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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 생태주의

<시인장의 살인>과 맹목적인 좀비들 본문

SF & 판타지/디스토피아, 아포칼립스

<시인장의 살인>과 맹목적인 좀비들

OneTiger 2019. 4. 9. 20:31

소설 <시인장의 살인>은 탐정 소설입니다. 주된 사건은 밀실 살인이고, 소설 주인공은 셜록 홈즈를 운운하는 탐정입니다. 밀실 살인 사건이 터졌을 때, 탐정이 그걸 해결한다면, 당연히 소설 장르는 탐정 소설이 될 거에요. 하지만 동시에 <시인장의 살인>은 좀비 이야기입니다. 좀비들이 주연 등장인물들을 포위하기 때문입니다. 밀실 살인 사건을 다루는 숱한 추리 소설들처럼, <시인장의 살인>에서 주연 등장인물들은 외딴 지역에 고립됩니다. 외딴 지역에서 좀비들은 주연 등장인물들을 습격하고, 주연 등장인물들은 안전한 건물로 대피합니다.


주연 등장인물들은 더 이상 좀비들이 공격하지 못할 거라고 안심하나, 밤새 밀실 살인 사건이 터집니다. 어쩌면 범인은 인간일지 모릅니다. 만약 범인이 인간이라면, (언제나 그런 것처럼) 범인은 주연 등장인물들 중에서 하나일지 모릅니다. 하지만 만약 범인이 인간이 아니라면? 우연히 어떤 좀비가 건물에 들어왔고, 그 좀비가 살인을 저질렀다면? 게다가 살인 현장은 꽤나 참혹합니다. 언뜻 이건 인간이 아니라 좀비가 저지른 살인 같습니다. 문제는 주연 등장인물들이 바리케이드를 쳤고 좀비가 건물 안으로 들어오지 못한다는 사실이에요. 무슨 일이 벌어졌을까요? 범인이 인간일까요, 아니면 좀비일까요?



소설 <시인장의 살인>은 익숙한 장르를 제시합니다. 밀실 살인은 익숙한 장르입니다. 어쩌면 추리 소설 소재들 중에서 밀살 살인은 가장 익숙할지 모릅니다. 모든 것이 폐쇄된 공간에서 불가능한 살인은 일어났고, 탐정은 불가능에 도전해야 합니다. <명탐정 코난> 같은 만화는 온갖 밀실 살인들을 상정하고, 이런 만화가 증명하는 것처럼, 밀실 살인은 가장 지적 쾌감을 자극하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소설 <시인장의 살인>은 그저 밀실 살인만 제시하지 않습니다. 이 소설은 밀실 살인과 함께 무시무시한 좀비 무리를 제시해요. 좀비 무리는 밀실 살인 현장을 포위했습니다.


따라서 소설 주인공 탐정은 두 가지 문제를 해결해야 합니다. 탐정은 범인이 인간인지 아니면 좀비인지 가려내야 합니다. 다른 밀실 살인 사건들에서 당연히 범인은 인간이겠으나, <시인장의 살인>에서 탐정은 인간과 좀비를 구분해야 합니다. 동시에 탐정은 좀비들에게서 살아남아야 합니다. 건물에 들어오기 위해 좀비들은 계속 문을 두드립니다. 비록 좀비들이 멍청하다고 해도, 언젠가 바리케이드는 무너질지 모르고, 좀비들은 건물 안으로 들어올지 모르죠. 언제 좀비들이 쳐들어올지 아무도 알지 못하는 상황에서 탐정은 범인을 찾아내고 살아남아야 합니다. <시인장의 살인>에서 탐정은 두 가지 문제를 떠안았습니다. 게다가 일반적인 탐정들은 좀비들에게서 달아나지 않아요.



어쩌면 이건 반칙일지 모릅니다. 일반적인 추리 소설들은 좀비처럼 상상력의 영역에 들어가지 않습니다. 위에서 언급한 <명탐정 코난>은 SF 설정들을 보여주나, 그런 SF 설정들은 추리에 영향을 미치지 않습니다. <명탐정 코난>에서 SF 요소들과 추리 요소들은 섞이지 않아요. 범인이 신체를 개조하는 약물을 마신다거나 첨단 투시 장치를 이용한다면, 작가는 얼마든지 트릭들을 만들 수 있을 테고, 트릭을 추리하는 재미는 떨어질 겁니다. 그래서 아무리 에도가와 코난이 마취침을 쏘거나 약물을 마시거나 이상한 장치를 사용한다고 해도, 그건 추리와 범죄에 직접 영향을 미치지 않습니다.


