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생태주의
<푸른 화성>부터 앙드레 고르를 거쳐 <판도라: 퍼스트 콘택트>까지 본문
차이나 미에빌이 최근에 쓴 책은 <옥토버>입니다. <10월>이죠. 러시아 10월 혁명을 이야기하는 책입니다. 차이나 미에빌이 새로운 책을 쓴다고 들었기 때문에 저는 으레 기괴한 판타지 소설이나 스팀펑크 소설이 나올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차이나 미에빌은 상당히 좌파적인 작가이고, 그런 관점에서 러시아 혁명을 그냥 지나치지 못했을 겁니다. <10월>은 그런 역사책인 듯하군요. 이 책을 보는 순간, 저는 존 몰리뉴가 머릿속에 떠올랐습니다.
존 몰리뉴는 사회주의 철학을 논하는 마르크스주의 전문가입니다. 이 좌파 논객은 <퍼디도 스트리트 정거장>을 읽고, 자본주의의 모순을 잘 드러내는 디스토피아라고 칭찬했어요. 아마 차이나 미에빌이 좌파적이기 때문에 존 몰리뉴가 그 스팀펑크 소설을 칭찬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하지만 존 몰리뉴가 좌파 논객임을 감안해도 <퍼디도 스트리트 정거장>은 (괴악하고) 훌륭한 디스토피아 소설이고, 파괴적인 사회 구조를 잘 드러낸 장르 소설입니다. 미에빌은 영국 런던을 여러 각도로 묘사하기 좋아하고, 런던은 자본주의의 본거지이고, 그래서 <퍼디도 정거장>이 그렇게 추악하게 나왔겠죠.
아마 미에빌은 좌파 성향을 강조하기 위해 <퍼디도 정거장>을 쓰지 않았을 겁니다. 미에빌은 그저 폭력적인 현실을 그대로 소설 속에 반영했을 뿐이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다른 장르 작가들처럼 미에빌은 자신이 장르적인 상상력을 좋아한다고 말했고, 그런 상상력을 묘사하기 위해 소설을 쓴다고 말했습니다. 흠, 아마 어슐라 르 귄도 비슷하게 말한 적이 있을 겁니다. 확실히 기억이 나지 않는군요. 르 귄도 좌파적인 성향보다 소설적인 재미가 우선이라고 말한 적이 있어요.
그런 점에서 어슐라 르 귄이나 차이나 미에빌은 소설과 사상을 분리하는 듯해요. 레프 톨스토이 같은 인물과 다릅니다. 톨스토이는 예술이 사상을 주장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여러 짤막한 소설들을 썼죠. 게다가 <안나 카레리나>를 쓴 이후, 톨스토이는 (예술가로서) 소설을 접었습니다. 소설이 사상을 제대로 전달하지 못한다고 느꼈고, 직접 사유 재산을 폐지하고 토지를 공유하고 정부를 부정하는 운동을 펼쳤어요. 하지만 르 귄이나 미에빌은 톨스토이와 다르죠. 그들이 소설을 쓰는 이유는 장르 소설다운 재미, 상상력을 발휘하는 재미 때문입니다. 아무리 골수 빨갱이도 처음부터 끝까지 빨갱이는 아니겠죠.
하지만 르 귄이나 미에빌 같은 작가들은 세상을 꿰뚫어 봅니다. 그들은 본질적인 문제를 비판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그런 생각은 소설에 (의도적이든 무의식적이든) 들어갑니다. 르 귄이나 미에빌은 본질적인 문제를 향하는 관점을 알기 때문에 그들의 소설은 구조적인 모순을 고발할 수 있습니다. 게다가 차이나 미에빌 같은 작가는 장르 소설을 이용해 자본주의의 문제나 사회주의적 전망을 살핀 적이 있습니다. 미에빌은 <레드 플래닛>이라는 SF 비평서를 썼고, 이 책은 마르크스주의와 SF 소설이 어떤 관계를 맺었는지 밝힙니다.
