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생태주의
재난에 웃음을 짓는 자본주의 본문
소설 <우주 전쟁>은 화성인들의 지구 침략을 이야기합니다. 화성인들은 대대적으로 지구를 침략했고, 인간들은 속수무책으로 당합니다. 당연히 각국 정부는 전대미문의 침략에 필사적으로 저항했겠죠. 하지만 <우주 전쟁>에서 정부나 지도자의 모습은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소설 배경은 영국이지만, 당시 영국 정부나 지도부가 무슨 일을 했는지 자세히 나오지 않습니다. 독자는 그저 그들이 무엇을 했는지 막연하게 유추할 뿐입니다.
대신 독자는 주인공을 따라 폐허가 된 영국의 이곳저곳을 방문합니다. 소설 주인공이자 화자는 어느 평범한 시민이고, 이 시민은 그저 목숨을 구하기 위해 사방을 방황할 뿐입니다. 이 주인공은 지도부나 정부의 행방이나 조치에 별다른 관심이 없고, 어떻게든 자기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애씁니다. 사실 정부라고 해서 딱히 화성인들을 물리칠 방법이 없겠으나, 어쨌든 이 소설은 처음부터 끝까지 주인공의 시점, 평범한 시민의 시점만 강조합니다. 아마 그 이유는 재난의 참담함을 더욱 강조하기 위해서일 겁니다. 수상의 눈보다 평범한 시민의 눈이 재난의 참담함을 더 강조할 수 있겠죠.
사실 똑같은 재난이 닥쳐도 사람의 입장에 따라 그 재난은 달라보일지 모릅니다. 아무리 전지구적인 위기가 닥쳐도 그 위기가 모든 사람의 눈에 똑같이 보이지 않을 겁니다. 평범한 시민과 한 나라의 수상이나 대통령은 전혀 다른 계급에 속합니다. 그만큼 두 사람의 시각은 극심한 차이를 드러내기 마련입니다. 아무리 막대한 위기가 닥쳐도 수상이나 대통령은 한 나라의 지도자입니다. 그만큼 그들은 많은 호위 병력을 거느렸을 테고, 위기에 보다 손쉽게 대처할 수 있겠죠. 호위 병력들은 대통령이나 수상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걸 테고, 모든 자원을 동원할 겁니다.
이에 비해 평범한 시민은…. 네, 말 그대로 평범하죠. 이 시민은 온전히 자기 손으로 자기 목숨을 지켜야 합니다. 다른 누군가의 도움을 기대하기 힘들겠죠. 가족이나 이웃이 도와줄지 모르나, 때때로 그것조차 여의치 않을 겁니다. 사실 소설 <우주 전쟁> 속에서 주인공은 그 누구의 도움도 받지 못하고, 그저 사방팔방 떠돌아다닙니다. 주인공은 대통령이나 수상처럼 막강한 호위 병력이나 비상 대처 방책을 기대하지 못합니다. 수상과 평범한 시민은 전혀 다른 계급에 속했습니다. 전혀 다른 세계에 속했다고 할 수 있겠죠. 지구인과 화성인이 전혀 다른 세상에 속한 것처럼.
인류가 사는 이 문명 세상은 그리 단순하지 않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살아가고, 수많은 계층과 계급이 나뉩니다. 사람들은 그런 계급 사이의 격차를 쉽게 뛰어넘지 못합니다. 운이 좋은 몇몇 사람들은 계급 상승의 기쁨을 누리지만, 그런 사람들은 소수입니다. 여전히 대부분 사람들은 그저 태생적인 계급을 죽을 때까지 유지하죠. 덕분에 이 문명 세계에는 서로 다른 계급들이 서로 다른 세상에서 살아갑니다. 한 나라에는 대통령도 있고 노숙자 거지도 있습니다. 그들은 똑같은 국민이지만, 사실 전혀 똑같지 않습니다.
우리는 흔히 '국민'이라는 표현을 아무렇지 않게 사용하지만, 국민은 모두 똑같지 않습니다. 선거철이 되면, 국회의원 후보나 대통령 후보는 '국민의 뜻'을 운운하지만, 국민에는 상류층도 있고 중산층도 있고 서민도 있고 밑바닥 사람들도 있습니다. 밑바닥 사람들은 결코 중산층이나 상류층과 똑같지 않습니다. 흔한 상식과 달리 계급 격차는 사람들을 전혀 다른 세상 속으로 밀어넣습니다. 꿀벌이나 쌍살벌과 달리 인간은 생물적인 계급이 없으나, 문명 세계의 태생적인 계급 구조는 사람들을 생물적인 계급만큼 명확하게 나눕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 계급에 따라 전혀 다른 삶을 살아갑니다.