가끔 괴도 키드는 마술과 범죄 트릭을 뒤섞는 것 같으나, 괴도 키드는 깜짝 손님에 가깝고 주연 등장인물이 아니에요. 일반적인 추리 소설들은 상상력의 영역을 배제하기 원합니다. 이미 19세기에 셜록 홈즈가 유명해졌을 때부터 셜록 홈즈는 상상력의 영역을 배재하느라 애썼어요. 흡혈귀나 유령이나 귀신은 범인이 되지 못해요. 하지만 벽을 타는 남자가 보여준 것처럼, 셜록 홈즈는 상상력의 영역을 완전히 배제하지 못했습니다. 개조 생명체 이야기는 일반적인 추리 소설보다 바이오펑크에 가까우나, 셜록 홈즈는 바이오펑크가 범인이라고 지목했어요. 물론 벽을 타는 남자 이야기는 예외적인 경우입니다.



추리 소설들은 현실적이고 논리적인 증명을 중시합니다. 상상력은 여기에 개입하지 말아야 합니다. 추리 소설 작가가 SF 설정 같은 상상력을 집어넣는 순간, 추리 소설 작가와 추리 소설 독자는 서로 다른 세계에 속합니다. 이건 공정한 퍼즐 게임이 아닙니다. 똑같은 현실 세계에서 추리 소설 작가와 추리 소설 독자는 퍼즐을 제시하고 풀어야 합니다. 좀비는 현실적이지 않은 소재, 비일상적인 소재입니다. 따라서 작가가 추리 소설에 좀비 무리를 집어넣는다면, 게다가 좀비 무리가 범죄에 영향을 미친다면, 그건 반칙일지 모릅니다. 좀비가 비일상적이기 때문에, 작가는 반칙을 저지를지 모릅니다.


작가는 좀비를 이용해 아주 엉뚱한 트릭을 만들지 모르죠. 하지만 좀비 무리가 주연 등장인물들을 포위했음에도, 소설 <시인장의 살인>은 별로 반칙을 저지른 것 같지 않습니다. 오히려 (좀비들이 우르르 몰려옴에도) 이 소설은 일반적인 추리 소설들과 비슷하게 흘러갑니다. 작가는 좀비가 무엇인지 명확히 선을 긋습니다. 작가는 좀비들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보여주고, 독자들 역시 좀비가 무엇인지 인식합니다. 독자가 좀비 무리를 인식한 이후, 마침내 작가는 밀실 살인 사건을 제시합니다. 밀실 살인 사건이 터지기 전에, 작가는 좀비 무리의 설정을 모두 공개하고, 따라서 독자는 좀비라는 비일상적인 상상력을 얼마든지 밀실 살인 사건에 접목할 수 있어요.



소설 <시인장의 살인>에서 절반은 탐정 소설이고 절반은 SF 소설입니다. 이 소설은 밀실 살인을 다루는 탐정 소설이고 동시에 좀비 무리가 몰려오는 SF 소설입니다. 이 소설에는 좀비 바이러스를 퍼뜨리는 수상한 과학자가 나옵니다. 수상한 과학자가 좀비 바이러스를 퍼뜨리는 시점에서 <시인장의 살인>은 (빼도 박도 못하게) SF 소설이 됩니다. 하지만 정말 <시인장의 살인>이 SF 소설이 될 수 있나요? 수상한 과학자와 좀비 바이러스가 나오기 때문에 <시인장의 살인>은 얼마든지 SF 소설이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작가가 이 소설이 사이언스 픽션이라고 주장한다면, 거기에 반박할 근거는 없을 겁니다.