그 자신이 <퍼디도 정거장>이나 <언런던>에서 자본주의의 해악을 꼬집은 만큼, 미에빌은 이런 SF 비평서를 썼을 겁니다. 비슷하게 킴 스탠리 로빈슨은 <붉은 화성> 시리즈를 비롯한 여러 소설들에서 자본주의와 기후 변화를 이야기합니다. 킴 로빈슨은 환경 문제들, 특히 기후 변화에 관심이 많은 듯해요. 사실 수많은 SF 작가들이 환경 아포칼립스 소설들을 썼으나, 킴 로빈슨은 어떻게 자본주의가 기후 변화를 일으키는지 설명하죠. 아마 이런 작가들은 상대적으로 꽤나 소수일 듯합니다. 아니, 거의 없다시피할 겁니다. 아쉽게도 언제나 좌파는 소수죠. 게다가 킴 로빈슨은 러시아 혁명을 언급하고 거대 자본을 뒤집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특이하죠. 자본주의가 환경을 오염시킨다고 비판하는 작가들은 많아도 혁명까지 언급하는 작가는 드물 듯합니다.
사실 기후 변화를 이야기한다면, 자본주의를 간과하지 못할 겁니다. 예전에도 비판한 것처럼 여러 사람들, 심지어 과학자들이나 전문가들마저 인류가 너무 탐욕스럽다거나 인구가 너무 많다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그런 주장들은 논점을 잘못 짚었습니다. 예전에 말한 것처럼 인류는 탐욕스럽지 않습니다. 10억 명이 넘는 사람들은 비참한 지옥 속에서 굶주립니다. 탐욕이라는 표현은 이 10억 명에게 전혀 어울리지 않습니다. 누군가가 저 10억 명을 탐욕스럽다고 비난하고 싶다면, 먼저 그들에게 따뜻한 밥 한 공기를 배불리 먹여야 할 겁니다.
게다가 인구와 환경 오염은 큰 연관이 없습니다. 물론 제한적인 자연 생태계를 보존하고 싶다면, 분명히 인구가 줄어야 합니다. 저는 인구가 30억 명 가량을 유지했으면 좋겠습니다. 30억 명은 자연 생태계를 지나치게 위협하지 않을 겁니다. 만약 그 30억 명이 생태적으로 살아간다면, 별로 문제가 없을 겁니다. 머릿수보다 사회 인프라와 그 인프라를 움직이는 체계가 더 중요하죠. 아프리카 사람들은 미국 사람들보다 훨씬 많으나, 그들은 기후를 위협할 시설을 갖추지 못했기 때문에 환경을 별로 오염시키지 못해요. 이처럼 온실 가스를 내뿜고 산업 폐기물을 버리고 핵 발전소를 짓는 장본인들은 어마어마한 몇 십 억의 인구가 아니라 소수 자본가들입니다.
따라서 자연 생태계를 보존하고 싶다면, 자본주의를 비판해야 합니다. 자본주의 체계에서 기득권들이 오직 이윤을 축적하기 위해 자연 생태계를 수탈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해도 자본주의만 환경을 오염시킨다는 뜻은 아닙니다. 자본주의 이외에 다른 요소들도 환경을 오염시키나, 제일 큰 문제가 자본주의라는 뜻입니다. 누가 온실 가스를 뿜고, 누가 산업 폐기물을 버리고, 누가 핵 발전소를 지을까요. 누가? 왜? 무엇 때문에? 대기업들이 이윤을 축적하기 위해서입니다. 자본주의는 대기업들이 이윤을 축적하기 위해 무슨 짓이든 할 수 있다고 주장하죠.
