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생태주의
자연 과학과 사회 과학의 경계 본문
"자연 과학자인 나는 카트리나가 발생하기 이전까지 자연 재해와 별 상관이 없는 연구를 해왔고, 경제학이나 정치학처럼 내 분야를 벗어나는 일은 아예 없었다. 그러던 내가 지난 몇 년 동안은 자연 과학에 쏟았던 관심만큼이나 많은 시간을 들여 사회 과학 분야를 탐구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자연 재해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필연적으로 사회 과학의 세계에 뛰어들어야 한다는 이치를 깨달았다. 재난이라는 주제는 이제껏 수 많은 책을 통해 언급되었지만, 자연 과학자가 자연 과학과 사회 과학의 경계에 서서 이 이야기를 한 경우는 아마 처음일 것이다."
위 문단은 <재난 불평등>이라는 책의 서문에서 발췌했습니다. 저자는 지구 물리학자로서 재난의 피해와 사회적 불평등을 연구했다고 합니다. 저자가 저런 서문을 쓴 이유는 자연 과학만으로 각종 부조리와 착취 등을 설명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지진, 쓰나미, 화산 폭발 등의 재난은 분명히 자연 현상이고, 자연 과학자가 연구하는 대상입니다. 하지만 자연 과학자는 이런 현상의 원인만 파악할 수 있을 뿐이고, 이런 재난이 사회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조사하지 않습니다. 그건 자연 과학의 대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인류 사회는 지구의 영향에서 자유로울 수 없고, 지구의 기후와 질병, 지각 운동, 야생 동물들은 인류 사회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지만, 자연 과학자의 시선은 오직 자연계에만 머무릅니다. 자연 과학자는 자연계와 인류 사회의 경계선을 넘지 않습니다. 저자는 자연 과학자의 이런 한계를 절감했고, 그래서 사회 과학을 맹렬하게 파고들었다고 말합니다.
중요한 점은 자연 재난이 모두에게 똑같이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는 겁니다. 이 사회에는 엄연히 계급이 존재합니다. 계급에 따라 재난은 각자 다르게 영향을 미칩니다. 부자는 재난에 훨씬 여유롭게 대처할 수 있습니다. 튼튼한 집을 짓고, 위생적인 환경에서 살고, 첨단 의료진을 부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가난한 자들은 다릅니다. 허름한 집에서 살고, 주변 환경은 불결하고, 간신히 공공 의료에 의지할 뿐입니다. 지진이 들썩이고 태풍이 몰아치고 질병이 퍼진다면, 가난한 사람들은 손 놓고 당해야 합니다. 사회의 계급 구조에 따라 재난 피해는 달라집니다. 그리고 이런 계급 구조는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수많은 세월 동안 엄청난 학살과 수탈과 오염을 통해 계급이 형성되었죠. 하지만 자연 과학은 이런 사실을 말하지 않습니다. 그건 사회 과학의 몫이죠. 자연 현상을 사회 과학적인 눈으로 바라볼 때, 밑바닥의 진짜 불합리와 폭력을 발견할 수 있을 겁니다.
어쩌면 사이언스 픽션은 이런 분야에 잘 어울리지 모릅니다. 자연 과학과 사회 과학의 만남. 자연 과학의 사회 과학의 경계선을 넘나들기. 사이언스 픽션의 정수는 하드 SF 장르지만, 대부분 사이언스 픽션들은 사회 과학에 손을 뻗치고, 심지어 일부 SF 소설들은 급진적인 혁명까지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사이언스 픽션이 흥미로운 장르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