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생태주의
포스트 아포칼립스가 엉터리 인류학에 기반할 때 본문
존 윈덤이 쓴 <트리피드의 날>은 포스트 아포칼립스입니다. 트리피드는 식인 식물이고 사람들을 습격합니다. 그래서 어떤 독자들은 트리피드들 때문에 인류 문명이 무너졌다고 오해합니다. 소설 제목이 '트리피드의 날'이기 때문에, 이 소설은 식인 식물 트리피드들을 강조하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사실 트리피드들은 별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지 않습니다. 소설 속에서 어떤 재난 때문에 사람들은 시력들을 잃었습니다. 정말 중요한 사건은 이겁니다. 대부분 사람들은 장님들이 되었고, 이것 때문에 인류 문명은 무너집니다.
인류 문명이 무너졌기 때문에, 식인 식물들은 탈출하고 사람들을 공격할 수 있었습니다. 만약 재난이 터지지 않았다면, 인류 문명은 무너지지 않았을 테고, 식인 식물들은 탈출하지 못했을 겁니다. 트리피드들은 그저 열심히 식용 기름을 짜야 했을 겁니다. 하지만 위험한 재난은 인류 문명을 무너뜨렸고, 이제 사람들은 새로운 사회를 건설해야 합니다. 소설 속에서 어떤 사회학자는 사람들이 관습과 도덕과 윤리와 규범을 새롭게 결정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과거는 무너졌습니다. 이제 사람들은 새로운 미래를 준비해야 합니다. 새로운 미래에는 새로운 윤리와 새로운 규범이 있어야 합니다. 그들은 과거를 버리고 새로운 사회로 가야 합니다.
여러 사람들은 반박합니다. 그들은 새로운 사회가 과거 윤리와 규범을 보존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사회학자는 이미 물리적인 조건들과 환경들이 바뀌었다고 주장합니다. 물리적인 조건들과 환경들이 바뀌었기 때문에, 새로운 사회는 새로운 것들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새로운 사회가 새로운 것들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새로운 사회는 무너질 겁니다. 여러 사람들은 사회학자에게 반박하나, 소설 주인공은 사회학자가 옳다고 생각합니다. 아니, 소설 주인공이 사회학자에게 반박하기 원한다고 해도, 이미 상황은 소설 주인공을 새로운 사회로 몰아갑니다.
소설 주인공이 원하지 않는다고 해도, 소설 주인공은 과거 윤리와 규범을 버리고 새로운 사회에 적응해야 합니다. 이렇게 포스트 아포칼립스는 과거 사회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사회를 보여줄 수 있습니다. 이미 존재하는 사회가 사라졌기 때문에, 포스트 아포칼립스는 얼마든지 새로운 사회를 보여줄 수 있습니다. 그래서 포스트 아포칼립스는 매력적입니다. 하지만 종종 이런 상황은 그릇된 판타지로 흘러갑니다. 소설 <트리피드의 날>은 '안락한 멸망 소설 (cosy catastrophe)'이라고 불립니다. 소설 주인공이 무엇이든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인류 문명이 무너졌기 때문에 소설 주인공은 거의 초인에 가깝습니다.
소설 속에서 수많은 사람들은 장님들이 되었습니다. 당연히 대부분 장님들보다 소수 '정상적인 사람들'은 우월합니다. 어둠 속에서 장님들이 헤맬 때, 정상적인 사람들은 먹거리를 찾고, 은신처를 찾고, 길을 찾을 수 있습니다. 심지어 정상적인 사람들은 장님들을 노예로 부릴 수 있습니다. 장님들이 앞을 볼 수 없기 때문에, 장님들은 정상적인 사람들에게 대항하지 못합니다. 허버트 웰즈가 쓴 <눈 먼 자들의 나라>에서 '정상적인 사람'은 장님들에게 함부로 대항하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장님들은 정상적인 사람을 몰아낼 수 있었습니다. 눈 먼 자들의 나라에서 정상적인 사람은 비정상이었습니다.
하지만 <트리피드의 날>에서 장님들은 노예가 되어야 합니다. 앞을 볼 수 있는 사람들은 막강한 권력을 휘두를 수 있습니다. 소설 주인공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소설 주인공은 앞을 볼 수 있고 맛있는 음식과 편안한 은신처를 찾을 수 있습니다. 소설 주인공은 장님들에게 명령하고 왕이 될 수 있습니다. 심지어 (남자) 소설 주인공에게 의존하기 위해 어떤 젊은 여자는 자신의 육체를 바치기 원합니다. 만약 소설 주인공이 그릇된 정복 욕구를 품었다면, 소설 주인공은 얼마든지 장님 여자들을 억압했을 겁니다. 이렇게 포스트 아포칼립스는 그릇된 판타지를 충족할 수 있어요.