그 덕분에 대기업들은 사람들이 고통에 시달리든 동물들이 멸종하든 이윤만 축적하기 위해 애쓰죠. 덕분에 환경 보호론자들은 빨갱이라고 불립니다. 사회주의자들처럼 환경 보호론자들도 자유 시장과 대기업들을 공격하기 때문입니다. 킴 로빈슨은 이런 구조적인 문제를 포착했고, 그래서 <붉은 화성>을 비롯한 여러 소설들을 썼을 겁니다. 게다가 킴 로빈슨은 <그린 플래닛>을 썼습니다. 생태적 관점에서 사이언스 픽션을 이야기하는 SF 비평서입니다. 차이나 미에빌이 <레드 플래닛>을 쓴 것처럼 킴 로빈슨은 <그린 플래닛>을 썼어요. 비록 차이나 미에빌이나 킴 로빈슨 같은 작가들은 극소수이나, 이처럼 SF 소설들은 사회주의나 환경 보호를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장르 소설을 쓰지 않는다고 해도 작가들은 (이른바) 주류 문학으로 사회주의나 환경 보호를 이야기할 수 있을 겁니다. 아니, 소설을 이용하지 않아도 작가들은 철학이나 사회학을 이용해 사회주의나 환경 보호를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사회학과 소설은 서로 다릅니다. 작가는 소설 속에서 이야기를 마음대로 배치할 수 있고, 주인공의 동기와 행동과 사고를 조종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독자는 철학이나 사회학보다 소설에 더 쉽게 접근할 수 있습니다. 철학이나 사회학은 논리와 법칙을 이야기하나, 소설은 그걸 일상 속에 좀 더 부드럽고 알기 쉽게 풀어넣을 수 있겠죠. 어떤 인문학자들은 철학과 문학이 서로 대립한다고 말하지만, 레이먼드 윌리엄스처럼 소설 속에서 철학과 사회학을 실험하는 인물도 있어요.
아니, 뭐, 사상이나 경향을 떠나서 많은 사람들이 철학과 예술을 서로 연결합니다. 게다가 장르 소설은 한 걸음 더 나갈 수 있습니다. 장르 소설은 미래와 외계를 전망하기 때문에 주류 문학보다 더 많은 것들을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스티븐 호킹은 인류가 화성으로 도망쳐야 한다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기후 변화 때문이죠. 하지만 정말 중요한 문제는 자본주의입니다. 만약 누군가가 호킹에게 반박하고 싶다면, 화성과 자본주의와 기후 변화를 이용한 소설을 쓸 수 있을 겁니다. 물론 작가가 의도적으로 사상을 이야기하지 않는다고 해도, 현실을 소설 속에 집어넣으려고 노력한다면, 당연히 <붉은 화성> 같은 소설이 튀어나오겠죠. (세계적인 과학자도 자본주의를 쳐다보지 못하는군요. 뭐, 호킹은 사회학자가 아닙니다.)
<퍼디도 스트리트 정거장>이나 <붉은 화성>처럼, 장르 소설이 사회주의나 환경 보호를 이야기한다면, 그 소설은 디스토피아나 유토피아 소설이 될 수 있습니다. <붉은 화성>은 전형적인 유토피아 소설이 아니나, <붉은 화성>을 비롯해 <화성 3부작>은 그런 흐름을 이어갑니다. <붉은 화성>을 쓰기 전에 킴 로빈슨은 <캘리포니아 3부작>을 썼고, 이 시리즈는 어니스트 칼렌바흐의 <에코토피아>와 비슷하죠. 킴 로빈슨은 <캘리포니아 3부작>을 우주로 확대했고, 그 출발은 <붉은 화성>입니다. 100여 명이 새로운 행성에 정착하고, 새로운 문명을 꾸립니다.
따라서 그들은 관습을 거부할 수 있습니다. <붉은 화성>에서 누군가는 사회주의 공동체를 이야기하고, 누군가는 자연 환경을 보존하는 공동체를 이야기합니다. 그들은 외계 행성에 문명을 세우는 동시에 다양한 사회적/생태적 철학들을 논합니다. 그런 와중에 공동체는 여러 문제점들을 드러내고 사람들은 다시 새로운 공동체를 세우려고 애쓰죠. 언제나 소설들이 다른 매체들에 영향을 미치는 것처럼 비단 SF 소설들만 아니라 SF 게임들도 이런 새로운 문명을 이야기하곤 합니다. <알파 센타우리>나 <판도라: 퍼스트 콘택트> 같은 게임들은 좋은 사례들입니다. 특히, 이런 게임들은 생태 사회주의 철학을 이야기하고, 자유 시장을 부정하죠.