극심한 계급 차이는 극심한 보호 대책을 낳습니다. 계급에 따라 재난에 저항하는 방법이 달라집니다. 아무리 막대한 재난이 일어나도 대통령이나 수상은 안전하게 대피할 수 있겠으나, 밑바닥 사람들은 그저 죽어야 합니다. 자기 목숨을 내놔야 합니다. 그저 운만 바라야 합니다. 화성인의 침략은 전지구적인 위기이고 대대적인 사건이지만, 영국 수상과 평범한 시민의 대처 방안은 똑같지 않습니다. 비단 <우주 전쟁>만이 아닙니다. 대부분의 재난물이나 전쟁물에서 지도자는 안전한 곳에 피신하고 평범한 사람들은 신나게 죽어나갑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본가들은 상류층에 속하고, 덕분에 재벌들도 안전한 곳에 피신할 수 있습니다. 이건 비단 SF 창작물 속의 이야기만은 아닙니다. 현실에서도 재난은 계급에 따라 다른 영향을 미칩니다. 재난이 어떤 가난한 지역을 휩쓴다면, 누군가는 웃지만 누군가는 웁니다. 만약 재개발을 노리는 부동산 업자라면, 그 재난을 보고 웃을 수 있을 겁니다. 재난이 알아서 그 지역을 철거했기 때문입니다. 이제 이 부동산 업자는 피해 복구를 빙자해서 각종 이윤을 축적할 수 있을 겁니다.
전쟁이나 재난은 무서운 비극이지만, 이런 비극이 모든 사람에게 골고루 피해를 미치지 않습니다. 누군가는 그런 비극 때문에 이익을 봅니다. 가령, 경제 공황이 터졌다고 가정하죠. 자본가들이 너무 생산을 많이 했기 때문에 시장에 상품들이 넘쳐납니다. 하지만 노동자들은 그런 상품들을 구입하지 못합니다. 자본가들이 노동자들의 임금을 깎거나 노동자들을 내쫓았기 때문에 노동자들은 돈을 벌지 못했고 따라서 상품도 구입하지 못합니다. 그래도 자본가들은 상품 생산을 멈추지 않습니다. 이윤 축적은 자본가의 사명이기 때문입니다.
이윤을 축적하고 싶다면 무조건 상품을 팔아야 합니다. 하다못해 금융 상품 같은 무형 상품이라도 팔아먹어야 합니다. (그래서 거품 경제가 쌓이죠.) 하지만 대부분 노동자들은 상품을 사지 못하고, 자본가들의 막대한 생산 시설은 이제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습니다. 이때 전쟁이 벌어진다면, 자본가들은 활로를 찾을 수 있습니다. 국가가 군수 장비를 사들일 테고, 자본가들은 열심히 군수 장비를 찍어낼 수 있겠죠. 전쟁 때문에 도시가 잿더미가 되었다면, 자본가들은 도시를 복구하고 그 과정에서 이윤을 축적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경제 공황에는 전쟁이 특효약이라고 말하죠.
전쟁은 밑바닥 사람들이나 서민들에게 공포의 대상이지만, 저런 자본가에게 횡재의 기회이고 특효약입니다. 예전에 2008년 금융 대란이 터지고 한창 경기가 밑바닥을 쳤을 때, 화성인이라도 쳐들어와야 한다는 농담이 돌았습니다. 그러면 자본가들이 활로를 뚫을 수 있겠죠. 누군가는 죽고 부서지고, 자본가들은 그것들을 복구하면서 돈을 벌 수 있고, 그러면 경제가 다시 돌아가겠죠. 자본주의를 비판하는 사람들은 이런 걸 '재난 자본주의'라고 부르더군요. 자본주의가 재난 때문에 먹고 산다는 뜻입니다.
