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생태주의
<괴수 행성> 시리즈의 제3세계, 여자, 자연 본문
[이런 시도는 그저 얄팍하고 공허한 담론에 불과합니다. 그렇다고 해도 여기에는 작은 가치가 있을 거에요.]
예전에 듀나님이 소설 <다섯 번째 계절> 서평을 썼을 때, 듀나님은 백인 남자가 사이언스 판타지의 표준 설정이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문학 및 소수 민족 연구자 셸리 스트리비는 사이언스 픽션이 오직 백인 남자만을 반영해서는 안 된다고 말합니다. 왜 백인 남자가 사이언스 판타지의 표준 설정인가요? 왜 사이언스 픽션이 오직 백인 남자만을 반영해서는 안 되나요? 19세기 유럽에서 사이언티픽 로망스가 나타났기 때문에, 사이언스 판타지의 표준 설정이 백인 남자인가요? 미국 출판 시장은 숱한 사이언스 픽션들을 쏟아냅니다. 흔히 우리가 생각하는 표준적인 미국 사람은 백인 남자입니다.
거의 대부분 미국 대통령들은 백인 남자들입니다. 그래서 사이언스 픽션이 오직 백인 남자만을 반영한다고 해도, 이건 커다란 잘못이 아닌 것 같습니다. 미국 출판 시장이 사이언스 픽션들을 쏟아내고, 표준적인 미국 사람이 백인 남자라면, 사이언스 픽션은 얼마든지 백인 남자를 반영할 수 있을 겁니다. 왜 셸리 스트리비가 이것을 경계하나요? 반다나 싱은 사변 소설들이 백인 남자 기술에 물든다고 비판합니다. 반다나 싱은 사변 소설들에서 우주가 백인 남자 기술들로 가득찬다고 비판합니다. 듀나님과 셸리 스트리비 역시 반다나 싱에게 동의할 것 같습니다.
하지만 오직 사이언스 픽션들만 백인 남자를 반영하나요? 그건 아닐 겁니다. 사이언스 픽션을 비롯해 수많은 창작물들은 백인 남자를 중시합니다. 낭만주의, 고전주의, 형식주의, 리얼리즘, 구조주의, (허접하기 짝이 없는) 포스트 모더니즘 같은 것들은 예술 사조/문학 사조입니다. 이런 것들은 서구 중심적인 문학 사조입니다. 비평가들은 아프리카 흑인 작가가 형식주의를 쓰거나 오세아니아 원주민이 구조주의를 쓴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클로드 레비스트로스가 부족 사회를 연구했고 구조주의를 제시했다고 해도, 비평가들은 구조주의가 서구 문학 사조라고 말합니다.
게다가 비평가들이 문학 사조들을 설명할 때, 비평가들은 백인 남자 작가들, 철학자들, 비평가들을 늘어놓을 겁니다. 클로드 레비스트로스처럼, 서구 문학 사조는 백인 여자보다 백인 남자와 훨씬 가깝습니다. 비평가들이 서구 문학 사조들을 설명할 때, 비평가들은 여자들을 별로 언급하지 않습니다. 이미 문학 사조는 백인 남자를 반영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사이언스 픽션이 백인 남자를 반영한다고 해도, 이건 별로 이상하지 않을 겁니다. 비단 사이언스 픽션만 아니라 중세 유럽 판타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에라곤> 같은 중세 유럽 판타지에서 핵심 드래곤 라이더는 백인 남자입니다.
중세 유럽 판타지 게임들이 광고할 때, 이런 게임들은 백인 남자 영웅들을 보여줍니다. 중세 유럽 판타지 게임들은 비서구 사람들을 보여주지 않습니다. 장르 명칭이 중세 '유럽' 판타지이기 때문에, 비서구 사람들은 커다란 비중을 차지하지 못합니다. 중세 유럽 판타지 게임들이 비서구 사람들을 광고한다고 해도, 그들은 인간이 아니거나 다소 왜곡되었을 겁니다. 중세 유럽 판타지 게임들이 백인 여자를 광고한다고 해도, 이런 광고는 여자의 몸을 소비하기 원할 겁니다. 중요한 것은 여자보다 여자의 몸입니다. 여자는 인간보다 (남자에게 삐뚤어진 쾌락을 주기 위한) 물건에 가깝습니다.