이런 행성 개척 게임만 아니라 <마스터 오브 오리온>이나 <스텔라리스> 같은 게임 역시 사회주의나 환경 보호, 새로운 문명을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플레이어는 대의 제도를 없애고, 행성의 자연 생태계를 오염시키지 않고, 계급이 없는 은하 문명을 이룩할 수 있어요. 하지만 저는 이런 게임들을 볼 때마다 뭔가 많이 아쉽습니다. 이런 게임들은 사회 구조를 깊이 살피지 않고, 그저 겉표면만 둘러보기 때문입니다. <마스터 오브 오리온>이나 <판도라: 퍼스트 콘택트> 같은 게임들은 방대한 설정들과 풍부한 텍스트를 자랑하나, 사회 공학을 그렇게 깊이 논하지 않아요.
<마스터 오브 오리온>을 플레이한다고 해도 플레이어는 왜 정부가 부정적이고 왜 지배 계급이 환경을 오염시키는지 잘 모를 겁니다. 그저 열심히 행성을 개척하거나 우주 함대를 생산할 뿐이겠죠. 게다가 게임 제작진들도 철학이나 사회 공학을 잘 모릅니다. 그저 주류적인 이론을 아무 비판 없이 받아들입니다. 어슐라 르 귄은 우주에서 인류학을 탐구하지만, 패러독스 스튜디오는 우주 문명을 장대하게 전개함에도 그렇지 못한 듯해요. 설정들과 텍스트는 풍부하지만, 이런 것들은 분량에 비해 사회 구조에 본질적으로 접근하지 못합니다.
물론 게임은 게임입니다. 대부분 플레이어들은 전략을 짜고 우주 함대를 조종하기 원할 겁니다. 게임 도중 사회 공학을 길게 읽고 싶어하는 플레이어는 거의 없겠죠. 하지만 저런 게임들이 좀 더 철학적이었다면 어땠을까 싶어요. 플레이어가 새로운 대안에 눈을 뜰 수 있도록. 어려운 철학을 게임 속에 쏟아부어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보다 게임 시스템에 사회주의적인 설정을 추가했으면 좋겠다는 뜻입니다. 예전에 말했던 것처럼 현재의 4X 게임 시스템으로 사회주의 체계를 완벽하게 구현하기 어려울 겁니다. 하지만 적어도 어느 정도 모방이나 흉내가 가능하지 않을까요. 저런 4X 게임들은 물리적인 생산이나 대외적인 전투에만 치중할 뿐이고, 문명 속에서 어떻게 인민들이 살아가는지 묘사하지 않죠.
사실 아무리 <마스터 오브 오리온>이나 <스텔라리스>가 외교나 사회 구조를 이야기한다고 해도 결국 중점은 우주 함대입니다. 뭔가를 때려부수는 게임이죠. 그래서 우주 함선들은 멋지게 게임 속에서 돌아다니지만, 인민들의 삶은 추상적인 영역에 머물 뿐입니다. 어쩌면 <마스터 오브 오리온>이나 <스텔라리스>보다 <스타토피아>나 <스페이스 콜로니>가 훨씬 그런 부분에 어울리는 게임일지 모르나, 이런 게임들 역시 사회 공학은 많이 부족하죠. 그저 모방이나 흉내에 불과하다고 해도 그런 시스템이 더욱 강했으면 좋겠어요. 어쩌면 어떤 플레이어는 <마스터 오브 오리온>이나 <스텔라리스>를 플레이한 이후, <빼앗긴 자들>이나 <붉은 화성>을 읽어볼지 모르죠. 그 플레이어는 그런 게임들을 통해, 그런 소설들을 통해, 사회학이나 철학에 좀 더 접근할 수 있을지 모르죠.
뭐, 그래서 저는 사람들이 철학 서적들과 SF 소설들과 SF 게임들을 두루두루 경험했으면 좋겠습니다. 그게 제일 좋은 방법일 겁니다. 앙드레 고르를 논의하고, <붉은 별>을 읽고, <판도라: 퍼스트 콘택트>를 플레이하고…. 사이언스 픽션을 (그 자체로 즐기지 않고) 너무 도구적으로 바라보는 듯하나, 이런 것 역시 장르 창작물을 즐기는 방법들 중 하나가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