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생태주의
자본주의 시대와 마가렛 앳우드 본문
트럼프 시대에 가장 두각을 드러내는 작가, 마가렛 앳우드. 예전에 어떤 인터넷 서점은 이런 문구로 마가렛 앳우드를 홍보한 적이 있습니다. 왜 도널드 트럼프 시대에서 마가렛 애우드가 가장 두각을 드러낼 수 있을까요. 어쩌면 <홍수> 같은 소설은 근거를 댈 수 있을 겁니다. <홍수>는 에코 페미니즘을 주장하는 소설이고 환경 보호와 페미니즘, 생물 다양성, 평등한 공동체를 외칩니다. 이런 주제들은 트럼프와 정반대입니다. 트럼프 대통령은 난민들을 억압하고, 자본주의 시장 경제를 지지하고, 거대 자본 권력과 친하고, 성별을 차별하고, 기후 변화를 크게 무시합니다.
따라서 <홍수>와 트럼프는 정반대이고, 트럼프 시대에서 <홍수>를 쓴 마가렛 앳우드는 가장 두각을 드러낼 수 있겠죠. 하지만 어떤 관점에서 이건 좀 이상한 시각인지 모릅니다. 이 세상에서 오직 트럼프만 환경 운동의 적이 되나요? 이 세상에서 오직 트럼프만 문제인가요? 트럼프가 대통령에서 물러나고 다시 버락 오바마가 대통령이 되거나 힐러리 클린턴이 대통령이 된다면, 미국 사회가 기후 변화를 막을 수 있을까요? 그건 아닙니다. 기후 변화는 자본주의 시장 경제에서 비롯한 환경 오염입니다.
그리고 트럼프 이외에 많은 사람들은 자본주의를 지지합니다. 버락 오바마나 힐러리 클린턴 역시 아주 강력하게 자본주의 시장 경제를 지지합니다. 왜 현대 문명이 그렇게 많은 오염 물질들을 내뿜을까요. 오염 물질들이 나쁘다는 사실을 다들 인정함에도, 왜 현대 문명이 계속 자연 환경을 파괴할까요. 우리는 누가 자연 환경을 파괴하는지 주목해야 합니다. 현대 문명 속에서 모든 사람이 똑같은 입장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는 아주 넓은 땅을 소유한 사람이 있고 그렇지 않은 사람이 있습니다. 넓은 땅을 소유한 사람은 쉽게 자본가가 될 수 있어요.
사실 수많은 사람들은 노동력 이외에 다른 소유 재산이 없고, 그래서 그들은 비참하게 다른 사람들(자본가들)에게 구걸해야 합니다. 그래서 비정규직 문제는 끊이지 않아요. 정치인들은 더 많은 일자리들을 창출해야 한다고 떠벌이나, 그건 본질을 가리는 발언입니다. 정치인들이 더 많은 일자리들을 창출한다고 해도, 가난한 사람들은 땅부자들, 자본가들에게 매달려야 합니다. 이런 모순적인 구조는 계속 가난한 사람들을 비참한 구렁텅이로 몰아가겠죠. 게다가 자본가들은 임금을 별로 높이지 않을 테고, 노동자들은 계속 낮은 임금으로 고통스러워할 겁니다. 더 많은 일자리들은 별로 중요한 문제가 아닙니다. 누가 땅을 비롯한 생산 수단을 소유했는가. 중요한 문제는 이겁니다.
노동력만 있고 생산 수단이 없는 사람들은 아무 것도 하지 못합니다. 핵 발전소에서 수많은 노동자들이 일한다고 해도, 그들은 핵 발전소를 소유하지 못합니다. 그저 거기에서 그들은 일할 뿐이고 언제 자신들이 발전소에서 쫓겨날지 두려워합니다. 아무리 정치인들이 더 많은 일자리들을 만든다고 해도, 치열한 무한 시장 경쟁 때문에 자본가들은 계속 노동자를 혹사시킬 겁니다. 발전소 직원들 역시 그런 사실을 잘 압니다. 그래서 그들은 발전소에서 쫓겨나기 원하지 않을 겁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본가들에게 굴종하고 핵 발전소가 없어진다는 사실을 두려워합니다. 그런 노동자들에게 핵 폐기물은 중요한 문제가 아닙니다. 중요한 문제는 먹고 사는 방법입니다.
먹고 살 수 있다면, 그런 노동자들은 핵 폐기물 따위를 상관하지 않을 겁니다. 오히려 정치인들이 핵 발전소를 폐쇄할 때, 그런 노동자들은 대대적으로 반대할 겁니다. 따라서 무엇보다 시급한 문제는 먹고 사는 문제입니다. 안정적으로 살지 못한다면, 인간은 환경 오염이고 나발이고 관심을 기울이지 못합니다. 비단 핵 발전소 직원들만 아니라 다른 수많은 직종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자본주의 시장 경제는 계속 비정규직들을 양산하고, 거품을 키우고, 인간을 기계 부품으로 만듭니다. 이건 성 차별이나 인종 차별을 부르고 돌고 도는 악순환이 됩니다.
