 미에빌은 언런던을 이용해 밑바닥 사람들을 비유하고 싶었는지 모릅니다.


미에빌은 <쥐의 왕>에서 계급 구조를 강조하기 위해 시민 쥐와 쥐의 왕을 대조했습니다. 그것처럼 <언런던>은 상류층이나 중산층을 런던에 비유하고, 하층민을 언런던에 비유했는지 모릅니다. 저는 차이나 미에빌의 속내를 알 수 없으나, 만약 정말 언런던이 하층민을 비유한다면, 그건 나름대로 적절한 문학적 기법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소설 속의 언런던과 언런던 시민들은 별로 부정적이지 않습니다. 겉모습은 쓰레기 같고 지저분하지만, 그들은 런던 시민들처럼 평범하게 살아가는 시민들입니다. 주인공 또한 그들과 친구가 되고 적극적으로 도와주죠.



사람들은 이런 밑바닥 계층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종종 잊어버리지만, 이들은 엄연하고 생생한 현실입니다. 누군가가 웃고 떠들고 잘 먹고 잘 살 때, 누군가는 울고 비명을 지르고 굶주리고 고통스러워 합니다. 이건 어디 머나먼 나라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소말리아나 베네수엘라 시골의 쫄쫄 굶주리고 병에 걸린 아이들도 밑바닥 계층이지만, 북적거리는 대도시에서도 밑바닥 사람들의 고통을 얼마든지 확인할 수 있습니다. 번화가의 광장이나 도심지에서도 해고 노동자들이나 산업 재해 노동자들의 시위를 얼마든지 볼 수 있습니다.


게다가 그들의 삶은 상류층이나 중산층의 삶과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자본주의 체계 속에서 대기업들이 그런 밑바닥 계층에게 피해를 줬기 때문입니다. 그 때문에 대기업은 이윤을 축적할 수 있고, 상류층은 이득을 취할 수 있고, 중산층은 그 이득의 일부를 혜택으로 받을 수 있죠. 한 번 생각해보죠. 상류층이나 중산층은 잘 먹고 잘 살지만, 그들이 잘 먹고 잘 사는 과정 속에서 누군가는 고통을 받는다는 뜻입니다. 해고 노동자나 산업 재해 노동자가 없어도 상류층과 중산층은 충분히 잘 먹고 잘 살 수 있으나, 자본주의 체계는 병적으로 경쟁을 강조하기 때문에 상류층과 중산층은 착취에 동참하게 됩니다.



어쩌면 누군가는 이런 주장에 동의하지 않을지 모릅니다. 어쩌면 누군가는 자신이 착취에 참여하지 않았다고 주장할지 모릅니다. 아, 물론 중산층이 직접 밑바닥 사람들을 착취했다는 뜻은 아닙니다. 잘 먹고 잘 사는 중산층과 굶주리고 고통스러워하는 밑바닥 사람들이 모두 똑같이 자본주의 체계에서 살아간다는 뜻입니다. 만약 중산층이 자본주의 체계를 용인한다면, 그들이 대기업의 횡포와 폭력을 용인한다면, 사실 중산층은 간접적으로 밑바닥 사람들을 착취한다고 볼 수 있을 겁니다. 만약 어떤 깡패가 힘없는 사람들을 두들겨팬다고 가정하죠. 지나가는 시민들은 얼마든지 그걸 말릴 수 있습니다.


시민들이 깡패보다 힘이 세기 때문에 깡패는 시민들에게 저항하지 못합니다. 당연히 시민들은 깡패를 압박하고 힘없는 사람들을 구해야 할 겁니다. 그게 인지상정이겠죠. 하지만 시민들이 깡패의 횡포를 방관한다면, 사실 그 시민들은 깡패의 횡포를 용인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자본주의 체계도 똑같습니다. 대기업이 이득을 얻을 때, 사람들은 그 이득의 일부분이 자신에게 돌아올 거라고 기대합니다. 그리고 대기업이 이득을 얻으면, 그 이득은 사회 전체에 어느 정도 분배됩니다. 하지만 그 이득 속에는 밑바닥 사람들의 고통이 담겼습니다.



이런 간접적인 착취는 노동자 해고부터 온실 가스까지 도처에서 목격됩니다. 그래서 '기후 정의'라는 문구가 생겼죠. 기후 정의는 이런 간접적인 착취의 실상을 아주 거시적으로 보여줍니다. 강대국의 기업들은 엄청난 온실 가스를 뿜습니다. 그래서 기후가 이상하게 바뀝니다. 하지만 그 피해는 모두에게 골고루 돌아가지 않습니다. 주로 가난한 농촌 사람들, 특히 남반구 사람들이 피해를 입죠. 그래서 강대국은 이득을 얻기 위해 남반구를 착취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마치 유럽 강대국들이 남반구에 식민지를 세우고 착취한 것처럼.