더 나가서 공산주의자들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자본주의를 폐지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엄청난 경쟁과 자유 시장 때문에 자본주의는 과잉 생산하기 마련이고, 과잉 생산은 경제 공황을 불러옵니다. 결국 자본주의는 활로를 뚫기 위해 재난을 이용합니다. 의도적이든 그렇지 않든. 어쨌든 사람들은 죽어가고 사회적 인프라는 처참하게 부서집니다. 이른바 자유 지상주의 경제학자들은 남아메리카 등에서 이런 재난 자본주의를 이용해 나라 기반을 완전히 황폐화시켰죠. 대신 자본가들은 민영화와 재개발의 혜택을 실컷 누렸습니다. 이는 1930년대 경제 대공황 때도, 이라크 침략 때도, 카트리나와 아이티 지진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사실 자본주의는 말 그대로 자본을 가진 사람이 유리한 구조입니다. 그 뿐만 아니라 자본을 이용해 계속 자본을 확장하고 축적하는 구조입니다. 덕분에 자본주의 체계는 어마어마한 생산량을 달성했으나, 문제는 그게 도를 넘어선다는 겁니다. 그 결과, 자본주의의 생산량은 환경을 오염시키고 야생 동물들을 멸종시키는 것조차 상관하지 않습니다. 환경 오염이나 생물 다양성 위기보다 자본 확장이 우선입니다. 그리고 참혹하고 끔찍한 재난마저 자본 확장의 기회로 삼습니다. 정말 외계 침략자들이 지구로 쳐들어온다면, 그리고 인류가 그 외계 침략자들을 무찌를 수 있다면, 어떤 사람들은 미소를 지을지 모릅니다.
외계인의 침공이라는 전대미문의 사건조차 자본주의 체계에서 돈벌이와 이윤 축적의 계기가 될 수 있을 겁니다. 뭔가를 더 생산하고 더 판매하고 더 증축함으로써 자본가 계급은 수익을 창출할 수 있을 겁니다. 외계인과의 전쟁 속에서 수많은 사람들과 동물들이 죽고 수많은 기물들이 부서지겠으나, 그건 누군가에게 행운의 기회가 될 수 있습니다. 자본주의의 수익 돌파구는 경제 공황과 중동 침략과 허리케인과 지진 때도 그랬고, 외계인의 침략이라고 해서 다르지 않을 겁니다.
물론 이 세상에는 누군가가 죽어야만 이득을 얻는 사람들이 분명히 있고, 그건 자연스러운 현상입니다. 어느 날 갑자기 사람들이 죽지 않는다면, 장의사는 다른 일을 찾아야 할 겁니다. 죽음과 파괴는 누군가에게 수익이 될 수 있죠. 하지만 이런 자연스러운 현상과 달리 자본주의 체계는 의도적으로 재난을 조장하거나 고난에 처한 사람들을 더욱 고난 속으로 내몹니다. 만약 <우주 전쟁>처럼 화성인들이 쳐들어온다면, 밑바닥 사람들은 아둥바둥 살기 위해 애쓰겠지만, 자본가들은 어떻게 한 밑천을 잡을까 계산할지 모르죠.
화성인들의 삼발이가 할렘과 빈민가를 쓸어버린다면, 자본가들은 거기에 수익성이 좋은 건물들을 지을 수 있겠죠. 용산 철거 참사 때처럼 철거 깡패를 동원할 필요는 없겠군요. 당연히 거기에 살던 사람들은 쥐꼬리만한 보상금만 받고 내몰리겠죠. 흔히 자본주의는 자유나 민주주의와 깊은 연관이 있는 것처럼 알려졌으나, 흔히 알려진 이야기와 달리 자본주의는 저런 것들과 함께 붙어다니지 않습니다. 그보다 자본주의 체계는 주기적으로 재난을 유리하게 이용하고, 그 와중에 수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비참한 지경으로 쫓겨납니다.
그 특유의 상상력 덕분에 SF 창작물은 거대 재난을 자주 묘사합니다. 19세기부터 지금까지 SF 작가들은 혜성을 떨어뜨리고, 적대적인 외계인들을 내보내고, 치명적인 질병을 퍼뜨리고, 거대한 괴수를 상륙시켰습니다. 그 덕분에 인류는 SF 창작물 속에서 항상 극심한 재난을 마주칩니다. 하지만 그 재난은 절대 모두에게 동일하게 적용되지 않습니다. 저는 사람들이 저런 SF 창작물을 볼 때마다 이런 점도 한 번 생각해봤으면 좋겠습니다. 외계인의 보행 병기가 도시를 짓밟을 때, 누구는 울지만 누구는 웃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