어쩌면 기후 변화를 막기 위한 방법은 꽤나 간단할지 모릅니다. 모두가 자연 환경을 평등하게 관리한다면, 자신의 이익을 위해 거대 자본 권력은 함부로 자연 환경을 훼손하지 못할 겁니다. 이 세상에는 기후 변화를 정말 막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적어도 모두가 자연 환경을 평등하게 관리할 때, 글로벌 그린스나 여러 환경 운동 단체들이나 국제 사회주의 역시 거대 자본 권력을 향해 목소리를 높일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글로벌 그린스나 여러 환경 운동 단체들이나 국제 사회주의에게는 권력이 없습니다.
자본주의 시장 경제 속에서 권력자는 거대 자본가 계급이고, 그들은 자연 환경을 함부로 사용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절대 모두가 자연 환경을 평등하게 관리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만약 모두가 자연 환경을 평등하게 관리해야 한다면, 사람들은 함께 토지와 하천과 해안과 해양을 공유해야 할 겁니다. 이런 공유 사회는 자본주의 시장 경제와 적대적입니다. 자본주의 시장 경제는 개인적인 소유를 중시합니다. 개인적인 소유 없이, 자본주의 시장 경제는 존재하지 못합니다. 평등한 자연 환경 관리와 자본주의 시장 경제는 함께 존재하지 못합니다.
사람들이 함께 자연 환경을 공유한다면, 인류 문명은 기후 변화를 막거나 여러 환경 오염들에 대처할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비단 거대 자본 권력만 아니라 일반적인 시민들 역시 공유 사회를 부정합니다. 자본주의 시장 경제 속에서 모든 것이 거대 자본을 예찬하기 때문입니다. 계몽주의 시대 이후, 유럽 자본주의가 계속 발달하는 동안, 자본주의는 자신에게 반대하는 것들을 계속 짓밟았습니다. 자본주의와 적대적인 목소리들은 죽어갔고, 오직 자본주의만 크게 외칠 수 있었습니다. 심지어 자본주의와 가장 적대적인 소비에트 연방에게도 별로 힘이 없었습니다.
미국이 전세계를 신나게 수탈하는 동안, 소비에트 연방은 그저 몇몇 국가만 침략했을 뿐입니다. 만약 미국처럼 소비에트 연방이 전세계를 수탈할 수 있었다면, 소비에트 연방이 2차 세계 대전을 겪지 않고 안전하게 후방에서 전쟁을 관망했다면, 소비에트 연방은 미국을 옥죌 수 있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상황은 반대였고, 아무리 소비에트 연방이 기를 쓴다고 해도, 소비에트 연방은 미국을 넘지 못했습니다. 냉전은 미국과 소비에트 연방의 싸움이 아니었어요. 냉전은 미국 자본주의가 소비에트 연방을 옥죄는 과정이었습니다. 이렇게 자본주의는 계속 혼자 떠들고 다른 것들을 짓밟습니다. 그러는 동안 사람들은 오직 자본주의만 옳다고 착각하고 자본주의가 만드는 악순환에 빠집니다.
버락 오바마가 이런 악순환을 끊었을까요. 아니, 그렇지 않았습니다. 힐러리 클린턴이 이런 악순환을 끊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버락 오바마는 단기적인 몇몇 사항들을 실행했을 뿐이고 근본적인 문제(소유 문제)에 관심이 없습니다. '행성적인 환경 오염'을 막고 싶다면, 모든 사람이 먹고 사는 걱정에서 벗어나야 하고 함께 자연 환경을 관리해야 합니다. 자본주의 시장 경제에서 사람들은 먹고 사는 걱정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자연 환경을 함께 소유하지 못합니다. 따라서 오직 트럼프만 기후 변화의 적이 아닙니다. 버락 오바마와 힐러리 클린턴 역시 기후 변화를 막지 못합니다.
그렇다고 해도 이건 버락 오바마와 도널드 트럼프가 똑같다는 뜻은 아닙니다. 양쪽은 많이 다릅니다. 여러 측면들에서 도널드 트럼프보다 버락 오바마는 훨씬 낫습니다. 하지만 양쪽 모두 자본주의를 지지하고 그런 관점에서 버락 오바마는 도널드 트럼프와 별로 다르지 않아요. 민주당에서 정치적 올바름을 중시하는 흑인 여자 대통령이 나타난다고 해도, 그 대통령이 자본주의를 지지한다면, 결국 그 대통령은 기후 변화를 막지 못할 겁니다. 마가렛 앳우드는 오직 트럼프 시대에서만 가장 두각을 드러내는 작가가 아닙니다. 자본주의가 온갖 환경 오염들을 저지르는 상황에서 언제나 마가렛 앳우드는 두각을 드러내는 작가일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