이렇게 사이언스 픽션과 판타지에게 백인 남자는 핵심적인 요소입니다. 문학 사조가 백인 남자를 중시하기 때문에, 사이언스 픽션과 판타지 역시 이런 영향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왜 문학 사조가 백인 남자를 중시하나요? 왜 사이언스 판타지에서 표준 설정이 백인 남자인가요? 왜 중세 유럽 판타지가 백인 남자 영웅을 보여주나요? 여기에는 여러 이유들이 있습니다. 자본주의 시장 경제는 가장 유력한 이유들 중에서 하나입니다. 우리는 자본주의 시장 경제를 숭배합니다. 우리는 자본주의가 신이라고 믿습니다. 우리는 자본주의가 반드시 옳고 영원불멸하다고 생각합니다.
리처드 도킨스 같은 (백인 남자) 과학자는 종교를 깝니다. 리처드 도킨스는 정말 열심히 종교를 깝니다. 하지만 리처드 도킨스 역시 종교인입니다. 리처드 도킨스는 아주 모범적인 자본주의 광신도입니다. 만약 누군가가 자본주의를 비판한다면, 리처드 도킨스는 열심히 자본주의를 옹호할 겁니다. 아무리 자본주의가 심각한 폭력들을 저지르고, 기후 변화를 일으키고, 생물 다양성을 파괴한다고 해도, '동물학자' 리처드 도킨스는 '생물 다양성을 파괴하는' 자본주의를 '열심히 옹호'할 겁니다. 리처드 도킨스가 정말 대단하지 않습니까. 동물학자가 생물 다양성 파괴를 옹호한다면, 이건 정말 자본주의 광신도를 대변할 수 있을 겁니다.
자본주의를 발전시키기 위해 유럽 문명이 제3세계 식민지들을 수탈한다고 해도, 자본주의 광신도 리처드 도킨스는 이걸 절대 비판하지 않을 겁니다. 비단 리처드 도킨스만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은 이걸 절대 비판하지 않을 겁니다. 이미 17세기 유럽 문명은 식민지들을 수탈했고 막대한 부를 축적했습니다. 서구 자본주의는 막대한 부를 이용해 세력을 확장했습니다. 서구 자본주의는 숱한 저항 운동들을 짓밟았고, 학살했고, 내쫓았습니다. 자본주의는 거짓말들과 세뇌들을 퍼뜨리고, 사람들은 거짓말들과 세뇌들에서 쉽게 빠져나오지 못합니다.
유럽이 두 아메리카 대륙을 수탈한 것처럼, 유럽에서 자본주의는 비롯했습니다. 그래서 자본주의는 서구 경제입니다. 나중에 일본이 자본주의를 발전시킬 때, 일본은 서구 문명을 모방합니다. 심지어 일본 제국은 서구 제국주의를 이식합니다. "일본 제국은 조선을 침략하지 않았다. 일본 제국은 조선을 근대화시키기 원했다." 이건 전형적인 식민지 근대화 주장입니다. 이미 17세기 유럽 침략자들은 이걸 떠들었습니다. "유럽은 인디언들을 침략하지 않았다. 유럽은 인디언들을 문명화(개종)시키기 원했다." 자본주의는 반드시 식민지들을 수탈해야 하고, 일본 제국 역시 식민지들을 수탈해야 했습니다.