비록 <시인장의 살인>이 훌륭한 하드 SF 소설이 되지 못한다고 해도, <시인장의 살인>은 SF 울타리에 얼마든지 들어갈 수 있어요. 하지만 많은 독자들은 <시인장의 살인>이 좀비 아포칼립스 소설보다 탐정 소설에 가깝다고 여길 겁니다. 결국 <시인장의 살인>은 탐정 이야기에서 출발하고 탐정 이야기에서 끝을 맺습니다. 좀비 아포칼립스는 밀실 살인 사건을 어려운 미궁에 빠뜨리나, 좀비 아포칼립스는 핵심적인 설정이 되지 않아요. <시인장의 살인>은 세상을 뒤짚지 않습니다. 그건 이 소설의 주된 목적이 아닙니다. <시인장의 살인>은 밀실 살인 사건을 풀기 원합니다. 그때 독자들은 쾌감을 느낍니다. 그래서 <시인장의 살인>은 탐정 소설에 가까워요.



그렇다고 해도 <시인장의 살인>은 좀비를 이용해 이것저것 이야기하고 싶어합니다. <시인장의 살인>은 여러 진부한 좀비 설정들을 늘어놓고 비평해요. <시인장의 살인>이 탐정 소설에 가깝다고 해도, 좀비 소설 팬들은 어느 정도 <시인장의 살인>이 재미있다고 느낄 수 있을 겁니다. 특히, 좀비들이 시대상을 반영한다는 비평은 가볍지 않아요. <시인장의 살인>에서 어떤 공포 장르 매니아는 이미 이 세상에 좀비들이 넘쳐난다고 비판합니다. 사람들이 맹목적으로 탐욕을 쫓을 때, 그런 모습은 좀비와 다르지 않아요. 이 세상에는 맹목적으로 탐욕을 쫓는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그들은 진짜 좀비가 아닙니다.


하지만 어떤 관점에서 그들은 좀비와 다르지 않습니다. 아무 생각 없이 좀비들은 행동합니다. 아무 생각 없이 좀비들은 맹목적으로 뭔가를 추구합니다. 사람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현대 도시 사회에서 아무 생각 없이 수많은 사람들은 뭔가를 추구합니다. 아무 생각 없이 사람들은 탐욕을 쫓고 돈벌이를 쫓고 범죄를 쫓아요. 그들은 왜 자신들이 탐욕을 추구하는지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들에게는 생각이 없습니다. 그들은 생각하는 존재 호모 사피엔스가 아니라 생각 없는 좀비입니다. <시인장의 살인>에서 공포 장르 매니아는 그런 점을 꼬집고 이미 이 세상에 좀비들이 많다고 말합니다.



물론 공포 장르 매니아는 왜 생각 없이 사람들이 탐욕을 쫓는지 말하지 않습니다. 공포 장르 매니아는 그저 사람들이 나쁘다고 인간성을 탓할 뿐입니다. 하지만 이건 얄팍한 비난입니다. 이건 억압적인 사회 구조를 외면하는 얄팍한 시각이에요. 현대 도시 사회에서 가장 지배적인 구조는 자본주의 경제입니다. 이미 어렸을 때부터 사람들은 자본주의가 최고라고 배웁니다. 왜 아이들이 학교에 다니나요? 이유는 뻔합니다. 아이들은 열심히 공부하고, 좋은 대학에 들어가고, 회사에 취직하고, 돈을 벌어야 합니다. 아이들은 자본주의 사회에 이바지해야 합니다. 아이들은 자본주의 임금 노예가 되어야 해요. 하지만 아이들은 자본주의가 무엇인지 배우지 못해요.


아이들은 무조건 자본주의가 옳고 자본주의에 충성해야 한다고 배웁니다. 학교 교육들은 생각하는 방법을 가르치지 않습니다. 학교 교육들이 그걸 가르치는 순간, 아이들은 생각하는 방법으로 자본주의를 회의하기 시작할 겁니다. 그건 자본주의를 무너뜨리는 단초가 될지 모릅니다. 학교 교육들은 생각하는 방법을 가르치기 원하지 않아요. 학교 교육들은 자본주의를 맹목적으로 쫓아가는 좀비들을 양산하고 싶어해요. 그래서 이 세상에는 좀비들이 넘쳐납니다. 하지만 그런 좀비들은 얼마든지 인간으로 되돌아올 수 있습니다. <시인장의 살인>은 그걸 말하지 않습니다. 작가는 사회 문제를 비판하기 원하는 것 같으나, 사회 구조는 아예 나오지 않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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