문제는 현실 속에서 많은 사람들이 엉터리 사회학과 인류학을 믿는다는 사실입니다. 소설 <트리피드의 날>이 사회학자 연설을 보여주는 것처럼, 포스트 아포칼립스에서 사회학과 인류학은 중요한 역할을 맡습니다. 포스트 아포칼립스가 새로운 사회를 묘사할 때, 사회학과 인류학은 커다란 영향을 미칠 겁니다. 하지만 포스트 아포칼립스 작가가 엉터리 사회학이나 엉터리 인류학을 믿는다면, 새로운 사회는 엉터리 이론에 기반할 겁니다. 그리고 현실 속에는 엉터리 사회학들과 인류학들이 많습니다. 남자 사냥꾼 이론은 유명한 엉터리 인류학입니다.
흔히 사람들은 고대 부족 사회에서 남자 사냥꾼들이 식량(고기)을 제공했다고 생각합니다. 남자 사냥꾼들이 식량(고기)을 제공했기 때문에, 부족 사회는 먹고 살 수 있었습니다. 당연히 남자들은 중요했고, 여자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여자들은 남자들에게 잘 보이기 원했습니다. 남자들에게 기쁨을 주기 위해 여자들은 진화했습니다. 남자들에게 기쁨을 주기 위해 여자들은 예쁘게 꾸미기 원합니다. 남자들은 사냥꾼이고, 남자들은 중요하고, 남자들은 공격적이고 적극적입니다. 공격적이고 적극적인 남자들은 중요합니다. 공격적이고 적극적인 남자들에게 기쁨을 주기 위해 여자들은 예쁘게 꾸며야 합니다.
사람들은 이런 이야기가 인류학이라고 생각합니다. 게다가 데즈먼드 모리스가 쓴 <털 없는 원숭이>처럼, 인류학 서적들 역시 남자 사냥꾼들을 강조합니다. 여전히 많은 사람들은 남자가 사회를 먹여살리고 남자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남자는 중요하고, 이렇게 남자가 중요하기 때문에, 여자는 부차적입니다. 어떤 무인도 포르노 소설에서 여자와 남자는 표류합니다. 두 사람은 무인도에 도착하나, 구조대는 영원히 오지 않을 것 같습니다. 무인도에서 평생 동안 여자와 남자는 살아야 합니다. 문제는 남자가 생존을 책임진다는 사실입니다. 포르노 소설은 무인도에서 남자가 자연을 개척하고 식량을 제공한다고 묘사합니다.
여자는 아무것도 하지 못합니다. 여자는 자연을 개척하지 못하고 식량을 제공하지 못합니다. 남자는 중요한 존재이나, 여자는 그렇지 않습니다. 여자는 자신이 남자에게 기쁨을 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여자가 식량을 모으지 못하기 때문에, 여자는 스스로 먹고 살지 못합니다. 남자가 있을 때, 여자는 남자에게 의존해야 합니다. 남자는 자연의 소유자이나, 여자는 아닙니다. 여자는 자신이 스스로 먹고 살지 못한다고 여기고 남자에게 기쁨을 주고 싶어합니다. 그 기쁨은 섹스입니다. 여자는 자신의 육체를 줍니다. 여자는 자신에게 이것 이외에 다른 것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소설 속에서 여자는 말합니다. 남자는 자연을 개척할 수 있고 식량을 제공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남자는 비단 자연의 주인만이 아니라 여자의 주인이 되어야 합니다. 여자는 남자가 자신의 주인이 되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 무인도 포르노 소설은 그저 3류 저질 포르노에 불과합니다. 인터넷에는 이런 저질 포르노들이 수두룩합니다. 하지만 <털 없는 원숭이>와 무인도 포르노 소설은 비슷합니다. 양쪽 모두 똑같은 상황에 기반합니다. 남자는 자연을 개척하고 식량을 제공합니다. 남자는 사회를 먹여살립니다. 반면, 여자는 수동적이고, 자연을 개척하지 못하고, 식량을 제공하지 못합니다. 남자는 중요하고, 여자는 부차적입니다.
그래서 여자는 남자에게 기쁨을 주고 싶어합니다. 여자는 남자와 섹스해야 합니다. 여자는 오직 그것만 해야 합니다. 여자가 존재하기 위한 이유는 그겁니다. 섹스 이외에 여자는 다른 것을 하지 못합니다. <털 없는 원숭이>는 인류학 서적이고, 무인도 포르노 소설은 인터넷의 수두룩한 저질 이야기들 중에서 하나입니다. 하지만 양쪽은 비슷합니다. 양쪽 모두 남자가 식량을 제공하고 남자를 위해 여자가 존재한다고 말합니다. 심지어 장 자크 루소가 쓴 <에밀> 역시 이런 시각에 기반합니다. 사람들은 <에밀>이 훌륭한 교육학 서적이라고 말하나, <에밀>이 여자와 자연을 이야기할 때, <에밀>은 3류 저질 포르노와 별로 다르지 않습니다.