이렇게 자본주의는 서구 경제입니다. 동시에 자본주의는 가부장적인 경제입니다. 자본주의는 중세 봉건 경제와 다르나, 중세 봉건 경제와 자본주의 모두 가부장 문화를 거부하지 않습니다. 오래 전부터 남자들은 엄청난 권력을 휘둘렀고, 자본주의는 이걸 부정하지 않습니다. 17세기 이후, 서구 문명이 자본주의를 발달시키는 동안, 숱한 정복자들, 탐험가들, 지도자들은 백인 남자들이었습니다. 우리는 백인 남자 탐험가가 식민지 열대 밀림을 탐험하는 장면을 쉽게 그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백인 여자 탐험가는 그렇지 않습니다. 백인 여자 탐험가들은 없지 않으나, 그들은 표준 설정이 아닙니다.
이건 그저 표면적인 설정에 불과하지 않습니다. 이윤을 극대화하기 위해 자본주의는 비용을 지불하지 않기 원합니다. 아무리 산업 폐기물들이 자연 환경을 더럽힌다고 해도, 자본가 계급은 정화 비용을 지불하지 않습니다. 정화 비용처럼, 아무리 돌봄 노동들이 노동력들을 배출한다고 해도, 자본가 계급은 돌봄 노동들에게 댓가를 지불하지 않습니다. 가난한 미혼모는 아이들과 함께 죽어야 합니다. 엄마들은 온갖 스트레스들에 시달려야 합니다. 엄마들이 온갖 스트레스들에 시달린다고 해도, 자본주의 사회에서 이건 그저 개인적인 영역에 불과합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돌봄 노동들은 절대 사회화하지 못합니다. 자본주의는 중산층 핵가족을 이상화하고, 이건 여자를 가정 주부화합니다.
숱한 CEO들이 아재들이기 때문에, 영리 기업 부장님들이 아재 개그를 구사하기 때문에, 자본주의가 남자 경제인가요? (사과를 한 입 깨문다면, 이건 파인애플이 됩니다. 어떤 관점에서 아재 개그는 재미있습니다.) 이런 것들 역시 이유가 되나, 근본적인 이유는 돌봄 노동 착취입니다. 아무리 여자들이 CEO 자리들을 꿰찬다고 해도, 자본주의가 돌봄 노동을 계속 착취하고 여자를 가정 주부화한다면, 여자 CEO들과 상관없이, 자본주의는 가부장적인 경제가 됩니다. 이렇게 자본주의가 가부장적인 백인 경제이고, 우리가 자본주의를 신이라고 떠받들기 때문에, 문화 예술 역시 자본주의를 반영합니다. 그래서 서구 문학 사조는 백인 남자를 중시하고, 사이언스 판타지 역시 백인 남자를 중시합니다.
그래서 듀나님과 셸리 스트리비와 반다나 싱은 백인 남자 설정을 비판했을 겁니다. 자본주의 시장 경제 때문에, 사이언스 판타지에서 표준 설정은 백인 남자입니다. 그래서 사이언스 판타지가 백인 남자 설정을 비판하고 싶다면, 사이언스 판타지는 비단 백인 남자라는 정체성만 아니라 자본주의라는 경제 구조를 비판해야 할 겁니다. 하지만 이건 쉽지 않습니다. 자본주의 시장 경제가 너무 지배적인 관념이기 때문에, 아무리 사람들이 백인 남자 설정을 비판하고 싶다고 해도, 사람들은 정곡을 찌르지 못합니다. 사람들은 그저 막연하게 원주민 여자와 백인 남자라는 정체성을 논의할 뿐입니다.
자비에 로랑 쁘띠가 쓴 <이타와파> 같은 소설은 원주민 여자와 제3세계 열대 밀림을 중시하고 백인 남자를 비판합니다. 하지만 <이타와파>는 자본주의 시장 경제를 자세히 파헤치지 않습니다. 이제까지 본문이 설명한 것처럼, 자본주의 때문에 백인 남자가 득세함에도, <이타와파> 같은 소설은 자본주의가 문제라고 지적하지 않습니다. <이타와파>는 일반적인 10대 성장 소설이나, 다른 많은 사이언스 판타지들 역시 <이타와파>와 다르지 않을 겁니다. 그렇다고 해도 <이타와파> 같은 소설들이 계속 제3세계 여자들과 열대 밀림들을 강조한다면, 백인 아재들이 우글거리는 창작물보다 <이타와파> 같은 소설은 훨씬 나을 겁니다.