나오미 클라인은 <이것이 모든 것을 바꾼다>에서 이런 기후 정의를 깨닫고 깜짝 놀랐다고 말합니다. 자본주의 체계가 이렇게 착취를 저지를 줄 몰랐기 때문입니다. 나오미 클라인은 민영화와 자유 시장 등이 자본주의 체계의 착취를 상징한다고 생각했고 기후 변화는 그저 과학자들의 사정이라고 생각했지만, 기후 변화는 그보다 훨씬 더 심각했죠. 이런 사실을 고려한다면, 강대국의 잘 먹고 잘 사는 중산층 사람들은 남반구의 가난한 사람들을 착취하는 셈입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이런 체계적인 모순을 인정하지 않을 겁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착취에 참가하지 않았다고 항변할지 모릅니다.



흔히 우리는 눈에 보이는 착취만이 착취라고 생각합니다. 눈에 보이는 폭력만이 폭력이라고 생각합니다. 현대 사회는 크고 복잡하기 때문에 눈에 보이지 않게, 간접적으로 착취가 일어나고 폭력이 일어납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자신이 직접 때리고 빼앗지 않았기 때문에 자신이 착취하지 않는다고 믿습니다. 물론 대부분 사람들은 직접 착취에 참가하지 않습니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저는 체계가 모순적이라고 지적했습니다. 이건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체계의 문제입니다. 체계가 잘못되었기 때문에 그저 잘 먹고 잘 살기 원하는 사람들까지 추악하고 끔찍한 폭력의 물결에 참가합니다.


체계가 문제이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자신이 착취에 참가하지 않았다고 믿을 겁니다. 가시적인 폭력마저 은근슬쩍 사라지는 마당에 사람들이 비가시적인 폭력을 쉽게 인정할 리 없겠죠. 가령, 유럽 강대국들은 남반구 식민지를 착취했고, 그 착취의 여파는 여전히 어마어마한 영향을 미칩니다. 하지만 과연 대부분 유럽 시민들이 그 사실을 두고두고 반성할까요. 아니, 그렇지 않을 겁니다. 아마 대부분 유럽 시민들은 그런 사실을 일상에서 전혀 생각하지 않을 겁니다.



종종 극우파는 이런 착취를 대놓고 인정합니다. 극우파는 나라와 국민의 전체 이익을 위해 누군가가 희생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극우파는 그 자신이 희생하겠다는 말을 절대 하지 않습니다. 만약 남한과 북한이 전쟁한다면, 남한 쪽이든 북한 쪽이든, 과연 어느 극우파 지도자가 자신을 장렬하게 희생할까요.) 극우파의 시선은 무조건 상류층을 향하기 때문에 착취를 대놓고 인정하는가 봅니다. 하지만 오히려 극우파가 아닌 사람들은 이런 착취를 부정할 겁니다. 흠, 만약 이런 주장이 틀렸다고 가정하죠. 간접적인 착취라는 주장이 틀렸다고 가정하죠.


하지만 어쨌든 대기업들은 여전히 밑바닥 사람들을 착취하고, 그건 분명한 사실입니다. 자신이 착취에 참가하지 않았다고 항변하는 사람들도 대기업의 횡포와 폭력을 부인하지 못할 겁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설사 대기업의 폭력을 인정한다고 해도) 그 사실을 금방 잊어버립니다. 그 이유는 아마 그 사람들이 직접 피해를 입지 않기 때문일 겁니다. 아무리 대기업이 밑바닥 사람들을 착취한다고 해도 중산층은 그걸 금방 잊어버립니다. 중산층은 대기업에게 피해를 별로 받지 않고, 설사 피해를 받는다고 해도 그걸 회복할 여유가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사람들이 사회주의자나 환경 운동가가 되는 까닭은 그 사람들이 그저 정의롭기 때문만은 아닐 겁니다. 어떤 사회주의자나 환경 운동가는 정의로울 수 있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많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신이 피해를 입기 때문에, 별로 이타적이거나 박애적이지 않으나 자신이 피해를 입기 때문에 사회주의자나 환경 운동가가 되곤 합니다. 따라서 피해를 받지 않는 사람들은 체계의 모순이나 부조리를 별로 느끼지 못할 겁니다. 오히려 그걸 당연하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심지어 때때로 과거의 노예들마저 압제와 굴종을 당연하게 생각했습니다. 노예들 중에서도 그걸 당연하다고 여긴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일본 제국이 한국을 지배할 때도 그걸 당연하다고 여긴 한국인들이 있습니다. 한국인이라고 해서 무조건 일본 제국을 미워하지 않았죠. 피해를 당한 사람들마저 그 피해를 당연하게 여기곤 합니다. 그렇다면 피해를 입지 않은 사람들은 그 피해를 잊어버리거나 외면하기 쉽겠죠. 고통 속에서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들과 동물들을 쉽게 잊어버릴 수 있겠죠.



하지만 우리가 잊어버리든 그렇지 않든, 그런 사람들은 엄연히 존재합니다. 그건 엄연한 현실이고 생생한 현실입니다. 우리가 뭐라고 생각하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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