<에밀>에서 남자 에밀은 자연을 점거하고, 자연을 이용해 노동하고, 식량을 생산할 수 있습니다. 여자 소피아는? 소피아는 아무것도 하지 못합니다. 소피아는 자연에 의존하지 못하고 식량을 생산하지 못합니다. 에밀에게 기쁨을 주기 위해 소피아는 존재합니다. 소피아는 생산 수단을 이용하지 못합니다. 장 자크 루소는 노골적으로 섹스를 운운하지 않습니다. 사실 루소는 끈적거리고 화끈한 섹스보다 수수하고 다소곳한 연애를 중시했습니다. 하지만 에밀과 소피아가 화끈하게 원 나이트 스탠드를 때리든, 알콩달콩하게 연애하든, <에밀>과 무인도 포르노 소설은 똑같은 상황에 기반합니다.
여자들은 노동하지 못합니다. 여자들은 생산 수단을 이용하지 못합니다. <에밀>은 3류 저질 포르노 소설과 별로 다르지 않아요. 무인도 포르노 소설에서 여자는 남자가 여자의 주인이 되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에밀>에서도 소피아는 에밀이 자신의 주인이 되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양쪽 모두 똑같이 여자가 생산 수단(자연과 토지)을 이용하지 못한다고 말하고 남자가 생산 수단과 여자의 주인이 되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위대한 <에밀>은 3류 포르노 소설에게 이론적인 근거를 뒷받침합니다. 여자는 생산 수단을 이용하지 못합니다. 물론 이건 그저 가부장적인 편견에 불과합니다.
고대부터 21세기 초반까지, 수많은 장소들에서 여자들은 식량들을 담당합니다. 심지어 어떤 사회들에서 여자 채집꾼들과 여자 낚시꾼들과 여자 농민들은 식량 채집과 생산의 70~80%를 차지합니다. 반면, 남자 사냥꾼들은 작은 비중을 차지합니다. 심지어 남자 사냥꾼들은 크게 다치고 애물단지(?)가 됩니다. 흔히 사람들은 남자 사냥꾼들이 함정을 파놓을 때 멍청한 매머드가 무조건 함정에 빠진다고 생각합니다. 흔히 사람들은 남자 사냥꾼들이 투창들을 던질 때 연약한 매머드가 무조건 쓰러진다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은 사냥이 비디오 게임이라고 여깁니다. 하지만 심지어 21세기 사람들조차 코끼리를 쉽게 사냥하지 못합니다. 아니, 심지어 비디오 게임 <몬스터 헌터>에서조차 양쿡 선생님(?)은 초보 헌터들을 호되게 가르칩니다. 이 시대의 참된 교육자로서 양쿡 선생님은 수많은 초보 헌터들을 울립니다. 사실 사냥은 굉장히 어렵고 힘듭니다. 매머드는 무조건 함정에 빠지지 않습니다. 투창들은 무조건 매머드를 쓰러뜨리지 못합니다. 준비물들을 왕창 챙기고 야생에서 투창을 만들어보시기 바랍니다. 투창은 원시적인 무기이나, 효율적인 투창을 만들기는 쉽지 않습니다.
투창으로 매머드를 쓰러뜨리기는 훨씬 어렵습니다. 레이 미어스와 라스 스트라우드와 베어 그릴스 역시 투창을 쉽게 만들지 못할 겁니다. 반면, 채집과 낚시와 농사는 훨씬 낫습니다. 바구니와 낚시 바늘과 호미를 만들기는 훨씬 쉽습니다. 자연 속에서 사람들이 야생 동물들을 관찰한다면, 사람들이 직접 야생 동물들의 흔적들(발자국, 털가죽, 소변, 기타 등등)을 쫓는다면, 사람들은 사냥이 만만하지 않다고 깨달을 겁니다. 구태여 사슴이나 멧돼지나 코끼리를 쫓을 필요는 없습니다. 사람들이 작은 동물들을 관찰한다고 해도, 그건 충분합니다.
하지만 여전히 많은 사람들은 남자 사냥꾼들이 중요하다는 엉터리 인류학을 믿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남자들이 중요한 노동을 맡고 여자들이 부차적인 살림과 육아를 맡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육아가 필수적인 노동임에도, 그래서 돌봄 노동 사회화가 정말 중요함에도, 가부장적인 인류학은 이걸 무시하고 부차적인 여자와 부차적인 돌봄 노동을 연결합니다. 가부장적인 인류학은 공공 육아를 말하지 않아요. 만약 포스트 아포칼립스가 이런 엉터리 인류학에 기반한다면, 그건 3류 포르노 소설과 다르지 않을 겁니다.
아니, 누가 아나요. 3류 포르노 소설을 쓰기 위해 누군가는 포스트 아포칼립스를 쓰기 원할지 모릅니다. 숱한 대체 역사 소설들이 삐뚤어진 국수주의로 흘러가는 것처럼, 숱한 포스트 아포칼립스들은 3류 포르노 소설들로 흘러갈지 모릅니다. 소설 <트리피드의 날>을 보세요. 이건 3류 포르노 소설이 아닙니다. 하지만 이런 상황은 3류 포르노를 전개하기에 좋습니다. 누군가는 이걸 이용해 그릇된 판타지를 펼칠지 모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