10대 성장 소설 <이타와파>가 원주민 여자와 열대 밀림을 강조하는 것처럼, 환경 아포칼립스 역시 백인 남자에게서 벗어나고 원주민 여자와 열대 밀림을 강조할 수 있습니다. 가령, <고지라: 괴수 행성> 시리즈는 환경 아포칼립스이고, 행성 생태학을 이야기하고, 거대 괴수 고지라가 지구 자연에 엄청난 영향을 미친다고 묘사합니다. 애니메이션 <고지라: 괴수 행성> 시리즈는 행성 생태학 SF입니다. 행성 생태학 SF로서 <고지라: 괴수 행성> 시리즈에는 여러 종족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여러 종족들은 특정한 문명, 기술, 문화를 대표합니다. 빌루사루도는 기술적 특이점이고, 엑시프는 소모적인 종교 집단입니다. 인류는 산업 자본주의이고, 후투아는 제3세계 생태 마을에 가깝습니다.
<고지라: 괴수 행성> 시리즈는 산업 자본주의를 깊게 분석하지 않으나, 이 애니메이션에서 전반적으로 인류는 산업 자본주의를 대표합니다. 그리고 <괴수 행성> 시리즈는 다른 것들보다 후투아(제3세계 생태 마을)를 향해 손을 들어줍니다. <괴수 행성> 시리즈는 얄팍하게 공허한 담론들을 늘어놓으나, 그렇다고 해도 후투아는 인상적입니다. 특히, <괴수 행성> 시리즈는 외관과 달리 후투아 문명이 상당히 뛰어나다고 묘사합니다. 흔히 우리는 근대화 이전이 야만이라고 무시하나, <괴수 행성> 시리즈는 근대화 이전 사회와 새로운 진보를 뒤섞고 후투아를 가장 긍정적으로 묘사합니다.
비록 애니메이션 <괴수 행성> 시리즈가 얄팍하다고 해도, 이런 시도는 나쁘지 않을 겁니다. 듀나님과 셸리 스트리비와 반다나 싱이 백인 남자를 비판하는 것처럼, 오히려 <괴수 행성> 시리즈 같은 시도는 훨씬 늘어나야 할지 모릅니다. 최근에 가장 거창한 환경 아포칼립스는 영화 <고지라: 괴수왕>일 겁니다. 공교롭게도 <고지라: 괴수 행성> 시리즈와 <고지라: 괴수왕>은 똑같이 고지라 이야기입니다. <고지라: 괴수 행성> 시리즈처럼, <고지라: 괴수왕> 역시 환경 아포칼립스입니다. 하지만 <고지라: 괴수 행성> 시리즈와 달리, 영화 <고지라: 괴수왕>은 백인 남자를 이용해 영웅 놀음을 펼치고 자본주의 시장 경제를 열심히 찬양합니다.
<고지라: 괴수 행성> 시리즈가 얄팍하고 공허한 담론들을 늘어놓는다고 해도, 적어도 이 애니메이션 시리즈는 제3세계 여자와 자연 환경을 보여주느라 애씁니다. 반면, 영화 <고지라: 괴수왕>에는 아예 이런 시도가 없습니다. 여기에는 온갖 지배적인 뻘짓들과 헛소리들과 난장판들이 있습니다. <고지라: 괴수왕>은 환경 아포칼립스이나, 결국 이 영화는 백인 남자, 가정 주부화, 자본주의를 떠받듭니다. 이건 구제가 불가능한 헛소리이고 망상이고 거짓말이고 세뇌입니다. 아무리 <괴수 행성> 시리즈가 얄팍하다고 해도, 구제가 불가능한 뻘짓거리 <고지라: 괴수왕>보다 <괴수 행성> 시리즈는 훨씬 낫습니다.